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여국.호원아는 봉구안의 밀서를 받았다.오양련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다급하게 물었다.“그 애가 뭐라고 했느냐?”호원아는 서신을 읽은 뒤, 복잡한 감정이 스쳐 가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오양련의 나이 든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다.“도대체 무슨 일이냐? 돌아온다고 했느냐?”호원아가 차분히 대답했다.“남제 황후에게는 쌍둥이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은 봉장미. 황후는 이 동생에게 황제의 자리를 맡기겠답니다.”오양련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말이냐? 처음부터 우리가 원한 건 그 애였지, 가짜를 내세우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호원아는 단호히 말했다.“가짜가 아닙니다. 봉장미 또한 서여국 황가의 혈통입니다.”오양련은 짜증이 섞인 듯 한숨을 내쉬었다.“그걸 내가 모를 것 같으냐? 문제는, 그 아이가 구안이의 대체품이라는 게지! 만약 들키기라도 한다면…”호원아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못 박았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습니다.”“서여국에서 혼란만 일어나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그 분은 지금 남제의 황후로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오양련은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야.”“장미가 그 아이를 대신하려면, 그 아이가 남제에서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돼.”“그런데 과연 그게 가능하겠느냐? 난 도무지,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구나.”호원아는 봉구안을 신뢰하고 있었다.“황제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그 분께서는 항상 신중하게 움직입니다.”“서여국을 위험에 빠뜨릴 리가 없습니다.”“우리의 역할은 그 분께서 요청한 대로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을 준비하는 것뿐입니다.”호원아는 오래 고민한 끝에 결국 이 사실을 봉 부인에게도 알렸다.어차피 그녀는 두 자매의 어머니였다.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다.봉 부인은 이 말을 듣자 즉시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뭐라고? 장미가 황제의 자리를 맡는다고?”“구안이는 왜 그런 결정을 한 걸까
쾅!이가 저택의 대문이 거칠게 차여 열렸다.하인들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라 문 앞에 선 인물을 바라보았다.“너, 너는 누구냐!”봉구안은 한 손으로 원가교를 끌고, 다른 손으로 옷자락을 정리하며 천천히 발을 거두었다.그녀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말이 필요 없었다.그녀가 손짓을 하자, 뒤에 대기하던 관군들이 일제히 들이닥쳤다.이 가의 하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어서 대인께 알리거라!”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원가교는 숨이 턱 막혔다.그녀는 봉구안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간절하게 외쳤다.“마마, 제 아이는…!”봉구안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걱정 마라. 아이는 안전할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오백이 아이를 안은 채 사람들 사이를 뚫고 다가왔다.“마마, 아이가 참 순합니다. 낯선 제 품에서도 울지도 않고 얌전합니다.”원가교는 급히 달려와 아이를 품에 안았다.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아기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봉구안에게 감사를 표했다.“마마…! 정말 감사합니다! 제 아이를 구해주셔서…!”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황후는 어떻게 자신의 처지를 알고 계셨던 걸까?그녀는 서방의 감시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그날 다과 자리에서도 완벽하게 감정을 감추었다.그런데도 황후는… 모든 걸 알아챘다.봉구안의 시선이 잠시 아이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아이의 목덜미에 선명한 손자국을 보고 눈빛을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너와 네 아이는 먼저 떠나거라.”그러나 원가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저는 마마 곁에 있겠습니다!”이가 저택은 온통 감시의 눈으로 가득했다.혼자서는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지금 이 순간, 그녀와 아이가 안전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황후의 곁뿐이었다.관군들이 이가 저택을 철저히 수색했으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바로 그때, 그녀의 낭군이 저택으로 돌
