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찬궁 내실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소욱은 어두운 눈빛으로 침대에 쓰러져 있는 봉구안을 응시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짐을 싸면서 직접 북연에 가서 조사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하지만 몇 걸음도 걷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그제야 그는 그녀가 아직 완전히 술이 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너무나 확고한 눈빛에 그녀가 이미 술에서 깨어난 줄로만 알았다.다른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난동을 부리거나 물건을 던지거나 하소연을 한다.하지만 그의 황후는 술에 취해도 나라 걱정에 여념이 없었다.이런 그녀를 어떻게 꾸짖을 수 있겠는가?그렇다고 그녀를 둘러싼 그 수많은 홍안지기를 완전히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소욱의 얼굴엔 쉽게 읽히지 않는 어두운 감정이 서려 있었다.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의 장막을 내렸다.잠시 후, 용 문양이 새겨진 황제의 화려한 의복이 장막 밖으로 던져졌다.그리고 장막 안에서는 낮고 유혹적인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구안아, 내게 황자를 안겨다오.”…봉구안은 소욱의 몸짓으로 인해 잠에서 깨어났다.목이 바짝 말라 눈을 떠보니, 흔들리는 장막이 보였다.마치 작은 배에 올라 큰 파도에 휩쓸린 듯, 붙잡을 데가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며, 붉게 물들었다.소욱은 그녀의 눈물을 입술로 닦아내며 허리 아래에 부드러운 쿠션을 받쳐 주었다.그의 눈빛은 붉게 빛났고,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타오르는 열정과 한없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그의 팔에는 힘줄이 솟아올랐고, 이마와 가슴엔 땀이 맺혀 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봉구안은 문득 부적절한 말을 뱉고 말았다.“요즘 연습을 게을리했나요?”그녀는 군영에서 오랫동안 지내며, 상반신을 드러낸 군사들을 많이 보았다.그렇기에 어떤 남성이 보기 좋고 어떤 남성이 강한지 익히 알고 있었다.소욱은 보기 좋고 강한 남자에 속했다.원래 그의 복부엔 선명하게 나뉜 여덟 개의 복근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선이 흐릿해져 두 개는
황제와 황후의 대혼례 전에는 녕비가 후궁의 권력을 주관하고 있었다.이제 궁에 황후가 생겼지만, 황후는 교무당의 여러 일을 겸해야 했으므로, 녕비는 여전히 후궁을 협조 관리하는 권한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런 녕비가 황제의 소환을 받는 일은 드물었기에, 태후는 이를 듣고 즉시 그녀를 불러 물었다.자녕궁.녕비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태후는 점점 더 조급해졌다."도대체 무슨 일이냐?"녕비는 고개를 들어 태후를 바라보며, 울상이 되어 호소했다."폐하께서 저더러 중매를 열어 미혼 남녀를… 고모님! 이러다간 제가 그냥 중매쟁이가 되지 않겠습니까!"자신이 어엿한 황실의 비빈인데 어찌 그런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녕비는 황제의 의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태후는 즉각 반박했다."그게 무슨 말이냐? 중매쟁이라니, 듣기 싫게. 이는 월하노인 역할이 아니더냐.""월하노인이라고 해서 뭐가 다르겠습니까!"아무튼 그녀는 중매를 주관하고 싶지 않았다.자진궁.소욱이 돌아왔을 때, 봉구안은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있었다.그녀는 탁자 앞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고, 궁녀 만추가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그가 들어서자 봉구안은 일어서서 인사했다.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편히 쉬라고 했는데 왜 일어난 것이냐?"봉구안은 담담히 대답했다."이제 괜찮습니다. 폐하, 완부옥 일행은 어찌 되었습니까?"그녀의 시선에는 신경 쓰이는 기색이 어렸다.소욱은 그녀와 함께 자리에 앉아 차분하고도 약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내게는 모든 이를 포용할 그릇이 있다. 그들에게 어려움을 주진 않을 것이다."이어서 그는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조회를 마쳤더니 출출하구나."유사양은 즉시 눈치를 채고, 부리나케 다른 상을 차려오도록 지시했다.봉구안은 이 장면을 보며, 자연스레 과거가 떠올랐다.그 시절 그는 영화궁에 와서 식사를 하곤 했는데, 그가 사용한 식기들은 그녀가 전부 폐기하곤 했다.세상일은 참 알 수 없다.그때는 무심하거나 심지
