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욱의 분노는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후궁의 빈들은 모두 그의 은총을 갈망하는데, 오직 그녀, 봉장미만은 원하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그의 앞에서 자존심을 세웠다.만약 그녀가 원치 않았다면, 어째서 어젯밤 그리 먼저 그를 유혹했단 말인가? 일이 끝나고 나서 이렇게 나오니, 마치 그가 억지로 강요한 듯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그가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봉구안은 진지하게 답했다.“폐하, 손해를 보신 것은 폐하이시옵니다.”소욱의 눈에는 여전히 냉기가 서려 있었지만, 그의 말투는 조금 누그러졌다.“내가 손해를 본 줄 안다면, 황후는 응당 잘 보상해야 할 것이 아닌가.”“만약 정말로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모두가 기뻐할 일이다.”“다시 이 ‘피임약’ 따위를 손대려 한다면, 너의 충성스러운 시녀를 죽일 것이다.”그는 어젯밤 그녀가 취한 모습을 보고 끝까지 하진 않았다는 걸 말할 생각이 없었다.드물게 군자의 도리를 지켰다고나 할까.지금 생각해보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차라리 어젯밤 정말로 그녀를 취했더라면 이런 손해는 없었을 텐데.봉구안은 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비록 피임약을 쓰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결코 황제의 자식을 낳지 않을 것이었다.……전각 밖.최 상궁은 죄인을 감시하듯 연상을 노려보고 있었다.그녀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네 이 악독한 것! 황후마마께서 너를 평소에 아끼셨건만, 너는 어떻게 마마를 해칠 수 있단 말이냐! 기다려라, 곧 폐하께서 너를 산산조각 낼 것이다!”연상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자신의 처지보다 더 염려되는 것은 봉구안의 안전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나왔다.연상은 급히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최 상궁은 황제가 벌을 내릴 것을 기대하며 입꼬리를 올렸다.그러나 황제는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렸다.“어?”“폐하!” 최 상궁이 급히 뒤따르며 외쳤다.소욱은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최 상궁은
최 상궁은 참지 못한 호기심에 황후의 서신을 몰래 열어 보았다. 이상하게도, 안에는 평범한 안부 인사만이 적혀 있었다. 이런 평범한 내용의 편지를 굳이 몰래 궁 밖으로 보낼 필요가 있을까? 너무 번거로운 일처럼 보였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최 상궁은 혹시 황후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믿을 만한 인물인지 보려는 것이라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지시대로 편지를 동문으로 몰래 보냈다. 동문에는 맞이할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백이 그 편지를 받았다.겉보기에는 평범한 편지였으나, 사실 이 편지는 암호로 작성되어 있었다. 소장군이 자주 사용하는 암호 방식인 ‘삼사일오’를 사용하여, 각 문장에서 세 번째, 네 번째, 첫 번째, 다섯 번째 글자를 뽑아 연결하면 진짜 전하고자 하는 뜻이 나왔다.[교먹에게 조력자가 있음. 조사할 것]오백은 편지를 읽고 곧바로 불살랐다.……이 시각, 영화궁 내에서는 새해 첫날을 맞아 후궁들이 황후에게 새해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가빈은 입이 가벼운지 혼자 계속 떠들었고, 그녀로 인해 다른 빈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실 후궁들은 저마다 불편한 속마음을 숨긴 채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저 황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이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직접 하명했다.“새해가 시작되었으니 각 궁에서는 업무를 정리하시오. 모두 돌아가도록 하여라.”후궁들은 한마음으로 일어나 인사드리고 물러났다. 그러나 무리 중 유독 모용선만 자리에 남아 있었다.“황후마마, 어젯밤…” 모용선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연상에게로 돌렸다.봉구안은 눈짓으로 연상에게 먼저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연상이 자리를 비우자 모용선이 말을 이었다.“어젯밤 그 신비한 자를 잡으셨사옵니까?”부친의 약점을 누군가 잡고 있다는 생각에 밤새 한잠도 못 잤던 그녀였다.봉구안은 단호히 말했다.“그 자는 매우 신중하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소.”