이 가 저택의 서재 밀실 안에는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그곳에는 숨을 쉬고 있는,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게다가 전부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었다.각자의 침상 위에 누운 모습은 얼핏 보면 시체 같았다.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보니, 희미하게나마 호흡이 있었다.봉구안은 즉시 의원을 불러 치료하게 했다.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한 가지 의심이 떠올랐다.과거 그녀는 장순의 어머니를 본 적이 있었다.그녀 역시 수년 동안 살아있는 시체와 같은 상태였다.그때 태의가 내린 진단은 약쟁이의 독 때문이었다.지금 밀실에 있는 여자들의 상태 역시 장순의 어머니와 매우 흡사했다.하지만 상성의 의원들은 약쟁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결국, 의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이 여성들에게 독이 퍼진 것은 분명하지만, 소인의 의술로는 어떤 독인지 밝혀낼 수 없습니다.”봉구안은 밀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붉은 비단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방 안에는 은은한 향이 퍼져 있었다.이곳은 단순히 사람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었다.그녀는 곧장 명령했다.“폐하, 저들과 관련된 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의원을 따로 불러 조사해봐야 할 듯 합니다.”소욱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이 밀실은 누가 봐도 단순한 창고가 아니었다.곧 산부인과의 명의가 불려왔다.봉구안은 남성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게 했다.소욱은 밀실을 나가기 전, 그녀의 손을 잡고 단단히 당부했다.“조심하가라.”얼마 지나지 않아, 의원의 검진이 끝났다.그녀는 얼굴이 굳어진 채 보고를 올렸다.“황후마마, 이 여성들은 모두 남성과 동침한 흔적이 있습니다.”“게다가 일부는 심하게 다친 상태입니다.”봉구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운 여성들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의원의 말을 정정했다.“동침이 아니라 겁탈인 듯합니다.”……대옥.봉구안은 체포된 자의 신원을 확인했다.그의 이름은 이원.이 가의 저택은 관저가 아닌, 그들의 개인 사유지
봉구안도 확신할 수 없었다.“이 가의 약쟁이는 이원의 아버지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사형과 이원이 교류가 있었던 만큼, 어쩌면 사형이 이 가문에 드나들다 무언가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추측일 뿐이었다.소욱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그 여자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이냐?”이원의 아버지 때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몇 년 이상은 지났다.봉구안 역시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진실이 밝혀져야만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다 그녀는 화제를 돌려 물었다.“정말 저와 함께 이 사건을 조사하시겠습니까?”“궁에선 폐하를 기다리고 있지 않나요?”소욱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나라에는 하루라도 군주가 없어선 안 된다.”“하지만 그것이 곧 군주가 궁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백성을 다스리려면, 그들의 삶을 직접 보아야 한다.”“내가 즉위한 이후, 미복으로 직접 민정을 살핀 적은 거의 없었지.”“하지만 이번 북행에서 부패한 관리들을 다수 적발했다. 이것만 봐도 미복 시찰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약쟁이 사건을 조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의 현실을 직접 보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일이다.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은 일이지 않겠느냐?”봉구안은 그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의 말을 듣다 보니, 문득 감탄이 나왔다.“폐하께서는 참 좋은 군주입니다.”소욱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스쳤다.칭찬을 들은 것이 기분 나쁘지 않은 듯했다.그는 겸손하게 답했다.“난 그저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야. 아직 진정한 ‘좋은 황제’가 되려면 멀었지.”“아니면 사람들이 날 ‘폭군’이라 부르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그리고, 난 네 앞에서만 좋은 모습을 보여줄 뿐이야. 다른 자들은 나의 이런 진심을 모를 것이다...”봉구안은 슬며시 웃었다.그녀는 서서히 다가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조용히 기대었다.……이원의 죄는 무거웠고, 법에 따라 처벌받았다.