전날 무리했던 탓에, 봉구안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교무당의 수업이 미시에 있었기에 그녀는 나갈 채비를 해야만 했다.소욱은 그녀에게 오늘은 쉬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끝내 참석하겠다고 고집했다.학생들은 전날 그녀가 남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었다. 오늘 수업에서는 제각각 다른 답을 내놓았으나 대부분 일리 있는 이야기들이었다.특히 병사를 지휘해 본 경험이 있는 무장들의 의견은 주목할 만했다.“가득 차면 해가 되고, 겸손해야 이익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가득하면 깎아내려야 한다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가장 적절한 사기 비율은, 우리 쪽이 적군보다 1~2할 높을 때입니다. 적으면 우리 사기가 부족하고, 너무 많으면 우리 군이 자만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견진은 병사를 이끌어 본 경험은 없었지만, 한 마디 거들었다.“황후마마, 제 생각에는 오히려 배수진을 치는 것이 모든 조건이 유리한 상황보다 더 높은 승률을 가져올 때가 많습니다.”봉구안은 잔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보아하니 병법을 잘 익혔구나. 오늘은 실전 연습을 해보겠다.”“실전 연습?”학생들은 궁금해졌다.실제로 전쟁이라도 나가는 건가?봉구안은 그들을 훈련장으로 이끌었다.훈련장에는 100여 명의 인원이 서 있었다.이들은 집을 지키는 하인, 시장 상인, 궁의 호위 등 복장과 차림새가 제각각이었다.봉구안은 명령을 내렸다.“방금 했던 이야기대로 상대를 골라 싸워보거라.”“내 요구는 단 하나다. 반드시 이겨야한다.”학생들은 자신만만했다.방금 내린 결론대로, 대부분 자신보다 약간 약한 상대를 선택했다.그렇게 하면 이기면서도 체면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봉구안은 유연이 가장 강해 보이는 상대를 선택한 것을 발견했다.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른 선택이었다.한바탕 대련이 끝난 뒤, 유연을 제외한 모든 학생이 패배했다.견진은 믿기 어려워하며 겸손하게 물었다.“마마,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건가요?”다른 사람들도 납득할 수 없었다.왜 전부 졌단 말인가!봉구안의 눈빛은 차가
동산국.봉구안은 대혼례 전에 자신이 길에서 받았던 적염련이 떠올랐다.스승은 그 적염련이 동산국에서 자라는 것이라고 했었다.적염련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지금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이제 약쟁이와 관련된 단서마저 동산국으로 이어지니, 동산국과 관련된 이 점을 깊이 파헤칠 필요가 있었다.황제가 영화궁으로 왔다.소욱은 익숙한 듯 내전에 들어섰고,봉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그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다른 사람이 없을 때는 예를 갖추지 말라고 했지 않았느냐.”“그렇게 하겠습니다.”소욱은 곧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았다.“뭘 하고 있었느냐?”그는 묻는 동시에 지도를 들여다보았다.거기엔 몇 개의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고, 그 경로는 모두 동산국으로 향하고 있었다.“이게 무엇이냐?”봉구안은 차분히 대답했다.“상로입니다.”소욱은 눈살을 찌푸리고 깊이 생각했다.“동산국은 부유한 나라로 문치를 숭상하고 무력을 경시하는 지역이다. 지난 100년 동안 손꼽을 정도의 전쟁에만 참여했으며, 다른 나라와의 외교 관계도 거의 없었지.”“선황 때부터 양국은 사신조차 교환하지 않았다.”“따라서 양국 간의 상로는 개설되지 않았지. 이 동산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무역이 없는데, 이 상로는 대체 어디서 생겨난 것이냐?”당시 남제는 외국 상인들이 정탐꾼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상로를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설령 외국과 무역을 시작하더라도, 그들 상인들이 남제 내 모든 도시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는 없었다.남제가 개방한 도시는 극히 몇 곳뿐이었으며, 선양이나 황성 같은 전략적 요충지는 외국 상인들의 출입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더욱이 양국 간의 무역이 성립되려면 동맹 관계가 전제되어야 했다.상호 이익이 있어야 비로소 교류가 가능했던 것이다.결국 동산국과 남제 간에는 상로가 끊긴 지 오래였고, 그런 상황에서 봉구안이 그린 상로는 소욱을 당혹스럽게 했다.봉구안은 그에게 설명했다.“이것은 비밀 통로입니다. 양국이 무역을 하지 않더라도,
