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측 군대가 대치 중인 가운데, 대하 측은 평화 협상을 위해 사신을 선성 근처 유현으로 보냈다.사신은 남제 황제 소욱을 만나, 대하의 평화 의지와 함께 과거 남제와의 화친 및 대하 장공주의 공헌을 강조하며 설득에 나섰다.소욱은 상석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무 말 없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가 풍기는 느긋하고도 오만한 태도는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사신의 말이 끝나자 소욱은 찻잔을 내려놓고 차갑게 시선을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상대의 내면을 꿰뚫는 듯했다.“평화 협상이라?”사신은 준비해온 국서를 급히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소욱은 국서를 읽은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위엄 있는 모습은 보는 이를 압도하며, 상대방의 숨을 멎게 할 만큼 위압적이었다.사신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몇 초 동안의 침묵이 이어지자, 그는 땀을 흘리며 간신히 견뎌야 했다.마침내 소욱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냉소적인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고작 이 정도로 나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사신은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폐하, 그 세 개의 성은 비옥한 땅이며…”“허.”소욱은 냉소를 내뱉으며 말을 끊었다.“보아하니 대하는 장병들의 목숨도 가볍게 여기고, 국가의 멸망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군.”“폐하!”사신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소욱의 손짓에 따라 사람들이 그를 끌어냈다.“폐하! 대하는 진심으로 평화 협상을 원합니다! 세 개의 성이 부족하다면 네 개를… 네 개를 드리겠습니다!”소욱은 긴 소매를 휘두르며 단호히 외쳤다.“대하가 양보하지 않겠다면 성을 공격하라! 과인 명하노니, 먼저 대하를 쳐라!”……대하.대하 조정에 전해진 전황은 심각했다.“폐하! 남제군이 국경에 집결하여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습니다!”황제는 놀란 표정으로 대전으로 향했다.“남제군이 이렇게 빨리 진격했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신하들 사이에서는 불안감이 퍼졌다.“폐하, 저희 병력 대부
“황후마마! 보고싶었습니다!” 소군주는 격식 있는 궁중 예를 올렸다.가벼운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숨을 헐떡였다.곧바로 소욱에게도 예를 올렸다.“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봉구안은 예상 밖의 방문에 물었다.“소군주께서 어떻게 성에 들어오셨습니까?”성내 적군은 대부분 제압되었지만, 아직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소군주는 밝게 웃으며 전혀 두려움 없는 모습으로 말했다.“아버님을 따라왔어요. 아버님께서 식량을 보내러 성에 들어오셨는데, 저도 도울 수 있답니다.”소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어린 네가 뭘 할 수 있겠느냐.”소군주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발끈하며 말했다.“폐하, 저를 너무 깔보지 마세요.”“저는 선성에서 자랐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길을 안내할 수 있어요!”“그나저나, 왜 주국공부에 안 계시고 이렇게 초라한 여관에 머물고 계신 거예요?”봉구안은 담담히 대답했다.“성내 아직 적이 남아 있어서 여관에 머무는 것이 병사들을 이끌기 더 수월합니다.”소군주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봉구안의 손에 난 상처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황후마마, 다친 것입니까?”“사소한 상처입니다.” 봉구안은 손을 뒤로 감췄다.소욱은 소군주를 옆으로 끌어냈다.“식량을 가져왔으면 이제 돌아가거라. 나와 황후는 논의할 일이 많다.”대체 왕숙께서 무슨 생각으로 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성에 온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소군주는 몸을 뿌리치며 봉구안을 향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황후마마, 마마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마마께서 제 약을 구하러 천지설산까지 가셨잖아요. 정말 죽을 뻔했다고 들었습니다. 절대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물 한 방울의 은혜에도 샘물로 갚아야 한다는데, 이건 저의 생명을 구한 은혜니까요.”“제 목숨은 마마의 것입니다. 앞으로 저를 필요로 하시면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그녀는 마치 강호의 무림인을 흉내 내는 듯한 말투로 말하며 봉구안을 향해 진심을 드러냈다.봉구안