보름 후.소욱은 봉구안을 데리고 죽산진에 도착했다.이곳은 과거 맹성주가 약쟁이의 거점을 조사했던 곳이자, 소욱이 황귀비를 구했던 곳이기도 했다.죽산진은 죽순으로 유명한 곳이었다.지금은 한겨울이라, 죽순 재배가 한창이었다.거리 곳곳에는 겨울 죽순을 파는 상인들이 줄지어 있었다.마침 봉구안에게도 이곳에 친한 지인이 있었다.그녀는 겸사겸사 그를 방문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굳이 소욱과 함께 갈 생각은 없었다.강호의 사내들은 대개 조정 사람들과 엮이는 걸 싫어했다.하물며 상대가 황제라면 더더욱.소욱은 그녀가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기에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원치 않는다고 해서, 그가 따라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결국, 봉구안이 먼저 발걸음을 떼자 소욱은 곧장 몰래 그녀를 뒤쫓았다.소욱은 진한길과 함께 봉구안을 따라 마을 외곽으로 갔다.그녀가 한 초가집에 들어서는 걸 보고, 소욱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진한길은 황제가 도둑 고양이처럼 숨어 있는 광경에 내심 황당했다.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폐하, 사실대로 마마께 얘기하심이 어떻겠습니까…?”그냥 황후께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소욱은 정색하며 말했다.“나는 황후의 안전이 걱정되어 따라온 것뿐이다.”진한길은 작게 중얼거렸다.“안전이 아니라… 황후 마마가 만나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신경 쓰시는 거겠죠.”그러나 그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소욱이 즉시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진한길은 등골이 서늘해지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폐… 폐하 송구합니다. 없던 걸로 해주십시오…!”그가 어찌하다 그 속내를 말해 버린 걸까!두 사람이 숨어 기다린 지 두 시진이 흘렀다.곧 봉구안이 초가집에서 나왔다.그녀와 함께 나온 사람은 하얀 수염이 길게 늘어진 노인이었다.노인은 다정하게 그녀를 마을 어귀까지 배웅했다.이 장면을 본 소욱은 살짝 안도했다.그 자는 젊은 사내가 아니다.또한, 어여쁜 여인도 아니다.그냥 노인일 뿐이었다.그는
소탁은 좋은 뜻으로 마을에 내려와 서당을 열었으나, 지금까지 받은 제자는 고작 한 명이었다.오늘도 학생을 받으려 돌아다녔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된 현실뿐이었다.그는 속으로 씁쓸함을 삼켰다.소욱은 남 일이면 한층 더 흥미로워지는 성격이었다.그는 봉구안을 보며 물었다.“대체 왜 사람들은 폐태자를 싫어하는 것이냐?”봉구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가을걷이가 한창 바쁜 시기에 사람들 자식들을 데려가 글을 가르친다나, 그건 그렇다 쳐도...삶은 계란을 미끼로 아이들을 유혹하는 통에 몇 번이나 유괴범으로 몰렸다고 합니다.”“서당에 보낸 글씨 연습용 종이와 그림들은 아이들이 이해도 못 한 채 불쏘시개로 써버렸고,그걸 보고 폐태자는 설교를 퍼부었죠.”“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제자가 한 명뿐인데 그나마도 배운 글자는 하나도 없고 살만 포동포동 쪘다더군요.”소탁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제발, 그만 말씀해 주십시오.”소욱은 소탁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어쨌든 우리 집안 사람인데 어찌 이 지경까지 망가질 수가 있단 말이냐.”“스승님! 제 닭다리는요!”그때, 통통한 아이 하나가 서당으로 뛰어들어왔다.“스승님! 배고파요! 오늘 닭다리는요?”순간, 모두의 시선이 소탁에게 집중되었다.소욱은 비웃듯 말했다.“제자들 밥이나 챙겨주는 스승이라니. 대체 원…”소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그때, 아이는 사람들을 보며 천진하게 물었다.“다들 우리 서당에 배우러 오신 거예요?”닭다리 경쟁자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소탁은 아이가 더 큰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서둘러 닭 한 마리를 쥐여 주었다.“오늘은 손님이 오셨으니, 수업은 없다. 닭은 줄 테니 어서 집으로 가거라.”“네, 스승님!”아이가 떠나자, 소탁은 한숨을 쉬며 닭장을 살폈다.‘또 한 마리 줄었군.’그는 하늘을 보며 한탄했다.소욱은 냉소적으로 말했다.“정말이지, 하루 스승이면 평생 아버지라는 말
봉구안의 차가운 눈빛 속에, 사형의 참혹한 죽음이 떠올랐다.직접 본 적은 없었다.하지만 스승의 이야기만으로도 머릿속에 그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그 참혹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는 천천히 돌아서며, 소욱을 바라보았다.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었다.“조심하는 것이 나쁠 것 없지 않겠습니까.”“무엇보다… 저는 더 이상 죄 없는 사람들을 이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사형이 남긴 마지막 경고는 분명했다.‘모든 걸 감당할 힘이 없다면, 불필요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라.’소욱은 그녀의 말을 듣고, 천천히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내 부인은 너무나도 마음이 여리구나.”목소리는 낮고도 부드러웠다.……객잔 안. 늦은 저녁.식사를 마친 후, 봉구안이 입을 열었다.“동방세가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그때 폐하께서 본 자의 얼굴을 묘사해 주십시오.”소욱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그가 본 것은 얼굴을 가린 남자일 뿐이었다.그러나 동방세라면, 대략적인 모습이라도 그려낼 수 있을 터였다.그런데 문득, 낮에 본 백발의 노인이 떠올랐다.소욱은 무심한 듯한 어조로 물었다.“그 노인, 허 씨라고 했던가. 대체 무슨 사람이기에 너와 인연이 있단 말이냐?”그는 반쯤 무덤에 들어간 듯한 노인이었다.언뜻 보아서는 평범했으며, 강호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봉구안은 솔직히 답했다.“그 분은 대장장이입니다. 강호를 떠돌던 시절, 무기를 만들기 위해 자주 찾아갔었죠.”“그 분께서 죽산진에 은거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으나, 이제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살짝 괴었다.“그렇군.”봉구안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저는 한때 약쟁이가 동산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지금으로선 그 뿌리가 남제에 있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지고 있습니다.”“전에 붙잡았던 상인이 제공한 정보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허나 장사꾼에게 있어 신뢰는 필수. 한 번 거래한 물건이 사라지면 반드시 다시 채워 넣으