다음 날, 봉구안은 호위들과 함께 도관으로 향해 지하 통로로 내려갔다.이 통로는 소욱이 이전에 철저히 조사하도록 명했지만, 지금까지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봉구안은 횃불을 들고 좁고 긴 통로를 걸었다.이곳은 복잡하게 설계된 함정이 숨겨져 있어, 각 길목이 모두 감춰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녀가 탐색하던 중, 앞서 가던 호위들이 갑자기 소리쳤다.“화약이 있습니다! 마마를 보호하라, 철수하라!”쾅!!어떤 구간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지며 터널이 붕괴되었다.돌들이 아래로 쏟아져 내리며 모든 길을 막아버렸다.봉구안은 흙먼지 속에서 눈을 들어 차가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아꼈다.만약 진상을 밝히기도 전에 죽는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터였다.확실한 준비가 없었기에, 그녀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철수하라.”바로 그때, 도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앞에 선 사람은 평소 교무당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랐다.그는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있었고, 차가운 귀족의 분위기를 풍겼다.봉구안 일행이 도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본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갔군. 우리도 가자.”뒤에 있던 부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예.”황궁.소욱은 지하 통로가 폭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봉구안의 안위가 매우 걱정되었다.그는 보고서를 내려놓고 직접 궁문으로 나가 그녀를 맞았다.그녀가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어 그는 그녀에게 더는 그곳에 가지 말라고 설득하고 싶었다.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봉구안이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먼저 말했다.“저는 괜찮습니다. 오늘의 일이 증명하듯, 저 숨어있는 자들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면, 틀림없이 실수하고 흔적을 남길 것입니다.”그녀는 곧이어 말했다.“전문가는 전문적인 일을 맡는 법이죠. 그 지하 통로에 설치된 함정들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동방세를 불러
비록 중매였지만, 사내들은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자 칼을 휘두르며 무예를 선보였다.녕비는 그런 모습들을 보며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아직 세상 이치를 모르는 그녀는 깊은 밤마다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후궁의 다른 비빈들이 가끔 호위들과 은밀한 관계를 맺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궁에 들어온 뒤로 그녀는 한 번도 평범한 사내를 본 적이 없었다.공연이 끝난 후 녕비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짝을 지어 꽃놀이를 하라 명했다.이 말의 의도는 너무나 분명했다.누군가 마음에 든다면 직접 나서 초대할 수 있었다.궁중의 중매는 한창 흥겨웠다. 마침 장공주가 태후를 찾아 궁에 들어오다가 웃음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춰 구경하게 되었다.멀리 나무 아래,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여자는 단아한 행동과 온화한 말투로 남자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얼굴을 붉혔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유 공자, 교무당에 들어가셨다니 참 재능 있는 분이시군요. 장차 멋진 장군이 되시길 바랍니다.”남자는 손수건을 받아들고 고맙다고 말했다.그 모습을 본 여자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손수건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유 공자는 준수한 외모에 교무당의 제자로, 황후의 가르침을 받는 인물이었다.여자는 용기를 내어 그를 올려다보았다.“그렇다면, 저희 집으로 청혼하러 오기를 기다릴게요.”그 말을 남기고 여자는 자리를 떠났다.장공주는 어둠 속에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 여자가 떠난 뒤, 유 공자가 손수건을 내던지는 모습까지도.곁에 있던 궁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공주마마, 저 사람 참 보기와는 다르게 겉과 속이 다르네요. 그 여인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손수건을 받았을까요? 관가의 집안을 두려워해 자기 출세에 해가 될까 염려한 걸까요?”장공주는 그가 교무당의 학생이라는 말을 듣고는 속으로 다짐했다.“저 사람의 이름과 품행을 알아보도록 하거라.”“예, 공주마마.”그녀는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봉구안이 장공주의 교무당 입학 요청을 거
