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연, 승상부.섭정을 맡은 승상은 밤낮으로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군사 보고를 위해 한 관료가 급히 들어왔다. 그의 얼굴엔 불안과 초조함이 역력했다.“승상! 큰일 났습니다! 남제로 보낸 원군이 모두 포위당했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전멸하거나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승상은 앉아 있다가 놀라며 일어섰다.“선성은? 폐하와 장수들은 무사한가?”“아직 선성 쪽에서 오는 소식이 없습니다…”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 무장이 급히 달려 들어왔다.“승상! 선성에서 큰일이 벌어졌습니다!”승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무장은 가져온 물건을 내밀며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이것은 남제에서 온 국서입니다. 그들은 이미 선성을 점령했으며, 폐하와 장수들이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이 말에 승상과 관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모두들 어쩔 줄 몰라 했다.“도대체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폐하께선 분명 선성이 연합군의 손에 들어갔다고 전하지 않았는가?”“세상 일은 한순간에 바뀌는 법.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남제의 계략일지도 모릅니다!”“폐하를 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나라에 군주가 없어선 안 됩니다!”모두가 승상을 바라보며 그의 지혜로운 판단을 기다렸다.승상은 국서를 열어 차분히 읽은 뒤, 얼굴에 분노를 가득 담고 고개를 들었다.“무도하다! 남제가 우리 북연의 영토 절반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다니! 그 대가로 폐하를 무사히 돌려보내겠다고 한다!”“뭐라고요?” 관료들은 경악했다.“영토의 절반이라니, 너무도 과도한 요구입니다!”한 관료가 염려하며 물었다.“승상, 만약 우리가 거절하면 폐하께서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요?”승상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남제가 이렇게까지 협박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황제를 무사히 돌려보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사실 이 모든 사태는 황제가 자신의 경고를 듣지 않았던 데서 비롯되었다.승상은 이미 황제에게 직접 나서지 말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지만, 결국
양측 군대가 대치 중인 가운데, 대하 측은 평화 협상을 위해 사신을 선성 근처 유현으로 보냈다.사신은 남제 황제 소욱을 만나, 대하의 평화 의지와 함께 과거 남제와의 화친 및 대하 장공주의 공헌을 강조하며 설득에 나섰다.소욱은 상석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무 말 없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가 풍기는 느긋하고도 오만한 태도는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사신의 말이 끝나자 소욱은 찻잔을 내려놓고 차갑게 시선을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상대의 내면을 꿰뚫는 듯했다.“평화 협상이라?”사신은 준비해온 국서를 급히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소욱은 국서를 읽은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위엄 있는 모습은 보는 이를 압도하며, 상대방의 숨을 멎게 할 만큼 위압적이었다.사신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몇 초 동안의 침묵이 이어지자, 그는 땀을 흘리며 간신히 견뎌야 했다.마침내 소욱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냉소적인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고작 이 정도로 나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사신은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폐하, 그 세 개의 성은 비옥한 땅이며…”“허.”소욱은 냉소를 내뱉으며 말을 끊었다.“보아하니 대하는 장병들의 목숨도 가볍게 여기고, 국가의 멸망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군.”“폐하!”사신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소욱의 손짓에 따라 사람들이 그를 끌어냈다.“폐하! 대하는 진심으로 평화 협상을 원합니다! 세 개의 성이 부족하다면 네 개를… 네 개를 드리겠습니다!”소욱은 긴 소매를 휘두르며 단호히 외쳤다.“대하가 양보하지 않겠다면 성을 공격하라! 과인 명하노니, 먼저 대하를 쳐라!”……대하.대하 조정에 전해진 전황은 심각했다.“폐하! 남제군이 국경에 집결하여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습니다!”황제는 놀란 표정으로 대전으로 향했다.“남제군이 이렇게 빨리 진격했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신하들 사이에서는 불안감이 퍼졌다.“폐하, 저희 병력 대부
