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왕은 홧김에 새장을 바닥에 패대기쳤다.안에 있던 새가 날개를 펄럭이며 밖으로 날아가다가 벽에 부딪혀 그대로 추락했다.진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새를 짓밟고는 말했다.“죽화총이라면 소욱이 그리도 아끼던 물건 아니냐. 그게 적국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려고 옆사람은 만지게도 못한다더니, 황후가 왜 그걸 갖고 있지?”“서왕과 군기감이 황제의 명을 어겼나 보군! 여봐라! 서왕부로 간다!”서왕부.진왕이 찾아와서 소란을 부릴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서왕은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죽화총이요? 저도 모르는 일을 진왕 전하께선 어찌 아셨을까요?”서왕은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진왕에게 물었고 진왕은 홧김에 책상을 쾅쾅 두드렸다.“황후에게 죽화총을 줘서 보내다니! 그러다 적국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네가 질 것이냐! 당장 죽화총을 되찾아와야 한다!”서왕은 담담히 차를 마시며 답했다.“알겠습니다. 이 일은 제가 책임지고 철저히 조사하지요. 만약에 사실이라면 죽화총은 되찾아와야 합니다.”진왕은 꾸물거리는 서왕의 태도를 보며 조바심이 났다.“당장 사람을 파견해야 한다!”서왕이 유유히 물었다.“지금이요? 때가 너무 늦었지 않습니까. 성문도 닫혔을 텐데...”서왕이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인식한 진왕은 홧김에 책상을 엎어버리고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말거라. 내가 널 대신해 죽화총을 되찾아오겠다.”떠나는 진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서왕의 두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시위 유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전하, 진왕은 대놓고 황후마마를 치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서왕이 그에게 되물었다.“넌 황후 일행이 어디까지 도착했는지 알고 있느냐?”순간 유화는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식량 운반대가 순조롭게 남부에 도착하게 하기 위해 그는 며칠 전, 황후의 행적을 추적한 적 있었다.하지만 보낸 수하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황후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서왕은 침착하게 찻잔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눈앞의 사람을 바라본 소욱의 표정은 예전의 냉철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칠흑같이 검은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지고 저도 모르게 입술이 떨렸다.“황후! 네가 어찌…”경악한 건 진한길도 마찬가지였다.황후가 왜 이런 곳에 나타난 것인가!눈앞에 무언가 그림자가 스치고 가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황후의 앞으로 달려간 황제가 보는 앞에서 황후를 품에 안았다.그 모습을 본 진한길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소욱은 그녀의 온기를 느끼려 더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이 전쟁은 그가 치렀던 중에 가장 승부가 묘연한 전쟁이었다.북연의 태자는 병법대로 싸우는 게 아닌 잔인하고 음험한 수단만 취했다.봉구안이 그를 밀치자 그가 말했다.“조금만 안고 있게 해주렴. 너무… 춥구나.”때는 어느덧 9월, 황성은 날씨가 싸늘한 시간이지만 남부는 전혀 춥지 않았다.봉구안은 그를 밀치며 말했다.“일단 식사부터 하세요.”그는 괜찮을지 몰라도 그녀는 배가 고팠다.어제 밤새 수많은 적군을 처리하고 겨우 운수통로를 다시 장악한 그녀였다.오늘 낮에는 식량을 운반하고 오느라 한시도 쉬지 못했다.소욱은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채고 버럭 화를 냈다.“어찌하여 너에게 식량 운수 일을 맡긴 것이냐!”남제에 이리도 사람이 없단 말인가!일국의 황후를 전장에 내몰다니!봉구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말했다.“상황이 시급하여 어쩔 수 없었습니다.”소욱은 참지 못하고 다시 그녀를 안았다.이때, 덤벙대는 장수 한 명이 무턱대고 안으로 들어왔다.“폐하! 먹을 게 생겼습니다! 조정의 식량이 도착…”하지만 말을 끝맺기도 전에 황제의 싸늘한 시선이 날아왔다.다시 보니 황제와 황후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장수는 다급히 시선을 돌리며 짐짓 모르는 척 중얼거렸다.“폐하는 어디 계시지? 내가 막사를 잘못 찾았나? 주변이 어두워서 보이지를 않네.”소욱은 봉구안을 껴안은 그대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넌 짐이 죽는 게 싫었던 것이다.”