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밥은 잘 챙겨 먹고 있어요. 다만 외국 음식이 입에 잘 안 맞아서요.”“그럼 돌아오…”박윤희는 말을 잇다 말고 아들을 흘끗 바라보았다.하이준의 낯빛이 싸늘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자, 딸에게 귀국하라고 하려던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그대로 삼켜졌다.“그럼 한국인 요리사를 한 명 고용해서 네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 달라고 해.”하채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겁먹은 눈으로 오빠를 살폈다.“서재에서 기다릴게.”하이준은 그 말만 남기고 휠체어를 돌려 서재로 향했다.하채린은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네 오빠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여. 가서 말조심해.”박윤희가 딸에게 당부했다.두 모녀는 하이준 몰래 허경빈을 함정에 빠뜨린 이후로 줄곧 마음을 졸이며 살아왔다.하채린은 하이준이 즐겨 마시는 차를 우려 서재로 가져갔다.“오빠…”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며 찻잔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그러나 하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채린이 뜨거운 찻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서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끓는 물의 열기가 찻잔을 뚫고 전해져 손끝이 타들어 가듯 아팠지만, 하채린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무릎 꿇어.”하이준은 무릎 위에 덮인 얇은 담요를 태연히 매만졌다.하채린은 순간 굳어 버렸다.“같은 말을 두 번 하게 만들지 마.”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음산하리만치 차가웠다.“네가 스스로 무릎 꿇기 싫다면, 사람을 시켜서라도…”결국 하채린은 찻잔을 든 채 천천히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비굴하게 허리를 숙인 모습이 꼭 천한 몸종 같았다.오빠라고?그의 앞에서 자신은 개만도 못한 존재였다.하채린은 때때로 의심했다. 저 남자의 몸에는 피가 아니라 얼음이 흐르는 게 아닐까 하고.그제야 하이준이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아 들었다. 그는 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을 천천히 불어 내며 물었다.“갑자기 왜 귀국했지?”“그, 그냥 오빠랑 엄마가 보고 싶어서…”하이준의 입에서 싸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우리가 보고 싶었다고? 그
하채린이 허경빈에게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가족에게 강제로 끌려가 낙태한 뒤로 그녀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하채린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더없이 의기양양했다.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러 돌아온 듯했다.하채린은 곧장 온유란의 앞으로 걸어갔다.“형수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 지금은 홀몸도 아니니 꼭 건강을 잘 챙기세요. 돌아가신 분이 다시 살아오실 수는 없잖아요.”온유란은 하채린이 나타난 것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은 하채린을 상대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일부러 장례를 훼방하러 온 것만 아니라면 그뿐이었다.하채린은 영정사진을 향해서도 허리를 숙여 절했다.온유란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아쉽고 분해서 견딜 수 없었다.하지만 도정숙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하채린도 알고 있었다.온유란에게 그 늙은 가사도우미는 친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치료비를 마련하려고 온씨 집안의 협박에 굴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채린은 지금까지도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가사도우미는 어디까지나 가사도우미일 뿐, 아무리 정이 깊다 한들 천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좋은 집안에 태어나지 못한 자신들의 팔자를 탓해야지.그런데도 온유란은 도정숙의 장례를 친어머니와 같은 격식으로 치러 주었다.요즘 사교계 사람들은 온유란을 두고 기구한 삶을 살면서도 정이 깊은 사람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겪은 일까지 안타까워하며 온통 칭찬만 늘어놓았다.하채린은 속으로 비웃었다.가식적이고 위선적이기 짝이 없었다.그래도 온유란의 안색이 좋지 않은 모습을 직접 보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하채린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다.온유란이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탄에 잠긴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그 옆에 선 송지아의 눈에서도 생기가 사라진 것을 보자 더욱 통쾌했다
도정숙이 고향으로 돌아온 며칠 동안, 많은 이웃이 문병을 왔다. 저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챙겨 왔고, 도정숙의 기력도 놀랄 만큼 좋아 보였다.해가 기울 무렵이면 그녀는 마당의 안락의자에 기대앉아 선선한 바람을 쐬었다.노을이 내려앉은 마을 굴뚝마다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의자 옆 작은 탁자에는 찻잔이 놓여 있었고, 하늘에서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갔다.곧 날이 저물 터였다.새들도 이제 둥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이제 안으로 들어가세요.”온유란이 도정숙을 바라보며 말했다.“해가 지면 금방 모기가 몰려들 거예요.”“괜찮아. 조금만 더 앉아 있을게.”“그럼 저랑 이석 씨는 저녁 준비하러 갈게요. 모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바로 들어가서 쉬셔야 해요.”온유란이 거듭 당부하자 도정숙이 웃었다.“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뭘 그렇게 자꾸 타이르니.”도정숙은 온유란의 손을 꼭 잡았다. 다른 손으로 살짝 부풀어 오른 배를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말했다.“나는 한 끼쯤 굶어도 괜찮지만, 너는 꼭 제때 밥을 먹어야 해. 우리 아기 토끼까지 배를 곯리면 안 되잖아.”온유란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어서 가서 이석이 도와줘. 나는 조금만 더 앉아 있을 테니.”도정숙은 온유란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시골집은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아, 부엌에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가 마당까지 고스란히 들려왔다.“여긴 기름 냄새 많이 나니까 나가 있어.”하이석의 목소리였다.“저는 손 안 대고 보기만 할 게요. 오늘 저녁은 뭐예요? 설마 또 생선국 끓인 건 아니죠?”“오늘은 코코넛 닭고기 수프야.”“그걸 만들 줄 알아요?”도정숙은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들었다.이윽고 고개를 들어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별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 평온한 미소가 번졌다.잠시 뒤 온유란이 국그릇을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그녀는 마당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엄마, 이제 들어와서 식사하세요. 오늘 이석 씨
