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중순이 되자 태양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봉구안 일행은 순조롭게 서여국에 도착했다.여자가 대권을 잡은 서여국이었기에 거리를 활보하는 여인들이 꽤 많았다.순찰을 도는 수비군마저도 전부 여인이었다.예전의 서여국도 남자가 대권을 잡은 시기가 있었다.하지만 한차례 나라가 뒤집힐 정도의 전쟁이 있은 후 사내들은 모두 전장에서 죽고 여인들은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되었다.나중에 사내들이 천천히 많아지긴 했지만 권력의 맛을 본 여인들은 잡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황실은 여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인에게만 황위를 넘겨주었다.간택된 관료들도 대부분이 여인이었다.사내도 관료가 될 수는 있었지만 극히 적었고 실권을 잡을 수도 없었다.서여국의 여인들은 상위자가 여인이어야만이 이 대권을 영원히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만약 사내가 대권을 잡는다면 판도가 완전히 바뀔 것이다.그래서 서여국 황제는 아들이 있지만 황위는 공주에게만 물려주기로 되어 있었다.봉구안은 몰래 온 사절이기에 대놓고 알현을 청할 수 없었다.그녀는 사람을 보내 서여국 내정을 자세히 알아본 후에 움직이기로 했다.조사를 나갔던 비응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공자, 서여국 법도는 참으로 이상합니다. 현임 황제는 40세인데 슬하에 아들딸이 없어요. 법도대로면 방계 친척에게 황위를 물려줘야 하거나 적합한 후보가 없으면 능력이 있는 자에게 물려준다고 합니다.”황실의 성이 바뀌는 건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이건 모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함이고 백성들에게 황위를 외족 여인에게 물려주더라도 절대 사내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황실의 의지이기도 했다.다른 비응군이 계속해서 아뢰었다.“공자, 제가 알아본 바로 서여국 황제에게는 잃어버린 쌍둥이 여동생이 있는데 몇 달 전에 드디어 찾았다고 합니다. 현재 황제는 중병을 앓고 있고 아마 그 여동생이 유력 후보인 것 같습니다.”“성 안에 도처에 의원을 찾는다는 공시가 붙었습니다. 서여국 황제의 병세가 그
봉구안은 멈칫하며 고개를 숙였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고개를 다시 들자 황색 침복을 입은 서여국 황제가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략 사십 세 정도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약한 주름이 져 있었지만 몸에서 풍기는 날카로운 기운은 여전했다.이런 황제가 나라를 지키고 있으니 서여국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 같았다.서여국 황제는 싸늘한 눈으로 봉구안을 노려보며 말했다.“자신의 황후를 서여국에 보내다니. 남제 황제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군. 짐이 널 죽일까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지?”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었기에 봉구안은 대범하게 인정했다.“서여국 폐하를 뵙습니다. 이번에 귀국에 오게 된 건 남제의 황후가 아닌 사절의 신분으로 온 것입니다. 맹 소장군은 더더욱 아니지요.”“위장을 하고 뵙게 된 것은 국세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하지만 저나 남제는 폐하께 무례를 범할 뜻은 없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서여국 황제는 여전히 검을 겨눈 채로 비아냥거렸다.“이미 무례를 저질러 놓고 양해를 바란다? 맹 소장군의 용맹함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남제 황제가 널 사절로 보냈는데 짐이 어떻게 안심할 수 있지?”봉구안은 날카로운 검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여제를 향해 예를 취했다.“소신은 저희 폐하의 명을 받고 서여국 사절이라는 중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서여국 영토이니 폐하께 사신으로서의 예를 취하겠습니다.”“혹여 폐하께선 남제와 동맹을 맺을 생각은 있으신지요?”서여국 황제의 눈빛이 근엄해졌다.그녀는 검을 내리고 외투를 걸친 뒤에 긴 머리를 위로 올려서 묶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힘없는 황제에서 여제로서의 위엄을 되찾았다.곧이어 상석에 앉은 그녀는 봉구안에게 자리를 권했다.“서 있지 말고 앉아서 얘기하거라.”봉구안은 가져온 국서를 서여국 황제에게 내밀었다.“남제가 원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전쟁이 터지면 서여국 병사는 남제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조만
봉구안은 힘겨운 표정으로 답했다.“나리, 소인의 의술이 부족하여 방도가 없습니다.”그 말을 들은 숙연은 눈물을 흘렸다.“자네도 방법이 없단 말인가…”봉구안은 굳은 표정으로 예를 행했다.“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숙연도 만났으니 더 이상 귀찮은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황궁 입구에 도착하자 관복을 입은 여인 한명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궁인이 말했다.“이분은 승상 나리입니다. 예를 행하셔야 합니다.”승상 조여란은 걸음을 멈추고 봉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네가 공시를 뗀 의원이야?”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예.”조여란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치켜올렸다.서여국에서 여인이 사내에게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무례에 속하지 않았다.조여란은 황제보다 조금 나이도 어리고 더 말라 보였다.승상의 자리까지 올라간 여인이라서 그런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 빨리 나온 거지?”