봉구안은 다시 그를 밀치고는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남제와 북연 양군이 대립하고 있는 사이에는 광활한 죽음의 계곡이 있었다.지세가 준엄하여 수풀도 자라지 않아 죽음의 계곡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결국 어느 한쪽이 계곡을 건너기만 한다면 승리할 수 있는 구도였다.남제는 방어를 위주로 하고 북연은 인해전술을 썼다.지금 형세로 보면 북연이 약간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봉구안과 소욱은 몸을 숨기고 죽음의 계곡으로 다가가는 북연군을 바라보고 있었다.계곡의 바람은 뜨거운 열풍을 지니고 얼굴을 간지럽혔다. 봉구안은 북연군 깃발을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적어도 한 달을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소욱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지?”봉구안이 말했다.“식량을 운반하기 전에 북연에 사람을 보냈었습니다. 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북연 태자에게 있습니다.”“그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북연 황제뿐이지요.”“북연 황제가 태자를 다시 불러들이길 바라는 것이냐?”소욱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북연 황제는 오랜 지병으로 앓아 누웠고 이미 목숨이 경각을 다투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태자도 30만이나 되는 대군을 데리고 이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을 테지.”봉구안은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병세는 북연 태자가 대외적으로 말한 핑계일 겁니다. 북연 태자는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동궁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대권을 장악한 것부터 이상합니다.”소욱은 뭔가 떠오른 듯, 동공이 확 흔들렸다.“태자가 친부를 시해하였다고 생각하느냐?”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예.”소욱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고 흐뭇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전쟁 방면에서 짐은 너를 따라갈 수가 없구나.”봉구안은 멀리 보이는 횃불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폐하, 북연의 애가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소욱이 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소장군은 적군을 흔들 수 있는 수단을 잘 알고 있군.”반 시진 후.남제의 대영에 북연의 애가가 울려퍼졌다.그 노래는 제사를 지낼 때 부르는 노래로 북연 사람이라면 다들
봉구안은 벌떡 몸을 일으키고 경계 어린 표정으로 소욱을 바라봤다.소욱은 전혀 잠기가 없는 얼굴로 담담히 그녀에게 물었다.“더 자지 않고 왜 깼느냐?”봉구안은 한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왜 아직도 안 주무시고 계셨습니까?”“내일의 역공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속으로 투덜거렸다.‘이런 자세로 그런 말씀하지 마시라고요!’한편, 북연군 군영.북연 태자가 보낸 첩자가 돌아와 남제의 식량 운송대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렸다.그제야 그들은 왜 남제가 그렇게 힘차게 애가를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하지만 남제의 운송통로는 북연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빠져나간 것일까?한참 후, 한 첩자가 그 답을 내놓았다.“태자 전하,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남제가 이미 운송통로를 다시 장악하고 우리 병사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합니다!”침상에 앉아 있던 북연 태자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광기가 넘실대는 그의 얼굴에서는 진한 살기가 요동쳤다.“아군이 남제 군영과 대치하고 있는데 대체 무슨 수로 통로를 장악했단 말이냐!”그 첩자가 계속해서 아뢰었다.“현장에 잔여 독안개의 흔적이 보였습니다. 필히 남강인들이 몰래 돕고 있는 것입니다!”북연 태자는 냉소를 지었다.“남강이라. 하, 약소국 주제에 이리도 주제파악이 안 되다니!”“태자 전하, 남강은 이미 남제와 연맹을 맺었으니 아마 남제가 쓰러지면 자신들도 화를 면치 못할 것이 두려워서 나선 듯합니다. 남강이 이 전장에 끼어드는 게 싫으시다면 소신이 가서…”북연 태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는 거만하게 말했다.“고작 남강 따위를 내 무서워할 것 같으냐? 남제를 소탕한 다음에 남강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것이다!”맹목적인 자신감은 아니었다. 현재 20만이나 되는 병력이 남아 있는 상황에 남제를 집중 공격하는 게 승산이 있었다.그는 남제가 보급 물자를 받지 못한다면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부하가 할 말 많은 표정으로 쳐다보자 태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또 무슨 일이냐?”“