쾅!갑자기 작동한 기계장치가 바닥을 갈라놓았다.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모두가 지하로 추락했다.오백은 끝까지 진한길을 붙잡고 있어 두 사람은 서로 얽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봉구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세우고 곧장 화절자를 꺼내 앞을 밝혔다.“폐하!”그녀는 즉시 소욱을 찾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괜찮으십니까?”소욱은 태연하게 말했다.“난 괜찮다.”그러나 그 순간…“그럴 수밖에. 제가 밑에 깔려 있었으니 말입니다.”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로 아래에서 소탁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봉구안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곧바로 주위를 살폈다.화절자의 빛이 모이자, 이곳이 어디인지 뚜렷이 드러났다.소욱은 벽면을 훑어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곳이 바로 약쟁이들의 본거지였다.”“예전에는 동굴 깊숙이 비밀 통로가 있어 그쪽으로만 접근할 수 있었지.”“하지만… 이곳에 또 다른 출입구가 있을 줄은 몰랐다.”과거 황실은 이곳을 완전히 파괴하라고 명령했다.그러나 여전히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약재를 보관하던 목제 선반들, 그리고 벽에 남겨진 검은 얼룩들.“폐하! 사람이 있습니다!”호위가 외쳤다.구석에는 검은 야행의를 입은 남자가 의식 없이 쓰러져 있었다.그의 팔에서 선홍색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얼굴은 창백했고, 숨이 희미했다.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이상 적일 수도 동료일 수도 있었다.소욱은 단호히 명령했다.“살려라.”그는 더 이상 그 남자를 신경 쓰지 않고, 봉구안과 함께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한편, 소탁은 부상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가지고 있던 금창약을 꺼내 그의 상처에 발라 주었다.……두 시진이 흘렀다.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이제 체력을 아껴야 할 때였다.봉구안은 바닥에 앉아 숨을 골랐다.소욱은 그녀의 옆에 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춥진 않느냐?”그녀는 체질상 한기에 약했다.평소에도 잠들 때면 늘 그를 꼭 껴안고서야 따뜻함을 유지할 수 있었
"공자님,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다 됩니다!" 연상은 즐겁게 부산을 떨며, 자신의 이런 행동이 소탁에게는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곧, 음식들이 다 되었다. 연상은 미역국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소탁을 바라보았다. "소 공자님, 오래도록 장수하시길 기원합니다. 모용길처럼...""아, 이런! 제 입이 이렇게 험합니다. 모용길 같은 악인과 소 공자님은 전혀 다르시죠." 소탁은 국을 먹지 않고 연상에게 물었다."너는 행복하니?" 연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저야 당연히 행복하죠. 나쁜 사람들이 인과응보로 벌을 받지 않았습니까.""게다가 오늘 의원께서 말씀하시길, 공자님의 눈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하였어요.""전 공자님께서 곧 다시 빛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연상아, 너와 나는 이뤄질 수 없는 사이야."소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도 결국에는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연상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 "공자님, 저도 알고 있어요. 공자님은 황실의 귀한 분이시고, 저는..." "네 신분 때문이 아니야. 연상아, 난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다."이 말을 듣자마자 연상의 눈에 갑자기 한 줄기 빛이 어렸다. "단지 절 걱정하시는 것 뿐이지, 절 싫어하시는 건 아니군요?" 소탁의 목이 갑자기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일생은 큰 기복이 있었고, 혼자 살아가게 될 운명이었다. 한 번도 인연을 찾을 생각을 해본 적 없었고,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연상이란 아이는 그에게 있어 더 과분한 존재였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 시간 동안 그녀가 곁에 있어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사실이었다. "난 너에게 남녀 간의 사랑을 품고 있지 않아. 설령 내가 여자를 찾는다 해도, 그건 아내지 시녀가 아니야." 연상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이 크게 떠졌다. 시녀? 소탁은 선의로 그녀에게 일깨워주었다
