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준혁 씨한테 전해주세요. 우리 애, 오늘 태어났다고.”
전화가 끊겼다.
거실에 있던 여자들이 일제히 준혁을 봤다.
나는 휴대전화를 내렸다.
“누구야?”
준혁이 입술을 핥았다.
“몰라.”
윤채원이 헛웃음을 쳤다.
“모르는데 애 이름까지 지어줘?”
“잘못 걸려온 전화야.”
나는 준혁 얼굴을 후려쳤다.
짝!
“거짓말도 좀 새 걸로 해, 이 등신아.”
“강서윤,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
나는 거실을 둘러봤다.
임신한 여자들, 숨겨둔 아이, 친구 아내, 가짜 결혼식까지.
“여기 네가 처잔 사람들만 모아도 반상회 열겠다.”
세라가 스피커폰 너머에서 소리쳤다.
“그년 번호 다시 걸어봐!”
나는 재통화를 눌렀다.
세 번째 신호에 여자가 받았다.
“왜요?”
윤채원이 먼저 굳었다.
“잠깐.”
채원이 내 손에서 폰을 빼앗았다.
“언니?”
거실이 조용해졌다.
“윤채경 맞지?”
몇 초 뒤 여자가 한숨을 쉬었다.
“채원아.”
준혁이 눈을 감았다.
나는 채원을 봤다.
“아는 사람이에요?”
채원이 준혁을 노려봤다.
“내 친언니예요.”
누군가 욕을 내뱉었다.
채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결혼식에서 부케 받아준 친언니.”
준혁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는 아무 사이 아니었어.”
채원이 그대로 준혁에게 달려들었다.
짝!
“그때는? 그럼 뒤에는 처잤다는 소리네, 이 개새끼야!”
준혁이 뺨을 감쌌다.
“네 언니가 먼저 힘들다고 연락했어!”
채경이 소리쳤다.
“야! 왜 내 탓을 해?”
나는 웃었다.
“가짜로 결혼한 여자 언니까지 건드렸어?”
채원이 울면서 물었다.
“언제부터야?”
채경이 대신 말했다.
“네 결혼식 석 달 뒤.”
채원 얼굴이 무너졌다.
“미친년아.”
“나도 속았어! 준혁 씨가 너랑 끝났다고 했어.”
준혁이 끼어들었다.
“둘 다 작작 해.”
두 자매가 동시에 소리쳤다.
“넌 닥쳐!”
“그래서 오늘 낳은 애가 준혁 애예요?”
채경이 대답했다.
“네.”
“검사했어요?”
“출산 전에 했어요.”
준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
채경이 차갑게 말했다.
“당신 애 맞아. 99.9퍼센트.”
준혁이 욕을 뱉었다.
“아, 젠장…”
채원이 준혁에게 달려들었다.
“내 언니까지 임신시켜놓고 왜 아쉬워?”
“나도 애 낳을 줄 몰랐어!”
채경이 비웃었다.
“나한테는 낳으라고 했잖아.”
거실의 임신한 여자들이 웅성거렸다.
“또?”
“나한테도 책임진다 했어.”
나는 물었다.
“아이 이름 뭐예요?”
“강준서.”
나는 준혁을 바라봤다.
“본인이 지었어?”
“네. 석 달 전에.”
준혁이 소리쳤다.
“그만 말해!”
채경은 멈추지 않았다.
“준서 태어나면 채원이랑 서윤 씨 둘 다 정리하고 나한테 온다고 했어요.”
채원이 입을 벌렸다.
“나는 지금 이 새끼 애 임신 중인데?”
이번에는 채경이 침묵했다.
“뭐?”
채원이 배를 가리켰다.
“나도 임신했어. 9주.”
전화기 너머에서 욕설이 터졌다.
“이 미친 새끼가!”
준혁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다 애를 낳겠다고 지랄이야!”
그 말이 끝나자 여자들이 달려들었다.
“네가 만들었잖아!”
“피임하지 말자던 새끼가 누구야!”
“책임진다며, 개잡놈아!”
준혁 셔츠 단추가 바닥에 튀었다.