이게 바로 하늘의 뜻인 걸까?남강 왕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서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단지 하루 늦었을 뿐이다.만약 어제 식량을 가져왔더라면 남제의 황제와 혼인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했다.조금 전까지 고고하고 교만하게 굴던 왕녀는 마치 서리 맞은 가지처럼 축 늘어져서 돌아갔다.진한길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훔쳤다.황후가 어제 늦지 않게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고귀한 황제가 남강 왕의 사위가 될 뻔하지 않았는가.소욱의 얼굴에도 불쾌감이 가득했다.남강 핏줄이라 그런지 몰라도 참으로 당돌하고 주제 분별이 안 되는 여인이었다.“남강 왕녀요?”막사에서 소욱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봉구안은 약간 놀랍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눈이 엄청 높다고 들었는데 왜 그랬을까요?”소욱이 발끈하며 반박했다.“짐이 어디가 못났다고!”일반인이었다면 모두가 남강 왕녀가 주제를 모른다고 욕했을 것이다.봉구안은 태연자약하게 해명했다.“폐하가 못났다는 얘기가 아니라 남강 왕녀는 보수파라서요. 일부일처제를 희망하고 절대 다른 여인과 부군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폐하처럼 수많은 후궁을 거느린 황제는 보수파의 눈에는 절대 좋은 선택지가 아니지요.”사실을 말한 것이지만 소욱이 듣기에는 무척이나 불편했다.그는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너 역시 남강 왕녀처럼 보수파였던 거군.”봉구안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오늘은 어떤 식으로 역공을 진행하실 겁니까?”소욱의 표정도 사뭇 진지해졌다.“3천 병력을 파견해 죽음의 계곡을 정면 돌파할 것이고 양측에 각 1만 병력을 배치해 엄호할 계획이다.”봉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색에 잠겼다.“총 2만 3천 병력이로군요. 이 전역의 목표는요?”소욱이 단호하게 말했다.“북연군을 죽음의 계곡에서 몰아내는 것이다.”죽음의 계곡에 주둔 중인 북연군은 총 3만이었다.미치광이와 천재는 종이 한장 차이라고 했던가. 북연 태자는 겉보기에 그냥 인원수로 밀어붙이는 것 같아도 사실 상 대비
죽음의 계곡 높은 곳.전방에서 돌아온 진한길이 보고를 전했다.“폐하! 북연군이 화룡을 가동하고 있습니다!”소욱의 옆에 서 있던 손덕방 장군이 그 말을 듣고 바로 말했다.“폐하, 쌍방은 화기를 들지 않아야 서로 대등한 정도입니다.”“저희가 죽화총을 사용하니 북연 쪽에서 화룡을 내놓은 것이지요! 당장 죽화총을 철수해야 합니다!”소욱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계속 공격하거라!”손덕방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미친 북연 태자가 진짜로 화룡을 가동한다면 다 같이 죽자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다른 장군들도 같은 생각이었다.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은 없다.화룡이 가동된다면 반경 백리 안에 생존자가 없게 되는데 지금 사정거리는 고작 십리 정도이니 다 같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건 북연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아무리 기다려도 화룡이 정식 가동되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네 시진 후, 전방에서 승전보가 들려와서야 장수들은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죽음의 계곡에 주둔 중이던 북연군은 절반의 사상자를 냈다. 사실 남제가 쳐들어올 때 곧바로 뒤로 철수할 수 있었지만 북연 태자는 계곡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철수했다면 살 수 있는 병사들이었다.하지만 눈앞에는 남제군이, 뒤에는 병기를 들고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아군이 있었다.그들이 철수한다면 아군의 손에 죽게 되는 상황이었다.어쩔 수 없이 만여명의 북연군은 꼭두각시처럼 어거지로 전장에 임했다.반면 북연 태자는 진작에 후방의 본진으로 돌아간 후였다.“태자 전하, 3만 대군이 전군복멸 되었습니다!”쾅!북연 태자는 치미는 짜증에 책상을 두드렸다.“우리가 3만이고 저쪽이 2만인데 어찌 졌단 말이냐!”옆에 있던 장군이 조심스레 말했다.“태자 전하, 저희 북연군 모두가 용맹하고 굳센 의지를 지녔습니다. 하지만 비열한 남제군이 신형 죽화총을 사용하는 바람에… 저희가 화룡을 꺼내들어도 전혀 기죽지 않더군요.”“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건가.”북연 태자의 눈동자가 잔인