“황후마마! 보고싶었습니다!” 소군주는 격식 있는 궁중 예를 올렸다.가벼운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숨을 헐떡였다.곧바로 소욱에게도 예를 올렸다.“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봉구안은 예상 밖의 방문에 물었다.“소군주께서 어떻게 성에 들어오셨습니까?”성내 적군은 대부분 제압되었지만, 아직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소군주는 밝게 웃으며 전혀 두려움 없는 모습으로 말했다.“아버님을 따라왔어요. 아버님께서 식량을 보내러 성에 들어오셨는데, 저도 도울 수 있답니다.”소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어린 네가 뭘 할 수 있겠느냐.”소군주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발끈하며 말했다.“폐하, 저를 너무 깔보지 마세요.”“저는 선성에서 자랐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길을 안내할 수 있어요!”“그나저나, 왜 주국공부에 안 계시고 이렇게 초라한 여관에 머물고 계신 거예요?”봉구안은 담담히 대답했다.“성내 아직 적이 남아 있어서 여관에 머무는 것이 병사들을 이끌기 더 수월합니다.”소군주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봉구안의 손에 난 상처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황후마마, 다친 것입니까?”“사소한 상처입니다.” 봉구안은 손을 뒤로 감췄다.소욱은 소군주를 옆으로 끌어냈다.“식량을 가져왔으면 이제 돌아가거라. 나와 황후는 논의할 일이 많다.”대체 왕숙께서 무슨 생각으로 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성에 온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소군주는 몸을 뿌리치며 봉구안을 향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황후마마, 마마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마마께서 제 약을 구하러 천지설산까지 가셨잖아요. 정말 죽을 뻔했다고 들었습니다. 절대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물 한 방울의 은혜에도 샘물로 갚아야 한다는데, 이건 저의 생명을 구한 은혜니까요.”“제 목숨은 마마의 것입니다. 앞으로 저를 필요로 하시면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그녀는 마치 강호의 무림인을 흉내 내는 듯한 말투로 말하며 봉구안을 향해 진심을 드러냈다.봉구안
남제, 황성.백성들은 전쟁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남제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들려온 소식은 남제가 북연과 대하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그게 정말인가?”“정말이네! 우리 조카가 군영에서 보낸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어. 이제 걱정할 필요 없다더군. 남제의 위기는 끝났으니, 이제 망할 걱정을 해야 하는 건 북연과 대하,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야!”이 소식은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사람들은 환호성을 터뜨리며 기뻐했다.곧이어 조정에서 징병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징병 공고가 사방에 붙었으니, 이번엔 정말인가 보다!”“나도 군에 지원할 거야! 남제를 위해 국토를 넓히고 가문에 영광을 안겨야지!”“나도 지원할래! 북연과 여러 나라들이 우리 남제를 모욕했으니, 이제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해!”이번 징병에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이들은 모두 이번 멸망 위기를 통해 깨달은 바가 있었다. 백성들 각자도 나라의 운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온몸으로 느꼈던 것이다.그들은 북쪽과 동쪽 방어선이 연이어 무너질 때, 가정에서 불안에 떨며 밤낮으로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남제를 지키려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이제 더 이상 집에서 무기력하게 소식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거리에서는 과거 시험 준비에 몰두하던 서생들마저 거리로 나와 외쳤다.“대장부라면 마땅히 전장에 나서야 해!”“갑옷을 입고 국위를 떨치며, 목숨을 걸고 적을 물리쳐야 한다!”“북연과 같은 나라가 우리 남제를 깔보는데, 우리 남제의 영웅들이 어찌 나약한 존재로 머물 수 있겠는가!”견진이 이끄는 부녀자 부대도 참전을 선언했다.“남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해낼 수 있어요! 우리도 서녀국의 여성들처럼 전장에 나가 싸울 겁니다!”한편, 서녀국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그들은 이미 소주국을 정복했고, 이제 정국을 공략할 계획이었