봉구안은 장공주의 속셈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단호하게 거절했다.“공주마마, 오늘 보신 일이 어떻든 간에 상관없습니다.”“설령 그 일이 사실이라 해도, 저는 유연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계략이 없다면 어떻게 군대를 지휘하겠습니까?”“궤변에 능하지 않으면 어떻게 적을 속이겠습니까?”“저는 이 일로 인해 유연의 능력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장공주는 실망하며, 봉구안이 자신에게 그 정도로 신뢰를 주지 않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황후, 제 말을 믿어주세요. 그 유연이라는 사람은 속셈이 좋지 않습니다.”“비록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제 감으로는 그는 제어하기 어려운 자입니다.”장공주의 말을 봉구안은 어느 정도 귀담아들었지만, 그녀 앞에서 그것을 드러내진 않았다.그도 그럴 것이, 유연을 내보내는 것보다 장공주의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더 꺼렸기 때문이다.황후가 된 이상, 경중을 잘 따져야 했다.장공주가 떠난 뒤, 봉구안은 시녀 만추에게 명령을 내렸다.“유연의 고향에 사람을 보내, 그 사람의 품행을 철저히 알아보도록 해라.”군대를 이끄는 이는 계략이 필요하지만, 속임수에 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중매가 끝난 뒤, 완부옥의 자매 동맹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그들 중에는 흥미를 느끼는 남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궁에 들어가길 원치 않았다.그 이유는 궁중의 엄격한 규칙과 화려한 궁궐의 공허함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그들은 확신했다.이 황궁은 소환이 오래 머무르지 못할 곳이란 걸 말이다.그렇다면, 그들은 왜 자신들까지 끌려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게다가, 이성적으로 생각해본 후 그들 역시 차선아처럼 완부옥의 음흉한 속내를 감지했다.그들 중 누구도 완부옥만큼 소환에게 집착하는 이는 없었다.만약 궁에 들어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면, 왜 완부옥 자신은 들어가지 않았을까?진실은 단 하나뿐이었다.완부옥은 소환이 머지않아 궁을 떠날 것이라 확신했고, 차라리 궁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동방세는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번쩍 뜨며 무너진 한 구역을 가리키더니 짐작했다.“이건 자폭의 흔적이오. 대개 추격병을 막고 통로를 차단하려고 이런 일을 벌이지.”그는 말하는 동안에도 손놀림으로 그림을 그렸다.봉구안은 그가 그린 거미줄 같은 그림을 보고 잠시 고심했다.“이게 뭔가?” 범진은 좌우를 살펴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동방세는 그림을 다 그린 후, 그들에게 설명했다.“내가 보기에 이 비밀 통로는 ‘거미줄’ 구조일 가능성이 크오.”“거미줄이라니?”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동방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가리키며 덧붙였다.“기계술에서 이런 비밀 통로를 거미가 거미줄을 치듯 설계해 중심점을 기점으로 사방으로 퍼뜨리며 연결하오. 더욱 복잡한 경우엔 음양의 방위를 포함해 방정 방향까지 모두 얽어 놓아 거대한 거미줄 형태를 만들지.”범진은 더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당신 말은 천간지지의 원리를 따른다는 뜻인가?”동방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소. 그래서 일종의 ‘가짜 팔괘진’이라 불리기도 하오.”봉구안은 총명한 성정 덕분에 동방세의 설명을 곧바로 이해했다.그녀는 동방세의 그림을 가리키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이 비밀 통로가 바로 거미줄 같군.”“중심에서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것은 세로 줄, 즉 남북과 동서를 연결하는 축이오.”“이 세로 줄을 둘러싸며 점점 바깥으로 확장되는 원형의 가로 줄도 있소.”동방세는 눈을 가늘게 웃으며 말했다.“역시 명성이 자자한 맹 소장군답소. 한 번 듣고 바로 이해했구려.”그는 이어 말을 이었다.“이런 완벽한 ‘거미줄’ 진을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오.”“나는 서책에서만 보았는데, 실제로 완성한 사람은 없었소. 이건 선대 고인들의 창의적인 발상일 뿐이오. 그들은 거미가 줄을 치는 모습을 보고 교훈을 얻은 것이지.”범진이 끼어들며 말했다.“그런데 보지도 못한 진을 어떻게 이 비밀 통로와 연결지을 수 있소?”동방세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건 자네
