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장미는 궁을 떠난 후, 잠시 남편 송려와 함께 봉부에 머무르게 되었다.과거 자신이 납치당했던 일을 이미 알게 된 그녀는 더 이상 그 기억에 사로잡혀 흔들리지 않았다.송려 역시 그런 그녀를 굳이 말리지 않았다.그러나 봉 부인은 이미 이혼을 한 몸이었기에 봉부로 들어가기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봉 부인은 혼자 참장부에 머물며 아들 봉안진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그녀는 아들을 타이르며, 외실 때문에 정실 아내와 딸들에게 소홀히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할 작정이었다.하지만 봉 부인의 잔소리는 봉안진에게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케 했다.“어머니!”그는 결국 꾹꾹 눌러 담았던 말을 꺼냈다.“저는 그저 아들 하나 갖고 싶을 뿐입니다. 봉가의 혈통을 잇기 위해서요.”봉 부인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들이 필요하면 며늘 아가가 낳으면 되지. 왜 굳이 바깥여자를 들여야 하느냐?”그건 분명, 방탕함을 정당화하는 핑계에 불과했다.봉안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그동안 아이를 갖기 위해 안 해본 게 없습니다. 의원을 불러 진맥도 받고, 약도 수없이 지어먹였죠. 저 역시 같이 약을 마셨습니다.”“하지만 수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제가 밖의 여자를 들일 이유가 있었겠습니까?”“저도 외실을 신뢰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이는 제 피붙이입니다.”“그 여자를 절대 봉부로 들이지 않을 것이며, 부인의 지위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봉 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들 말도 전혀 터무니없는 건 아니었다.“허나 그 여자가 보통 사람은 아니다. 얼마 전 저택에 들어와 소란도 일으키지 않았느냐?”“그건 어쩔 셈이냐?”그 말을 들은 봉안진은 고개를 저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이미 그 여자에게 분명히 경고했습니다.”“아마도 제가 과거에 조금 관대하게 대해준 것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전 그저 아이만 원했을 뿐입니다.”“그럼 그 말을 며
봉구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궁중에 떠도는 그런 소문들은 그녀 역시 한두 번쯤은 들은 적 있었다.그러나 단 한 번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황제 소욱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매일같이 어전에서 산더미 같은 정무를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는 그가, 그런 시시한 헛소문에 신경을 쓸 리 없었다.“녕비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거야. 그리고 너도 너무 마음쓰지 말고.”봉구안이 입을 열었다.“하지만…” 봉장미는 말을 맺지 못하고 망설였다.봉구안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부드럽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장미야,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너야.”“너는 이제 그날의 진상을 알게 됐고, 나와 어머니, 그리고 궁 밖의 송려까지… 우리 모두는 너를 걱정하며 네 곁에 있어주고 싶어 해.”“네가 궁을 떠나 송려와 함께할 수 있다면 당연히 기쁜 일이야. 하지만 한 가지만 묻자. 넌 지금 송려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니?”봉장미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러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서방님께서는 그 일로 저를 단 한 번도 혐오하신 적이 없어요.”“지금도 여전히 치료해주시고, 제가 회복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계세요.”“그런 분에게 제가 더는 실망을 안겨드릴 수 없잖아요.”“이렇게 진실을 마주하려 애쓰는 것도, 과거의 응어리를 풀고 잡념 없이 그분과 함께하고 싶어서예요.”“언니, 전 준비됐어요.”봉구안은 그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하지만 혹시라도 모를 일에 대비해서, 몇 사람을 배치해 은밀히 너를 지킬 거야.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도록.”봉 부인도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게 제일 낫겠구나. 사람 많으면 서로 도울 수도 있고.”봉장미는 망설임 없이 언니를 끌어안았다.“언니, 항상 절 지켜줘서 고마워요.”봉구안은 그녀의 등을 다정히 두드리며 웃었다.“바보 같은 소리. 넌 내 친동생이잖니.”봉장미가 툭 던지듯 말했다.“오라버니는 절대 이렇게 안 해줄 거예요. 그 사람은 머릿속에 온통 그