그때 채경이 말했다.
“서윤 씨. 오늘 전화한 게 애 때문만은 아니에요.”
준혁이 고개를 들었다.
“윤채경, 하지 마.”
처음으로 목소리가 떨렸다.
채경이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 집에 딸이 셋이에요.”
채원 얼굴이 굳었다.
“언니.”
“나 첫째, 채원이 둘째. 막내 채희가 있어요. 스물여섯.”
준혁이 전화기를 향해 악을 썼다.
“입 닥치라고!”
채원이 준혁을 돌아봤다.
“설마.”
채경이 말했다.
“채희도 강준혁 만났어요.”
거실에서 욕설이 터졌다.
채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채희는 호주에 있잖아.”
“두 달 전에 들어왔어.”
“왜 나한테 말 안 했는데?”
“준혁 씨가 말하지 말랬으니까.”
채원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너 우리 집안 여자들 도장 깨기 했냐?”
준혁이 이를 악물었다.
“말을 왜 그렇게 해.”
채원이 웃다가 울었다.
“그럼 뭐라고 해? 첫째랑 자고, 둘째랑 결혼식 하고, 막내까지 건드렸으면 아주 집안 행사 다 돌았네, 개새끼야.”
나는 준혁을 바라봤다.
“자매 셋을 다 건드렸어?”
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경이 대신 말했다.
“그것만이면 내가 전화 안 했어요.”
“또 뭐가 있는데요?”
곧 다른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채원이 벌떡 일어났다.
“채희야?”
막내가 흐느꼈다.
“미안해.”
“너도 저 새끼랑 잤어?”
“응.”
채원이 비명을 질렀다.
“이 미친년아!”
채희가 울면서 말을 이었다.
“나도 임신했어.”
준혁이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 씨발!”
첫째는 오늘 준혁의 아들을 낳았다.
둘째는 준혁과 가짜 결혼식을 올렸고 9주 임신 중이었다.
막내까지 준혁의 아이를 가졌다.
세 자매가 한 남자의 아이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그때 채희가 말했다.
“근데 언니들.”
“뭐.”
“나 병원에 혼자 있는 거 아니야.”
채경이 물었다.
“누구랑 있는데?”
채희가 울음을 멈췄다.
“준혁 오빠 여자 한 명 더 있어.”
나는 이를 악물었다.
“누군데?”
“여기 같은 산부인과 병실에 누워 있어.”
준혁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 여자도 오늘 애 낳았어.”
채희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쌍둥이로.”
“피고는 열 명 이상과 관계한 사실을 인정합니까?”준혁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그 침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연이 다음 서류철을 꺼냈다.“관련자들의 서면진술과 객관 자료를 제출하겠습니다.”준혁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관련자 누구요?”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첫 번째 이름이 화면에 떴다.윤채린.준혁이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쟤가 뭘 안다고.”채린의 진술은 짧았다.준혁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고 만났고, 관계를 오래 유지했으며, 서윤을 조롱하기 위한 사진과 메시지를 보낸 것도 사실이라고 적혀 있었다.내 잠옷을 입었던 사진.내 몸을 두고 웃었던 대화.준혁이 직접 보낸 메시지도 붙었다.쟤는 이제 여자 같지도 않아.준혁이 변호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저거 다 짜깁기라고 해요.”재판장이 말했다.“피고는 변호인과 상의 후 발언하세요.”다음은 오유진이었다.클리닉 진료 관련 기록과 준혁에게 보냈던 메시지가 제출됐다.이번에도 검사 안 하면 진짜 위험해.준혁의 얼굴이 굳었다.유진은 자신이 알고 있던 범위와 준혁에게 검사 필요성을 전달한 시점을 날짜별로 적어두었다.나는 그 날짜를 봤다.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준혁과 같은 집에서 살던 때였다.준혁이 중얼거렸다.“저 여자도 나한테 받은 게 얼마나 많은데.”나연이 바로 받아쳤다.“그래서 금전 내역도 함께 제출했습니다.”준혁이 입을 다물었다.세 번째는 최라희.호텔 이용 기록이었다.객실.법인카드.체크인 시간.준혁과 여자들의 동선까지.라희는 자신이 일부 예약과 비용 처리를 도왔다고 인정했고, 더 이상 준혁을 보호하기 위해 사실과 다른 진술을 하지 않겠다고 적었다.“배신한 년들.”이번에는 분명히 들렸다.재판장이 준혁을 바라봤다.“한 번 더 부적절한 발언을 하시면 제지하겠습니다.”준혁은 턱을 굳힌 채 앞만 봤다.네 번째 이름이 떴다.배지아.지아는 나를 조롱했던 사실부터 인정했다.내 몸무게를 소재로 준혁과 대화했고, 체중계와 식단표를 건넨 것도 자신이었다.