봉구안은 침착하게 답했다.“소인의 의술이 부족하여 폐하의 병을 고쳐드릴 수 없어서입니다.”조여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부족한 의술로 공시를 뗐단 말이냐? 어디서 사기나 치던 놈이 궁에 뭐 도둑질할 게 없나 하고 들어온 건 아니고?”다른 사람이었으면 그 말을 듣고 크게 당황했겠지만 봉구안의 마음은 평온했다. 그녀는 땀을 닦는 척 이마를 훔치며 짐짓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폐하의 안위가 걱정되어 용기를 내본 것입니다. 다만…”조여란은 그녀를 홱 밀치고는 짜증스럽게 말했다.“궤변은 듣고 싶지 않다. 여봐라! 이 돌팔이를 끌고 가서 몸을 수색하라! 궁중의 물건을 도둑질한 게 없나 잘 확인하고 곤장 스무 대를 쳐라!”봉구안은 곤장은 두렵지 않았지만 몸을 수색한다면 여인의 신분이 드러나서 심문을 받게 될 것이다.시위가 다가오자 봉구안은 언성을 높여 물었다.“승상 나리의 말씀대로라면 제가 도둑질한 게 없어도 곤장을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조여란은 거만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물론이지! 의술도 변
서여국 황궁을 떠난 후, 봉구안은 바로 객잔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서여국 승상은 비겁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자이기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그리하여 그녀는 기루에서 남풍관, 그리고 다시 기루에 들렀다. 기회를 엿봐서 의용술로 모습을 바꾼 뒤에 떠나기 위함이고 여기서 뭔가 알아낼 수도 있었다.이런 유흥업소는 정보가 가장 빠른 곳이기도 했다.기루.봉구안은 기생을 한 명 불렀다. 기생이 손님을 받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봉구안은 보름 간 그녀를 독점하기로 하고 돈을 지불한 후에 방에서 가야금만 연주하라고 했다.이러면 그녀의 행적을 감추는데 유리할 것이다.단지 돈이 많이 들어간 것이 조금 씁쓸했다.이 기생의 일당은 은화 3냥이었는데 그녀가 묵는 객잔보다 더 비쌌다.다행히 기생이 말을 잘 듣고 아는 게 좀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공자, 그건 모르시나 봐요. 저희의 폐하께선 젊으셨을 때 중상을 입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에요. 폐하께는 쌍둥이 여동생뿐이니 아마 황위는 숙연 대인에게 물려주실 것 같아요.”봉구안은 생각에 잠겼다.“폐하의 병이 심각하냐?”“예. 이미 조회에 안 나오신지 좀 되었다고 해요. 승상께서 국무를 처리하고 계시죠.”봉구안은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무심한듯 말했다.“승상께서 권력을 독점하신다? 그럼 그 숙연 대인은 그걸 눈 뜨고 보고만 있었단 말이냐?”기생은 아무런 의심 없이 말했다.“소인이 여기 간판 언니에게서 들은 바로는 숙연 대인이 승상을 추천한 거랍니다. 자신은 한마음 한뜻으로 폐하를 보살피고 잠시 나랏일은 신경 쓰고 싶지 않다면서요.”봉구안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불필요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가지 않았다.“술이 괜찮네. 한 단지 더 내오거라.”“공자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제가 같이 한잔 마셔드리겠습니다.”봉구안은 생각에 잠겼다.한쪽은 막강한 권력을 잡은 승상, 한쪽은 미래의 황제가 될 유력후보. 원래라면 서로 경쟁 관계이고 사이가 안 좋아야 마땅하지만 이
은육은 지난번 천지설산에서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황후가 시킨 일은 평소보다 더 열심히 했다.승상 쪽 이상한 움직임을 조사하기 위해 그는 매일 한 시진만 잠을 잤다.그러다가 드디어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다.“마마, 어젯밤에 서여국 황제의 쌍둥이 동생이 몰래 승상부 뒷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승상과 둘이 오래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아요. 저는 너무 가까이 갈 수 없어서 자세히 듣지는 못했는데 그들이 서여국 황제를 제거하려는 것 같습니다.”방 안의 비응군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서여국에 큰 대란이 일어날 것 같았다.비응군 수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봉구안에게 예를 행했다.“소인이 보기에 서여국 내부에 대란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서여국 황제는 스스로를 보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니 저희의 제안에 답을 줄 수 없겠지요. 당장 남제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소식을 기다리는 건 저희들이 하겠습니다!”그들은 죽음을 각오할 수 있지만 소장군이 서여국에서 변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봉구안은 싸늘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대란이 우리에겐 기회일지도 몰라.”다음 날.봉구안은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여 공시를 떼고 입궁했다.같은 궁인이 천택궁으로 그녀를 안내했다.내전에서 숙연이 황제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흐느꼈다.“언니,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가 만 천하에 의원을 찾는다고 공시를 냈으니…”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서서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잠시 후, 그녀에게 고개를 돌린 황제가 입을 열었다.“또 공시를 뗀 의원이 왔네?”숙연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봉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겉보기에 부드럽고 애수에 찬 눈동자에서 수상한 한기가 넘쳐흘렀다.서여국 황제는 사람을 물리고 봉구안만 내전에 남겼다.사람들이 밖으로 나간 후, 봉구안은 공손히 황제에게 예를 행했다.“폐하, 저입니다.”서여국 황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그동안 그녀를 제외하고 공시를 뗀 자가 없었다.“짐의 소식을 기다리라 하지 않았느냐? 전