태황태후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입궁한 지도 꽤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침소에 들지 않으면 되겠느냐?”태황태후는 이전에도 이를 추진하려 했으나, 그때 황제의 건강이 좋지 않아 미뤄졌을 뿐이었다.이제 황제가 다시 건강을 되찾았으니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게다가 황제는 원래부터 할머니인 태황태후를 극진히 공경해 왔다. 당초 황후도 성혼 후 여전히 처녀로 남아 있었는데, 태황태후가 단호히 명령을 내린 덕에 황제는 마침내 황후와 합방할 수 있었다. 모용선의 합방도 그녀로서는 자신이 있었다.모용선은 얼굴이 발그레해져 눈을 아래로 떨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마마의 뜻에 따르겠사옵니다.”그녀는 겉으로는 온화하고 순종적인 듯 보였으나, 눈빛 속에는 야망이 서려 있었다. 입궁하여 후궁이 되고 황자를 낳는 것, 그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다만 모친의 일로 인해 잠시 발이 묶였을 뿐이었다. 이제 황후가 먼저 기회를 잡았으니, 그 신비한 자와의 문제는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황후는 이미 그 신비한 자와 갈라섰고, 그녀 부친의 매관매직 증거 또한 불태워버렸으며, 황후는 모용선과 협력해 함께 그 자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그 신비한 자도, 황후도 그녀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만수궁이 이렇듯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자녕궁에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태후는 자신의 조카딸을 일러 당부했다.“남자는 한 번 맛보면 갈망이 생기기 마련이니라. 황 귀비가 유배를 간 후 황제가 다시 여자를 가까이하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지금 황후는 아이를 가졌으니 침소에 나서지 못할 것이다. 너는 자주 영화궁을 방문하여, 머지않아 기회를 잡고 성은을 입어라.”녕비는 이를 알아듣고, 약간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태후마마, 제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이런 때에 다른 이들이 기회를 노릴 테니, 제가 그런 것들을 절대 쉽게 두지는 않을 것이옵니다.”그녀는 곧 말투를 바꾸어 물었다.“하지만 태후마마, 정말 황후가 무사히
교먹은 계속 서 있다가, 봉구안의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으라는 소리에 순간 당황하였다. 봉구안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다.“무릎을 꿇으라 했거늘, 감히 서 있을 셈이냐? 너는 신하로서의 예의를 모른단 말이냐?”교먹은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그녀가 말재주가 뛰어나도, 황권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이전에 봉구안은 그녀를 몹시 아꼈다. 무릎 꿇게 한 적은커녕 오래 서 있게 하지도 않았었다.이 격차에 교먹은 큰 충격을 받아 여전히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봉구안이 명을 내리자, 황실의 호위 한 명이 들어왔다. 교먹은 이 모습을 보고 군영에서의 봉구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도 봉구안이 한마디만 외치면, 병사들이 즉각 명령을 받들곤 했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이었다. 장군으로서의 권력도 이렇듯 강했는데, 황후가 되니 더욱 그러했다.봉구안은 날카롭게 말했다.“맹교먹이 본궁에게 무례한 언행을 하였으니, 끌고 나가 한 시진 동안 무릎을 꿇게 하라.”호위들은 명을 받자마자 망설임 없이 교먹을 내전 밖으로 끌고 나갔다. 교먹은 소리쳤다.“황후마마, 저는 남제의 공신입니다! 저에게 이러실 수는 없사옵니다!”봉구안은 다시 찻잔을 들며, 뚜껑으로 찻잎을 가볍게 저어내리며 무심한 듯 명령했다.“시끄럽구나. 저 자의 입을 막아라.”공신이라니? 먼 이야기까지 들 필요도 없었다. 양 나라와의 전투에서 그녀는 두 번이나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갔었다. 당시 그녀는 수도 없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었다. 당시 배에 난 그 칼자국은 양 나라의 황제가 직접 찌른 것으로, 아무리 봉 부인이 준 연고를 발랐다 한들 완전히 가릴 수 없었다. 교먹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무슨 공신이란 말인가!……전각 밖.교먹은 입이 막힌 채 어깨를 붙들려 강제로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이제 널리 알려진 남제의 첫 여자 장군이자, 지금의 감찰위 맹 대인이었기에 궁중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이었다. 지나가던 궁녀들은 이 모습을 보
