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연이 보낸 편지에는 원비가 입궁하기 전 이미 아이를 낳았다는 내용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 소욱은 무표정한 얼굴로 글을 읽으며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의심이 깊어졌다. 그의 생모가 정말 숙비가 아니란 말인가.곰곰이 생각해 보니 실마리는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는 예전에 궁 안의 노인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모친은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입궁했다고 했다. 원래 친정은 세력이 약했고, 역병으로 혼자만 살아남은 채 궁 밖에서 선황을 만나 총애를 입었으며, 궁에 들어온 지 몇 달 되지 않아 숙비로 봉해졌다는 것이다..."폐하?"봉구안의 부름에 흩어졌던 그의 생각이 다시 다잡아졌다.소욱은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만약 원비가 이미 선황의 아이를 낳았다면 어찌 곧장 입궁하지 않았겠느냐. 남제로 보내졌을 때 선황을 가까이해 해치려 한 것이 아니었더냐."봉구안은 차분하게 대꾸했다."원 노인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원비마마를 미인계로 쓰게 된 일은 억지가 아니었다고요. 원바마마 스스로의 뜻이었다고 말입니다. 겉으로는 동산국을 위해 남제로 와서 선황 폐하를 해치려 했다고 보일 수 있지만, 정작 원비마마 본인은 다른 의도를 품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원가의 가보인 적연검을 요구하고 또 천문산에서 적연암검을 빼앗으려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원비마마가 남제로 온 것은 억지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습니다."소욱은 냉소 어린 웃음을 흘렸다."결국 우리가 본 것이 곧 진상은 아니었구나. 설령 원비가 내 생모라 하더라도 나를 버리고 뱃속의 소무까지 죽이려 했으니... 무엇이 그분을 그토록 잔혹하게 만든 것이더냐."봉구안은 눈을 곧추세우고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폐하의 말씀이 저를 빗대어 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저 역시 아이들을 두고 떠난 적 있지만 결코 그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완부옥 또한 그러하지요. 결이를 위하지 않았다면 남강을 버리고 서왕과 함께 황성으로 올 리 없었을 것입니다."소욱의 얼굴빛
서왕이 다시 한번 유화를 가로막았다. 그가 손을 대는 순간, 곧바로 호위병들까지 열무신을 상대로 나설 터였다.열무신의 눈빛에는 서릿발 같은 한기가 서려 있었다. 서왕은 온화한 얼굴로 그를 타이르듯 말했다.“세상일이 어찌 흑백으로만 가를 수 있겠느냐.”“소황이 죄를 많이 짓긴 했으나, 그 또한 선을 행한 적이 있지 않느냐.”“자네가 벗의 원수를 갚으려 한 일이 의로운 뜻인 건 나도 안다. 하지만 그대 스스로 완전한 선인이라 장담할 수 있느냐?”서왕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저자를 죽여 원한을 풀 수는 있겠지. 하지만 끝없는 고통을 주는 건, 결국 그대 자신을 더 갉아먹는 일이 아니냐.”“내가 동정하는 건 그자가 아니다. 천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발버둥치다 꺾여버린 무수한 인간들일 뿐이지.”열무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럴듯한 말씀이군요.”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전하, 그토록 자비로운 체면을 쓰고 사는 게, 지치지는 않으십니까?”그 눈빛은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는 듯 깊고 날카로웠다. 잠시 서왕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스쳐갔다.“나는 그대를 존중하고 아낀다…”“대체 저랑 무슨 친분이 있단 말입니까!”열무신의 목소리가 매섭게 갈라졌다.“그런 허울뿐인 말은 집어치우십시오! 좋습니다. 저 짐승 같은 자에게 물과 마른 양식은 주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그따위 가엾은 눈빛을 제 앞에서 보이지 마십시오.”그가 이를 갈았다.“역겹습니다.”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동정은 모두 칼날이었다. 한때 열정으로 불타던 소년의 심장을 찌르는 날선 칼날.열무신은 홀연히 몸을 돌려, 홀로 무리의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그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을 뿐,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잠시 뒤, 유화가 나아와 조심스레 아뢰었다.“전하, 열무신이 감히 전하의 말을 거역했으니, 혹여…”서왕이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쓸데없이 나서지 말거라. 