"공자님,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다 됩니다!" 연상은 즐겁게 부산을 떨며, 자신의 이런 행동이 소탁에게는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곧, 음식들이 다 되었다. 연상은 미역국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소탁을 바라보았다. "소 공자님, 오래도록 장수하시길 기원합니다. 모용길처럼...""아, 이런! 제 입이 이렇게 험합니다. 모용길 같은 악인과 소 공자님은 전혀 다르시죠." 소탁은 국을 먹지 않고 연상에게 물었다."너는 행복하니?" 연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저야 당연히 행복하죠. 나쁜 사람들이 인과응보로 벌을 받지 않았습니까.""게다가 오늘 의원께서 말씀하시길, 공자님의 눈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하였어요.""전 공자님께서 곧 다시 빛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연상아, 너와 나는 이뤄질 수 없는 사이야."소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도 결국에는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연상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 "공자님, 저도 알고 있어요. 공자님은 황실의 귀한 분이시고, 저는..." "네 신분 때문이 아니야. 연상아, 난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다."이 말을 듣자마자 연상의 눈에 갑자기 한 줄기 빛이 어렸다. "단지 절 걱정하시는 것 뿐이지, 절 싫어하시는 건 아니군요?" 소탁의 목이 갑자기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일생은 큰 기복이 있었고, 혼자 살아가게 될 운명이었다. 한 번도 인연을 찾을 생각을 해본 적 없었고,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연상이란 아이는 그에게 있어 더 과분한 존재였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 시간 동안 그녀가 곁에 있어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사실이었다. "난 너에게 남녀 간의 사랑을 품고 있지 않아. 설령 내가 여자를 찾는다 해도, 그건 아내지 시녀가 아니야." 연상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이 크게 떠졌다. 시녀? 소탁은 선의로 그녀에게 일깨워주었다
완부옥은 예로부터 여자를 좋아했다. 남자를 대할 때조차도, 가볍게 희롱하거나 농을 던질 뿐이었다.그런 그녀 앞에 서왕이 호의를 드러내자,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게다가… 분명 그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던가.서왕은 그녀의 반응이 예상보다 격해 당황하며 서둘러 설명했다.“우리는 비슷한 처지가 아니더냐? 같이 사는 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지 않느냐.”“네가 떠나면, 난 또 다른 이와 혼인해야 할 텐데… 너처럼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여인은 없을 것이다.”“또다시 나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할 테니… 차라리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완부옥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 말씀이셨군요.”그가 정말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고 긴장했건만…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한편 모용길의 죄행이 세상에 밝혀지자, 남제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백성들 또한 믿기 어려워했다.“그 자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고? 분명 불로장생의 술법이 있었던 게지. 폐하께서 그걸 두려워해 제거한 거야.”“약쟁이 사건도 정말 복잡하군. 처음엔 모용욱이 범인이라더니… 이번엔 왜 모용길이 나와? 설마 이번에도 헛다리 짚은 건 아니겠지?”“뭐가 어쨌든 간에 약쟁이는 전부 모용가 짓이란 말이잖아. 그런 집안은 몰아내야지!”분노한 백성들은 결국 모용가로 몰려가 돌과 썩은 달걀을 던지며 고함쳤다.“남제에서 당장 꺼져라!”“모용가 놈들은 천벌 받아야 마땅해! 죄 없는 사람들 고통받게 했잖아!”며칠째 모용가는 백성들의 소란에 시달려, 누구 하나 문밖을 나서지 못했다.……성 외곽의 한 촌락.낡은 농가 안,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말했다.“들었어? 약쟁이 사건 피해자한텐 조정에서 보상금을 준다더라. 장순이네도 그랬잖아. 우리도 당장 관청 가자고, 장대복! 내 말 듣고 있는 거야?”장대복은 장순의 친삼촌이었다. 어린 조카를 생각하면 늘 미안함이 앞섰다.“형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 모자 둘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당신도 알잖아.”