반 시진 후, 밀실 밖으로 나온 서왕의 표정은 음울했고 목덜미에 여인의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유화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서왕은 구겨진 옷매무시를 정돈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입맛이 없다고 하니 이틀 정도 굶기거라.”“예.”남부.오백은 몰래 북연군 진영에 들어갔지만 화룡의 위치를 알아내지는 못했다.더 있다가는 들통날 수 있기에 그는 일단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북연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태자가 아니라 화룡을 가진 태자였다.남제가 지금까지 그들의 압박을 참아주면서 소규모의 역공만 하고 있는 것도 정말 큰 전쟁을 치를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화룡 때문이었다.봉구안은 대담한 의견을 내놓았다.“안 된다!”그녀의 계획을 들은 소욱은 당장에서 반대했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네가 위험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건 허용할 수 없다!”봉구안은 여전히 침착한 표정으로 의견을 피력했다.“북연이 강대국으로 불리는 이유는 화룡 때문입니다. 전에는 줄곧 꽁꽁 숨기고 있어서 아무도 그 실체를 보지 못했지요. 만약 가능하다면 그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제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소욱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내 화룡은 없지만 북연이 두렵지 않다!”봉구안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그 말이 진심이십니까? 멀리까진 아니더라도 현재 상황만 놓고 보아도 결국에 압박을 못이긴 북연 태자는 화룡을 사용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저희가 그것을 파괴해야 합니다.”비록 그녀가 북연에 사람을 보내 북연 황제가 이 전쟁에 간섭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성사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그러니 한곳에 모든 희망을 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소욱도 그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위험을 자처하는 걸 허용할 수는 없었다.봉구안은 결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약속했다.“저를 믿어주십시오. 꼭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그가 여전히 말이 없자, 그녀는 강조해서 말했다.“폐하, 전시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폐
연나라 태자의 한마디에 호위들은 곧바로 봉구안을 향해 칼을 빼들었다.그러나 막 공격하려던 순간, 봉구안이 땅에 무언가를 던졌다. 곧이어 하얀 연기가 사방으로 퍼졌다.이 연기는 그들의 시야를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하였다.연기를 겨우 걷어내고 보니, 봉구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멀리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태자 전하께서 화룡을 놓고 동맹할 뜻이 없으시니, 이 화룡은 저희도 사양치 않겠습니다."연나라 태자는 찬바람이 이는 듯한 음산한 눈빛으로 장막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방 어둠 속을 헤집었으나, 남강 사신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는 눈을 부릅뜨며 크게 외쳤다.“쫓아라! 그 자를 잡아 오라! 산 채로든, 아니면 시체로라도!”"예!"그는 곧바로 자신의 심복 호위를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너는 직접 화룡을 살펴보고 오너라. 만약 화룡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네 가족들을 모두 멸할 것이다!"호위는 즉시 명을 받들어 떠났다.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그의 발이 떠나자마자 봉구안이 몰래 그의 뒤를 따랐다.사실 봉구안은 애초부터 떠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이 봉구안의 계책은 지금까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조금 뒤, 봉구안은 그 호위를 따라 연나라 군대의 대진 후방에 있는 울창한 숲에 들어섰다.여러 차례 굽이돌아 마침내 거대한 바위 앞에 도착했다.그 바위는 사람 둘이 겨우 닿을 만한 높이였으며, 달빛 아래 이끼와 낙엽으로 덮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봉구안은 암흑 속에 몸을 숨기고 그 바위 뒤에 무엇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추측했다.곧이어 바위 곁에 서 있는 연군 병사들을 보자마자 깨달았다.이 바위는 가짜군!그때 한 병사가 명령을 전했다."모두 듣거라! 태자 전하께서 명하시길, 며칠간 근무 인원을 늘려 이곳을 철저히 지키라 하셨다!""알겠습니다!"그 병사가 자리를 떠난 뒤, 봉구안은 소매에서 화살을 꺼내 그들을 향해 쏘았다.두 명의 병사가 소리 지를 틈도 없이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