우리는 그저 속히 황성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완부옥이 싸늘하게 웃었다.“전하께서는 방에 가서 씻으십시오. 결이가 잠들면 그때 전하께 찾아가 상의드리겠습니다.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요.”서왕은 그 속뜻을 곧 알아챘다.고개를 숙여 아들을 바라보니, 결이는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서왕은 미소를 머금으며 몸을 굽혀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고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결아, 얼른 안 자면 아비가 그냥 기절시켜 버린다?”결이가 움찔하며 온몸을 떨었다.……남강에서 황성까지는 아무리 서둘러도 한 달은 족히 걸렸다.서왕은 가족을 데리고, 또 황제의 명을 받들어 소황을 압송해야 했다.그 길 위에서 열무신은 줄곧 서왕의 뒤를 따라붙었다.마치 원귀처럼 떠도는 그의 두 눈은 오직 소황만을 꿰뚫듯 노려보고 있었다.그 광경이 우스워, 서왕은 완부옥에게 여러 차례 이야기해주곤 했다.“지금 소황은 이미 반항할 기력도 없다. 그런데 열무신이 저러니 괜히 다른 사람들만 놀라는 법이지. 이를테면 결이 같은 애 말이다. 이틀 사이에 애가 악몽을 얼마나 꿨는지 모른다.”완부옥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결이는 겉으로는 겁이 많은 것 같아도, 속은 누구보다 담이 큽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제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겠지요.”고왕을 제거한 뒤에도, 그녀의 용모는 돌아오지 않았다.보이지 않아도 손끝으로 더듬으면 여전히 패인 흉터들이 뚜렷이 느껴졌다.서왕은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부옥아, 네 자신을 얕잡아 보지 말거라. 개도 집이 가난하다고 싫어하지 않고, 아들도 어미가 못생겼다 탓하지 않는 법이다. 겉모습이야 어떻든…”짝!완부옥은 손바닥으로 서왕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위로도 못 할 바엔 입이라도 다무십시오! 성가셔 죽겠네 정말!”서왕은 오히려 가볍게 웃었다.“걱정 마라. 이미 명의를 찾아 사람을 보냈다. 반드시 그 눈과 얼굴을 고쳐줄 것이야. 방금 말하려던 건, 껍데기는 그저 겉모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와 결이가 귀히 여기는 건 네 마음씨지.”완부옥은 차갑게 비
완부옥은 결이를 꼭 껴안았다. 아이의 고른 숨결이 전해지는 순간, 온몸을 짓누르던 고통은 싹 사라진 듯 사그라졌다.그녀는 서왕의 말을 애써 외면한 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서왕은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부옥아, 너 정말 우리와 함께 황성으로 돌아갈 것이냐? 언제 떠나면 좋겠느냐?”“아니지, 따질 것도 없겠군…”“내일이라도 떠나자구나!”완부옥은 시끄러운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만하십시오. 잠시만이라도 조용히 하여 주십시오.”“어찌 이리 말을 쏟아내십니까.”서왕은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는 그녀와 결이를 와락 끌어안았다.“부옥아, 너무도 기쁘구나. 이제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는구나…”완부옥은 미간을 찌푸렸다.“……”지옥 같은 곳이라니?!!드디어 속내를 드러내는구나!서왕은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결과는…“당장 제 방에서 나가십시오!!!”그는 결국 또다시 완부옥의 방에서 쫓겨나고 말았다.……황성.서왕이 올린 상소문이 소욱의 손에 들어왔다.소황이 죽지 않았을뿐더러, 고왕까지 몸에 들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소욱의 낯빛은 싸늘히 굳어졌다.그는 설마 소황의 죽음을 틈타 이런 구멍이 생길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지금은 소황이 붙들려 달아날 수 없으나, 만약 열무신이 방심하여 범을 산으로 풀어주기라도 한다면?어찌 후환도 따지지 않고 이런 경솔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그날 밤, 소욱은 영화궁에 들어 봉구안에게 울분을 토했다.“소황을 단죄한다 해도 황성의 대감옥에 가두면 족한 일 아니겠느냐?”“그런데 열무신 그놈, 말 한마디 없이 소황을 끌고 나가 버렸다! 분명 그와 손을 잡은 자가 따로 있을 터. 아니면 어떻게 그 많은 눈을 피해 이런 일을 꾸밀 수 있단 말이냐.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봉구안은 조심스레 달랬다.“폐하, 조사하실 수는 있겠지만, 대체로는 일이 커지지 않게 다스리시는 편이 좋습니다.”소욱은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리며 그녀의 손을 잡아 제 가슴 위에
