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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윤은혜
“아가씨,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먹을 생각뿐이옵니까?”

소민은 주인이 여전히 그 커다란 무쇠솥을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속이 타들어가며 가슴을 쳤다. 궁중의 저 무리들은 사람을 고를 것도 없이 구박하는 게 일상사였고, 비위에 조금만 거슬리면 곧장 강윤지를 희롱하곤 했다. 이제 겨우 품계가 올랐는데 이럴 때 황상의 눈에 들어야지 무슨 밥을 지어 먹겠다고...

“이러다 유빈 마마께서 총애를 받으면 아가씨를 더 괴롭히실 것이옵니다.”

강윤지는 턱을 괴고 담담히 그녀를 바라봤다.

“할 말 다 했느냐?”

소민이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무쇠솥부터 가져오거라.”

소민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강윤지는 그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족령이 내려진 처지에 달리 무슨 수가 있겠는가.

설마 울고불고 매달려 하림에게 살려달라 빌라는 것은 아니겠지?

그랬다간 눈물을 닦기도 전에 흰 비단에 목이 조일 게 뻔했다.

“차라리 나가지도 못하니 먼저 배부터 채우는 게 낫지.”

말을 마치고는 접시에서 과자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불룩해진 볼은 마치 먹을 것을 훔친 다람쥐 같았다.

소민은 여전히 근심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강윤지는 마침내 비장의 한 수를 꺼냈다.

“내가 굶어서 홀쭉해지고 초라해지면 유빈이 속으로 얼마나 기뻐할지 뻔하다. 폐하께서 곁에 황폐한 늙은 여인만 보게 되면 언짢아하시고, 결국 날 냉궁으로 보내실 게 뻔하다. 그러면 우리 둘의 앞날은 끝장이야.”

입은 이렇게 놀렸지만 강윤지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그녀는 황제의 총애 따위 전혀 바라지 않았다. 전생에서 본 궁중극만 해도 총애를 차지하려다 목숨을 잃은 여인이 수두룩했다. 그녀는 그저 무사히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좋았다.

궁중 암투? 아니, 그건 그녀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차라리 황제가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이 작은 전각에서 소민이와 함께 하루 세 끼를 직접 지어 먹으며 사는 것, 그게 그녀가 바라는 전부였다.

소민이는 마침내 마음이 움직였는지 강윤지를 데리고 그토록 궁금해하던 무쇠솥을 보러 갔다. 작은 부엌에 들어서자 강윤지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눈이 반짝거렸다.

소민이가 사 온 묵직한 무쇠솥을 보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소민아, 살찐 거위 한 마리 잡아오너라. 오늘은 무쇠솥에 거위탕을 끓이마.”

소민이는 잽싸게 달려 나갔다가 이내 통통하게 살찐 거위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강윤지는 거위를 받아들고 목을 비틀어 조용히 숨결을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털을 뽑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다. 그 손놀림은 몇 년 동안 주방에서 보낸 장인의 솜씨처럼 거침없었다.

“아가씨, 이 솜씨면 궁 밖에 나가 금자루 식당을 차려도 되겠사옵니다.”

소민이는 눈을 반짝이며 감탄을 연발했다. 강윤지는 그 칭찬을 들으며 재빨리 손을 놀렸다. 전생에서도 스스로 잘 먹고 잘 살아온 성격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입맛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활활 달궈진 무쇠솥에 향기로운 기름을 두르자 기름방울이 경쾌하게 튀었다. 잘 썬 거위 고기를 넣고 주걱으로 뒤적이니 익어가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부엌 한가득 번졌다.

한 시진도 안 되어 뚜껑을 여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농후한 향이 퍼졌다.

강윤지는 거위탕을 큼직한 대접에 담고 대파 한 줌을 뿌렸다.

“밥 먹자!”

이곳에 온 뒤로 강윤지는 소민이와 함께 먹고 마시는 걸 일과로 삼았다. 그녀도 이제는 강윤지의 이런 변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흰 쌀밥 두 그릇을 가져와 부엌의 낮은 탁자에 놓고 강윤지와 마주 앉았다. 소민이는 기다렸다는 듯 거위 고기를 한 점 집어 베어 물었다.

“아가씨, 고기가 어쩜 이렇게 부드러운 것이옵니까?”

강윤지도 한 점을 집어 은근히 씹어 먹었다. 고기는 부드럽고 육즙이 풍부했으며, 함께 넣은 감자와 당근은 속까지 양념이 스며들어 맛이 일품이었다. 진한 국물은 밥을 부르는 맛이었다.

“역시 무쇠솥 요리가 제맛이군.”

강윤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숨을 내쉬었다. 소민이는 반찬과 밥을 번갈아 먹으며 볼을 불룩하게 채웠다.

“아가씨, 이 맛을 황상께서 알게 된다면 분명 좋아하실 것이옵니다.”