육수린은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하이준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이내 방긋 웃어 보였다.하이준도 순간 굳었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아이의 미소에 화답했다.육수린의 뒤를 따르던 보모 황금자는 하이준을 알아보고 잔뜩 경계했다. 그녀는 서둘러 아이를 재촉했다.“아가씨, 이제 가셔야 해요. 더 늦게 돌아가시면 사모님께서 걱정하세요.”육수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황금자의 손을 잡았다.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던 아이는 하이준이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육수린은 고개를 숙여 손에 든 치즈 간식을 내려다보았다.하이준이 자신의 간식을 먹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아저씨도 드실래요?”“아가씨…”황금자가 다시 작은 목소리로 재촉했다.하지만 육수린은 하이준에게 치즈 간식 하나를 건넨 뒤에야 황금자의 손을 잡고 떠났다.하이준은 손에 들린 간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육수린은 서은주와 아주 빼닮은 얼굴은 아니었다.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특히 웃는 모습이 그랬다.육강민이라는 사람은… 정말 운이 좋았다.좋은 아내를 얻은 데다 저토록 사랑스러운 딸까지 두었으니 말이다.육민찬은 친아들이 아니었지만, 육강민은 제 자식처럼 아끼고 키웠다. 그 일은 이미 사교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미담이었다.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겉으로는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는 육강민이 사실은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고.사업에도 성공했고 가정까지 행복했다.누구나 부러워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하이준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 가족을 하씨 집안에서 내쫓았을 뿐이었다.그 일만 없었다면 자신도 육강민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사업에 성공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을.*병실에 들어간 육수린은 곧장 어머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서은주는 딸의 손에 들린 것을
송지아는 허경빈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왜 그래?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아무것도 아니야. 나, 조만간 며칠 정도 자리를 비울 것 같아.”“어디 가는데?”“회사에 일이 좀 생겨서 외국에 다녀와야 해.”송지아는 고개만 끄덕일 뿐 더 묻지 않았다.허경빈은 의료용 솜에 소독약을 묻혀 그녀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소독약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화상을 입은 부위가 따끔하게 타들어 갔고, 송지아의 몸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묵묵히 견뎠다.이제는 이런 고통에도 익숙해져 있었다.허경빈은 쓰레기통 안에 쌓인 피 묻은 솜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도 서서히 핏빛이 번졌다.“경빈아.”송지아가 문득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지?”“그냥 네가 아파하는 게 마음 아파서 그래.”“난 괜찮아. 유주만 선생님도 그러셨잖아. 앞으로는 발작하는 간격이 점점 길어지다가 결국 완전히 멎을 거라고. 나 곧 나을 거야.”허경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삶의 중심을 전부 나한테만 두지 마. 일도 열심히 하고, 밥도 잘 챙겨 먹고, 잠도 푹 자야 해. 내가 걱정하지 않게 해 줄 거지?”송지아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허경빈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몸을 가까이 기울여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너도 나한테 뽀뽀해 줘.”허경빈은 그녀의 입술 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 입맞춤에는 한 점의 욕정도 없었다.오직 애틋함과 안쓰러움만이 가득했다.송지아가 이런 고통을 겪을 이유는 없었다.하채린이 그녀를 이토록 집요하게 노린 건 단지 설씨 집안의 복수를 돕기 위해서만은 아닐 터였다.자신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몰랐다.과거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하채린에게 모욕을 주었으니까.만약 자신이 송지아에게 다가가지 않았다면, 어쩌면 모든 일이 달라졌을지도 몰랐다.허경빈은 송지아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에게 기대어 가만히 온기를 나누었다.
하이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하채린이라니.멀리 외국에 있으면서도 이 많은 일을 벌였단 말인가?“방금 하채린이라고 했습니까?”허경빈은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 설도윤의 어머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그 여자가 먼저 저를 찾아왔어요. 서로 돕자고 했습니다. 자기가 송씨 집안에 복수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저는 온유란에게 복수하는 걸 도와 달라고 했어요.”“당신 남편이 밖에서 데리고 살던 여자에게 사고가 난 것도 그 여자가 저지른 짓입니까?”허경빈은 순식간에 모든 사건의 연결고리를 찾아냈다.“설도윤의 병도 고쳐 주겠다고 했겠군요. 그래서 제안을 받아들인 거고요?”설도윤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급히 변명했다.“하지만 그 여자가 그렇게까지 잔인한 줄은 몰랐습니다. 기껏해야 사람을 시켜 송지아를 겁주거나 납치하는 정도일 줄 알았어요. 설마 그 여자가…”“독을 먹일 줄은 몰랐다는 겁니까?”“그 여자는 미친 사람이에요! 제 아들을 빌미로 협박해서 저도 그만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제가 한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허경빈이 싸늘하게 물었다.“증거는 있습니까?”“어, 없습니다…”애초에 설도윤의 어머니는 영리한 사람이 아니었다.손에 증거가 있었다면 하채린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렸을 리도 없었다. 그랬다면 서로의 약점을 쥐고 견제할 수 있었을 터였다.“하지만 제가 한 말은 한마디도 거짓이 아닙니다. 믿어 주세요. 그 여자와 직접 대질할 수도 있습니다.”이번에는 하이석이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하채린은 외국에 있는데 어떻게 대질하겠다는 거지?”그의 시선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그 여자가 국내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죄를 뒤집어씌우는 건 아니고?”“아, 아닙니다. 정말 그 여자예요! 모든 일을 그 여자가 꾸몄습니다.”설도윤의 어머니가 다급히 부인했지만, 증거 없는 항변은 공허하기만 했다.“전부 그 여자가 한 짓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