완부옥은 오래 고민한 끝에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바보 같은 사람…” “사실 그날 밤, 전하께서는 죽은 듯이 곯아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날 저희 둘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서왕은 이 말을 듣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뭐라고?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동침하지 않았다니?그럼 아이는 어떻게 된 거지?완부옥은 그를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이렇게 멍청하다니,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동침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아이도 없겠지요. 이해가 되십니까?”서왕은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그동안 온화했던 눈빛에 분노를 담아 그녀를 노려보았다.“아이가 없다고?”“그럼 그 희맥은 뭐였다는 말이냐?”그는 원래 온화한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겨우겨우 화를 누르고 있었다.완부옥은 대답했다.“남강의 주술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고술로 그렇게 보이게 했던 거라고요.”서왕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왜 그녀가 회임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 늦었는지 이해됐다.단순히 몸매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회임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그녀는 처음부터 그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어떻게 그녀는 그를 이렇게 속일 수 있었을까...서왕은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한 분노로 가득 찼다.“내가 너에게 무슨 원한을 졌다고, 네가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이냐!”이미 사실을 털어놓았으니, 완부옥은 그가 화를 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녀는 다른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마치 폭발 직전의 작은 짐승을 달래듯 말했다.“소환에게 이 일을 말하지 않고, 저와 이혼하지 않는다면 제가 충분히 보상하겠습니다.”“전하께서 원하는 아이를 다른 여자를 시켜 낳게 해주겠습니다.”“아들도 딸도 모두 만들어주겠습니다.”“잘생긴 남자도 데려다 줄 수 있습니다. 남강의 젊은이들은 정말 잘생겼거든요.”“만약 싫으시다면, 고술을 써서라도 죽고 못 살게 만들어주겠습니다.”완부옥은 이미 서왕을 위해 어떻게
선성.성 안의 적군은 구련산으로 물러난 북연군을 제외하고 모두 포로로 붙잡혔다.포로들은 갑옷과 무기를 내려놓고 나서야 선성을 나설 수 있었다.대하군이 보유했던 다양한 활과 석궁은 선성에 남겨져 남제군의 손에 넘어갔다.단춘은 그 무기들을 파괴하려 했으나, 매번 남제군의 감시를 받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추운 날씨 속에서 연합군 병사들은 얇은 옷만 걸친 채 선성을 떠났다.서로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며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단춘은 마지막으로 선성을 돌아보며 굳게 다짐했다.대군을 이끌고 반드시 이곳에 다시 돌아오겠다고.준비도 없이 기습당하고,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전력이 약해져 이번처럼 참담한 패배를 당하지 않겠다며 이를 악물었다.포로들은 남제군의 군영으로 옮겨져 남제군의 관리를 받았다.포로 생활의 유일한 이점은 마침내 음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한 사람당 흰 죽 한 그릇과 만두 하나뿐이었지만, 선성에 갇혀 있을 때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그러나 단춘처럼 강직한 이는 남제군이 제공하는 음식을 거부했다.그는 죽이 담긴 큰 솥을 발로 차 뒤집어버렸다.남제군은 즉시 그를 붙잡아 나무 우리에 가뒀다.그는 머리를 들어 대하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흘러내린 죽을 핥는 모습을 보았다.그 모습에 단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크게 외쳤다.“이 비굴한 자식들아! 적군의 음식을 먹지 마라! 안 들리느냐! 먹지 말라고!”그러나 목숨이 달린 문제 앞에서 많은 연합군 병사들이 굴복했다.단춘처럼 남제군의 음식을 거부하며 굶기를 택한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그들마저도 단춘처럼 솥을 뒤엎지는 않고 조용히 앉아 단식으로 저항할 뿐이었다.선성.봉구안은 구련산 방어를 맡아, 황제가 직접 장병들을 위로하며 밤마다 순찰을 돌고 있었다.지휘 막사 안.황제와 황후가 마주 앉아 있었다.진한길이 식사를 담은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꺼냈다.봉구안은 잠시 갑옷을 벗고 편한 옷차림으로 앉아 있었
감옥에서 간수가 전한 말에 담대연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는 벽에 새겨진 거미줄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감정을 지운 듯 멍한 얼굴로 물었다.“바깥 전황은 어떤가?”간수는 돈을 받고 전하는 말인 만큼, 예의를 차려 대답했다.“폐하께서 직접 나서서 선성의 적군을 진압하셨습니다. 각국에서 온 지원군도 모두 생포됐고요.”“현재 조정에서는 북연과 대하를 공격할 준비로 사방에서 징병령을 내리고 있습니다.”“이제 남제는 평온을 되찾았다고 보시면 됩니다.”담대연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되물었다.“‘거미줄’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간수가 잠시 당황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동방 가문에서 만든 기계 진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거 참 대단하더군요. 남제 전역에 퍼져 있어서, 적이 어디서 나타나든 바로 막을 수 있답니다.”