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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2화

Author: 일설연우
봉 대인은 딸을 핑계 삼아, 강주의 특산 복숭아 누름과자를 들고 궁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봉구안은 소욱보다도 냉담했다. 얼굴엔 미소 하나 없었고, 목소리는 싸늘했다.

“왜 오셨어요?”

어젯밤 분명히 경고했다.

요즘 강주는 어수선하니 조용히 사마부에 머물라고.

그런데도 기어코 선물까지 들고 얼굴을 비추다니.

봉 대인은 기가 죽은 듯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황제와 황후 앞에 섰다.

“저… 아니, 신이… 혹시 무슨 도움이 될까 하여 들렀습니다.”

“그래도 한때 강주 사마였으니, 백성들 얼굴쯤은 익숙합니다.”

봉구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말투엔 그늘 하나 없이 냉정했다.

“쓸데없는 짓 안 하시는 게 제일 큰 도움이에요.”

그 말에 봉 대인은 더욱 풀이 죽었다.

소욱조차 이번만큼은 봉구안이 지나치게 매정한 것 같았다.

“좋은 마음에서 온 게 아니겠느냐. 그만 화 풀어라, 구안아.”

소욱이 본인의 편을 들어주자, 봉 대인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그러나 소욱은 곧 공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요즘 실종자 수색이 한창이네.”

“관아에서도 이 일에 집중하고 있지.”

봉 대인은 그제야 눈빛이 살아났다. 곧장 예를 올리며 말했다.

“신이 바로 나가 보겠습니다!”

돌아서기 전, 그는 봉구안에게 조심스레 덧붙였다.

“누름과자는 따뜻할 때 드셔야 제맛이지. 좀 먹어보거라.”

봉 대인이 떠나자, 소욱이 조심스레 봉구안을 달랬다.

“그래도 부친이지 않느냐. 걱정돼서 온 게 느껴졌다.”

봉구안은 냉소를 머금은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게 느껴지셨어요?”

소욱은 탁자 위의 누름과자를 집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이게 그 누름과자 아니냐.”

소욱은 상자를 열며 중얼거리다가, 손을 멈췄다.

“근데 이 과자…”

봉구안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소욱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차갑지 않느냐. 이걸 어떻게 따뜻할 때 먹으라는 거지?”

“게다가 다 부서졌지 않느냐. 대인은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도, 속으로는 공 훈장이나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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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34화

    소욱은 봉구안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방금 전까진 분명 모용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태조 황제 묘까지 들먹이는 것일까?그래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해 주었다.“태조께서는 동릉에 묻혔다.”도굴을 막기 위해 태조의 능은 총 열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덤엔 무거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허나 그 열세 곳 모두가 가짜였다.진짜 묘는 오직 역대 황제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능을… 잠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소욱의 눈썹이 즉시 찌푸려졌다.“안 된다.”태조 황제는 이미 서세를 마친 성조였다.그분의 안식을 함부로 깨뜨릴 순 없었다.봉구안도 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은 약쟁이 사건의 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그녀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진정 불로장생을 원한 사람은 모용길이 아니라 태조 황제였을 수도 있습니다.”소욱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구안아, 지금 네 말은… 너무 황당하구나.”“설마 이 모든 약쟁이 사건의 배후가 태조 황제라는 것이냐?”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동방세가 그린 그 인물은 모용길과 닮았을 뿐, 자신들의 소씨 가문과는 단 한 점도 닮은 데가 없었다.봉구안도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라 단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모용길이 연막을 치고 모용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모용가 전체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 자는 모용가의 존망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그렇다면 그 자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 건, 다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폐하, 이백 년 전의 일은 저희가 직접 본 게 아닙니다.”“하지만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황제께서는 남산왕, 서왕, 그리고 모용길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남산왕은 태조의 명을 따라 세세손손 봉맥을 지켜왔고, 서왕가는 동부를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33화

    봉구안은 이전에 모용가의 선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태조 황제가 천하를 개척할 당시,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군량과 보급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지만 불과 세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향년, 마흔.그런데 지금 동방세가 그려낸 배후 인물의 얼굴이 그 모용길과 너무도 흡사했다.소욱 역시 그림을 비교해보았다.한 손엔 방금 받은 초상화, 다른 한 손엔 책에 실린 옛 그림이 들려있었다.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십중팔구 정도 닮은 듯했다!그는 봉구안과 눈을 마주쳤다.“얼굴이 닮은 거겠지. 아니면 모용가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서자일지도 몰라.”소욱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그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강호를 누비며 별의별 기이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충북에는 삼백 살 넘은 노인이 있다 들었습니다.”“신무파 장문도 이백십칠 년을 살았다죠.”“남제가 건국된 지 이제 겨우 이백 년 남짓입니다.”“만일 정말 불로장생이 가능하다면, 모용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게다가, 그녀를 더욱 확신에 가까운 의심으로 이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다.“폐하, 서왕께선 납치 당시에 그들이 피를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요.”“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서왕 말로는, 그 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던데... 횡설수설하는 미치광이였다고.”봉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들을 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모용길이 이번 일의 진짜 배후라 생각합니다.”“모용가의 조상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독초를 재배하려면 내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요.”“그리고 모용욱의 검거도 너무 순조로웠습니다.”“모든 것이… 너무 ‘그럴듯’했어요.”“어쩌면, 모든 건 모용길이 준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32화