교먹은 그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 속에서 반 시진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러다 황제가 오자마자, 그녀는 급히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무력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뜻밖에도 황제는 그녀를 쳐다 보지도 않고 곧장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교먹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어붙은 손을 꽉 쥐었다. 봉구안이 황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아마도 봉구안을 무척 좋아하는 듯했다. 다만, 아무리 여인을 아낀다 해도, 그녀가 조정을 간섭하거나, 전장에서 공을 세운 장군을 이처럼 함부로 대하는 것을 용납하진 않으리라!전각 안에서, 소욱은 들어오자마자 모든 사람을 물러가게 했다. 최 상궁은 마지막으로 황후를 보며 ‘결국 큰일이 났구나’ 하는 눈빛으로 무척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봉구안은 일어나 절을 올렸으나, 얼굴에는 전혀 미안함이나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소욱은 엄중한 표정으로 그녀를 꾸짖었다.“어찌하여 맹교먹에게 무릎을 꿇게 했는가?”그는 그녀가 훌륭한 장수를 모욕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지만, 먼저 사정을 물어보려 했다. 그가 그녀를 잘 아는 바, 아무런 이유 없이 아랫사람에게 벌을 내릴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봉구안은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그녀가 불경한 언사를 하였기에, 제가 벌을 내렸사옵니다.”소욱은 눈살을 찌푸렸다.“어떻게 불경했는지 분명히 말해보거라.”“그녀는 제게 폐하께 잘 말씀드려, 다시 북방으로 돌아가 대장군 자리를 맡게 해달라 간청했사옵니다.”“황성에 남아 감찰위로 있는 것이 싫다 하였사옵니다.” 봉구안은 거짓말을 태연하게 지어냈다. 듣는 이가 다른 이였다면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욱은 본래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그는 봉구안을 날카롭게 살폈다.“맹 대인이 과거 그대의 행적을 내게 누설했기에, 오늘 마침 구실을 찾아 맹 대인을 겨울바람 속에 무릎 꿇린 것이 아니더냐.”“만일 그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둔다면, 남제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
교먹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소욱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의 검은 눈썹이 단단히 좁혀지고, 목소리 속에 억눌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는 봉구안을 꾸짖었다.“황후, 참 ‘잘’했습니다!”그는 즉시 교먹을 편전으로 옮기고, 어의를 불러 진찰을 명했다. 동시에 영화궁 전각의 모두에게 오늘의 일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말라고 엄중히 명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교먹은 따뜻한 편전에서 눈을 떴다. 전각 안에는 궁녀들이 그녀를 시중들고 있었다.“맹 대인, 좀 괜찮으십니까?” 궁녀 한 명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사실 교먹은 기절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인내심이 바닥나서 속임수를 쓴 것뿐이었다. 지금 그녀는 침상에 누워 힘없이 보이려 애쓰며 말했다.“일… 일으켜주게. 아직 한 시진을 다 채우지 못했네…”쿵!그녀는 마치 다리가 얼어붙기라도 한 듯, 일어서려다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궁녀는 깜짝 놀라 그녀를 급히 부축했다.“맹 대인,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명하셨으니 오늘은 더 이상 무릎을 꿇지 않으셔도 되옵니다…”교먹은 고개를 저으며, 침상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려 애썼다.“안 돼. 황후께서 무릎 꿇으라 하셨으니 내가 어찌 명을 어기겠는가?”그녀는 헛된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에게 봉구안이 자신과 같은 공신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반드시 알려야 했다!궁녀는 그녀를 겨우 부축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당황한 채로 말했다.“맹 대인, 정말로 더 이상 꿇으실 필요 없사옵니다! 폐하께서 대인께서 하는 일에는 마무리가 깔끔하신 걸 잘 아시기에 특별히 당부하셨사옵니다.”“만약 대인께서 다시 꿇고 싶으시다면, 대신 남제의 법률을 백 번 필사하여 황후마마께 바치면 된다고 하셨사옵니다.”“…”황제의 의도가 무엇이란 말인가!진심으로 그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그렇다면, 황후마마는…”황후는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단 말인가?직접 물을 수 없어 그녀는 돌려서 물어보았다.“폐하와 황후마마는 본디 매우 사이가
