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장부 문 앞에서 호위병이 유영에게 서신을 건넸다."큰 마님께서 서신을 남기셨습니다."유영은 재빨리 서신을 받아 들고, 지체 없이 봉투를 뜯었다.[유영아, 일이 갑자기 결정되어 오늘 장주로 떠나게 되었다. 여정이 길어, 추석을 위해 장미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면 지체할 수가 없어 너와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궁에 가서 황후를 찾으렴. 황후께서 너와 정희를 잘 돌봐주실 거란다.]서신을 읽는 순간, 유영의 얼굴이 굳어졌다.이렇게 갑자기 떠난다고?뭔가 이상했다.마치 일부러 자신을 피해 도망치는 것처럼 말이다.심지어 이 서신이 정말 봉 부인이 남긴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하지만 유영은 이내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호위병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이제 내가 누군지 잘 알겠지? 언니 방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잠시 들어가야겠다."그러나 호위병의 태도는 단호했다."주인 어르신의 허락 없이는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작은 마님께 여쭙고 오겠습니다."유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게 빛났다.잠시 후, 보고를 마친 하인이 돌아와 말했다."작은 마님께서 지금 추석 연회 준비로 바쁘셔서 손님을 맞이할 여유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남기신 물건이 있으시면, 큰 마님께서 돌아오신 후 찾아오시든지, 아니면 어떤 물건인지 정확히 말씀해 주시면 시녀를 시켜 찾아 드린다고 하십니다."유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이 주씨라는 여인, 정말 독하구나. 언니가 없다고 감히 나를 무시하는 건가?’‘산중에 호랑이가 없으니 원숭이가 왕 노릇을 하는구나!’겨우 한낱 며느리에 불과한 주씨 따위가 감히 그녀의 길을 막는단 말인가?그녀가 참장부에 들어가려 했던 이유는 단 하나.봉 부인이 정말 장주로 떠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자신을 피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이제 그마저도 확인할 길이 막혀버렸다.유영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어미가 불쾌함을 느
"어머니!"정희가 가게 밖에서 손을 흔들며 유영을 불렀다.그러나 유영은 어딘가 신경이 곤두선 듯한 표정으로, 무심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정희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머니, 이모님은요? 오늘 같이 오신다고 하셨잖아요!"그러나 유영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일단 여관으로 돌아가자."정희는 당황했다."하지만…!"그녀의 시선이 금류의로 향했다.이렇게까지 애써 찾아온 옷을 그냥 포기하라고?정희는 어머니의 손을 더욱 꽉 붙잡으며 애원했다."어머니! 가기 전에 저 주인장한테 말씀 좀 해 주세요.""이 주인장이 우리가 황후마마와 가족 관계라는 걸 믿질 않아요. 저에게 저 금류의를 팔지 않겠대요!"유영은 딸이 이 옷을 왜 사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추석 연회에서 황후 앞에 당당히 서기 위해서였다.그리고 그녀도 딸에게 연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하지만…누가 알았겠는가?봉 부인이 갑자기 장주로 떠나 버릴 줄은 말이다!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유영은 순간적으로 딸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걸 말해 줄 수는 없었다."내 말 들으렴, 일단 여관으로 돌아가자."정희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어머니, 이모님은 대체 어디 계세요?"유영은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네 이모는 여기에 오지 않는단다.""뭐라고요?!"정희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이모가 이 곳에 오지 않는다고?순식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그때, 가게 주인이 조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말했다."이제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다른 손님들도 계시니…"짝!손이 올라갔다.정희는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가게 주인의 뺨을 후려쳤다."건방지게 어디서 말대답이야?!"갑작스러운 따귀에 가게 주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떻게 아무런 죄 없는 사람을 때릴 수가 있는 거죠?!"정희는 콧방귀를 뀌며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내 말을 못 믿겠