준혁은 법정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봤다.한 달 가까이 제대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그런데도 그 시선은 예전과 똑같았다. 내가 어디에 앉는지, 누구와 눈을 맞추는지, 도현이 근처에 있는지부터 찾았다.나는 나연 옆에 앉아 서류만 펼쳤다.준혁 쪽 변호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원고 역시 혼인 중 부정행위를 했습니다.”곧 사진이 제출됐다.호텔 로비.엘리베이터 앞.도현의 차에서 내리는 나.다음 날 호텔을 나오는 모습까지.준혁은 사진이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나를 쳐다봤다.자기가 이겼다는 얼굴이었다.“원고는 피고의 잘못만을 주장하고 있으나, 혼인관계를 파탄시킨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나연이 내 쪽을 봤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재판장이 물었다.“원고 측, 사진 속 인물이 원고가 맞습니까?”내가 대답했다.“맞습니다.”준혁이 고개를 돌렸다.재판장이 다시 물었다.“사진에 함께 있는 남성과 교제한 사실도 인정합니까?”“인정합니다.”법정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준혁이 피식 웃었다.나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성적인 관계가 있었던 사실도 부인하지 않습니다.”준혁이 바로 몸을 앞으로 숙였다.“보셨죠? 저 여자도 똑같습니다.”재판장이 준혁 쪽을 바라봤다.“피고인은 발언 순서를 지켜주세요.”준혁은 입을 다물었지만 표정까지 감추지는 못했다.그가 원했던 건 이것이었다.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순간.그래야 자기에게 쌓인 모든 기록도 반으로 줄어든다고 믿는 얼굴이었다.준혁 측 변호사가 말을 이었다.“피고는 혼인관계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오히려 원고가 다른 남성과 관계를 맺으면서 적극적으로 혼인을 파탄으로 몰고 갔습니다.”나연이 서류철 하나를 들었다.“시간 순서를 보겠습니다.”첫 번째 자료가 화면에 띄워졌다.십 년 연애 당시 준혁이 다른 여자와 주고받은 메시지.결혼 전 호텔 결제 내역.결혼식 직전 문세라와 함께 있었던 기록까지.준혁의 표정이 굳었다.나연이 말했다.“피고의 부정행위는 원고가 서도현 씨를 만나기 훨씬 이전
감염내과 대기실에서 준혁의 이름이 세 번째로 불렸다.“강준혁 님, 진료실 앞에서 기다려주세요.”준혁은 휴대전화만 내려다봤다.서윤에게 건 전화가 또 끊겼다.연결할 수 없습니다.다시 걸었다.같은 안내가 나왔다.“씨발.”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쳐다보자 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끝으로 갔다.이번에는 문세라를 눌렀다.한 번.두 번.곧 통화가 끊겼다.메시지를 보냈다.나 병원 왔어.전송되지 않았다.차단이었다.“이년까지.”윤채린.차단.오유진.차단.최라희.차단.배지아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한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 먼저 찾던 여자들이었다. 호텔 방을 잡아달라던 여자, 명품을 사달라던 여자, 보고 싶다며 회사 앞으로 오던 여자도 있었다.지금은 다섯 명 모두 전화 한 번 받지 않았다.준혁은 연락처를 내리다가 어머니 이름을 눌렀다.신호가 오래 갔다.받지 않았다.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곧 문자 하나가 들어왔다.옥자였다.병원 치료나 받아. 당분간 집에 오지 마.준혁이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옥자가 받자마자 말했다.