소욱은 그 향낭을 손에 쥐고서 미묘한 기색을 느꼈다. 그는 봉구안을 바라보며 그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외부의 사람들에게 명을 내렸다.“어의를 부르거라!”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의 태진을 담당하던 어의가 들어왔다. 그는 황후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어의는 향낭을 코에 대고 한 번 냄새를 맡자, 곧 결론을 내렸다.“폐하께 아뢰옵니다. 이는 ‘영릉향’으로, 피를 순환시키고 어혈을 풀어주는 효능이 있사옵니다.”이 시점까지는 그저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곧 어의의 말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이어졌다.“그러나, 이 물건은 사향과 마찬가지로 임산부가 장기간 접촉하면 태아에게 영향을 미쳐 유산에 이르게 하거나 사태를 일으킬 위험이 있사옵니다!”“임산부뿐만 아니라, 일반 여인들도 이 향낭을 지니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봉구안은 소매 속에서 손을 살짝 쥐어 보았다. 결국 들키고 말았구나…소욱의 눈빛은 차갑게 변하며 한순간에 서릿발 같은 빛이 사라져, 오히려 얼음 같은 싸늘함만이 남았다. 그 기운은 사람을 떨게 만들 정도였다.그러나 그의 감정은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물리친 뒤, 황제로서의 권위와 평정을 간신히 지키며 봉구안에게 차분히 물었다.“이 향낭, 그대 것이냐, 아니면 누군가가 준 것이냐?”두 경우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봉구안은 그 자리에서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신첩의 것이옵니다.”황제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그 속엔 차가운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네 몸을 해칠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이 향낭을 지니고 있었다니…”“황후, 내가 그대를 칭찬해야 할지, 어리석다 꾸짖어야 할지 모르겠구나!”쾅…소욱의 내공이 터져 나오자, 벽 옆의 화병이 기류에 깨지며 청명한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땅에 흩어졌다. 그의 마음 또한 화병과 같았다. 흐트러져,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그는 황후의 고요한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주먹을 베개에 내리치는 것처럼 그의 모든 격
교먹은 황제가 영화궁을 떠나는 것을 보자, 즉시 뒤따라갔다. 그녀는 감찰관의 직위를 가진 무관으로, 소환이 없이는 입궐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여성이었기에, 아무리 높은 관직에 있어도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논할 수 없었다.결국 황제를 직접 뵐 기회가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그녀는 어떤 사안을 고하려 했으나, 눈앞의 황제는 두 눈에 핏줄이 서고 무언가를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살기를 뿜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속에 순간적으로 떨림이 일었다. 황제는 평소에 그저 엄격하고 무뚝뚝한 인상만을 주었을 뿐, 지금처럼 두려움을 일으키는 모습은 아니었다.“무슨 일이냐.” 소욱의 기세는 마치 차가운 얼음 조각처럼, 주위의 온기를 모두 얼어붙게 만들었다.교먹은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고 손을 모아 절하며 말했다.“신이 한 가지 병기 설계도를 올리고자 하옵니다!”찬바람이 휘몰아쳐 그녀의 얼굴을 스칠 때, 소욱은 사사로운 일을 단념하고 임금으로서의 자리에 재빨리 복귀하였다. 그는 병기 설계도를 받아 들고 가볍게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는 순식간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고, 교먹을 향해 아낌없는 칭찬을 건넸다.“예전부터 들었노라. 그대의 재주가 남다르다 하더니, 여러 신형 병기를 창안하였구나.”“그대를 감찰관에 두기에는 그대의 재능을 묻어두는 셈이로구나.”교먹은 몸을 굽혀 절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으나, 그 눈 속에는 칭찬으로 인한 기쁨은 없었다.무엇보다 이 도면은 그녀가 그린 것이 아니라, 봉구안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이다.……영화궁.최상궁은 마치 먹잇감을 맡은 사냥개처럼 급히 안으로 들어가 봉구안에게 보고하였다.“마마, 그 맹 소장군이 아무리 여자라지만, 경계해야 할 자이옵니다.”“들으니, 폐하께서 영화궁을 떠나시자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고 들었사옵니다. 지금쯤 두 사람이 추운 정자에서 술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고 있을 것이옵니다.”“에구구... 마마께서 직접 보셨다면 마음이 상하셨겠지요. 그 맹 소장군은 분수도 모르고 남자 앞에서 술잔