봉가의 쌍둥이 자매, 봉구안과 봉장미.같은 날 태어났지만 성격은 정반대였다.녕비는 눈앞의 봉장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궁중에 부인과 폐하를 두고 온갖 소문이 돌고 있어요. 부인은 정말 아무 말도 못 들었나요?”봉장미는 조금 놀란 듯 되물었다.“저와 폐하가요?”그녀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대부분 영화궁 안에 머물며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고 있었고, 영화궁의 궁인들도 입이 무거운 자들이라 그녀 앞에서 쓸데없는 말은 삼가고 있었다.게다가 최근에는 며칠씩 궁 밖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니, 후궁의 소문 따위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녕비는 그녀가 이토록 순진하고 무지한 것을 보자, 오히려 모두 말해주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설명했다.모든 이야기를 들은 뒤, 봉장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분노 때문이었다.“네…?”“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전 이미 혼인한 몸이에요. 궁에 머무는 건 그저 언니가 보고 싶고, 두 황자마마를 자주 뵙고 싶었을 뿐인데…”녕비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저에게 해명할 필요는 없어요.”“사람들 입이 무섭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본궁이 드릴 수 있는 충언은 하나예요. 가급적 빨리 궁 밖으로 나가 거처를 마련하세요.”“혹시 마땅한 거처가 없다면, 본궁이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그 말은 마치,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자격이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봉장미는 단호하게 응수했다.“거처는 이미 있습니다.”“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폐하와 언니에게 누를 끼친 건 사실이었다.그래서 오히려 다른 누군가가 뭐라 하지 않아도 그녀 스스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녕비가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마시기 위해 태후를 뵈러 갔던 봉 부인도 영화궁으로 돌아왔다.딸의 낯빛이 좋지 않은 것을 본 봉 부인은 곧장 다가왔다.“장미야, 무슨 일이 있었느냐?”이 딸은 참으로 속을
황궁소욱은 영화궁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첫마디부터 궁인들에게 물었다.“황후는 돌아왔느냐?”“폐하, 마마께서는 안에서 두 황자마마를 돌보고 계십니다.”예상치 못한 대답에 기대조차 없던 소욱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내전으로 들어섰다.“구안아, 너는…”뜻밖에도 봉구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봉장미도 함께 있었다.그 순간 소욱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방금 전의 따스함은 사라지고, 다시 제왕의 냉엄한 얼굴로 돌아갔다.봉장미는 곧장 일어나 공손히 인사했다.“폐하께 문안 올립니다.”그녀는 한때 황제의 자리에 있었기에 천자 앞이라고 해도 전처럼 두려움에 떨지는 않았지만, 천자의 위엄 앞에선 여전히 조심스러웠다.봉장미가 봉구안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언니, 그럼 전 가서 준비하고 있을게요.”봉구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장미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그녀가 나가자마자 소욱은 참지 못하고 봉구안을 끌어안았다.이마에, 뺨에 그리고 입술에 연이어 입맞춤을 했다.“오늘도 또 밖으로 나가는 거야?”“며칠 내내 네 동생이랑만 시간을 보내는구나. 정작 나와 아이들은 제대로 네 얼굴도 못 본 것 같은데…”“구안아, 너무 우리들을 편애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편애가 심하다.”봉구안은 때때로 봉장미와 함께 외박까지 하며 궁 밖에 나가곤 했다.마치 어젯밤처럼 말이다.소욱은 봉장미에게 질투를 느끼기보다, 봉구안이 이토록 몸을 아끼지 않는 게 안쓰러웠다.봉구안은 조용히 그를 안아주었다.“저도 폐하와 황자들이 그리웠답니다.”“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며칠 전까진 서당 일로 바빴고요. 장미가 드물게 무언가 하고 싶다고 나섰는데, 제가 도와야죠.”“그 애가 뭘 하고 싶다고 했느냐?”“서당 선생님을 하겠대요.”소욱이 다시 물었다.“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너도 굳이 매일 따라다닐 필요는 없지 않느냐?”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인하지 않았다.“제 생각보다 장미는 훨씬 더 강해진 것 같아요.”며칠 전까지만 해도