강윤지는 며칠간 들었던 황제의 속마음을 떠올리며 묵묵히 고기를 더 크게 베어 물었다. 밥도 뜨겁게 못 먹고, 속은 늘 허기진 채로 사는 신세. 사실 황제라는 자리도 별로 좋은 건 아닌 듯했다.

두 사람은 낮은 탁자 앞에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 순간, 세상 모든 근심은 잠시 사라져 버린 듯했다.

한편, 유빈은 단 한 그릇의 경단으로 황제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데 성공한 뒤, 마음속에서는 오직 더 많은 총애를 얻기 위한 궁리만 가득했다.

다음 날 새벽, 하늘이 막 밝아올 즈음, 그녀는 취영의 시중을 받으며 단정히 단장한 후 말도 없이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의 궁인들은 그 모습을 보자 손에 쥔 일을 멈추고 일제히 무릎을 꿇어 인사했다.

“유빈 마마를 뵙습니다.”

유빈은 턱을 높이 치켜들고 부엌 사람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말 한마디 건네고 싶은 마음조차 없는 듯했다. 취영이 앞으로 나서 부엌 궁인들에게 손짓했다.

“됐으니 다들 물러가거라.”

윗전의 분부를 어길 궁인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는 서둘러 부엌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부엌에는 유빈과 취영만이 남았다.

유빈은 전에도 부엌에 내려와 직접 음식을 한 적이 있어 재료가 어디에 있는지 대략 알고 있었다. 그녀는 취영에게 찹쌀가루를 가져오게 하고 자신의 두 손을 정갈히 씻은 뒤 곧장 경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취영이 그 모습을 보고 급히 말했다.

“마마, 귀하신 몸으로 어찌... 이런 사소한 일은 노비에게 맡기시는 것이…”

“안 된다.”

유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자신의 앞날이 달린 일이니 남에게 맡길 수 없었다.

어제 황제께 경단을 올렸을 때의 반응이 떠오르자 유빈의 입매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녀는 속으로 은근한 뿌듯함이 번졌다.

“황상께서 친히 내가 빚은 경단을 좋아하시니 당연히 내 손으로 해야 그 정성이 전해지지 않겠느냐?”

“마마 말씀이 옳사옵니다. 노비의 솜씨가 어찌 마마를 따라갈 수 있겠사옵니까? 제가 어리석은 소리를 했사옵니다.”

취영이 옆에서 웃으며 아첨했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유빈은 취영의 말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 오로지 손끝에만 집중했다. 익숙지 않은 손길로 찹쌀가루를 큰 사발에 부은 뒤 알맞게 덥힌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반죽을 빚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동글동글한 경단들이 제 모양을 갖췄다.

취영은 곁에서 재료를 건네며 틈틈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마마의 솜씨는 하늘이 내려준 듯 정교하옵니다. 경단 하나도 이렇게 곱게 빚으니...”

유빈은 칭찬에 기분이 더 가벼워져 손놀림을 재촉했고 한 시진도 안 되어 하얀 김을 피우는 한 그릇의 탕원이 완성됐다.

그녀는 완성된 경단을 들고 방으로 돌아가 한 번 더 단장을 마친 뒤 취영과 함께 양심전으로 향했다.

왕덕은 유빈의 방문 뜻을 전해 듣고 안으로 들어가 하림에게 고했다.

그는 눈꺼풀만 가볍게 들어 올렸을 뿐 표정은 여전히 냉정하고 담담했다. 마침 막 조정에서 돌아와 아직 식사도 하지 않은 참이었다.

“들여보내거라.”

문밖에서 전갈을 들은 유빈은 이마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고르고 취영에게서 경단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한껏 요염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황상, 빈이 새로 속을 바꿔 경단을 만들었습니다. 막 조회를 마치시고 아직 수라를 들지 않으셨을 듯하여 곧장 들고 왔사옵니다.”

하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왕덕을 보았다. 그는 독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후 하림에게 건넸다.

“황상, 드시옵소서.”

하림은 작은 그릇을 받아 들었다. 이번 경단은 지난번보다 크기가 조금 컸다.

숟가락으로 하나 집어 먹었으나 속은 지나치게 달고 피는 두꺼웠다.

강윤지는 대체 왜 이리 성의가 없는 것이지? 날이 갈수록 대충 만드는군.

그렇게 생각했지만 조회 내내 허기를 달고 있었으니 그릇 속 몇 알을 끝까지 먹었다.

“괜찮구나.”

감정 없는 평이었지만 유빈의 마음에는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 황상은 경단을 좋아한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을. 아니었다면 어찌 강윤지 이름 한마디도 꺼내지 않겠는가.

“황상께서 좋아하시니 다행이옵니다.”

그러자 유빈의 눈빛이 은은히 빛나고 입꼬리의 곡선이 한층 더 짙어졌다.

생각보다 황상의 마음을 얻는 건 간단하군. 앞으로는 더 부지런히 더 많은 음식을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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