"공자님,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다 됩니다!" 연상은 즐겁게 부산을 떨며, 자신의 이런 행동이 소탁에게는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곧, 음식들이 다 되었다. 연상은 미역국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소탁을 바라보았다. "소 공자님, 오래도록 장수하시길 기원합니다. 모용길처럼...""아, 이런! 제 입이 이렇게 험합니다. 모용길 같은 악인과 소 공자님은 전혀 다르시죠." 소탁은 국을 먹지 않고 연상에게 물었다."너는 행복하니?" 연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저야 당연히 행복하죠. 나쁜 사람들이 인과응보로 벌을 받지 않았습니까.""게다가 오늘 의원께서 말씀하시길, 공자님의 눈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하였어요.""전 공자님께서 곧 다시 빛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연상아, 너와 나는 이뤄질 수 없는 사이야."소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도 결국에는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연상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 "공자님, 저도 알고 있어요. 공자님은 황실의 귀한 분이시고, 저는..." "네 신분 때문이 아니야. 연상아, 난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다."이 말을 듣자마자 연상의 눈에 갑자기 한 줄기 빛이 어렸다. "단지 절 걱정하시는 것 뿐이지, 절 싫어하시는 건 아니군요?" 소탁의 목이 갑자기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일생은 큰 기복이 있었고, 혼자 살아가게 될 운명이었다. 한 번도 인연을 찾을 생각을 해본 적 없었고,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연상이란 아이는 그에게 있어 더 과분한 존재였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 시간 동안 그녀가 곁에 있어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사실이었다. "난 너에게 남녀 간의 사랑을 품고 있지 않아. 설령 내가 여자를 찾는다 해도, 그건 아내지 시녀가 아니야." 연상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이 크게 떠졌다. 시녀? 소탁은 선의로 그녀에게 일깨워주었다
완부옥은 예로부터 여자를 좋아했다. 남자를 대할 때조차도, 가볍게 희롱하거나 농을 던질 뿐이었다.그런 그녀 앞에 서왕이 호의를 드러내자,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게다가… 분명 그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던가.서왕은 그녀의 반응이 예상보다 격해 당황하며 서둘러 설명했다.“우리는 비슷한 처지가 아니더냐? 같이 사는 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지 않느냐.”“네가 떠나면, 난 또 다른 이와 혼인해야 할 텐데… 너처럼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여인은 없을 것이다.”“또다시 나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할 테니… 차라리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완부옥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 말씀이셨군요.”그가 정말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고 긴장했건만…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한편 모용길의 죄행이 세상에 밝혀지자, 남제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백성들 또한 믿기 어려워했다.“그 자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고? 분명 불로장생의 술법이 있었던 게지. 폐하께서 그걸 두려워해 제거한 거야.”“약쟁이 사건도 정말 복잡하군. 처음엔 모용욱이 범인이라더니… 이번엔 왜 모용길이 나와? 설마 이번에도 헛다리 짚은 건 아니겠지?”“뭐가 어쨌든 간에 약쟁이는 전부 모용가 짓이란 말이잖아. 그런 집안은 몰아내야지!”분노한 백성들은 결국 모용가로 몰려가 돌과 썩은 달걀을 던지며 고함쳤다.“남제에서 당장 꺼져라!”“모용가 놈들은 천벌 받아야 마땅해! 죄 없는 사람들 고통받게 했잖아!”며칠째 모용가는 백성들의 소란에 시달려, 누구 하나 문밖을 나서지 못했다.……성 외곽의 한 촌락.낡은 농가 안,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말했다.“들었어? 약쟁이 사건 피해자한텐 조정에서 보상금을 준다더라. 장순이네도 그랬잖아. 우리도 당장 관청 가자고, 장대복! 내 말 듣고 있는 거야?”장대복은 장순의 친삼촌이었다. 어린 조카를 생각하면 늘 미안함이 앞섰다.“형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 모자 둘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당신도 알잖아.”