남제, 황성.백성들은 전쟁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남제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들려온 소식은 남제가 북연과 대하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그게 정말인가?”“정말이네! 우리 조카가 군영에서 보낸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어. 이제 걱정할 필요 없다더군. 남제의 위기는 끝났으니, 이제 망할 걱정을 해야 하는 건 북연과 대하,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야!”이 소식은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사람들은 환호성을 터뜨리며 기뻐했다.곧이어 조정에서 징병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징병 공고가 사방에 붙었으니, 이번엔 정말인가 보다!”“나도 군에 지원할 거야! 남제를 위해 국토를 넓히고 가문에 영광을 안겨야지!”“나도 지원할래! 북연과 여러 나라들이 우리 남제를 모욕했으니, 이제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해!”이번 징병에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이들은 모두 이번 멸망 위기를 통해 깨달은 바가 있었다. 백성들 각자도 나라의 운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온몸으로 느꼈던 것이다.그들은 북쪽과 동쪽 방어선이 연이어 무너질 때, 가정에서 불안에 떨며 밤낮으로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남제를 지키려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이제 더 이상 집에서 무기력하게 소식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거리에서는 과거 시험 준비에 몰두하던 서생들마저 거리로 나와 외쳤다.“대장부라면 마땅히 전장에 나서야 해!”“갑옷을 입고 국위를 떨치며, 목숨을 걸고 적을 물리쳐야 한다!”“북연과 같은 나라가 우리 남제를 깔보는데, 우리 남제의 영웅들이 어찌 나약한 존재로 머물 수 있겠는가!”견진이 이끄는 부녀자 부대도 참전을 선언했다.“남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해낼 수 있어요! 우리도 서녀국의 여성들처럼 전장에 나가 싸울 겁니다!”한편, 서녀국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그들은 이미 소주국을 정복했고, 이제 정국을 공략할 계획이었
완부옥은 오래 고민한 끝에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바보 같은 사람…” “사실 그날 밤, 전하께서는 죽은 듯이 곯아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날 저희 둘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서왕은 이 말을 듣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뭐라고?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동침하지 않았다니?그럼 아이는 어떻게 된 거지?완부옥은 그를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이렇게 멍청하다니,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동침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아이도 없겠지요. 이해가 되십니까?”서왕은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그동안 온화했던 눈빛에 분노를 담아 그녀를 노려보았다.“아이가 없다고?”“그럼 그 희맥은 뭐였다는 말이냐?”그는 원래 온화한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겨우겨우 화를 누르고 있었다.완부옥은 대답했다.“남강의 주술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고술로 그렇게 보이게 했던 거라고요.”서왕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왜 그녀가 회임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 늦었는지 이해됐다.단순히 몸매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회임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그녀는 처음부터 그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어떻게 그녀는 그를 이렇게 속일 수 있었을까...서왕은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한 분노로 가득 찼다.“내가 너에게 무슨 원한을 졌다고, 네가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이냐!”이미 사실을 털어놓았으니, 완부옥은 그가 화를 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녀는 다른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마치 폭발 직전의 작은 짐승을 달래듯 말했다.“소환에게 이 일을 말하지 않고, 저와 이혼하지 않는다면 제가 충분히 보상하겠습니다.”“전하께서 원하는 아이를 다른 여자를 시켜 낳게 해주겠습니다.”“아들도 딸도 모두 만들어주겠습니다.”“잘생긴 남자도 데려다 줄 수 있습니다. 남강의 젊은이들은 정말 잘생겼거든요.”“만약 싫으시다면, 고술을 써서라도 죽고 못 살게 만들어주겠습니다.”완부옥은 이미 서왕을 위해 어떻게