어전.“폐하, 서왕 전하와 왕비마마께서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서왕 전하께서 지금 궁문 밖에 대기 중이며, 아뢸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이 말을 들은 소욱은 지체 없이 명하였다.“어서 들라.”얼마 지나지 않아, 서왕은 발걸음을 옮겨 어전으로 들어섰다.그는 문턱을 넘자마자 곧장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신, 폐하를 뵙나이다!”소욱은 그 기색을 살피고, 정신이 온전한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무사하다니 다행이로구나.”헌데, 서왕의 안색은 심상치 않았다.“폐하, 신이 납치당한 이유는… 그들이 신의 피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신의 부친께서 돌아가시던 때가 떠올랐습니다.”소욱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그는 눈빛을 가라앉히고 그를 바라보았다.“너의 피를 왜 필요로 한단 말이냐? 그자들이 정말 피를 취하였느냐?”서왕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취하지는 못하였사오나, 그들의 목적이 분명 피에 있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신 그 사건 역시, 이번 일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소욱의 미간이 좁게 모아졌다.그는 전대의 왕부, 곧 서왕의 아버지에 관한 억울한 일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 일로 선황은 오랫동안 후회하며 침식을 잊고 괴로워했었다.그래서 소욱 또한, 이후 누구에 대해 반역 운운하는 소문이 돌 때마다 쉽게 믿지 않았다.선왕이 저지른 실책을 그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허나 지금 와서 다시금 드러나는 의혹은 그 죽음이 단순한 누명이나 정치적 숙청이 아닌, 무언가 깊은 연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소욱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자세히 말해 보아라.”……황성 서쪽.봉구안의 행차가 한적한 관로에 이르렀을 때, 한 일행이 그녀를 막아세웠다.오백이 곧장 검을 뽑아 방어 태세를 취했으나, 막아선 이들이 익숙한 인물임을 곧 알아보았다.바로 자재각을 지키던 소욱의 친위 호위병들이었다.그들은 마차를 둘러싸며 호위 진형을 갖추었다.“마마, 저희는 폐하의 명을 받아 마마를 궁으로 모
소욱은 한참을 고심한 끝에, 어느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천명을 믿지는 않았으나, 담대연이 말한 ‘인성’은 부정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언제나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과거 그녀가 이미 단회욱을 마음에서 지웠음에도, 그를 구하기 위해 주저 없이 죽음을 택했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했다.서여국은 외환보다 내우가 깊은 나라였다.아무리 소주와 정국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안으로는 여전히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이번에 봉구안이 직접 서여국에 가게 되면, 그 혼란 속에서 국주로 추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그녀의 성정상 그 책임을 외면하진 못할 터였다.결국엔 남제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소욱의 가슴을 옥죄었다.담대연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천하통일. 그러나 그보다 무서운 건, 그 길목에서 아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진한길.”“신, 여기 있습니다!”“황후를 몰래 다시 데려오거라. 사람을 붙여, 은밀히.”진한길은 순간 의아함을 품었다.폐하께서 왜 이리도 갈팡질팡하시는 걸까………한편, 황성 서쪽 교외.담대연이 도착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하궁의 비밀 통로를 찾아냈다.그가 손을 쓰자 거대한 암석이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진 지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담대연은 호위들에게 엄중히 이르렀다.“이곳은 함정과 기계장치가 많습니다. 