FAZER LOGIN“오늘 밤은 이생원을 부를 거예요.”해원이 문을 닫은 뒤에도 허담은 떠나지 않았다.이번에는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변명도 하지 않았다.그저 돌쇠가 만든 문밖에 서 있었다.한참 뒤 방문이 다시 열렸다.해원이 물었다.“아직도 있어요?”“예.”“왜요?”허담은 대답 대신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해원의 눈썹이 움직였다.“뭐 하는 거예요?”“용서는 구하지 않겠습니다.”“그건 어제 들었어요.”“대신.”허담의 손가락이 천천히 말렸다.“벌을 주십시오.”해원의 표정이 사라졌다.“벌?”“예.”“무슨 벌을 받고 싶은데요?”“무엇이든.”대답은 빨랐다.“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셔도 됩니다.”해원은 말없이 들었다.“욕을 하셔도 되고.”허담의 목울대가 움직였다.“때리셔도 됩니다.”해원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나리.”“예.”“지금 내가 나리를 때리면.”허담이 그녀를 바라봤다.“편해지죠?”“…….”“아, 맞았으니까.”해원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이만큼은 갚았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허담의 얼굴이 굳었다.“그런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그럼 왜 자꾸 받을 걸 달라고 해요?”허담이 멈췄다.해원은 그의 내민 손을 내려다봤다.“어제는 용서.”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오늘은 벌.”이번에는 허담의 얼굴을 봤다.“내일은 뭘 달라고 할 건데요?”“마님.”“용서든 벌이든.”해원의 목소리가 차갑게 잘렸다.“결국 내가 나리한테 뭔가를 줘야 끝나는 거잖아요.”허담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정곡이었다.해원은 문턱에 섰다.둘 사이에는 한 발이면 넘을 수 있는 거리밖에 없었다.하지만 허담은 들어오지 않았다.“벌은요.”해원이 말했다.“아직 상대를 붙잡고 있을 때나 주는 거예요.”허담의 눈이 흔들렸다.“잘못했으니까 고치라고.”한마디.“아팠으니까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또 한마디.“그래도 다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주는 거예요.”허담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졌다.해원은 그 모습을 보고도
“용서를...”“빌지 마요.”허담의 입이 그대로 닫혔다.해원은 문을 열지도, 완전히 닫지도 않은 채 문틈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허담은 여전히 문밖에 있었다.“마님.”“왜 용서받고 싶은데요?”“제가 잘못했으니까요.”“그건 알아요.”너무 빨리 나온 대답에 허담의 얼굴이 굳었다.해원은 담담하게 말했다.“나리도 알고.”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나도 알고.”손이 문틀 위를 천천히 쓸었다.돌쇠가 깎은 나무였다.“죽은 사람도 알았겠죠.”허담의 시선이 떨어졌다.“그러니까 굳이 나한테 확인받지 마요.”“확인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해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그럼 뭔데요?”허담은 대답하지 못했다.해원이 문을 조금 더 열었다.하지만 들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내가 용서한다고 해 볼까요?”허담의 눈이 올라왔다.“그러면 오늘 밤은 잘 수 있어요?”“마님.”“내일은 이 문 앞에 안 와도 되고?”“그런 뜻으로...”“또.”허담이 멈췄다.해원의 입가가 아주 조금 비틀렸다.“또 그런 뜻이 아니래.”허담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나리는 항상 뜻을 말하죠.”베려던 뜻은 없었다.죽이려던 뜻도 없었다.해원을 가두려던 뜻도 없었다.전부 뜻은 아니었다.그런데 남은 것은 늘 결과였다.“난 이제 나리 뜻이 궁금하지 않아요.”해원의 목소리에는 화조차 없었다.그래서 허담은 더 견디기 어려운 얼굴이 되었다.“돌쇠는 죽었고.”해원의 손끝이 문설주의 대패 자국을 따라갔다.“나는 다른 남자를 몇이나 불러도 그 사람 냄새를 맡고.”허담의 손이 움켜쥐어졌다.“나리는 그 남자들이 남긴 것만 주워 치우고.”해원이 그를 바라봤다.“그러다가 이제는 용서까지 받아 가려고요?”“아닙니다.”“그러면 받지 마요.”한마디가 칼처럼 떨어졌다.허담은 더 이상 부정하지 못했다.한참 뒤 겨우 입을 열었다.“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해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무엇을 해야 마님께서 조금이라도...”“그것도 묻지