소욱은 미소를 지었다.“부창부수라 하지 않느냐. 함께 손잡고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황부도 결국 한 여자의 지아비이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서왕은 한껏 조이던 가슴이 결국 힘없이 내려앉았다.그는 즉시 두 손을 모아 절하며 간언했다.“폐하, 그건 절대 안 됩니다!”“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주이십니다. 어찌 여인의 그늘 아래 계시겠습니까?”“이 일이 만에 하나라도 세상에 알려진다면, 조롱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평소 성정이 온화한 서왕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은근히 고집이 세지는 성격이었다.소욱은 목소리를 날카롭게 높였다.“그래서 말이지.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서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폐하도 이게 창피한 줄은 아시는구나…’“황후 마마께서는 폐하께서 황부가 되겠다는 걸 허락하셨습니까?”소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황후가 왜 반대하겠느냐? 설마 다른 사내를 맞이해야한단 말이냐?”서왕은 잠시 헷갈려 그 말에 말려들 뻔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황후마마께서도 이 일이 폐하께 불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신지 여쭈려는 것입니다.”소욱은 눈을 좁히며 말했다.“내 너를 형제로 생각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이미 내가 결정한 일이야. 누구도 바꿀 수 없어.”“너는 그저 국정을 맡아 잘 처리하거라. 내가 황후와 함께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그러자 서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하지만 폐하 신도 이번에는 휴가를 청하려 했습니다.”매번 국정을 떠맡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아무리 가까운 형제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겠는가.‘이 나라는 분명 소씨 가문의 일국이지 않는가.’ ‘잠깐… 순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서왕은 방금 스쳐간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감히 황제에게 이런 불만을 품다니. 마음으로도 짜증을 내다니, 감히 내가?’소욱은 인내심을 다잡으며 물었다.“휴가를 내겠다고? 무슨 연유냐?”서왕은 몇 초간 머뭇거리다, 정색하며 대답했다.“왕비와 함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소욱은
서왕의 심문이 시작되자, 손추의 수하였던 자객은 결국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그… 그 일은 저희가 꾸민 일입니다.”“모용길이 왕가의 피를 원했고, 손추가 직접 그 일을 맡았습니다.”“하지만 그분은 왕이셨고, 무공도 출중하셨습니다. 손추는 선제를 이간질해 부친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결국 모반의 증거를 조작했습니다.”그 뒤의 이야기는 서왕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조정에 충성을 다했다.군주의 명이 떨어지면, 신하는 죽는 수밖에 없었다.유배길에 올라서도 그의 아버지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그는 끝까지 선제가 자신의 결백을 밝혀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약쟁이단이 아버지의 목숨을 노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진실이 드러났을 때, 서왕은 마치 천근 무게의 짐을 내려놓은 듯 가슴이 후련해졌다.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쓰라림으로 번져왔다.그가 정원으로 돌아오자, 멀리 나무 아래서 완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왕은 한 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와락 안아 올렸다.“이번 일을 해결해줘서… 정말 고맙다!”“드디어 모두가 알게 되었어. 부친께서 얼마나 억울하게 누명을 썼는지…”“선제도 진범을 찾고자 했었지만, 결국 오늘에서야 제대로 밝혀졌어. 정말, 정말 고맙다…”서왕은 거듭 고마움을 표현했고, 완부옥은 조금은 지겨워하며 그를 말렸다.무엇보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직접 껴안을 줄은 몰랐다.조금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완부옥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됐습니다. 됐어요. 그렇게 큰일도 아닌걸요.”“정말 제게 보답하고 싶다면, 폐하께 소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여쭤봐 주세요.”서왕은 그녀를 놓고,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아직도 포기 못 한 것이냐?!”완부옥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게 아닙니다.”“그저 소환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정인이 아니더
세상일이란 참 아이러니했다. 열무신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가 천옥에 도착했을 때, 모용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모용길의 시신을 바라보며 열무신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낮은 포효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재앙은 천 년을 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모용길 같은 자는 200살이 넘게 살다가 죽었는데, 맹성주 같은 이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생각하니 열무신의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열무신은 천옥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기절해버렸다.황궁. 봉구안은 임시로 자진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임 중이었고,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회임이 실감 났다.정말로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소욱이 정해준 태의는 매일 그녀에게 와서 맥을 짚었다. 최근 그녀의 태상은 안정되어, 더 이상 안태약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저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아이의 일에 대해서, 봉구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사건도 이미 해결되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 현재 유일하게 장미에 대해서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장미의 옛 병이 재발할까 걱정되었다.그것이 만약 재발한다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을 터였다.봉구안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도착했다. 소욱은 약쟁이 사건의 최신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무신이 붙잡은 그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구나. 이미 200년 전에 태조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엿다. 모든 것이 모용길의 환상이었던 거야.”“짐은 이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이다. 모용길이 남긴 큰 돈은 모두 약쟁이 매매로 얻은 것이야. 짐은 이 돈을 피해자들과 그 친척들을 위로하는 데 쓸 것이다.”“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그는 걱정이 가득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이 조치는 백성
마지막으로 태조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석에 누워 숨이 끊어질 듯했다. [모용길... 내 아우야, 너는 내 마음을 알지. 짐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다. 새 정치를 세우지 못했고, 태자는 아직 어리지. 난 단지 하늘이 인색해서 짐에게 몇 년을 더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단 일 년이라도 짐이 일 년만 더 산다 해도 좋을 텐데... 남쪽의 수해, 북쪽의 기근, 남제는 사방에서 적에 둘러싸여 있고, 북연은 우리를 업신여기며, 내부에는 반적이 있는데... 어찌할까, 염라대왕이 목숨을 거두어 가니, 짐은...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구나. 아우야, 나라의 일을 모두 네 손에 맡기노니, 너는 태자를 보필하라. 너는 그의 고모부이자, 또한 그의 상부이니. 아우야, 짐은 오직 너만 믿는다.]기억 속의 태조가 눈앞의 그와 겹쳐졌다. 모용길은 낮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그의 눈에 태조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형님! 형님께서 원하던 것을 제가 마침내 이루어냈습니다! 형님께서는 불로장생할 것이고, 이 남제는 반드시 형님의 통치 아래 번영하며, 장차 천하를 통일하여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당초 남제가 새로 세워졌을 때 태조는 약속대로 그에게 강산의 절반을 주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태조의 뜻이 천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조와 계속해서 사방을 정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태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그는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모용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눈물로 가득 찬 시선 속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팔을 뻗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여인은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인, 남은 길은 제가 당신과 함께 걸을게요." 모용길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함께..."