소욱은 미소를 지었다.“부창부수라 하지 않느냐. 함께 손잡고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황부도 결국 한 여자의 지아비이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서왕은 한껏 조이던 가슴이 결국 힘없이 내려앉았다.그는 즉시 두 손을 모아 절하며 간언했다.“폐하, 그건 절대 안 됩니다!”“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주이십니다. 어찌 여인의 그늘 아래 계시겠습니까?”“이 일이 만에 하나라도 세상에 알려진다면, 조롱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평소 성정이 온화한 서왕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은근히 고집이 세지는 성격이었다.소욱은 목소리를 날카롭게 높였다.“그래서 말이지.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서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폐하도 이게 창피한 줄은 아시는구나…’“황후 마마께서는 폐하께서 황부가 되겠다는 걸 허락하셨습니까?”소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황후가 왜 반대하겠느냐? 설마 다른 사내를 맞이해야한단 말이냐?”서왕은 잠시 헷갈려 그 말에 말려들 뻔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황후마마께서도 이 일이 폐하께 불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신지 여쭈려는 것입니다.”소욱은 눈을 좁히며 말했다.“내 너를 형제로 생각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이미 내가 결정한 일이야. 누구도 바꿀 수 없어.”“너는 그저 국정을 맡아 잘 처리하거라. 내가 황후와 함께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그러자 서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하지만 폐하 신도 이번에는 휴가를 청하려 했습니다.”매번 국정을 떠맡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아무리 가까운 형제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겠는가.‘이 나라는 분명 소씨 가문의 일국이지 않는가.’ ‘잠깐… 순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서왕은 방금 스쳐간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감히 황제에게 이런 불만을 품다니. 마음으로도 짜증을 내다니, 감히 내가?’소욱은 인내심을 다잡으며 물었다.“휴가를 내겠다고? 무슨 연유냐?”서왕은 몇 초간 머뭇거리다, 정색하며 대답했다.“왕비와 함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소욱은
서왕의 심문이 시작되자, 손추의 수하였던 자객은 결국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그… 그 일은 저희가 꾸민 일입니다.”“모용길이 왕가의 피를 원했고, 손추가 직접 그 일을 맡았습니다.”“하지만 그분은 왕이셨고, 무공도 출중하셨습니다. 손추는 선제를 이간질해 부친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결국 모반의 증거를 조작했습니다.”그 뒤의 이야기는 서왕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조정에 충성을 다했다.군주의 명이 떨어지면, 신하는 죽는 수밖에 없었다.유배길에 올라서도 그의 아버지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그는 끝까지 선제가 자신의 결백을 밝혀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약쟁이단이 아버지의 목숨을 노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진실이 드러났을 때, 서왕은 마치 천근 무게의 짐을 내려놓은 듯 가슴이 후련해졌다.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쓰라림으로 번져왔다.그가 정원으로 돌아오자, 멀리 나무 아래서 완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왕은 한 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와락 안아 올렸다.“이번 일을 해결해줘서… 정말 고맙다!”“드디어 모두가 알게 되었어. 부친께서 얼마나 억울하게 누명을 썼는지…”“선제도 진범을 찾고자 했었지만, 결국 오늘에서야 제대로 밝혀졌어. 정말, 정말 고맙다…”서왕은 거듭 고마움을 표현했고, 완부옥은 조금은 지겨워하며 그를 말렸다.무엇보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직접 껴안을 줄은 몰랐다.조금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완부옥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됐습니다. 됐어요. 그렇게 큰일도 아닌걸요.”“정말 제게 보답하고 싶다면, 폐하께 소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여쭤봐 주세요.”서왕은 그녀를 놓고,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아직도 포기 못 한 것이냐?!”완부옥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게 아닙니다.”“그저 소환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정인이 아니더
세상일이란 참 아이러니했다. 열무신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가 천옥에 도착했을 때, 모용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모용길의 시신을 바라보며 열무신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낮은 포효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재앙은 천 년을 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모용길 같은 자는 200살이 넘게 살다가 죽었는데, 맹성주 같은 이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생각하니 열무신의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열무신은 천옥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기절해버렸다.황궁. 봉구안은 임시로 자진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임 중이었고,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회임이 실감 났다.정말로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소욱이 정해준 태의는 매일 그녀에게 와서 맥을 짚었다. 최근 그녀의 태상은 안정되어, 더 이상 안태약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저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아이의 일에 대해서, 봉구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사건도 이미 해결되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 현재 유일하게 장미에 대해서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장미의 옛 병이 재발할까 걱정되었다.그것이 만약 재발한다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을 터였다.봉구안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도착했다. 소욱은 약쟁이 사건의 최신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무신이 붙잡은 그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구나. 이미 200년 전에 태조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엿다. 모든 것이 모용길의 환상이었던 거야.”“짐은 이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이다. 모용길이 남긴 큰 돈은 모두 약쟁이 매매로 얻은 것이야. 짐은 이 돈을 피해자들과 그 친척들을 위로하는 데 쓸 것이다.”“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그는 걱정이 가득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이 조치는 백성
마지막으로 태조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석에 누워 숨이 끊어질 듯했다. [모용길... 내 아우야, 너는 내 마음을 알지. 짐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다. 새 정치를 세우지 못했고, 태자는 아직 어리지. 난 단지 하늘이 인색해서 짐에게 몇 년을 더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단 일 년이라도 짐이 일 년만 더 산다 해도 좋을 텐데... 남쪽의 수해, 북쪽의 기근, 남제는 사방에서 적에 둘러싸여 있고, 북연은 우리를 업신여기며, 내부에는 반적이 있는데... 어찌할까, 염라대왕이 목숨을 거두어 가니, 짐은...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구나. 아우야, 나라의 일을 모두 네 손에 맡기노니, 너는 태자를 보필하라. 너는 그의 고모부이자, 또한 그의 상부이니. 아우야, 짐은 오직 너만 믿는다.]기억 속의 태조가 눈앞의 그와 겹쳐졌다. 모용길은 낮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그의 눈에 태조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형님! 형님께서 원하던 것을 제가 마침내 이루어냈습니다! 형님께서는 불로장생할 것이고, 이 남제는 반드시 형님의 통치 아래 번영하며, 장차 천하를 통일하여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당초 남제가 새로 세워졌을 때 태조는 약속대로 그에게 강산의 절반을 주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태조의 뜻이 천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조와 계속해서 사방을 정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태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그는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모용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눈물로 가득 찬 시선 속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팔을 뻗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여인은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인, 남은 길은 제가 당신과 함께 걸을게요." 모용길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함께..."