문을 닫았는데도 허담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해원은 새벽까지 몇 번이나 문 아래를 바라봤다.그림자는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돌쇠가 만든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해원은 안에.허담은 밖에.날이 밝자 복례가 대문을 열었다가 놀랐다.“허 의원님.”허담은 밤새 벽에 기대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옷자락에는 이슬이 내려앉았고, 손등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해원이 방 안에서 물었다.“뭘 했어요?”허담이 고개를 들었다.그 옆에는 작은 것들이 모여 있었다.우석이 떨어뜨리고 간 매듭끈.이름 모를 장정의 신에서 떨어진 흙.만복이 두고 갔던 술병 마개.해원의 얼굴이 굳었다.“또 치웠어요?”“버리지는 않았습니다.”“그게 다르다고 생각해요?”허담의 입이 다물렸다.해원이 밖으로 나왔다.“왜 모아 놨어요?”“마님 눈에 보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또 나한테 뭐가 좋은지 나리가 정했네요.”허담의 손이 멈췄다.해원은 그가 모아 둔 것들을 하나씩 바라봤다.살아 있는 남자들의 흔적이었다.그런데 그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돌쇠의 것은.“이상하네.”해원이 중얼거렸다.“왜 돌쇠 것은 안 치워요?”허담의 얼굴이 굳었다.“문도 그대로고.”해원이 손을 뻗어 문설주를 쓸었다.“대패 자국도 그대로고.”손끝 아래로 거친 나무결이 느껴졌다.“나무 냄새도.”허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해원이 그를 바라봤다.“다른 남자 흔적은 그렇게 잘 치우면서.”한 걸음 가까워졌다.“왜 돌쇠 것에는 손도 못 대요?”허담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오래 지나서야 입이 열렸다.“제가 없앨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입니다.”해원의 표정이 멈췄다.“자격?”“예.”허담은 돌쇠가 만든 문을 바라봤다.“살아 있을 때도 그 사람을 밀어내려고 했습니다.”손가락이 천천히 말렸다.“죽고 나서까지 제가 흔적을 없애면 안 될 것 같습니다.”해원이 웃었다.웃음에 온기가 없었다.“그래서 우석 건 치우고.”허담이 고개를 숙였다.“만복 것도 치우고.”
해원은 자기 손바닥을 코끝에 가져갔다.표정이 굳었다.나무 냄새가 났다.아주 희미했다.생나무를 대패로 밀어냈을 때 나는 냄새.마른 톱밥에 땀이 조금 섞였을 때의 냄새.해원은 다시 맡았다.“……돌쇠.”이름이 저절로 나왔다.조금 전 우석의 손을 잡았던 손이었다.해원은 급히 복례를 불렀다.“내 손에서 뭐 나?”복례가 조심스럽게 맡아 봤다.“나무 냄새가 조금 납니다.”해원의 눈이 흔들렸다.“너도 나?”“예.”“돌쇠 냄새.”복례가 입을 다물었다.“그렇지?”“저는 그냥…… 나무 냄새 같습니다.”그 말이 해원을 멈추게 했다.그냥 나무 냄새.복례에게는 그뿐이었다.그런데 해원에게는 아니었다.돌쇠가 별당 문 앞에 앉아 대패를 밀던 날이 떠올랐다.손바닥으로 톱밥을 털던 모습.땀에 젖은 소매.가까이 오면 늘 먼저 느껴지던 마른 나무 냄새.해원은 갑자기 방문을 바라봤다.조금 전 우석을 내보내며 자신이 잡았던 문틀.다가가 손바닥을 댔다.냄새가 더 짙어졌다.해원의 숨이 멎었다.돌쇠가 고친 문이었다.자물쇠를 달았다가 뜯고.판자를 덧댔다가 다시 떼어 내고.마지막까지 수없이 손을 댔던 곳.해원이 문틀에 코끝을 가까이했다.나무 냄새가 났다.그뿐이었다.그런데 눈을 감는 순간 돌쇠가 바로 뒤에 서 있는 것 같았다.“마님.”복례가 다가오자 해원이 손을 들었다.“오지 마.”그녀는 한동안 문틀을 놓지 못했다.돌쇠가 살아 있을 때는 이 문이 감옥 같았다.그가 죽고 나니,이 문만 돌쇠를 기억하고 있었다.해원이 갑자기 말했다.“뜯어.”복례가 굳었다.“예?”“이 문.”해원의 손가락이 나무를 움켜쥐었다.“전부 뜯어내.”복례가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마님, 정말로요?”“냄새 나잖아.”해원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계속 나잖아.”복례가 연장을 가지러 몸을 돌렸다.“잠깐.”발이 멈췄다.해원은 문틀을 바라봤다.뜯어 버리면 냄새는 없어질지도 몰랐다.하지만 돌쇠가 마지막으로 손댄 것도 없어진다.“……하지