열무신은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가 아니었다면, 또 누군가 새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그는 사로잡은 자객들을 직접 데리고 돌아와 천옥에 넘긴 뒤, 단 한숨도 쉬지 않고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자객들은 처음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모용길이 이미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희망도 이미 무너진 셈이었다.이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저희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폐태자를 노린 건 그 분의 ‘혈’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태조 황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불로장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백골이었습니다. 이백 년 전, 모용길이 시신을 도굴해갔을 때부터 이미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건, 망상이었어요!”“애초에 죽은 자였다고요!”그들이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말투에는 모용길을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쓸모없는 일에 목숨을 건 그를 그들은 미련한 바보로 여겼다.같이 심문을 진행하던 관리가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태조 황제께서 살아난 적이 없다는 걸 말이다.”“모용길이 그렇게까지 집착한 이유가 뭐였지?”자객들 중 한 명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모용길이 약쟁이를 만든 건, 그들로 실험해 불로장생의 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을 제조한 의원들은 손수 기록을 남겼고, 그 손책들엔 분명히 쓰여 있었죠. 이백 년 동안 그들이 상대한 건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시체’였다고요.”“아무리 약을 먹여도 살아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입니다.”다른 자객 하나는 공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모용길은… 이미 오래전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마치… 마치 그 자리에 태조 황제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또 다른 자객이 덧붙였다.“그 자는 단지 태조 황제를 살리려 한 게 아닙니다. 자신도 불로장생 하고 싶었던 거에요.”“그리고 그게… 그 자는 정말로 성공했
태황태후는 직접 선조를 만나기 위해 천옥으로 향하려 했다.하지만 황제의 명이 내려져 있었다.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모용길을 접견할 수 없었다.하는 수 없이, 태황태후는 궁으로 전갈을 보냈다.하지만 설령 황제가 허락하더라도 모용길이 누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는 오직 태조는 아직 살릴 수 있다는 집념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런 그가 천옥에 갇힌 지금, 마음은 타들어가듯 초조했다.“그 어린 황제놈은 어딨느냐! 어서 나를 뵈러 오라 하지 못할까!”모용길에게 후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는 생각했다.이 나라 남제는, 태조와 자신이 함께 세운 나라였다.그런 자신을 막고 있는 소욱 따위가 어찌 감히 군림한단 말인가.천옥에 갇힌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쳤다.“태조를 살려야 한다! 어서 황제를 데려와라!”하지만 그는 몰랐다.그의 그 모든 고함과 분노는 소욱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그를 흔들기 위한 계략이었단 사실을 말이다.그리고 다섯째 날.천옥의 간수가 냉정한 얼굴로 명을 전했다.“폐하의 어명이십니다.”“모든 죄를 자백하고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죽을 때까지 말입니다.”모용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허튼소리 마라! 그 어린놈이 과연 알기나 한단 말이냐, 내가 이 모든 짓을 왜 해왔는지를 말이다!”간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나으리,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자백했다고 당장 목을 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태조께서 하사하신 면사금패는 아직도 가지고 계시잖아요?”그 말에 모용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그렇다.면사금패만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황제 따위가 그를 처형할 권한은 없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조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결심이 선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두 시진 후.모용길이 쓴 자백서가 궁으로 들여졌다.그 문서는 곧장 어전으로 올라갔다.문서를 넘겨받은 소욱은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길수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