완부옥은 예로부터 여자를 좋아했다. 남자를 대할 때조차도, 가볍게 희롱하거나 농을 던질 뿐이었다.그런 그녀 앞에 서왕이 호의를 드러내자,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게다가… 분명 그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던가.서왕은 그녀의 반응이 예상보다 격해 당황하며 서둘러 설명했다.“우리는 비슷한 처지가 아니더냐? 같이 사는 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지 않느냐.”“네가 떠나면, 난 또 다른 이와 혼인해야 할 텐데… 너처럼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여인은 없을 것이다.”“또다시 나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할 테니… 차라리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완부옥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 말씀이셨군요.”그가 정말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고 긴장했건만…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한편 모용길의 죄행이 세상에 밝혀지자, 남제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백성들 또한 믿기 어려워했다.“그 자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고? 분명 불로장생의 술법이 있었던 게지. 폐하께서 그걸 두려워해 제거한 거야.”“약쟁이 사건도 정말 복잡하군. 처음엔 모용욱이 범인이라더니… 이번엔 왜 모용길이 나와? 설마 이번에도 헛다리 짚은 건 아니겠지?”“뭐가 어쨌든 간에 약쟁이는 전부 모용가 짓이란 말이잖아. 그런 집안은 몰아내야지!”분노한 백성들은 결국 모용가로 몰려가 돌과 썩은 달걀을 던지며 고함쳤다.“남제에서 당장 꺼져라!”“모용가 놈들은 천벌 받아야 마땅해! 죄 없는 사람들 고통받게 했잖아!”며칠째 모용가는 백성들의 소란에 시달려, 누구 하나 문밖을 나서지 못했다.……성 외곽의 한 촌락.낡은 농가 안,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말했다.“들었어? 약쟁이 사건 피해자한텐 조정에서 보상금을 준다더라. 장순이네도 그랬잖아. 우리도 당장 관청 가자고, 장대복! 내 말 듣고 있는 거야?”장대복은 장순의 친삼촌이었다. 어린 조카를 생각하면 늘 미안함이 앞섰다.“형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 모자 둘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당신도 알잖아.”
소욱은 미소를 지었다.“부창부수라 하지 않느냐. 함께 손잡고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황부도 결국 한 여자의 지아비이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서왕은 한껏 조이던 가슴이 결국 힘없이 내려앉았다.그는 즉시 두 손을 모아 절하며 간언했다.“폐하, 그건 절대 안 됩니다!”“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주이십니다. 어찌 여인의 그늘 아래 계시겠습니까?”“이 일이 만에 하나라도 세상에 알려진다면, 조롱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평소 성정이 온화한 서왕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은근히 고집이 세지는 성격이었다.소욱은 목소리를 날카롭게 높였다.“그래서 말이지.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서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폐하도 이게 창피한 줄은 아시는구나…’“황후 마마께서는 폐하께서 황부가 되겠다는 걸 허락하셨습니까?”소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황후가 왜 반대하겠느냐? 설마 다른 사내를 맞이해야한단 말이냐?”서왕은 잠시 헷갈려 그 말에 말려들 뻔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황후마마께서도 이 일이 폐하께 불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신지 여쭈려는 것입니다.”소욱은 눈을 좁히며 말했다.“내 너를 형제로 생각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이미 내가 결정한 일이야. 누구도 바꿀 수 없어.”“너는 그저 국정을 맡아 잘 처리하거라. 내가 황후와 함께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그러자 서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하지만 폐하 신도 이번에는 휴가를 청하려 했습니다.”매번 국정을 떠맡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아무리 가까운 형제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겠는가.‘이 나라는 분명 소씨 가문의 일국이지 않는가.’ ‘잠깐… 순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서왕은 방금 스쳐간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감히 황제에게 이런 불만을 품다니. 마음으로도 짜증을 내다니, 감히 내가?’소욱은 인내심을 다잡으며 물었다.“휴가를 내겠다고? 무슨 연유냐?”서왕은 몇 초간 머뭇거리다, 정색하며 대답했다.“왕비와 함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소욱은
서왕의 심문이 시작되자, 손추의 수하였던 자객은 결국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그… 그 일은 저희가 꾸민 일입니다.”“모용길이 왕가의 피를 원했고, 손추가 직접 그 일을 맡았습니다.”“하지만 그분은 왕이셨고, 무공도 출중하셨습니다. 손추는 선제를 이간질해 부친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결국 모반의 증거를 조작했습니다.”그 뒤의 이야기는 서왕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조정에 충성을 다했다.군주의 명이 떨어지면, 신하는 죽는 수밖에 없었다.유배길에 올라서도 그의 아버지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그는 끝까지 선제가 자신의 결백을 밝혀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약쟁이단이 아버지의 목숨을 노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진실이 드러났을 때, 서왕은 마치 천근 무게의 짐을 내려놓은 듯 가슴이 후련해졌다.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쓰라림으로 번져왔다.그가 정원으로 돌아오자, 멀리 나무 아래서 완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왕은 한 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와락 안아 올렸다.“이번 일을 해결해줘서… 정말 고맙다!”“드디어 모두가 알게 되었어. 부친께서 얼마나 억울하게 누명을 썼는지…”“선제도 진범을 찾고자 했었지만, 결국 오늘에서야 제대로 밝혀졌어. 정말, 정말 고맙다…”서왕은 거듭 고마움을 표현했고, 완부옥은 조금은 지겨워하며 그를 말렸다.무엇보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직접 껴안을 줄은 몰랐다.조금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완부옥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됐습니다. 됐어요. 그렇게 큰일도 아닌걸요.”“정말 제게 보답하고 싶다면, 폐하께 소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여쭤봐 주세요.”서왕은 그녀를 놓고,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아직도 포기 못 한 것이냐?!”완부옥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게 아닙니다.”“그저 소환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정인이 아니더