이들은 어둠 속에서 서여국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일 것이다.그래서 첫 대면에서도 서여국 황제는 주변을 물려달라는 봉구안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이다.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 중에 바보는 없었다.몸을 일으킨 서여국 황제는 침대머리에 놓인 생화를 매만지며 말했다.“짐의 병은 아주 어릴 때부터 짐을 따라다녔지. 매년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다.”“특히나 최근 몇 달은 줄곧 병상에 누워만 있어서 제대로 정무를 처리할 수조차 없었지. 승상은 이 기회에 자신의 세력을 늘리고 있었다. 짐이 눈치챘을 때 그녀는 이미 만인지상의 위치까지 올라갔더군.”고개를 돌린 황제는 여전히 요지부동인 봉구안을 보고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짐을 배신한 자들은 전부 죽어 마땅하다.”봉구안이 담담히 물었다.“거기에 친동생도 포함입니까?”순간 서여국 황제의 손이 흠칫 떨렸다.그녀는 봉구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동산국에서 짐에게 사람을 파견해서 같이 남제를 침공하자고 하더군. 솔직히 저들이 약속한 조건이 남제의 제안보다 좋다고는 볼 수 없어도 솔깃한 제안이긴 했어.”“남제를 몇 등분으로 나누어도 우리에게 성 몇 채가 주어지는데 너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황제의 눈빛이 뱀처럼 서늘하게 빛났다.봉구안이 말했다.“동산국을 선택하셨다면 첫만남에서 저를 죽이셨을 겁니다.”“하!”서여국 황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봉구안의 앞으로 다가가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맞아. 짐의 마음은 남제에 좀 더 기울었어.”“동산국이 남제를 멸망시킨 후에 다음 목표가 서여국일지 어찌 알겠느냐.”“다만 서여국 상황은 너도 알다시피 내가 연맹을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지금 조정은 승상이 장악하고 있어. 그녀는 동산국과 연맹을 맺고 남제를 멸할 생각이야.”“주인을 배신한 신하라면 죽여 마땅하지요.”봉구안이 차갑게 말했다.서여국 황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승상 하나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아. 어려운 건 모든
북연.궁밖의 동화대는 황가에서 건설한 작은 행궁이었다. 압박에 의해 퇴위한 태상황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이곳에서 편히 쉬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상 구금이나 다름없었고 안팎에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내실, 태상황은 근엄한 자세로 상석에 앉아 있고 그의 앞에는 불효자식인 신임 황제가 있었다.황제는 강압적인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고 태상황도 화가 난 상태였다.“남제를 협공한다고? 네가 북연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구나!”태상황은 과거에 마음이 약해져서 이 불효자식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가 되었다.신임 황제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병부때문이었다.그의 눈에는 광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마치 이 문제만 해결하면 천하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아바마마, 곧 거사가 성사됩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온 천하가 북연에 귀속되는 광경을 보게 되실 겁니다. 북연이 천하통일을 이뤄내지 못하더라도 남제는 멸망하게 되겠지요! 그러니, 병부를 내어주시지요!”태상황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아들을 꾸짖었다.“어리석은 놈! 넌 미친 게 틀림없어!”“남제는 하루아침에 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짐은 이 일에 동의할 수 없다!”인내심이 바닥난 신임 황제는 태상황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울부짖었다.“아바마마, 왜 아들을 이리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짐도 대국을 위해서란 말입니다! 아바마마께선 나이가 드셨고 북연은 더 이상 아바마마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전장에 패배한 기록이 없던 북연이 아바마마의 손에서 연속 남제에 패했습니다.”패배한 전장을 언급하자 태상황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손을 뻗어 아들의 뒤통수를 갈기며 호통쳤다.“그걸 말이라고! 이 후레자식이! 네가 아니었으면 북연은 삼십만 대군을 잃지 않았어! 네가 아니었으면 남제가 화룡을 접촉할 일도 없고 화룡을 제작해낼 일도 없었어!”“북연의 지금 상황은 다 네가 초래한 거야!”뒤통수를 맞은 신임 황제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태상황이 분노한 고함을 질렀다.“미친 놈!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짐은 네 아비이자 북연의 황제란 말이다!”하지만 그의 아들이자 현임 황제는 병부에 눈이 멀어 그의 말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다.태상황이 강력한 무공을 갖고 있는 것을 걱정해서 사내들은 그에게 근력을 무력화시키는 약을 먹였다.나이가 든 태상황은 결국 숫자에 밀려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그는 곧 떠나려는 신임 황제를 보고 곧 있으면 이 사내들에게 유린당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처음으로 당황했다.“아니… 아니 된다!”신임 황제는 매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병부, 내놓으실 거지요?”