열무신은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가 아니었다면, 또 누군가 새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그는 사로잡은 자객들을 직접 데리고 돌아와 천옥에 넘긴 뒤, 단 한숨도 쉬지 않고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자객들은 처음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모용길이 이미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희망도 이미 무너진 셈이었다.이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저희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폐태자를 노린 건 그 분의 ‘혈’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태조 황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불로장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백골이었습니다. 이백 년 전, 모용길이 시신을 도굴해갔을 때부터 이미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건, 망상이었어요!”“애초에 죽은 자였다고요!”그들이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말투에는 모용길을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쓸모없는 일에 목숨을 건 그를 그들은 미련한 바보로 여겼다.같이 심문을 진행하던 관리가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태조 황제께서 살아난 적이 없다는 걸 말이다.”“모용길이 그렇게까지 집착한 이유가 뭐였지?”자객들 중 한 명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모용길이 약쟁이를 만든 건, 그들로 실험해 불로장생의 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을 제조한 의원들은 손수 기록을 남겼고, 그 손책들엔 분명히 쓰여 있었죠. 이백 년 동안 그들이 상대한 건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시체’였다고요.”“아무리 약을 먹여도 살아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입니다.”다른 자객 하나는 공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모용길은… 이미 오래전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마치… 마치 그 자리에 태조 황제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또 다른 자객이 덧붙였다.“그 자는 단지 태조 황제를 살리려 한 게 아닙니다. 자신도 불로장생 하고 싶었던 거에요.”“그리고 그게… 그 자는 정말로 성공했
태황태후는 직접 선조를 만나기 위해 천옥으로 향하려 했다.하지만 황제의 명이 내려져 있었다.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모용길을 접견할 수 없었다.하는 수 없이, 태황태후는 궁으로 전갈을 보냈다.하지만 설령 황제가 허락하더라도 모용길이 누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는 오직 태조는 아직 살릴 수 있다는 집념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런 그가 천옥에 갇힌 지금, 마음은 타들어가듯 초조했다.“그 어린 황제놈은 어딨느냐! 어서 나를 뵈러 오라 하지 못할까!”모용길에게 후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는 생각했다.이 나라 남제는, 태조와 자신이 함께 세운 나라였다.그런 자신을 막고 있는 소욱 따위가 어찌 감히 군림한단 말인가.천옥에 갇힌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쳤다.“태조를 살려야 한다! 어서 황제를 데려와라!”하지만 그는 몰랐다.그의 그 모든 고함과 분노는 소욱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그를 흔들기 위한 계략이었단 사실을 말이다.그리고 다섯째 날.천옥의 간수가 냉정한 얼굴로 명을 전했다.“폐하의 어명이십니다.”“모든 죄를 자백하고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죽을 때까지 말입니다.”모용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허튼소리 마라! 그 어린놈이 과연 알기나 한단 말이냐, 내가 이 모든 짓을 왜 해왔는지를 말이다!”간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나으리,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자백했다고 당장 목을 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태조께서 하사하신 면사금패는 아직도 가지고 계시잖아요?”그 말에 모용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그렇다.면사금패만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황제 따위가 그를 처형할 권한은 없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조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결심이 선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두 시진 후.모용길이 쓴 자백서가 궁으로 들여졌다.그 문서는 곧장 어전으로 올라갔다.문서를 넘겨받은 소욱은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길수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