“왜.”“엄마까지 이럴 거야?”“네가 서윤 회사 찾아가서 난리 쳤다며.”“걔가 먼저 사람 미치게 만들었잖아.”“도현인지 뭔지 그 남자 죽인다는 소리까지 했다며.”“말이 그렇다는 거지.”“이제 네 말 한마디가 다 증거야.”준혁의 얼굴이 굳었다.“엄마도 서윤 편이야?”“누구 편이고 자시고 너 때문에 집안까지 엮이게 생겼어.”“엄마가 걔 만나서 얘기했다며.”전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그건 네가 알 거 없어.”“돈 준다고 했어?”“치료나 받아!”옥자가 전화를 끊었다.준혁은 다시 걸었지만 이번에는 받지 않았다.대기실 직원이 가까이 왔다.“강준혁 님?”“네.”“진료 들어가셔야 합니다.”준혁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그때 병원 안내데스크 쪽에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강준혁 씨 맞으십니까?”준혁이 걸음을 멈췄다.“누구세요?”남자가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강준혁 씨
새집 현관 벨이 세 번째 울렸을 때 나는 화면부터 확인했다.준혁이었다.한 손에는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서윤아. 열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뒤 주먹으로 문을 쳤다.“안에 있는 거 알아. 문 열어.”하은은 방에서 자고 있었다.나는 바로 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준혁이 집 앞이야.”“문 열지 마. 관리실에 연락하고, 계속 그러면 경찰 불러.”현관 밖에서 준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도현이 여기 있어?”나는 인터폰 녹화를 켰다.“가.”“그 새끼 여기 있냐고.”“없어.”“거짓말하지 마.”문손잡이가 몇 번 흔들렸다.“한서윤, 나 미치게 하지 마. 도현 어디 있어.”나는 대답 대신 관리실에 전화했다.잠시 뒤 경비 직원 둘이 올라왔고, 준혁을 현관에서 떼어냈다.엘리베이터 쪽으로 끌려가면서도 준혁은 계속 소리쳤다.“걔 만나지 마!”문이 닫힌 뒤 휴대전화가 바로 울렸다.받지 않자 문자가 이어졌다.도현이랑 끝내.내가 가만 안 둬.그 새끼 죽여버릴 거야.나는 마지막 문장을 캡처했다.다음 날 아침, 나연은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서류를 꺼냈다.“이건 그냥 부부싸움으로 넘길 일이 아니야.”“접근금지 가능해?”“지속적인 방문, 연락, 위협 정황까지 묶어서 임시 조치를 신청해볼 수 있어. 판단은 법원이 하지만 지금 자료는 최대한 전부 내자.”어제 인터폰 영상.관리실 통화 기록.준혁이 보낸 문자.반복된 전화 목록까지 넘겼다.나연이 파일을 저장했다.“새집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도 확인해야 해.”“회사 사람 통해 알아냈을 수도 있어.”“회사에도 보안 요청 넣어.”나는 바로 비서실에 연락했다.준혁이 오면 대표실로 올리지 말 것.사전 약속 없는 방문은 막을 것.소란이 생기면 경호팀과 바로 연결할 것.그 지시를 내린 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대표님, 강준혁 씨 1층입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올려 보내지 마세요.”비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기 너