분노한 태상황이 포효했다.“하늘이 북연을 멸하려는 게구나!”신임 황제가 음침한 눈을 하고 말했다.“아바마마,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병부, 내놓으실 거죠?”태상황의 몸은 완전히 무력화된 상태였다.병부를 내놓지 않는다면 오늘 밤 무슨 일을 당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이런 치욕을 감당할 수 있는 사내는 없었다.하물며 그는 북연의 황제였다.태상황은 굴욕의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그래, 알았다!”일각이 지난 후.신임 황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병부를 들고 동화대를 떠났다.마차에 오른 그는 동화대 정문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짐의 아바마마도 역시 정상인이었군.”동화대.태상황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바닥에 깔린 비빈들의 시체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었다.불과 몇 달 사이에 그는 열 살은 더 늙은 것 같았다.그는 후회막심하여 검을 들고 자결을 택하려 했다.병부를 내놓으면 북연이 어떤 결말을 초래할지 뻔히 알면서 자신의 결백을 위해 결국 내놓고 말았으니 나라에 큰 죄를 지은 거나 다름없었다.챙그랑!검이 바닥에 떨어졌다.결국 그는 죽을 용기조차 없었다.그는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어쩌면 하늘과 조상님들이 보우하여 협공 작전이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은가?태상황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창밖의 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한편, 서여국.봉구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
봉구안의 한마디가, 마침내 모용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그는 쇠창살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이놈이! 감히 태조 폐하를 저주하다니!”“태조 황제 폐하께서 이 강산을 개척하지 않으셨다면,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오늘날을 누리겠느냐!”“특히 너! 소가의 자식! 네놈이 정말 태조께서 살아계시길 바란다면 당장 본좌를 풀어라!”소욱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태조 황제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모용길은 그를 믿지 않았다.“당장 날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소욱은 억눌린 분노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태조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하지만… 그 전에 말해보거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반드시 밝혀야겠다.”모용길은 한참이나 소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육지산.”그곳은 황성 내부에 있는 산이었다.소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봉구안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모용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 또는 산속에 기관 장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도 소욱을 따라나섰다.한 시진이 지나, 일행은 육지산에 도착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구름이 몰려들어 햇빛을 가리며, 마치 용이 잠든 연못을 둘러싼 기운처럼 음침한 기색이 피어올랐다.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다.소욱의 옷자락은 세차게 펄럭였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육지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산에 오른다. 태조를 찾아라!”“예!”그는 봉구안이 회임 중인 것을 고려해, 줄곧 옆에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서였다.그러나 봉구안은 전혀 허약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날쌘 걸음으로 병사들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병사들이 한 구덩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폐하!
봉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는 황실의 혈족을 해한 죄이다.”모용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허, 무지한 계집이구나.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폐하께서 절 죽이고 싶으시다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그 얼굴에는 오히려 당당함이 어려 있었다.그러나 봉구안의 시선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네가 해한 이는 바로 태조 황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그 말에 소욱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모용길이… 태조의 측근들을?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모용길의 웃음은 사라졌고, 시선은 무겁게 봉구안에게 꽂혔다.봉구안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소욱이 언젠가 말했던 ‘옥비석의 재앙’.남제가 건국된 직후, 태조 황제를 지키던 측근들이 하나둘 기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옥비석의 반작용 때문이라 여겼지만… 봉구안은 단정했다.“그 죽음들은 전부 너 모용길이 꾸민 짓이 아니더냐.”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길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날카롭게 울렸다.