고왕이 소황의 몸에 들어간 지 한 시진도 되지 않아, 그의 살은 이미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뼛속을 갉아먹는 고통은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마치 머리가 산산조각 나는 듯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 싶을 만큼 참혹한 고통이었다.“아아! 아아…!”소황은 의자째 나동그라져 바닥을 뒹굴며 몸부림쳤다.곁에서 지켜보던 열무신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의 가슴속에 떠오른 이는 오직 한 사람,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맹성주뿐이었다.그 자들이 아니었다면, 그 소년은 장차 대장군이 되어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을 것이다.그 자들이 아니었다면, 자신 역시 이토록 흉측한 괴물로 변하지 않았을 터였다.이런 자들은 천 번, 만 번을 죽인다 한들 결코 죗값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이번 일로 인해 완부옥은 심하게 원기를 잃었다. 곧장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서왕이 급히 품에 안아 데리고 나갔다.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여전히 눈앞은 캄캄했다. 대신 귓가에 익숙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마마마! 어마마마!”결이의 앳된 부름은 꿀처럼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그 순간,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처음 아이를 품었을 땐 이런 감정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어머니가 될 줄은, 단 하나의 아이 때문에 이토록 마음이 흔들리고 이토록 애절해질 줄은 상상조차 못 했던 것이다.그때, 곁을 지키던 서왕이 부드럽게 말했다.“부옥아, 의원이 네 맥을 짚고 독을 뽑아냈다. 네 몸속에 깊이 퍼진 독이 금세 사라지진 않겠지만, 피부에 드러난 독성은 이미 걷혔다. 이제는 결이를 안아도 되고… 나도 안아도 된다.”완부옥은 곧장 퉁명스레 받아쳤다.“누가 전하를 안겠습니까. 전 결이만 있으면 됩니다.”마침내 마음 놓고 아들을 안을 수 있게 되자,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편안한 웃음이 번졌다. 결이를 껴안는 힘이 지나쳐 아이가 숨을 헐떡일 지경이었다.곧 그녀는 눈빛을 굳히며 물었다.“소황은 어떻습니까?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까?”서왕이 대답했다.
완부옥은 문가에 서서 굳센 목소리로 선언했다.“예, 충분히 생각했습니다.”서왕은 여전히 그녀가 후회하지는 않을까 근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갈십칠이 조심스레 나섰다.“사저, 너무 서두르실 것 없지 않습니까? 혹여 다른 방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만약 고왕을 꺼내 따로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요?”완부옥은 그를 밀쳐내듯 막아섰다.“선대들이 이 고왕을 만든 것은 남강 사방에 독장을 펼치기 위함이었다.”"하나 이번 전쟁으로 남강은 이미 제나라의 영토가 되었지. 고왕의 존재는 이제 무의미할 뿐 아니라, 도리어 제국의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게다가 지금의 남강에는 더는 독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독장은 외적을 막아내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리 남강 사람들의 몸과 뜻을 좀먹었습니다.”“남의 힘에 의존해 스스로를 지키려 하느니, 차라리 제 손으로 무기를 들어 지켜내는 것이 옳습니다.“무엇보다 고왕을 잇기 위해 매 세대마다 누군가 희생해야 했습니다. 그 고통은 이제 제 세대로 끝내야 합니다.”서왕은 그녀의 뜻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부옥아, 알겠다.”그러나 갈십칠은 여전히 고개를 내저으며 외쳤다.“잠깐만요! 저는 납득이 안 갑니다! 사저 말씀이 옳긴 합니다만, 고왕은… 단순히 독장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쓸모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완부옥이 매섭게 받아쳤다.“다른 쓸모라 함은, 독을 퍼뜨리는 일을 말하는 것이냐?”갈십칠은 기가 죽은 듯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그렇습니다.”완부옥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빛났다.“이 못난 놈아, 똑똑히 새겨라! 독을 퍼뜨리는 고왕 따위보다, 병을 고치고 사람을 살리는 고왕을 만드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것이야말로 남강의 미래가 아니겠느냐?”“독을 다루는 자는 끝내 독에 물려 파멸한다. 맨날 누굴 해칠 궁리만 하고, 누구를 독살할 궁리만 하는데, 우리 백성이 어찌 평안히 살 수 있겠느냐?”“설령 네가 해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널 이용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게 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