    봉구안은 소욱이 자신을 다시 궁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자신이 서여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욱은 조심스레 사과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문득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소욱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동작엔 위로와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번 일은 폐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하신 건 제가 드린 믿음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담대연은 말재주가 뛰어납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흔들릴 만합니다.”그녀는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제 마음속에서 가족이 있는 곳이, 진짜 ‘집’입니다.”“폐하께서는 저의 지아비이십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저의 여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이지요.”“서여국이 아무리 좋아도, 폐하만큼 소중하진 않습니다.”소욱의 손끝이 떨렸다.“너… 그 말이 진심이냐?”그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가 정말 네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봉구안은 오히려 되물었다.“폐하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그러자 소욱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사부랑 사모, 그리고 봉장미, 게다가… 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세상 사람들 다 그러더라. 자식은 어미의 인생 그 자체라고… 지금도 내 순위가 그리 높진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내 자리는 더 밀려나겠지.”봉구안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저에게 산처럼 큰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만, 그분들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혈육’일 뿐입니다.”“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기에 생긴 아이인데, 어떻게 그 아버지를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폐하야말로 제가 앞으로 비바람을 함께할 사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유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31화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30화

    어전.“폐하, 서왕 전하와 왕비마마께서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서왕 전하께서 지금 궁문 밖에 대기 중이며, 아뢸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이 말을 들은 소욱은 지체 없이 명하였다.“어서 들라.”얼마 지나지 않아, 서왕은 발걸음을 옮겨 어전으로 들어섰다.그는 문턱을 넘자마자 곧장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신, 폐하를 뵙나이다!”소욱은 그 기색을 살피고, 정신이 온전한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무사하다니 다행이로구나.”헌데, 서왕의 안색은 심상치 않았다.“폐하, 신이 납치당한 이유는… 그들이 신의 피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신의 부친께서 돌아가시던 때가 떠올랐습니다.”소욱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그는 눈빛을 가라앉히고 그를 바라보았다.“너의 피를 왜 필요로 한단 말이냐? 그자들이 정말 피를 취하였느냐?”서왕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취하지는 못하였사오나, 그들의 목적이 분명 피에 있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신 그 사건 역시, 이번 일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소욱의 미간이 좁게 모아졌다.그는 전대의 왕부, 곧 서왕의 아버지에 관한 억울한 일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 일로 선황은 오랫동안 후회하며 침식을 잊고 괴로워했었다.그래서 소욱 또한, 이후 누구에 대해 반역 운운하는 소문이 돌 때마다 쉽게 믿지 않았다.선왕이 저지른 실책을 그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허나 지금 와서 다시금 드러나는 의혹은 그 죽음이 단순한 누명이나 정치적 숙청이 아닌, 무언가 깊은 연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소욱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자세히 말해 보아라.”……황성 서쪽.봉구안의 행차가 한적한 관로에 이르렀을 때, 한 일행이 그녀를 막아세웠다.오백이 곧장 검을 뽑아 방어 태세를 취했으나, 막아선 이들이 익숙한 인물임을 곧 알아보았다.바로 자재각을 지키던 소욱의 친위 호위병들이었다.그들은 마차를 둘러싸며 호위 진형을 갖추었다.“마마, 저희는 폐하의 명을 받아 마마를 궁으로 모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29화

    소욱은 한참을 고심한 끝에, 어느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천명을 믿지는 않았으나, 담대연이 말한 ‘인성’은 부정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언제나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과거 그녀가 이미 단회욱을 마음에서 지웠음에도, 그를 구하기 위해 주저 없이 죽음을 택했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했다.서여국은 외환보다 내우가 깊은 나라였다.아무리 소주와 정국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안으로는 여전히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이번에 봉구안이 직접 서여국에 가게 되면, 그 혼란 속에서 국주로 추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그녀의 성정상 그 책임을 외면하진 못할 터였다.결국엔 남제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소욱의 가슴을 옥죄었다.담대연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천하통일. 그러나 그보다 무서운 건, 그 길목에서 아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진한길.”“신, 여기 있습니다!”“황후를 몰래 다시 데려오거라. 사람을 붙여, 은밀히.”진한길은 순간 의아함을 품었다.폐하께서 왜 이리도 갈팡질팡하시는 걸까………한편, 황성 서쪽 교외.담대연이 도착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하궁의 비밀 통로를 찾아냈다.그가 손을 쓰자 거대한 암석이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진 지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담대연은 호위들에게 엄중히 이르렀다.“이곳은 함정과 기계장치가 많습니다. 제 발을 따라오십시오. 절대 멋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명심하겠습니다!”……지하궁 내.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서왕과 완부옥은 이미 허기와 피로로 맥을 잃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그 인물은 이전에 죽은 자의 시체를 발견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시체를 끌고 나갈 뿐이었다. 마치 이곳에서 죽음은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시체를 처리한 뒤, 그자는 곧장 서왕을 데리고 가려 했다.완부옥은 그를 향해 소리쳤다.“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대답은 없었다. 그저 서왕을 밀어내듯 이끌 뿐이었다.하지만, 그들은 이미 내공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28화