황궁.봉구안은 추석 연회 전에 장공주의 혼처를 정하기로 했다.이것은 황제 소욱이 직접 그녀에게 맡긴 일이었다.이를 위해 봉구안은 자녕궁을 찾아 태후와 논의하기로 했다.태후 역시 딸이 다시 혼인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일찍이 혼인을 하고, 후사를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그렇지 않다면, 홀로 지내는 세월이 너무도 외롭지 않겠는가.하지만 봉구안은 태후의 말에 단호하게 반박했다."장공주께서는 거느리는 시녀와 하인들도 많고, 사교성이 좋아 벗도 널리 두고 계십니다.""결코 외롭지 않으실 것입니다."태후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이 아이,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그야말로 다 외부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 이들이 어찌 진정으로 공주를 위할 수 있단 말이냐..."그때, 계 상궁이 다가와 공손히 알렸다."태후마마, 황후마마, 장공주께서 오셨습니다."자신의 혼인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장공주는 지체 없이 황궁으로 달려왔다.혹시라도 조금이라도 늦으면, 황제가 제멋대로 혼인을 정해버릴지도 모르지 않는가!장공주는 천천히 전각으로 들어서며, 두 사람에게 예를 갖췄다."어머니, 평안하셨습니까? 황후도 계셨군요."태후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았다."잘 왔다. 마침 황후와 네 혼인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단다."이때, 계 상궁이 나서서 덧붙였다."공주마마,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공주님의 혼처를 신중히 정하기 위해, 궁중에서 특별히 아집을 열어 배필을 고르기로 하셨습니다."그러나 장공주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나는 그런 갓 쓰고 글만 읽는 남자들 전혀 취향이 아니다."태후는 혀를 찼다."너는 이 나라의 공주다. 순종적이고 예의 바른 부마가 가장 좋단다.""그런데 검과 창을 휘두르는 무관이라도 골랐다가, 혹여 너를 다치게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장공주는 마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들은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어머니, 만약 정말 그런 사내가 있다면, 저는 오히려 더
봉구안은 어머니에게 유영 모녀를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였다.그렇기에 유영이 봉 부인의 서신을 들고 찾아왔을 때, 그녀는 내칠 수 없었다.그녀는 시종 오백에게 명령했다."두 사람을 영화궁으로 데려오도록 해라."오백은 공손히 예를 갖추며 답했다."명 받들겠습니다!"유영 모녀에게는 이번이 첫 궁궐 방문이었다.성벽만 보아도 압도될 만큼 웅장한 황궁. 그러나 성문을 넘어서니, 더욱 광활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규칙적으로 배치된 궁전들, 끝없이 이어지는 회랑과 정원, 곳곳에서 어른거리는 금빛 장식들…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길을 잃을 것 같은 미궁과도 같았다.선두에서 길을 안내하는 내시를 따라, 모녀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강주에서 살던 시절, 돈만큼은 부족함이 없던 유영이었다.그녀가 머물던 저택은 그 지역에서 가장 화려했으며, 정원이며 누각이며 온갖 명장들이 정성을 다해 조각한 곳이었다.하지만… 이곳, 황궁과 비교하면 그녀는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았다.정희는 자연스레 주눅이 들었다.그녀의 두 눈은 놀라움과 동경으로 가득 찼다.‘왜 다들 궁에 들어가길 원하는지 알 것 같아…’이곳은 마치 구름 위의 천궁과도 같았다.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지상의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존재임이 분명했다.그녀 역시 이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했다.그러려면… 황자를 낳아야만 했다.머릿속으로 야망을 키우던 정희는, 조심스레 어머니에게 속삭였다."어머니, 황제 폐하는 어디 계신가요?"유영은 즉시 눈매를 날카롭게 바꾸며 딸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 입을 좀 다물거라. 궁 안에서는 항상 입을 조심해야 된다는 걸 잊은 게냐?’눈빛 하나로 경고를 보내는 그녀였다.궁중은 규율이 엄격한 곳이다. 감히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그렇게 모녀가 길을 따라가던 중,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그중에서도 단연 화려한 장신구로 장식된 여인에게 눈길이 갔다.그녀의 뒤에는 수많은 시녀와 내시들이 따라붙어 있었다.내시가 발걸음을 멈추며 조