그녀는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 짐작이 맞다면, 그 시절의 태조는 이미 병세가 깊었던 상태였을 거야.”“너는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술을 익혔고, 그 실험 대상으로 태조 곁에 있던 이들의 피를 썼지.”“다만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말려 죽였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야.”“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옛 서왕, 지금의 서왕의 부친이셨던 거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피만이 태조의 몸에 반응을 보였을 거야. 그렇게 태조께서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됐고, 넌 그때부터 계속해서 약쟁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진짜 목적은 태조를 살리는 거였지.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게 너의 최종 목표였을 거야.”모용길은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 노도사는 봉구안이 데려온 가짜 도사였다.사실 그는 타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지만, 실제로 삼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이번 계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였다.약쟁이 사건의 진짜 배후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그 자의 진짜 목적은 불로장생.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단번에 끝을 내야 했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소욱이 조용히 말했다.“약이 식겠다. 먼저 약부터 마시거라.”……밤이 깊은 시각, 궁 밖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노도사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소욱과 봉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을 교환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은이와 그 일행이 도사를 납치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천옥으로 이송 중입니다!”소욱은 심장이 요동쳤다.진실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그는 봉구안과 함께 곧장 천옥으로 향했다.반 시진쯤 지나, 천옥.두 사람은 마침내 그 사내와 마주했다.노도사를 납치했던 자이자, 어쩌면 약쟁이단의 진짜 주모자일지도 모를 인물이었다.봉구안은 호위복으로 변장한 채 소욱 옆에 서 있었다.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에, 그녀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감옥 안의 남자는 매우 늙어 보였다.눈은 푸르스름하게 흐려졌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확실히 동방세가 그려낸 인물과 유사했다.그는 소욱을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절 잡기 위해, 아주 큰 판을 짰다던데 과연 사실이었군요.”소욱은 감방 너머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네 정체가 무엇이냐.”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모용길입니다.”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정말로… 이 남자가 그 전설의 모용길이란 말인가.이백 년을 살아온 그 인물이 맞다고?모용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
소욱은 봉구안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방금 전까진 분명 모용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태조 황제 묘까지 들먹이는 것일까?그래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해 주었다.“태조께서는 동릉에 묻혔다.”도굴을 막기 위해 태조의 능은 총 열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덤엔 무거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허나 그 열세 곳 모두가 가짜였다.진짜 묘는 오직 역대 황제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능을… 잠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소욱의 눈썹이 즉시 찌푸려졌다.“안 된다.”태조 황제는 이미 서세를 마친 성조였다.그분의 안식을 함부로 깨뜨릴 순 없었다.봉구안도 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은 약쟁이 사건의 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그녀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진정 불로장생을 원한 사람은 모용길이 아니라 태조 황제였을 수도 있습니다.”소욱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구안아, 지금 네 말은… 너무 황당하구나.”“설마 이 모든 약쟁이 사건의 배후가 태조 황제라는 것이냐?”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동방세가 그린 그 인물은 모용길과 닮았을 뿐, 자신들의 소씨 가문과는 단 한 점도 닮은 데가 없었다.봉구안도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라 단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모용길이 연막을 치고 모용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모용가 전체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 자는 모용가의 존망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그렇다면 그 자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 건, 다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폐하, 이백 년 전의 일은 저희가 직접 본 게 아닙니다.”“하지만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황제께서는 남산왕, 서왕, 그리고 모용길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남산왕은 태조의 명을 따라 세세손손 봉맥을 지켜왔고, 서왕가는 동부를