참장부봉안진은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의 무능을 탓하고 있었다.봉장미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은 그의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고, 술 외에는 그 감정을 달랠 길이 없었다.그때, 주씨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술잔을 낚아챘다.“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한때는 부부였던 두 사람.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그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었다.봉안진의 지친 눈빛과 어깨 너머로 흐르는 깊은 근심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봉안진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껴안았다.그는 천천히 머리를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었다.그 모습은 마치 위로가 필요한 아이처럼 연약하고 슬퍼 보였다.“내가… 큰 잘못을 했소…”그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다.주씨는 순간 얼어붙었지만, 곧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두드렸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가 잠에 빠질 때까지 곁에 앉아 함께해주었다.궁중봉구안은 봉장미에게 과거의 진실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그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기억인지 알기에, 봉 부인은 듣기조차 힘들어 먼저 자리를 피했다.봉장미가 너무 큰 충격을 받을까 염려한 봉구안은 그녀의 얼굴과 호흡, 손끝의 떨림까지 살피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혹시나 공황 장애와 같은 증세가 나타날까, 매 순간 숨을 죽이며 말끝을 고르고 또 골랐다.그러나 놀랍게도 봉장미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단했다.자신이 산적들에게 끌려가 정말로 정절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봉장미는 그저 쓴웃음을 지었을 뿐이다.“그래, 그랬군요… 진짜였엉…”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언니를 바라봤다.“언니, 저 그 꿈을 계속 꿨어요.”“매번 악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전부… 진짜였던 거군요.”봉구안은 말없이 그녀를 껴안았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우리가 너를 지켜주지 못한 거고… 내가 너를 그런 일에 휘말리게 한 거야.”충격이 가신 후, 봉장미는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그녀가 조용히 팔을 들어 봉구안의 등을 어루만졌다.“괜찮아요, 언니.”“저는… 그때 죽지
봉장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봉구안과 봉안진 모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봉구안은 망설임 없이 동생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장미, 너…”하지만 봉장미는 곧장 봉안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잘랐다.“오라버니, 방금 하신 말씀이 정말이에요? 제가 잃어버린 기억이… 산적들과 관련된 거라는 게 진짜예요?”봉안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입술이 떨렸고,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나… 나는…” 그는 본능적으로 봉구안을 바라봤다.그녀가 어찌됐든 몇 마디로 얼버무려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만약 봉장미가 그 일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분명 병이 도질 것이다.그렇게 되면… 그 모든 잘못은 자기 몫이 될 터였다.봉장미는 고개를 돌려 언니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엔 결의가 서려 있었다.“언니, 정말인가요?”“진실을 듣고 싶어요.”“언니 입으로 말해주세요… 제가 정말…”그녀의 감정은 이미 통제 불가능한 지경이었다.떨리는 손으로 봉구안의 팔을 붙잡고는 온몸을 흔들며 애원하듯 말했다.마치 어떤 끔찍한 기억이 다시 머릿속 깊은 곳에서 기어나오는 것만 같았다.봉구안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를 끌어안았다.눈빛은 한없이 온화하면서도 단단했다.“무서워하지 마.”“장미야, 네가 진실을 듣고 싶다면 내가 말해줄게. 지금은 우리 모두 네 곁에 있어. 어떤 누구도 널 해칠 수 없어.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그러나 봉장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이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 반응하는 공포였다.그녀는 확신했다. 오라버니가 실수한 게 아니라, 자신이 정말 산적들에게 끌려간 적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신이 황궁에 시집갈 수 없게 된 것일까.단순히 명예가 손상된 것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해를 입었고, 언니는 그 모든 진실을 대신 감당한 채 출가한 것이었다.그녀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더니, 봉구안을 무의식적으로 밀쳐냈다.그리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듯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장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