간수는 이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흥이 난 듯했다.그러나 담대연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그는 몸을 돌려 간수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동방 가문의 기계 진법이라고?”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대답했다.“맞습니다. 바로 동방 가문입니다. 동방 공자가 대군을 이끌며 만들었다고 하더군요.”“지하 통로가 각 성을 연결해 적이 방심할 틈이 없도록 만들었답니다. 게다가 다양한 기계 장치들까지…”담대연의 눈빛은 갑자기 싸늘해졌다.‘동방 가문이라니?’‘그럴 리가 없다.’‘이건 분명 담대 가문의 ‘거미줄’ 진법이란 말이다.’그는 속으로 분노를 삼키며 생각했다.‘봉구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담대연의 눈은 깊은 어둠을 담고 있었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고요했지만, 그 속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선성.구련산은 여전히 군사들에게 철통같이 포위당했으나, 다른 지역은 점차 안정되고 있었다.황제와 황후가 떠나는 날, 주국공이 소군주를 데리고 작별 인사를 하러 나왔다.소군주는 서운한 표정으로 봉구안의 소매를 붙들며 말했다.“황후마마, 제가 황성에 가서 찾아뵙겠습니다! 저도 무술을 배우고 싶
선성, 주국공부.호위병이 다급히 내원으로 들어와 주국공에게 보고했다.“대인, 북연군이 북연 황제를 붙잡아 항복하러 왔습니다.”주국공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나간 주국공은, 땅바닥에 오장으로 묶여 굶주려 야위어버린 북연 황제와 그를 둘러싼 북연군들을 보았다. 북연군들은 갑옷과 무기를 내려놓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애처롭게 고개를 조아렸다.“제발, 먹을 것을 조금만 주십시오... 저희는 항복하겠습니다!”주국공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북연 황제를 힐끔 본 뒤 고개를 저었다.그토록 오만했던 북연 황제가 이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잡히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과연 사람의 마음은 끝까지 알 수 없는 법이다.주국공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저들을 모두 잡아들여 수감하라!”“예!”그날 밤, 주국공은 직접 서신을 작성해 황제에게 급히 전하도록 했다.이때, 소욱과 봉구안은 황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그들이 지나가는 관도 곳곳에 백성들이 나와 군대를 환영하고 있었고, 평화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모습이었다.그날 밤, 그들은 근처 역관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봉구안은 오랜만에 목욕을 하며 오랜 전투의 피로를 씻어냈고, 기분도 한결 가벼워졌다.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니, 소욱이 책상에 앉아 무언가에 깊이 몰두한 모습이었다.그녀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토록 심각하십니까?”소욱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주국공이 서신을 보내왔다. 북연군 일부가 항복하면서 북연 황제를 잡아 그 진정성을 보여주려 했다 하는구나.”북연 황제의 성격상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지만, 예상보다 빠른 전개였다.봉구안은 놀라며 말했다.“그렇다면 이번에는 북연도 북연 황제의 생사에는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높겠군요.”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무릎 위로 앉혔다.피곤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그건 북연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
소욱은 봉구안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방금 전까진 분명 모용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태조 황제 묘까지 들먹이는 것일까?그래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해 주었다.“태조께서는 동릉에 묻혔다.”도굴을 막기 위해 태조의 능은 총 열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덤엔 무거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허나 그 열세 곳 모두가 가짜였다.진짜 묘는 오직 역대 황제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능을… 잠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소욱의 눈썹이 즉시 찌푸려졌다.“안 된다.”태조 황제는 이미 서세를 마친 성조였다.그분의 안식을 함부로 깨뜨릴 순 없었다.봉구안도 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은 약쟁이 사건의 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그녀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진정 불로장생을 원한 사람은 모용길이 아니라 태조 황제였을 수도 있습니다.”소욱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구안아, 지금 네 말은… 너무 황당하구나.”“설마 이 모든 약쟁이 사건의 배후가 태조 황제라는 것이냐?”