제 발을 따라오십시오. 절대 멋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명심하겠습니다!”……지하궁 내.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서왕과 완부옥은 이미 허기와 피로로 맥을 잃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그 인물은 이전에 죽은 자의 시체를 발견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시체를 끌고 나갈 뿐이었다. 마치 이곳에서 죽음은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시체를 처리한 뒤, 그자는 곧장 서왕을 데리고 가려 했다.완부옥은 그를 향해 소리쳤다.“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대답은 없었다. 그저 서왕을 밀어내듯 이끌 뿐이었다.하지만, 그들은 이미 내공
그 뱀은 영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슥, 하고 순식간에 주실 안으로 기어들어가더니 어디에 숨어버렸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뱀을 잡기 위해선 황후의 물건들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고, 이는 반드시 폐하께 고해야 할 사안이었다.때마침 소욱은 밤이 깊어도 봉구안이 그리워져 자유각을 찾았다.호위들은 이 일을 곧장 아뢰었다.소욱의 눈썹이 짙게 찌푸려졌다.그는 친히 방으로 들어가 사방을 뒤적이다, 마침내 침상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뱀을 발견하였다.그 순간, 그는 뱀의 눈과 마주쳤다.소욱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이놈을 당장 잡아내라…”막 명하려던 찰나, 그는 그 뱀이 어딘가 익숙하단 걸 느꼈다.이 뱀은… 분명 완부옥이 기르던 그 뱀과 닮아 있었다.완부옥과 서왕이 함께 실종된 걸 떠올린 소욱은 곧 심중에 짚이는 바가 있었다.그는 즉시 명하여 뱀을 그물망에 넣게 한 뒤, 서왕부로 보내어 확인하게 하였다.서왕부의 호위, 유화가 그 뱀을 확인하였다.그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억누르며 가까이 다가갔고, 잠시 후 단호하게 말했다.“왕비마마께서 기르던 뱀입니다.”자유각.소욱은 전갈을 받은 후, 이 일에 더없이 의아해졌다.완부옥의 뱀이 어찌 자유각까지 온단 말인가?설령 이 뱀이 길을 안다 하여도, 돌아간다면 당연히 서왕부로 가야 할 터였다.그는 곧 봉구안에게 전령 비둘기를 날렸다.그 시각, 봉구안은 황성을 갓 벗어난 참이었다.편지를 받아든 그녀는 곧장 완부옥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예전에 완부옥이 똑같은 짓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곧장 회신을 써서 다시 소욱에게 전했다.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봉구안은 잠시 고심한 끝에, 두 번째 편지를 써 보냈다.그 안엔 한 마디 당부가 적혀 있었다.[폐하, 부디 경솔한 행동은 삼가 주시옵고, 무엇보다 폐하의 안전을 우선으로 삼으소서.]소욱은 첫 번째 편지를 받고 곧장 진한길을 불렀다.“서왕의 흔적을 찾을 실마리를 얻었다. 몇 사람을 데려가 뱀을 풀고, 그 자취를 따라가 보아라.”“예, 폐
지하궁은 온통 어둠뿐이었다.완부옥과 서왕은 감금되어 있던 방을 빠져나왔으나, 사방이 캄캄하여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었고, 출구를 찾는 것조차 막막하였다.서로 떨어질까 염려된 완부옥은 명령조로 말했다.“제 옷소매를 붙잡아요. 바짝 따라와요.”“알겠다.” 서왕은 그녀의 뒤를 따르는 수행자처럼 움직였다.그가 조심스레 속삭였다.“조심하거라. 혹시 저들이…”“쉿. 소리 들리십니까?”완부옥이 숨을 죽이며 물었다.그 순간, 어둠 속에서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둘은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인 채, 벽에 몸을 바짝 붙여 섰다.다행히도 어둠이 그들의 몸을 감추었고, 다가오던 자는 그들을 발견치 못한 채 멀어져갔다.발소리가 사라지자, 완부옥은 서왕의 귀가에 바싹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벽을 더듬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출구가 보일 겁니다.”서왕이 대답하였다.“네가 앞장서거라. 나는 네 옷자락을 붙잡으마.”“……”‘참, 한 손가락도 까딱 안 하려 드는군.’예전 소환과 함께 위기에 빠졌을 때는 달랐다.그저 조금 투정만 부리면, 소환은 그녀를 안고서 척척 길을 찾아주곤 했다.‘하… 또 소환이 그리운 하루네.’완부옥은 ‘짐짝’ 하나를 등에 지고서 벽을 더듬으며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한 걸음마다 온몸이 긴장되었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적들의 기척에 늘 귀를 곤두세워야 했다.지나치게 어두운 환경에 눈이 점점 아파왔고, 이윽고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걸음을 멈췄다.서왕은 그녀가 지친 줄 알고 말했다.“내가 앞장서마. 넌 내 옷자락을 붙잡거라.”완부옥은 비웃듯 말했다.“이제야 남자였던 게 기억난 겁니까?”“……”그녀의 말은 확실히 가시가 있었다.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모든 위기는 결국 그녀가 그를 구하려다 엮인 결과였다.명색만 아내인 그녀가 이토록 의리를 지닌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그리하여 둘은 번갈아가며 벽을 더듬었고,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게 돌고 돌다가 결국, 처음 그 시체가