    그 뱀은 영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슥, 하고 순식간에 주실 안으로 기어들어가더니 어디에 숨어버렸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뱀을 잡기 위해선 황후의 물건들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고, 이는 반드시 폐하께 고해야 할 사안이었다.때마침 소욱은 밤이 깊어도 봉구안이 그리워져 자유각을 찾았다.호위들은 이 일을 곧장 아뢰었다.소욱의 눈썹이 짙게 찌푸려졌다.그는 친히 방으로 들어가 사방을 뒤적이다, 마침내 침상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뱀을 발견하였다.그 순간, 그는 뱀의 눈과 마주쳤다.소욱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이놈을 당장 잡아내라…”막 명하려던 찰나, 그는 그 뱀이 어딘가 익숙하단 걸 느꼈다.이 뱀은… 분명 완부옥이 기르던 그 뱀과 닮아 있었다.완부옥과 서왕이 함께 실종된 걸 떠올린 소욱은 곧 심중에 짚이는 바가 있었다.그는 즉시 명하여 뱀을 그물망에 넣게 한 뒤, 서왕부로 보내어 확인하게 하였다.서왕부의 호위, 유화가 그 뱀을 확인하였다.그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억누르며 가까이 다가갔고, 잠시 후 단호하게 말했다.“왕비마마께서 기르던 뱀입니다.”자유각.소욱은 전갈을 받은 후, 이 일에 더없이 의아해졌다.완부옥의 뱀이 어찌 자유각까지 온단 말인가?설령 이 뱀이 길을 안다 하여도, 돌아간다면 당연히 서왕부로 가야 할 터였다.그는 곧 봉구안에게 전령 비둘기를 날렸다.그 시각, 봉구안은 황성을 갓 벗어난 참이었다.편지를 받아든 그녀는 곧장 완부옥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예전에 완부옥이 똑같은 짓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곧장 회신을 써서 다시 소욱에게 전했다.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봉구안은 잠시 고심한 끝에, 두 번째 편지를 써 보냈다.그 안엔 한 마디 당부가 적혀 있었다.[폐하, 부디 경솔한 행동은 삼가 주시옵고, 무엇보다 폐하의 안전을 우선으로 삼으소서.]소욱은 첫 번째 편지를 받고 곧장 진한길을 불렀다.“서왕의 흔적을 찾을 실마리를 얻었다. 몇 사람을 데려가 뱀을 풀고, 그 자취를 따라가 보아라.”“예, 폐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27화

    지하궁은 온통 어둠뿐이었다.완부옥과 서왕은 감금되어 있던 방을 빠져나왔으나, 사방이 캄캄하여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었고, 출구를 찾는 것조차 막막하였다.서로 떨어질까 염려된 완부옥은 명령조로 말했다.“제 옷소매를 붙잡아요. 바짝 따라와요.”“알겠다.” 서왕은 그녀의 뒤를 따르는 수행자처럼 움직였다.그가 조심스레 속삭였다.“조심하거라. 혹시 저들이…”“쉿. 소리 들리십니까?”완부옥이 숨을 죽이며 물었다.그 순간, 어둠 속에서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둘은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인 채, 벽에 몸을 바짝 붙여 섰다.다행히도 어둠이 그들의 몸을 감추었고, 다가오던 자는 그들을 발견치 못한 채 멀어져갔다.발소리가 사라지자, 완부옥은 서왕의 귀가에 바싹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벽을 더듬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출구가 보일 겁니다.”서왕이 대답하였다.“네가 앞장서거라. 나는 네 옷자락을 붙잡으마.”“……”‘참, 한 손가락도 까딱 안 하려 드는군.’예전 소환과 함께 위기에 빠졌을 때는 달랐다.그저 조금 투정만 부리면, 소환은 그녀를 안고서 척척 길을 찾아주곤 했다.‘하… 또 소환이 그리운 하루네.’완부옥은 ‘짐짝’ 하나를 등에 지고서 벽을 더듬으며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한 걸음마다 온몸이 긴장되었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적들의 기척에 늘 귀를 곤두세워야 했다.지나치게 어두운 환경에 눈이 점점 아파왔고, 이윽고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걸음을 멈췄다.서왕은 그녀가 지친 줄 알고 말했다.“내가 앞장서마. 넌 내 옷자락을 붙잡거라.”완부옥은 비웃듯 말했다.“이제야 남자였던 게 기억난 겁니까?”“……”그녀의 말은 확실히 가시가 있었다.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모든 위기는 결국 그녀가 그를 구하려다 엮인 결과였다.명색만 아내인 그녀가 이토록 의리를 지닌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그리하여 둘은 번갈아가며 벽을 더듬었고,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게 돌고 돌다가 결국, 처음 그 시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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