선성.성 안의 적군은 구련산으로 물러난 북연군을 제외하고 모두 포로로 붙잡혔다.포로들은 갑옷과 무기를 내려놓고 나서야 선성을 나설 수 있었다.대하군이 보유했던 다양한 활과 석궁은 선성에 남겨져 남제군의 손에 넘어갔다.단춘은 그 무기들을 파괴하려 했으나, 매번 남제군의 감시를 받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추운 날씨 속에서 연합군 병사들은 얇은 옷만 걸친 채 선성을 떠났다.서로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며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단춘은 마지막으로 선성을 돌아보며 굳게 다짐했다.대군을 이끌고 반드시 이곳에 다시 돌아오겠다고.준비도 없이 기습당하고,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전력이 약해져 이번처럼 참담한 패배를 당하지 않겠다며 이를 악물었다.포로들은 남제군의 군영으로 옮겨져 남제군의 관리를 받았다.포로 생활의 유일한 이점은 마침내 음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한 사람당 흰 죽 한 그릇과 만두 하나뿐이었지만, 선성에 갇혀 있을 때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그러나 단춘처럼 강직한 이는 남제군이 제공하는 음식을 거부했다.그는 죽이 담긴 큰 솥을 발로 차 뒤집어버렸다.남제군은 즉시 그를 붙잡아 나무 우리에 가뒀다.그는 머리를 들어 대하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흘러내린 죽을 핥는 모습을 보았다.그 모습에 단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크게 외쳤다.“이 비굴한 자식들아! 적군의 음식을 먹지 마라! 안 들리느냐! 먹지 말라고!”그러나 목숨이 달린 문제 앞에서 많은 연합군 병사들이 굴복했다.단춘처럼 남제군의 음식을 거부하며 굶기를 택한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그들마저도 단춘처럼 솥을 뒤엎지는 않고 조용히 앉아 단식으로 저항할 뿐이었다.선성.봉구안은 구련산 방어를 맡아, 황제가 직접 장병들을 위로하며 밤마다 순찰을 돌고 있었다.지휘 막사 안.황제와 황후가 마주 앉아 있었다.진한길이 식사를 담은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꺼냈다.봉구안은 잠시 갑옷을 벗고 편한 옷차림으로 앉아 있었
감옥에서 간수가 전한 말에 담대연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는 벽에 새겨진 거미줄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감정을 지운 듯 멍한 얼굴로 물었다.“바깥 전황은 어떤가?”간수는 돈을 받고 전하는 말인 만큼, 예의를 차려 대답했다.“폐하께서 직접 나서서 선성의 적군을 진압하셨습니다. 각국에서 온 지원군도 모두 생포됐고요.”“현재 조정에서는 북연과 대하를 공격할 준비로 사방에서 징병령을 내리고 있습니다.”“이제 남제는 평온을 되찾았다고 보시면 됩니다.”담대연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되물었다.“‘거미줄’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간수가 잠시 당황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동방 가문에서 만든 기계 진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거 참 대단하더군요. 남제 전역에 퍼져 있어서, 적이 어디서 나타나든 바로 막을 수 있답니다.”간수는 이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흥이 난 듯했다.그러나 담대연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그는 몸을 돌려 간수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동방 가문의 기계 진법이라고?”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대답했다.“맞습니다. 바로 동방 가문입니다. 동방 공자가 대군을 이끌며 만들었다고 하더군요.”“지하 통로가 각 성을 연결해 적이 방심할 틈이 없도록 만들었답니다. 게다가 다양한 기계 장치들까지…”담대연의 눈빛은 갑자기 싸늘해졌다.‘동방 가문이라니?’‘그럴 리가 없다.’‘이건 분명 담대 가문의 ‘거미줄’ 진법이란 말이다.’그는 속으로 분노를 삼키며 생각했다.‘봉구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담대연의 눈은 깊은 어둠을 담고 있었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고요했지만, 그 속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선성.구련산은 여전히 군사들에게 철통같이 포위당했으나, 다른 지역은 점차 안정되고 있었다.황제와 황후가 떠나는 날, 주국공이 소군주를 데리고 작별 인사를 하러 나왔다.소군주는 서운한 표정으로 봉구안의 소매를 붙들며 말했다.“황후마마, 제가 황성에 가서 찾아뵙겠습니다! 저도 무술을 배우고 싶
선성, 주국공부.호위병이 다급히 내원으로 들어와 주국공에게 보고했다.“대인, 북연군이 북연 황제를 붙잡아 항복하러 왔습니다.”주국공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나간 주국공은, 땅바닥에 오장으로 묶여 굶주려 야위어버린 북연 황제와 그를 둘러싼 북연군들을 보았다. 북연군들은 갑옷과 무기를 내려놓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애처롭게 고개를 조아렸다.“제발, 먹을 것을 조금만 주십시오... 저희는 항복하겠습니다!”주국공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북연 황제를 힐끔 본 뒤 고개를 저었다.그토록 오만했던 북연 황제가 이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잡히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과연 사람의 마음은 끝까지 알 수 없는 법이다.주국공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저들을 모두 잡아들여 수감하라!”“예!”그날 밤, 주국공은 직접 서신을 작성해 황제에게 급히 전하도록 했다.이때, 소욱과 봉구안은 황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그들이 지나가는 관도 곳곳에 백성들이 나와 군대를 환영하고 있었고, 평화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모습이었다.그날 밤, 그들은 근처 역관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봉구안은 오랜만에 목욕을 하며 오랜 전투의 피로를 씻어냈고, 기분도 한결 가벼워졌다.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니, 소욱이 책상에 앉아 무언가에 깊이 몰두한 모습이었다.그녀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토록 심각하십니까?”소욱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주국공이 서신을 보내왔다. 북연군 일부가 항복하면서 북연 황제를 잡아 그 진정성을 보여주려 했다 하는구나.”북연 황제의 성격상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지만, 예상보다 빠른 전개였다.봉구안은 놀라며 말했다.“그렇다면 이번에는 북연도 북연 황제의 생사에는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높겠군요.”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무릎 위로 앉혔다.피곤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그건 북연