세상일이란 참 아이러니했다. 열무신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가 천옥에 도착했을 때, 모용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모용길의 시신을 바라보며 열무신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낮은 포효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재앙은 천 년을 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모용길 같은 자는 200살이 넘게 살다가 죽었는데, 맹성주 같은 이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생각하니 열무신의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열무신은 천옥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기절해버렸다.황궁. 봉구안은 임시로 자진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임 중이었고,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회임이 실감 났다.정말로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소욱이 정해준 태의는 매일 그녀에게 와서 맥을 짚었다. 최근 그녀의 태상은 안정되어, 더 이상 안태약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저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아이의 일에 대해서, 봉구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사건도 이미 해결되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 현재 유일하게 장미에 대해서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장미의 옛 병이 재발할까 걱정되었다.그것이 만약 재발한다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을 터였다.봉구안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도착했다. 소욱은 약쟁이 사건의 최신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무신이 붙잡은 그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구나. 이미 200년 전에 태조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엿다. 모든 것이 모용길의 환상이었던 거야.”“짐은 이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이다. 모용길이 남긴 큰 돈은 모두 약쟁이 매매로 얻은 것이야. 짐은 이 돈을 피해자들과 그 친척들을 위로하는 데 쓸 것이다.”“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그는 걱정이 가득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이 조치는 백성
마지막으로 태조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석에 누워 숨이 끊어질 듯했다. [모용길... 내 아우야, 너는 내 마음을 알지. 짐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다. 새 정치를 세우지 못했고, 태자는 아직 어리지. 난 단지 하늘이 인색해서 짐에게 몇 년을 더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단 일 년이라도 짐이 일 년만 더 산다 해도 좋을 텐데... 남쪽의 수해, 북쪽의 기근, 남제는 사방에서 적에 둘러싸여 있고, 북연은 우리를 업신여기며, 내부에는 반적이 있는데... 어찌할까, 염라대왕이 목숨을 거두어 가니, 짐은...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구나. 아우야, 나라의 일을 모두 네 손에 맡기노니, 너는 태자를 보필하라. 너는 그의 고모부이자, 또한 그의 상부이니. 아우야, 짐은 오직 너만 믿는다.]기억 속의 태조가 눈앞의 그와 겹쳐졌다. 모용길은 낮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그의 눈에 태조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형님! 형님께서 원하던 것을 제가 마침내 이루어냈습니다! 형님께서는 불로장생할 것이고, 이 남제는 반드시 형님의 통치 아래 번영하며, 장차 천하를 통일하여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당초 남제가 새로 세워졌을 때 태조는 약속대로 그에게 강산의 절반을 주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태조의 뜻이 천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조와 계속해서 사방을 정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태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그는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모용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눈물로 가득 찬 시선 속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팔을 뻗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여인은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인, 남은 길은 제가 당신과 함께 걸을게요." 모용길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함께..."