우석의 손을 잡는 순간, 해원은 그 손이 낯설다고 생각했다.이상했다.분명 예전에 잡아 본 손이었다.장터의 등불 아래에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도 잡았었다.그때 우석은 욕심내지 않았다.해원이 놓으면 놓았고, 가까이 오라는 말이 없으면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그래서 기억하고 있을 줄 알았다.그런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마님?”우석이 조심스럽게 불렀다.해원은 그의 손바닥을 뒤집어 봤다.“우리 예전에 손 잡았죠?”“예.”“이 손이었어요?”우석이 잠시 당황하다 웃었다.“제가 손이 두 개이긴 합니다만.”해원은 웃지 않았다.우석의 웃음도 금세 사라졌다.“그때 내가 어땠어요?”“무슨 말씀이십니까?”“웃었어요?”우석은 기억을 더듬었다.“조금은.”해원의 손가락이 멈췄다.“정말?”“예.”그 대답이 이상하게 아팠다.우석은 기억하는데 자신은 기억나지 않았다.그날의 손도.그때의 웃음도.돌쇠가 죽기 전의 자신도.해원은 우석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아픕니다.”“놓지 마요.”“예?”“내가 놓으라고 할 때까지.”우석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의 손은 따뜻했다.어제의 이름 모를 장정보다 조금 거칠고, 손가락도 굵었다.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이 손바닥을 통해 분명히 전해졌다.그런데 해원의 머릿속에는 다른 손이 떠올랐다.문을 만들던 손.비녀를 고치던 손.자물쇠를 움켜쥐던 손.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손.해원이 우석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끼웠다.“더 세게.”우석이 힘을 주었다.해원의 손마디가 눌렸다.“더.”“아프실 텐데요.”“괜찮아요.”더 세게.마치 다른 손의 감각을 덮어버리려는 것처럼.우석의 손이 아플 정도로 단단히 맞물렸다.그래도 없어지지 않았다.오히려 더 선명해졌다.돌쇠는 이렇게 잡지 않았다.돌쇠 손은 여기보다 거칠었다.돌쇠 손가락은—해원이 갑자기 우석의 손을 놓았다.“왜 그러십니까?”“가까이 와요.”우석이 움직였다.한 걸음.“더.”다시 한 걸음.이제 손
“우리 사귀지는 말아요.”도현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서윤이 그를 똑바로 보며 덧붙였다.“대신 또 자고 싶으면 내가 연락할게요.”이번에는 도현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어젯밤 처음 함께 잔 두 사람이 아침에 나누기에는 지나치게 노골적인 말이었다.하지만 서윤은 돌려 말하고 싶지 않았다.“왜요?”“아닙니다.”“기분 나빠요?”“아뇨.”도현의 시선이 서윤에게 머물렀다.“생각보다 훨씬 솔직하셔서요.”“어젯밤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점잖은 척하면 더 웃기잖아요.”도현이 웃었다.“그건 그렇네요.”서윤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사랑한다고 하지도 말고.”“네.”“매일 연락할 필요도 없고.”“알겠습니다.”“보고 싶으면 연락하고, 싫으면 안 만나고.”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정도면 저도 좋습니다.”서윤이 그를 봤다.“조건 없어요?”“있습니다.”“뭔데요?”“거짓말은 하지 맙시다.”“무슨 거짓말?”“다른 사람이 생겼는데 숨기거나.”도현이 잠시 말을 골랐다.“싫은데 괜찮은 척하는 것.”서윤은 잠깐 조용해졌다.준혁과 정반대였다.결혼생활 내내 서윤은 싫다는 말 하나를 하기 위해 이유부터 준비해야 했다.왜 싫어.남편인데.지난번엔 했잖아.유난 떨지 마.그렇게 밀어붙이다 서윤이 지치면 준혁은 그걸 동의라고 생각했다.서윤이 물었다.“그럼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안 만나겠다고 해도?”“알겠습니다.”“왜냐고 안 물어요?”“궁금하긴 하겠죠.”“그런데?”“대답 안 하고 싶다는데 붙잡고 염병 떨어봐야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당신도 그런 말 하네요?”“염병 정도는 합니다.”“욕 못 하는 줄 알았는데.”“강준혁 씨 정도로 다양하게 하진 않습니다.”서윤의 웃음이 사라졌다가 다시 번졌다.“그건 따라가지 마요.”“노력하겠습니다.”잠깐 편안한 침묵이 이어졌다.서윤이 먼저 물었다.“그럼 우리 뭐예요?”도현이 그녀를 봤다.“꼭 이름을 붙여야 합니까?”“불륜 상대?”“듣기 상당히 안 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