역관 내 다실.늙은 군의와 그의 제자는 다실로 안내되어 상석에 앉은 황제를 알현했다.소욱은 간단히 세수를 마친 상태로 편안한 옷차림이었지만, 여전히 황제의 위엄을 감출 수 없었다.검은 머리카락은 백옥으로 장식된 비단 끈으로 단정히 묶였으며, 강인하고 당당한 인상을 풍겼다.“군의라 하면서 대군을 따라 행군하지 않고, 왜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이냐?”황제의 날카로운 질문에, 늙은 군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폐하, 미천한 신은 위급한 상황에 임명된 사람일 뿐, 본래 군의는 아닙니다.”그의 말이 끝나자, 한 사람이 다실로 들어왔다. 바로 봉구안이었다.“폐하.”소욱은 그녀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지막하게 물었다.“좀 더 자지 않고 무얼 하러 나왔느냐?”봉구안은 그에게 가볍게 예를 표한 뒤, 조용히 자리에 앉으며 늙은 군의와 약동을 정식으로 소개했다.“이 일은 제가 부족했음을 탓해야 할 일입니다. 폐하, 당시 천지설산에서 제가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바로 이분들에게 도움을 받은 바 있습니다.”소욱의 얼굴에서 다소 날카로웠던 표정이 풀렸다. 그는 곧 명령을 내렸다.“그들이로구나. 앉을 자리를 마련하라.”늙은 군의는 황급히 몸을 숙이며 손사래를 쳤다.“그런 호의를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폐하. 미천한 몸으로 감히 자리를 청하지 못합니다.”하지만 옆에 있던 약동이 순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스승님, 앉으세요. 우리 한참 걸어왔잖아요. 신발도 다 해졌고요.”그는 어릴 적부터 스승을 따라 깊은 산에서 살았기에 세상 물정을 모른 채 자라왔다.황제가 얼마나 고귀한 사람인지, 신분의 높고 낮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본능대로 말하고 행동했다.늙은 군의는 약동의 무례를 바로잡으려 황제에게 사죄했다. 하지만 소욱은 그들을 꾸짖지 않았다.“격식을 차리지 마라. 내가 앉으라 했으니 편히 앉아라.”잠시 후, 역관의 하인이 다과를 가져왔다.늙은 군의는 봉구안을 보자 원래 황제에게 전하려 했던 말을 잠시 망설였다.소욱은 그의 마음을 이해한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
봉구안의 한마디가, 마침내 모용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그는 쇠창살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이놈이! 감히 태조 폐하를 저주하다니!”“태조 황제 폐하께서 이 강산을 개척하지 않으셨다면,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오늘날을 누리겠느냐!”“특히 너! 소가의 자식! 네놈이 정말 태조께서 살아계시길 바란다면 당장 본좌를 풀어라!”소욱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태조 황제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모용길은 그를 믿지 않았다.“당장 날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소욱은 억눌린 분노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태조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하지만… 그 전에 말해보거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반드시 밝혀야겠다.”모용길은 한참이나 소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육지산.”그곳은 황성 내부에 있는 산이었다.소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봉구안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모용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 또는 산속에 기관 장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도 소욱을 따라나섰다.한 시진이 지나, 일행은 육지산에 도착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구름이 몰려들어 햇빛을 가리며, 마치 용이 잠든 연못을 둘러싼 기운처럼 음침한 기색이 피어올랐다.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다.소욱의 옷자락은 세차게 펄럭였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육지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산에 오른다. 태조를 찾아라!”“예!”그는 봉구안이 회임 중인 것을 고려해, 줄곧 옆에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서였다.그러나 봉구안은 전혀 허약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날쌘 걸음으로 병사들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병사들이 한 구덩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폐하!
