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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마음을 읽는 황비의 후궁 평정기
폭군의 마음을 읽는 황비의 후궁 평정기
Author: 윤은혜

제1화

Author: 윤은혜
“강 선시처럼 꽃다운 얼굴이 오늘 추석 궁중 연회에 빠지면 섭섭하지요. 이번 기회를 잡지 않는다면 아마 앞으로는 황제를 뵐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옵니다.”

연회석상, 강윤지는 마치 불 위에 올려진 생선처럼 사방에서 몰아붙임을 당했던 터라 머릿속이 지끈해났다.

“강 낭자, 황제께서 보고 계시지 않느냐? 어서 올라가거라.”

유빈은 눈웃음을 지었지만 그 속내는 차가웠다.

그녀는 강윤지가 속한 전각의 주인이었다. 한 달 전, 강윤지가 한밤중에 요리를 하다 풍기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유빈의 침전까지 스며들자 분수를 모른다며 윤지에게 핀잔을 준 적이 있었다. 지금 보니 그녀는 뒤끝이 참 긴 모양이었다.

강윤지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림을 바라보았다.

그는 폭군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스물넷에 친형을 죽이고 황위를 빼앗았으며 성정이 불안정하고 사람 목숨을 공기처럼 가벼이 여긴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가 1년 사이 갈아치운 궁인만 해도 부지기수.

자줏빛 금룡포를 입은 그의 용모는 준수하나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위압감이 있었다. 그 날카롭고 차가운 흑안이 그녀를 향하자 강윤지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은 석 달 전 일이었다.

그녀는 “폭군왕조”라는 소설 속으로 들어와 강윤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강윤지라는 인물은 대사가 단 한 줄밖에 없는 하찮은 조연에 불과했다.

소설에 따르면 그녀는 3년 전 궁녀 선발로 입궁했다. 아버지는 7품의 미관말직이었지만 그녀의 미모가 화려했던 탓에 운 좋게 후궁으로 뽑힐 수 있었다. 명문가 출신들이 가득한 후궁에서 그녀는 가장 빛바랜 조각에 불과했다. 그런데 성격마저 소심한 탓에 늘 숨을 죽이며 살아왔다.

그러다 3개월 전, 귀비가 기분이 나쁘다며 연회석상에서 그녀의 뺨을 후려쳤고 놀란 강윤지는 그날 밤 고열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녀는 조연답게 얼마 못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아, 물론 여기까지가 소설 속의 이야기다.

어쩐 일인지 소설 속 강윤지가 세상을 떠난 뒤 지금의 그녀가 강윤지의 몸에 빙의하여 이곳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재주도 없는 그녀는 출세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투명인간처럼 살다가 기회가 된다면 유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늘 유빈에 의해 억지로 무대에 올려졌다.

“노첩은 재주도 재능도 없는 사람이옵니다. 폐하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무리 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강윤지는 잔을 들어 그에게 술을 올리려 했다. 그러나 술잔을 들기도 전에 위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또 술이냐! 온종일 밥 한 끼도 못 먹고 술만 마셔댔단 말이다. 너희들은 정녕 나를 술로 죽일 셈인 것이냐? 조만간 이 후궁에 있는 사람들의 목을 전부 베어버릴 테다!’

그 목소리에 강윤지는 손이 떨려 술을 절반이나 쏟아버렸다.

사실 조금 전부터 다른 빈들이 무예를 펼칠 때, 강윤지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춤을 왜 저따위로 추는 것이지? 우스꽝스러운 게 꼭 원숭이 같군. 어화원에 있는 개구리가 이보다 더 우아하게 추겠다.’

‘이 곡이 네 귀에는 그리도 곱게 들리는 것이냐? 감히 나에게 눈짓을 해?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군.’

‘하루 종일 정무를 처리하고 여기 와서 너희들의 질투 싸움을 들어야 하는 것이냐? 내가 이러려고 황제가 된 게 아닐 텐데.’

강윤지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웃고 있었고 자신과 무관한 일이었기에 방관하기만 했다. 하지만 방금 전 그가 했던 말을 듣고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석 달 만에 처음 마주한 황제였지만 그는 진심으로 노한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했던 말처럼 실제로 살인을 저지를 것 같지도 않고.

일단 밑에서 다른 빈들이 부추기기에 황제 앞에서 무언가를 하긴 해야 할 텐데...

그 순간, 강윤지는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그녀는 술잔 대신 자신이 가져온 음식 함을 앞으로 밀었다.

“노첩은 노래와 춤에 능하지 않사오나 이 손맛 하나만은 자신 있사옵니다. 이 주조경단을 한 번 맛보십시오.”

그러자 황제 곁에 있던 대 태감은 앞으로 나와 음식 함을 받고는 황제 앞에 놓으며 말했다.