완부옥은 지금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자만했던 탓에 전부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서왕은 그저 이름만 걸친 지아비일 뿐, 생사 여부는 그녀와 무관한 일이었다.허나 그를 구하겠답시고 나섰다가 결국 본인까지 덩달아 갇혀버린 셈이었다.“정말이지, 손해도 이런 손해가 또 있을까.”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지금 가장 급한 일은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완부옥은 숨을 죽이고 목소리를 낮추어 서왕에게 말했다.“제가 폐하보다 먼저 깨어났습니다.”“이놈의 곳은 온통 함정투성이인데다, 한밤중이면 어딘가에서 귀신 울음소리 같은 것까지 들려옵니다.”“도망치려면 단번에 노려야 합니다.”“그러니 우선 생각해보세요. 대체 어떤 자가 폐하를 납치했겠습니까? 목적을 알아야 그것을 역이용할 수 있습니다.”서왕은 긴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딱히 떠오르는 자가 없다.”그는 평소 온화하고 무던한 성격이었기에 원한을 살 일이 별로 없었다.완부옥은 그런 그를 보며 속이 터졌다.“정말 생각 안 나십니까?”“어찌 되었건 노린 건 폐하였고, 전 구하러 따라왔다가 덤으로 잡힌 겁니다!”서왕은 머리를 부여잡았다.“미안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안 되는구나…”완부옥은 이를 갈았다.“그럼 지금 움직일 수는 있습니까? 무기는 있습니까?”서왕은 한숨을 내쉬었다.“전신에 기운이 없구나”“게다가 발엔 쇠사슬까지 채워져 있지. 무기라니, 입궐할 때 무기를 지니는 건 금지 아닌가.”완부옥은 말문이 막혀 한동안 침묵했다.서왕이 조심스레 물었다.“그쪽은 어떠한가. 몸을 움직일 수는 있겠느냐?”“내가 움직일 수 있었으면 진작 나갔다!”완부옥은 못마땅하다는 듯 쏘아붙였다.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혹시 약쟁이 무리의 짓이 아닐까요?”최근 조정에서 집중적으로 수사 중인 사건이었고, 서왕이 맡았던 설가 조사도 결국 그 사건과 맞닿아 있었다.서왕은 반박하지 않고 침묵에 잠겼다.그때였다.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바깥에서조차 한 줄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서왕이 누군가에게 노려질 줄은 말이다.소욱은 곧바로 도성의 모든 성문을 봉쇄하도록 지시하고, 서왕의 행방을 찾기 위한 대대적인 수색을 명했다.아울러 도성 안에 방을 붙여 백성들에게 제보를 구하게 하였다.서왕부의 호위들 또한 사태 발생 직후 각지로 흩어져 수색과 감시를 병행했다.이튿날, 성 외곽에서 한 무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유화를 발견했다.유화는 서왕의 호위무사로, 전날 서왕이 꾀임에 빠져 마차에 올라탔을 때도 곁에 있었다.그가 정신을 차리자 곧 일행에게 상황을 설명했다.“마차가 중간쯤 갔을 때, 방향이 이상하단 걸 눈치채셨습니다. 제가 마차를 세우려 하자, 마부놈이 제게 발길질을 해 마차 밖으로 떨어졌지요.”“그때 왕비께서 뒤따라 오셨습니다. 마마께서는 놀랄 만큼 민첩하게 마차 위로 뛰어올랐고… 그다음은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마차가 서쪽으로 향한 것은 분명히 기억납니다.”이윽고 유화는 다급히 물었다.“전하께서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은 폐하께서 알고 계십니까? 구하러 가신 분은 있습니까?”……황궁, 어전.소욱의 얼굴은 짙게 드리워진 먹구름처럼 어두웠다.서왕을 납치한 자가 누구인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약쟁이 무리의 소행일 가능성이 가장 컸지만, 그들의 본거리는 이미 파괴되었고 대부분이 체포된 상황이었다.남은 잔당들이 있다 해도, 서왕 같은 인물을 일부러 노리고 데려갈 이유는 부족해 보였다.만약 도망이 목적이었다면, 오히려 짐이 되는 인물을 굳이 데려갈 리가 없었다.무언가, 납득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그날 밤, 자유각.소욱은 발걸음을 옮겨 봉구안이 있는 자유각을 찾았다.하루가 멀다 하고 가까운 인물들이 위험에 처하는 이 시국에, 그의 마음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었다.“구안아, 오늘 밤은 나와 함께 궁으로 돌아가자.”“이렇게 궁 밖에 두는 건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하지만 봉구안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눈빛이 깊어졌고,