옥자가 먼저 연락해온 건 그날 저녁이었다.잠깐 보자. 준혁이 없이.나는 답하지 않았다.십 분 뒤 다시 문자가 왔다.하은이 문제야. 너도 엄마면 무슨 말인지 알겠지.하은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휴대전화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약속 장소는 호텔 라운지였다.옥자는 이미 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차 두 잔과 두꺼운 서류봉투가 놓여 있었다.“앉아.”나는 가방을 옆자리에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하은이 얘기라면서요.”“성질 좀 죽여. 나도 싸우자고 부른 거 아니니까.”옥자는 봉투를 내 쪽으로 밀었다.“열어봐.”안에는 부동산 등기 관련 서류와 계좌 내역이 들어 있었다. 처음 보는 아파트 주소도 있었다.“이게 뭔데요.”“네가 원하는 거.”“제가 뭘 원한다고 했어요?”“이혼한다며.”옥자는 찻잔을 들었다.“그러면 받을 건 받고 나가야지.”나는 서류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얼마예요?”옥자의 눈썹이 움직였다.“역시 돈 얘기하니까 빠르네.”“어머니가 돈으로 얘기하러 왔으니까 묻는 거예요.”“아파트 하나 넘겨줄게. 현금도 따로 챙겨주고.”“그리고요?”“하은이도 네가 키워.”그 말에서 손이 멈췄다.옥자가 내 얼굴을 살폈다.“준혁이 설득은 내가 해. 친권이니 양육권이니 물고 늘어지지 못하게 할 테니까.”“대신 뭘 원하는데요.”“진단서.”예상했던 말인데도 속이 서늘해졌다.“무슨 진단서요?”“알면서 뭘 물어.”옥자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준혁이 병 말이야.”나는 가방 안에 손을 넣었다.“그걸 어떻게 하라고요.”“밖으로 안 나가게 해.”“이미 변호사한테 갔어요.”“그 여자 입도 막으면 되잖아.”“나연이요?”“변호사면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잖아.”나는 옥자를 한동안 쳐다봤다.“어머니는 지금 뭘 제안하는지 알아요?”“내 아들 인생 살리자는 거야.”“아들 인생만요?”“너도 나쁠 거 없어. 하은이 데리고 나가서 편하게 살고, 회사 키우고. 서로 조용히 끝내면 얼마나 좋아.”나는 가방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테이블
사진 속 나는 호텔 로비에 서 있었다.도현은 반걸음 뒤에서 나를 보고 있었고, 사진 아래에는 날짜와 시간이 찍혀 있었다.나연이 두 번째 사진을 꺼냈다.이번에는 엘리베이터 앞이었다.“몇 장이야?”“지금 받은 것만 열세 장.”“준혁이 찍은 건 아니지?”“사설업체를 쓴 흔적이 있어. 정확한 건 확인해야 하고.”나는 사진을 한 장씩 넘겼다.도현의 차에서 내리는 모습.호텔로 들어가는 모습.다음 날 같은 옷을 입고 나오는 모습까지 있었다.숨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이 정도면 부정행위 증거로 쓸 수 있어?”나연이 곧바로 답했다.“준혁 쪽에서는 그렇게 주장할 거야.”“나도 인정할게.”“서윤아.”“했잖아.”나는 사진을 다시 봉투 안에 넣었다.“도현 씨 만났고, 같이 잤어. 없던 일처럼 만들 생각 없어.”나연이 의자에 등을 붙였다.“그 말 법정에서도 할 수 있어?”“응.”“위자료 청구 들어와도?”“내 책임이면 받아야지.”나연은 잠시 나를 봤다.“그래서 더 정확하게 정리해야 해.”그녀가 노트북을 돌렸다.화면에는 날짜별로 정리된 표가 떠 있었다.준혁의 첫 외도 확인 시점.호텔 결제 기록.문세라와의 연락.집 안에 여자 다섯을 불러들였던 날.미선에게 맞았던 날짜.생활비 카드 한도가 끊긴 날.준혁의 HIV 확진일.그리고 내가 도현을 처음 만난 날짜.“네가 도현 씨와 관계를 시작한 건 여기.”나연이 화면을 짚었다.“그 전에 이미 준혁의 장기 외도 기록이 있고, 별거에 가까운 생활이 시작됐고, 폭행과 경제적 통제도 있었어.”“응.”“이 순서가 중요해.”“내가 먼저 바람난 것처럼 만들겠지?”“이미 그러고 있어.”나연은 상대 측에서 보낸 문서를 내 쪽으로 밀었다.맨 첫 줄부터 눈에 들어왔다.배우자의 부정행위 및 혼인관계 파탄 유발.헛웃음이 나왔다.“혼인관계 파탄을 내가 유발했대?”“저쪽 주장이야.”“집에 다섯 명 불러놓고?”“그래서 증거를 시간순으로 맞추는 거야.”나연이 다른 파일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