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동방세가 그린 그 인물은 모용길과 닮았을 뿐, 자신들의 소씨 가문과는 단 한 점도 닮은 데가 없었다.봉구안도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라 단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모용길이 연막을 치고 모용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모용가 전체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 자는 모용가의 존망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그렇다면 그 자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 건, 다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폐하, 이백 년 전의 일은 저희가 직접 본 게 아닙니다.”“하지만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황제께서는 남산왕, 서왕, 그리고 모용길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남산왕은 태조의 명을 따라 세세손손 봉맥을 지켜왔고, 서왕가는 동부를
봉구안은 이전에 모용가의 선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태조 황제가 천하를 개척할 당시,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군량과 보급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지만 불과 세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향년, 마흔.그런데 지금 동방세가 그려낸 배후 인물의 얼굴이 그 모용길과 너무도 흡사했다.소욱 역시 그림을 비교해보았다.한 손엔 방금 받은 초상화, 다른 한 손엔 책에 실린 옛 그림이 들려있었다.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십중팔구 정도 닮은 듯했다!그는 봉구안과 눈을 마주쳤다.“얼굴이 닮은 거겠지. 아니면 모용가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서자일지도 몰라.”소욱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그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강호를 누비며 별의별 기이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충북에는 삼백 살 넘은 노인이 있다 들었습니다.”“신무파 장문도 이백십칠 년을 살았다죠.”“남제가 건국된 지 이제 겨우 이백 년 남짓입니다.”“만일 정말 불로장생이 가능하다면, 모용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게다가, 그녀를 더욱 확신에 가까운 의심으로 이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다.“폐하, 서왕께선 납치 당시에 그들이 피를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요.”“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서왕 말로는, 그 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던데... 횡설수설하는 미치광이였다고.”봉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들을 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모용길이 이번 일의 진짜 배후라 생각합니다.”“모용가의 조상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독초를 재배하려면 내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요.”“그리고 모용욱의 검거도 너무 순조로웠습니다.”“모든 것이… 너무 ‘그럴듯’했어요.”“어쩌면, 모든 건 모용길이 준
봉구안은 소욱이 자신을 다시 궁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자신이 서여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욱은 조심스레 사과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문득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소욱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동작엔 위로와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번 일은 폐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하신 건 제가 드린 믿음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담대연은 말재주가 뛰어납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흔들릴 만합니다.”그녀는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제 마음속에서 가족이 있는 곳이, 진짜 ‘집’입니다.”“폐하께서는 저의 지아비이십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저의 여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이지요.”“서여국이 아무리 좋아도, 폐하만큼 소중하진 않습니다.”소욱의 손끝이 떨렸다.“너… 그 말이 진심이냐?”그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가 정말 네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봉구안은 오히려 되물었다.