봉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는 황실의 혈족을 해한 죄이다.”모용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허, 무지한 계집이구나.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폐하께서 절 죽이고 싶으시다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그 얼굴에는 오히려 당당함이 어려 있었다.그러나 봉구안의 시선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네가 해한 이는 바로 태조 황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그 말에 소욱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모용길이… 태조의 측근들을?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모용길의 웃음은 사라졌고, 시선은 무겁게 봉구안에게 꽂혔다.봉구안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소욱이 언젠가 말했던 ‘옥비석의 재앙’.남제가 건국된 직후, 태조 황제를 지키던 측근들이 하나둘 기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옥비석의 반작용 때문이라 여겼지만… 봉구안은 단정했다.“그 죽음들은 전부 너 모용길이 꾸민 짓이 아니더냐.”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길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날카롭게 울렸다.그녀는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 짐작이 맞다면, 그 시절의 태조는 이미 병세가 깊었던 상태였을 거야.”“너는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술을 익혔고, 그 실험 대상으로 태조 곁에 있던 이들의 피를 썼지.”“다만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말려 죽였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야.”“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옛 서왕, 지금의 서왕의 부친이셨던 거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피만이 태조의 몸에 반응을 보였을 거야. 그렇게 태조께서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됐고, 넌 그때부터 계속해서 약쟁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진짜 목적은 태조를 살리는 거였지.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게 너의 최종 목표였을 거야.”모용길은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 노도사는 봉구안이 데려온 가짜 도사였다.사실 그는 타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지만, 실제로 삼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이번 계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였다.약쟁이 사건의 진짜 배후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그 자의 진짜 목적은 불로장생.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단번에 끝을 내야 했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소욱이 조용히 말했다.“약이 식겠다. 먼저 약부터 마시거라.”……밤이 깊은 시각, 궁 밖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노도사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소욱과 봉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을 교환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은이와 그 일행이 도사를 납치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천옥으로 이송 중입니다!”소욱은 심장이 요동쳤다.진실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그는 봉구안과 함께 곧장 천옥으로 향했다.반 시진쯤 지나, 천옥.두 사람은 마침내 그 사내와 마주했다.노도사를 납치했던 자이자, 어쩌면 약쟁이단의 진짜 주모자일지도 모를 인물이었다.봉구안은 호위복으로 변장한 채 소욱 옆에 서 있었다.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에, 그녀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감옥 안의 남자는 매우 늙어 보였다.눈은 푸르스름하게 흐려졌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확실히 동방세가 그려낸 인물과 유사했다.그는 소욱을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절 잡기 위해, 아주 큰 판을 짰다던데 과연 사실이었군요.”소욱은 감방 너머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네 정체가 무엇이냐.”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모용길입니다.”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정말로… 이 남자가 그 전설의 모용길이란 말인가.이백 년을 살아온 그 인물이 맞다고?모용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
소욱은 봉구안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방금 전까진 분명 모용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태조 황제 묘까지 들먹이는 것일까?그래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해 주었다.“태조께서는 동릉에 묻혔다.”도굴을 막기 위해 태조의 능은 총 열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덤엔 무거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허나 그 열세 곳 모두가 가짜였다.진짜 묘는 오직 역대 황제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능을… 잠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소욱의 눈썹이 즉시 찌푸려졌다.“안 된다.”태조 황제는 이미 서세를 마친 성조였다.그분의 안식을 함부로 깨뜨릴 순 없었다.봉구안도 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은 약쟁이 사건의 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그녀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진정 불로장생을 원한 사람은 모용길이 아니라 태조 황제였을 수도 있습니다.”