궁 밖, 자유각.소욱은 드물게 여유를 낼 수 있는 날이었다.곧장 자유각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는 오늘만큼은 봉구안과 함께 저녁상을 나누고자 했다.헌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여러 권의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고개도 들지 않고 책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소욱이 조용히 다가서자, 그제야 봉구안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폐하,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소욱은 그녀의 말에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오는 게 싫은 것이냐?”그 말과 함께 그는 주저 없이 그녀를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직접 의자에 앉은 그는 그녀의 허리를 품에 안고, 손으로 봉구안의 배를 부드럽게 쓸며 아이에게 말하는 척 투정을 부렸다.“들었느냐, 너희 어미는 참 정이 없는 여자다.”“부디 보러 온 아비를 반가워해 줘야 할 텐데 말이다.”봉구안은 그 손을 떼어내며 어이없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싫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폐하께서 상주서를 다 보시지 못하실까 염려되어서입니다.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으시잖습니까.”그녀의 속뜻을 알게 된 소욱은 그녀의 손을 잡고, 가만히 입술을 가져가 살며시 입을 맞췄다.그의 눈빛에는 은근한 정과 깊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내 걱정은 할 줄도 아는구나.”그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책상 위 책들을 훑었다.“이번엔 또 뭘 보고 있느냐.”“궁에서 은육에게 부탁하여 가져오게 하였습니다.”“혹시라도 모용가 선조들에 대해 알아두면 약쟁이 사건에 도움이 될까 해서요.”소욱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몸을 살짝 기댔다.“그럴 필요 없다. 그냥 내게 물어보면 되지 않느냐.”봉구안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폐하께서… 알고 계십니까?”소욱은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모용가라면 나도 잘 아는 편이지.”그리고 그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모용가의 시조는 남산왕과 서왕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태조 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공신이었다.”“하지
황성 동쪽 교외.약쟁이 무리의 본거지가 발각되어 관군의 손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었다.그곳에 몸 담고 있던 무리 또한 하나하나 사로잡혀 옥에 갇혔다.이어진 엄한 문초 끝에, 그들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약쟁이 무리는 수년간 약쟁이를 만들어 여기저기 팔아넘겨왔다고 했다.그 대상에는 반란을 꾀하던 천룡회는 물론, 동산국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문초하던 관리가 다시 물었다.“이 일에 설가가 어떤 연관이 있느냐. 설 대인을 죽인 것도 너희냐.”“예… 저희가 했습니다. 현비마마께서 두 번째로 잡혀가신 이후, 주인어른께서 직접 명을 내리셨습니다. 설가를 제거하라 하셨지요.”“그날 설 대인께서 댁을 나서자마자 손을 썼습니다.”“그가 너희를 고발하려 했던 것이냐.”문초자는 낮게 목소리를 눌렀다.“그렇습니다. 하지만… 설 대인께서 무언가를 알아내신다 하여도 주인어른께서 직접 엮일 일은 없었습니다.”“그분이 아신 건 기껏해야 홍련초와 관련된 일 정도였습니다.”“딸을 살리기 위해서였지요. 그래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으셨습니다.”“설 대인이 알던 건 무엇이더냐.” 관리의 어조가 더욱 날카로워졌다.잡힌 자는 낮게 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그해, 영비마마께서 현비마마를 제거하고자 하셨습니다.”“허나 궁 안의 약물은 태의원이 일일이 기록하여, 함부로 쓸 수 없었습니다.”“영비마마께선 귀가하시는 날을 틈타 독약을 구하려 하셨고, 어디서 들으셨는지 저희 주인어른께서 독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손을 내미셨습니다.”“주인어른께선 처음엔 약을 지어드렸지만, 영비마마께서 제멋대로 약창고에 들었다가 엉뚱한 약을 들고 나왔습니다.”“그 탓에 약쟁이의 독이 세상에 드러날까 주인어른께선 설 대인을 찾아가 경고하셨습니다.”“‘딸을 살리고 싶다면 입을 다물라’는 뜻이었지요. 대신 해독약을 주셨고, 홍련초를 심게 하여 해독제를 만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동시에 저희도 독을 더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지요.”“설 대인께서는 저희를 몰래 추적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