“폐하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그러자 소욱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사부랑 사모, 그리고 봉장미, 게다가… 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세상 사람들 다 그러더라. 자식은 어미의 인생 그 자체라고… 지금도 내 순위가 그리 높진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내 자리는 더 밀려나겠지.”봉구안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저에게 산처럼 큰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만, 그분들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혈육’일 뿐입니다.”“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기에 생긴 아이인데, 어떻게 그 아버지를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폐하야말로 제가 앞으로 비바람을 함께할 사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유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
어전.“폐하, 서왕 전하와 왕비마마께서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서왕 전하께서 지금 궁문 밖에 대기 중이며, 아뢸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이 말을 들은 소욱은 지체 없이 명하였다.“어서 들라.”얼마 지나지 않아, 서왕은 발걸음을 옮겨 어전으로 들어섰다.그는 문턱을 넘자마자 곧장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신, 폐하를 뵙나이다!”소욱은 그 기색을 살피고, 정신이 온전한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무사하다니 다행이로구나.”헌데, 서왕의 안색은 심상치 않았다.“폐하, 신이 납치당한 이유는… 그들이 신의 피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신의 부친께서 돌아가시던 때가 떠올랐습니다.”소욱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그는 눈빛을 가라앉히고 그를 바라보았다.“너의 피를 왜 필요로 한단 말이냐? 그자들이 정말 피를 취하였느냐?”서왕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취하지는 못하였사오나, 그들의 목적이 분명 피에 있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신 그 사건 역시, 이번 일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소욱의 미간이 좁게 모아졌다.그는 전대의 왕부, 곧 서왕의 아버지에 관한 억울한 일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 일로 선황은 오랫동안 후회하며 침식을 잊고 괴로워했었다.그래서 소욱 또한, 이후 누구에 대해 반역 운운하는 소문이 돌 때마다 쉽게 믿지 않았다.선왕이 저지른 실책을 그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허나 지금 와서 다시금 드러나는 의혹은 그 죽음이 단순한 누명이나 정치적 숙청이 아닌, 무언가 깊은 연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소욱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자세히 말해 보아라.”……황성 서쪽.봉구안의 행차가 한적한 관로에 이르렀을 때, 한 일행이 그녀를 막아세웠다.오백이 곧장 검을 뽑아 방어 태세를 취했으나, 막아선 이들이 익숙한 인물임을 곧 알아보았다.바로 자재각을 지키던 소욱의 친위 호위병들이었다.그들은 마차를 둘러싸며 호위 진형을 갖추었다.“마마, 저희는 폐하의 명을 받아 마마를 궁으로 모
소욱은 한참을 고심한 끝에, 어느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천명을 믿지는 않았으나, 담대연이 말한 ‘인성’은 부정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언제나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과거 그녀가 이미 단회욱을 마음에서 지웠음에도, 그를 구하기 위해 주저 없이 죽음을 택했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했다.서여국은 외환보다 내우가 깊은 나라였다.아무리 소주와 정국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안으로는 여전히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이번에 봉구안이 직접 서여국에 가게 되면, 그 혼란 속에서 국주로 추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그녀의 성정상 그 책임을 외면하진 못할 터였다.결국엔 남제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소욱의 가슴을 옥죄었다.담대연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천하통일. 그러나 그보다 무서운 건, 그 길목에서 아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진한길.”“신, 여기 있습니다!”“황후를 몰래 다시 데려오거라. 사람을 붙여, 은밀히.”진한길은 순간 의아함을 품었다.폐하께서 왜 이리도 갈팡질팡하시는 걸까………한편, 황성 서쪽 교외.담대연이 도착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하궁의 비밀 통로를 찾아냈다.그가 손을 쓰자 거대한 암석이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진 지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담대연은 호위들에게 엄중히 이르렀다.“이곳은 함정과 기계장치가 많습니다. 