소욱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구안아, 지금 네 말은… 너무 황당하구나.”“설마 이 모든 약쟁이 사건의 배후가 태조 황제라는 것이냐?”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동방세가 그린 그 인물은 모용길과 닮았을 뿐, 자신들의 소씨 가문과는 단 한 점도 닮은 데가 없었다.봉구안도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라 단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모용길이 연막을 치고 모용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모용가 전체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 자는 모용가의 존망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그렇다면 그 자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 건, 다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폐하, 이백 년 전의 일은 저희가 직접 본 게 아닙니다.”“하지만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황제께서는 남산왕, 서왕, 그리고 모용길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남산왕은 태조의 명을 따라 세세손손 봉맥을 지켜왔고, 서왕가는 동부를
봉구안은 이전에 모용가의 선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태조 황제가 천하를 개척할 당시,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군량과 보급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지만 불과 세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향년, 마흔.그런데 지금 동방세가 그려낸 배후 인물의 얼굴이 그 모용길과 너무도 흡사했다.소욱 역시 그림을 비교해보았다.한 손엔 방금 받은 초상화, 다른 한 손엔 책에 실린 옛 그림이 들려있었다.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십중팔구 정도 닮은 듯했다!그는 봉구안과 눈을 마주쳤다.“얼굴이 닮은 거겠지. 아니면 모용가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서자일지도 몰라.”소욱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그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강호를 누비며 별의별 기이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충북에는 삼백 살 넘은 노인이 있다 들었습니다.”“신무파 장문도 이백십칠 년을 살았다죠.”“남제가 건국된 지 이제 겨우 이백 년 남짓입니다.”“만일 정말 불로장생이 가능하다면, 모용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게다가, 그녀를 더욱 확신에 가까운 의심으로 이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다.“폐하, 서왕께선 납치 당시에 그들이 피를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요.”“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서왕 말로는, 그 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던데... 횡설수설하는 미치광이였다고.”봉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들을 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모용길이 이번 일의 진짜 배후라 생각합니다.”“모용가의 조상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독초를 재배하려면 내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요.”“그리고 모용욱의 검거도 너무 순조로웠습니다.”“모든 것이… 너무 ‘그럴듯’했어요.”“어쩌면, 모든 건 모용길이 준
봉구안은 소욱이 자신을 다시 궁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자신이 서여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욱은 조심스레 사과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문득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소욱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동작엔 위로와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번 일은 폐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하신 건 제가 드린 믿음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담대연은 말재주가 뛰어납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흔들릴 만합니다.”그녀는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제 마음속에서 가족이 있는 곳이, 진짜 ‘집’입니다.”“폐하께서는 저의 지아비이십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저의 여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이지요.”“서여국이 아무리 좋아도, 폐하만큼 소중하진 않습니다.”소욱의 손끝이 떨렸다.“너… 그 말이 진심이냐?”그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가 정말 네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봉구안은 오히려 되물었다.“폐하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그러자 소욱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사부랑 사모, 그리고 봉장미, 게다가… 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세상 사람들 다 그러더라. 자식은 어미의 인생 그 자체라고… 지금도 내 순위가 그리 높진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내 자리는 더 밀려나겠지.”봉구안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저에게 산처럼 큰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만, 그분들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혈육’일 뿐입니다.”“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기에 생긴 아이인데, 어떻게 그 아버지를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폐하야말로 제가 앞으로 비바람을 함께할 사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유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