봉구안은 이전에 모용가의 선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태조 황제가 천하를 개척할 당시,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군량과 보급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지만 불과 세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향년, 마흔.그런데 지금 동방세가 그려낸 배후 인물의 얼굴이 그 모용길과 너무도 흡사했다.소욱 역시 그림을 비교해보았다.한 손엔 방금 받은 초상화, 다른 한 손엔 책에 실린 옛 그림이 들려있었다.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십중팔구 정도 닮은 듯했다!그는 봉구안과 눈을 마주쳤다.“얼굴이 닮은 거겠지. 아니면 모용가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서자일지도 몰라.”소욱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그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강호를 누비며 별의별 기이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충북에는 삼백 살 넘은 노인이 있다 들었습니다.”“신무파 장문도 이백십칠 년을 살았다죠.”“남제가 건국된 지 이제 겨우 이백 년 남짓입니다.”“만일 정말 불로장생이 가능하다면, 모용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게다가, 그녀를 더욱 확신에 가까운 의심으로 이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다.“폐하, 서왕께선 납치 당시에 그들이 피를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요.”“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서왕 말로는, 그 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던데... 횡설수설하는 미치광이였다고.”봉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들을 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모용길이 이번 일의 진짜 배후라 생각합니다.”“모용가의 조상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독초를 재배하려면 내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요.”“그리고 모용욱의 검거도 너무 순조로웠습니다.”“모든 것이… 너무 ‘그럴듯’했어요.”“어쩌면, 모든 건 모용길이 준
봉구안은 소욱이 자신을 다시 궁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자신이 서여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욱은 조심스레 사과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문득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소욱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동작엔 위로와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번 일은 폐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하신 건 제가 드린 믿음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담대연은 말재주가 뛰어납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흔들릴 만합니다.”그녀는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제 마음속에서 가족이 있는 곳이, 진짜 ‘집’입니다.”“폐하께서는 저의 지아비이십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저의 여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이지요.”“서여국이 아무리 좋아도, 폐하만큼 소중하진 않습니다.”소욱의 손끝이 떨렸다.“너… 그 말이 진심이냐?”그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가 정말 네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봉구안은 오히려 되물었다.“폐하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그러자 소욱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사부랑 사모, 그리고 봉장미, 게다가… 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세상 사람들 다 그러더라. 자식은 어미의 인생 그 자체라고… 지금도 내 순위가 그리 높진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내 자리는 더 밀려나겠지.”봉구안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저에게 산처럼 큰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만, 그분들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혈육’일 뿐입니다.”“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기에 생긴 아이인데, 어떻게 그 아버지를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폐하야말로 제가 앞으로 비바람을 함께할 사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유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