제 발을 따라오십시오. 절대 멋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명심하겠습니다!”……지하궁 내.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서왕과 완부옥은 이미 허기와 피로로 맥을 잃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그 인물은 이전에 죽은 자의 시체를 발견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시체를 끌고 나갈 뿐이었다. 마치 이곳에서 죽음은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시체를 처리한 뒤, 그자는 곧장 서왕을 데리고 가려 했다.완부옥은 그를 향해 소리쳤다.“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대답은 없었다. 그저 서왕을 밀어내듯 이끌 뿐이었다.하지만, 그들은 이미 내공
그 뱀은 영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슥, 하고 순식간에 주실 안으로 기어들어가더니 어디에 숨어버렸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뱀을 잡기 위해선 황후의 물건들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고, 이는 반드시 폐하께 고해야 할 사안이었다.때마침 소욱은 밤이 깊어도 봉구안이 그리워져 자유각을 찾았다.호위들은 이 일을 곧장 아뢰었다.소욱의 눈썹이 짙게 찌푸려졌다.그는 친히 방으로 들어가 사방을 뒤적이다, 마침내 침상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뱀을 발견하였다.그 순간, 그는 뱀의 눈과 마주쳤다.소욱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이놈을 당장 잡아내라…”막 명하려던 찰나, 그는 그 뱀이 어딘가 익숙하단 걸 느꼈다.이 뱀은… 분명 완부옥이 기르던 그 뱀과 닮아 있었다.완부옥과 서왕이 함께 실종된 걸 떠올린 소욱은 곧 심중에 짚이는 바가 있었다.그는 즉시 명하여 뱀을 그물망에 넣게 한 뒤, 서왕부로 보내어 확인하게 하였다.서왕부의 호위, 유화가 그 뱀을 확인하였다.그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억누르며 가까이 다가갔고, 잠시 후 단호하게 말했다.“왕비마마께서 기르던 뱀입니다.”자유각.소욱은 전갈을 받은 후, 이 일에 더없이 의아해졌다.완부옥의 뱀이 어찌 자유각까지 온단 말인가?설령 이 뱀이 길을 안다 하여도, 돌아간다면 당연히 서왕부로 가야 할 터였다.그는 곧 봉구안에게 전령 비둘기를 날렸다.그 시각, 봉구안은 황성을 갓 벗어난 참이었다.편지를 받아든 그녀는 곧장 완부옥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예전에 완부옥이 똑같은 짓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곧장 회신을 써서 다시 소욱에게 전했다.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봉구안은 잠시 고심한 끝에, 두 번째 편지를 써 보냈다.그 안엔 한 마디 당부가 적혀 있었다.[폐하, 부디 경솔한 행동은 삼가 주시옵고, 무엇보다 폐하의 안전을 우선으로 삼으소서.]소욱은 첫 번째 편지를 받고 곧장 진한길을 불렀다.“서왕의 흔적을 찾을 실마리를 얻었다. 몇 사람을 데려가 뱀을 풀고, 그 자취를 따라가 보아라.”“예, 폐
지하궁은 온통 어둠뿐이었다.완부옥과 서왕은 감금되어 있던 방을 빠져나왔으나, 사방이 캄캄하여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었고, 출구를 찾는 것조차 막막하였다.서로 떨어질까 염려된 완부옥은 명령조로 말했다.“제 옷소매를 붙잡아요. 바짝 따라와요.”“알겠다.” 서왕은 그녀의 뒤를 따르는 수행자처럼 움직였다.그가 조심스레 속삭였다.“조심하거라. 혹시 저들이…”“쉿. 소리 들리십니까?”완부옥이 숨을 죽이며 물었다.그 순간, 어둠 속에서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둘은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인 채, 벽에 몸을 바짝 붙여 섰다.다행히도 어둠이 그들의 몸을 감추었고, 다가오던 자는 그들을 발견치 못한 채 멀어져갔다.발소리가 사라지자, 완부옥은 서왕의 귀가에 바싹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벽을 더듬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출구가 보일 겁니다.”서왕이 대답하였다.“네가 앞장서거라. 나는 네 옷자락을 붙잡으마.”“……”‘참, 한 손가락도 까딱 안 하려 드는군.’예전 소환과 함께 위기에 빠졌을 때는 달랐다.그저 조금 투정만 부리면, 소환은 그녀를 안고서 척척 길을 찾아주곤 했다.‘하… 또 소환이 그리운 하루네.’완부옥은 ‘짐짝’ 하나를 등에 지고서 벽을 더듬으며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한 걸음마다 온몸이 긴장되었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적들의 기척에 늘 귀를 곤두세워야 했다.지나치게 어두운 환경에 눈이 점점 아파왔고, 이윽고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걸음을 멈췄다.서왕은 그녀가 지친 줄 알고 말했다.“내가 앞장서마. 넌 내 옷자락을 붙잡거라.”완부옥은 비웃듯 말했다.“이제야 남자였던 게 기억난 겁니까?”“……”그녀의 말은 확실히 가시가 있었다.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모든 위기는 결국 그녀가 그를 구하려다 엮인 결과였다.명색만 아내인 그녀가 이토록 의리를 지닌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그리하여 둘은 번갈아가며 벽을 더듬었고,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게 돌고 돌다가 결국, 처음 그 시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