열무신은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가 아니었다면, 또 누군가 새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그는 사로잡은 자객들을 직접 데리고 돌아와 천옥에 넘긴 뒤, 단 한숨도 쉬지 않고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자객들은 처음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모용길이 이미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희망도 이미 무너진 셈이었다.이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저희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폐태자를 노린 건 그 분의 ‘혈’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태조 황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불로장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백골이었습니다. 이백 년 전, 모용길이 시신을 도굴해갔을 때부터 이미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건, 망상이었어요!”“애초에 죽은 자였다고요!”그들이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말투에는 모용길을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쓸모없는 일에 목숨을 건 그를 그들은 미련한 바보로 여겼다.같이 심문을 진행하던 관리가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태조 황제께서 살아난 적이 없다는 걸 말이다.”“모용길이 그렇게까지 집착한 이유가 뭐였지?”자객들 중 한 명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모용길이 약쟁이를 만든 건, 그들로 실험해 불로장생의 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을 제조한 의원들은 손수 기록을 남겼고, 그 손책들엔 분명히 쓰여 있었죠. 이백 년 동안 그들이 상대한 건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시체’였다고요.”“아무리 약을 먹여도 살아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입니다.”다른 자객 하나는 공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모용길은… 이미 오래전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마치… 마치 그 자리에 태조 황제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또 다른 자객이 덧붙였다.“그 자는 단지 태조 황제를 살리려 한 게 아닙니다. 자신도 불로장생 하고 싶었던 거에요.”“그리고 그게… 그 자는 정말로 성공했
태황태후는 직접 선조를 만나기 위해 천옥으로 향하려 했다.하지만 황제의 명이 내려져 있었다.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모용길을 접견할 수 없었다.하는 수 없이, 태황태후는 궁으로 전갈을 보냈다.하지만 설령 황제가 허락하더라도 모용길이 누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는 오직 태조는 아직 살릴 수 있다는 집념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런 그가 천옥에 갇힌 지금, 마음은 타들어가듯 초조했다.“그 어린 황제놈은 어딨느냐! 어서 나를 뵈러 오라 하지 못할까!”모용길에게 후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는 생각했다.이 나라 남제는, 태조와 자신이 함께 세운 나라였다.그런 자신을 막고 있는 소욱 따위가 어찌 감히 군림한단 말인가.천옥에 갇힌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쳤다.“태조를 살려야 한다! 어서 황제를 데려와라!”하지만 그는 몰랐다.그의 그 모든 고함과 분노는 소욱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그를 흔들기 위한 계략이었단 사실을 말이다.그리고 다섯째 날.천옥의 간수가 냉정한 얼굴로 명을 전했다.“폐하의 어명이십니다.”“모든 죄를 자백하고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죽을 때까지 말입니다.”모용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허튼소리 마라! 그 어린놈이 과연 알기나 한단 말이냐, 내가 이 모든 짓을 왜 해왔는지를 말이다!”간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나으리,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자백했다고 당장 목을 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태조께서 하사하신 면사금패는 아직도 가지고 계시잖아요?”그 말에 모용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그렇다.면사금패만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황제 따위가 그를 처형할 권한은 없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조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결심이 선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두 시진 후.모용길이 쓴 자백서가 궁으로 들여졌다.그 문서는 곧장 어전으로 올라갔다.문서를 넘겨받은 소욱은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길수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