“폐하, 드시옵소서.”

하림은 그 뜨끈한 주조경단을 가만히 바라보다 마지못해 손을 들었다. 그때 유빈의 비웃음이 날아왔다.

“어차피 어선방에서 폐하의 식사를 마련하는데 강 선시가 이런 잡것을 내놓는 건 공연히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격이 아니겠사옵니까?”

연회장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림의 후궁들은 모두 화려한 집안 배경을 자랑했지만, 강윤지만은 달랐다. 그녀는 오직 아름다운 얼굴 하나만으로 입궁을 허락받았다. 황제는 정무를 처리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후궁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궁 안의 귀한 분들이 답답함을 달래려 찾은 표적이 바로 강윤지였다.

오늘만큼은 황제 앞에서 얼굴을 비추고 싶은 마음에 빈들은 온갖 재주를 다 부렸지만 하림의 눈길조차 얻지 못했다. 어차피 다들 소득이 없으니 그저 강윤지가 더 처참히 짓밟히며 무너지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려는 모양이었다.

‘먹는 거? 이건 입에 넣으면 뜨끈하고, 꼭꼭 씹어 삼켜야 하는 음식이군. 세상에 아직 이렇게 뜨거운 밥이 남아 있었다니... 그동안 내가 어선방에서 받아먹던 식은 흰죽과 시든 채소들은 뭐였단 말이냐?’

‘이 선시의 솜씨는 어선방보다 훨씬 낫구나. 궁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나한테 먹을 걸 챙겨 주는 건 이 낭자 하나뿐이군. 한데 누구인 것이지? 강 선시라는 사람이 궁에 있었나? 난 왜 기억이 없는 것이지?’

강윤지의 얼굴은 그 자리에서 귀까지 붉어지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들고 싶었지만 그 충동을 억누르고 미간을 더욱 깊게 찌푸렸다. 이 황제는 참으로 말이 많은 성격인 듯하다.

“맛이 괜찮구나.”

하림은 주조경단을 한 숟가락 떠서 맛보고는 여전히 냉랭한 눈빛으로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건조하게 평가했다.

“감사하옵니다, 폐하.”

강윤지는 몸을 숙여 예를 올렸지만 속으로는 투덜거렸다.

이 책 속으로 들어온 뒤 강윤지는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시원치 않았다. 다만 음식 솜씨 하나는 자신 있었기에 매달 받는 봉록은 모조리 음식에 쏟아부어 자기 배를 채웠다.

그녀는 오늘 궁중 연회에서 마음껏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일부러 주조경단을 만들어 왔는데 그게 고스란히 황제의 배로 들어가다니!

“강 선시, 짐 옆에 앉거라.”

아래쪽에서 킥킥 웃음이 새어 나오던 찰나 하림의 한마디가 떨어지자 연회장은 순식간에 고요에 잠겼다. 그녀는 황제 왼편에 자리한 가 귀비를 힐끔 쳐다보았다.

내 주조경단이 그렇게 맛있었나? 총애 받는 귀비와 같은 자리에 앉힐 정도로?

하지만 황제의 부름을 감히 거절할 수는 없는 법.

그녀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원망스러운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하림의 오른편에 앉았다. 아래쪽에 앉아있던 빈과 비들은 이를 갈았다.

진작 알았더라면, 몇 달씩 재주를 연마할 게 아니라 차라리 뜨끈한 주조경단 한 그릇을 바쳤을 것인데.

‘속마음을 알 수 없군.’

강윤지가 조심스럽게 앉아 있던 그때, 하림의 차가운 속마음이 다시 들려왔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걸까?

그녀는 하림 곁에서 재잘대며 웃음을 유도하느라 부채를 흔들고 있는 가 귀비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그래,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장군 아버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황제 앞에서 감히 웃음을 팔 배짱이 어디 있겠나?

책 속에 들어온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예전에도 궁중 암투극은 많이 보아왔다. 재주 없고, 총애 없고, 배경마저 없는 여인이 함부로 사람들 앞에 나섰다간 대개 머지않아 허무하게 사라지는 게 순리였다. 강윤지는 아직 오래 살고 싶었다.

무대 위에 다른 빈들이 차례차례 재주를 뽐내며 눈길을 끌었다. 이번에 무용을 선보인 이는 최영화였다. 서역풍의 이국적인 의상에, 유연하게 펼쳐진 춤사위와 드러난 하얀 피부, 그리고 부드럽게 드러난 가슴선이 특히 눈부셨다. 강윤지는 자신조차도 고개를 파묻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매혹적이었다.

혹시… 황제도 이 여인을 좋아하지 않을까?

그녀가 이 책 속에 들어온 뒤로 하림이 후궁의 침소를 찾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머릿속에 다시금 낮고 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고, 탐스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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