영화궁.유영 모녀뿐만이 아니었다. 봉 대인 역시 황후가 갑자기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고 싶었다.하지만 궁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불안감이 엄습했다.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러다 영화궁 안에서 유영과 정희를 마주한 순간, 그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두 모녀가 또 무슨 사고를 친 게 분명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하인을 데려올 걸 그랬나? 누가 그 대신 뺨이라도 맞아줘야 할 텐데 말이다!!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어디까지나 자신은 황후의 친부이다. 황후가 아무리 거침없는 성격이라도, 친부에게 손을 댈 수는 없을 터. 그는 서둘러 몸을 숙였다."황후마마를 뵙습니다!"봉구안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예를 면하십시오."몸을 일으키자마자, 봉 대인은 본능적으로 유영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그는 분노 섞인 표정으로 두 모녀를 바라보았다.'저 여인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지?'유영 역시 봉 대인의 시선을 느끼고 속으로 비웃었다.'황후가 그를 부른 목적이 뻔하지 않은가.'하지만 그녀는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오랜 상업 경험으로 단련된 그녀에게, 위기란 그저 넘어서야 할 또 하나의 장애물일 뿐이었다.남제의 율법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설령 황후라도 자신에게 사적인 처벌을 가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였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봉구안에게 서신을 내밀었다."황후마마, 이건 언니께서 제게 남긴 서신입니다.""아직 읽어보시지 못했을 텐데, 먼저 확인해보시는 게 어떠신지요?"궁녀 만추는 그 말을 듣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이 유씨 부인이라는 자, 고작 서신 한 장으로 마마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은근히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황후를 흘깃 바라보았다. 하지만 봉구안은 서신을 볼 생각조차 없는 듯,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제야 만추는 다시 시선을 바로 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봉구안은 그저 찻잔 뚜껑을 살짝 열어 찻잎을 저으며 나직이 말했다."내가 듣기로, 봉가의
봉 대인은 약을 먹고 겨우 숨을 골랐지만,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나를 강주로 보내겠다고?"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그저 한 번 더 혼인하려 했을 뿐인데, 그것이 무슨 대역죄라도 된단 말인가?"그렇게 되면 나는 이제 다시는 황성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 아니더냐?"분노는 봉구안이 아닌 유영을 향했다.그는 거칠게 유영의 팔을 붙잡았다."너… 대체 또 무슨 짓을 한 거냐!"틀림없이 유영이 황후 봉구안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후가 이토록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진 않았을 터였다.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의심이 가득했다."대체 또 무슨 계략을 꾸민 것이냐! 어서 말해 보거라!"유영은 억울했다.이번만큼은… 정말 그녀가 한 일이 없었다."대인,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그녀는 눈물 머금은 얼굴로 애처롭게 봉구안을 바라보았다."황후마마, 만약 저에게 불만이 있으시다면, 저를 처벌하셔야지 왜… 왜 죄 없는 분까지 연루시키십니까?""특히, 대인은 정말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대체 무슨 죄가 있어 이런 가혹한 벌을 내리시는 것입니까?"'나는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꼴을 당하는 거야!'봉 대인은 여전히 억울한 기색이 역력하였다.정희는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구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머니, 저희 여기서 이러고 있을 필요 없어요!""지금 당장 궁을 나가서 이모님을 찾아가야 해요! 이모님이라면, 저희가 이렇게 당하는 걸 두고 보지 않으실 거예요!"그녀는 봉구안을 향해 날을 세웠다."황후마마, 솔직히 말씀하세요. 이건 저희 가족을 황성에서 몰아내려는 의도 아닌가요?""대체 무슨 이유로! 저희 부모님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황후마마께서는 사적인 감정을 이용해 권력을 남용하고 계십니다!""버릇없이 굴지 마라!"그 순간, 봉구안의 궁녀 만추가 앞으로 나섰다."황후마마께 불경한 언사를 내뱉은 죄, 궁중의 법도로 엄히 다스려야 마땅
유영은 평생 장사를 하며 수많은 권력자들을 상대해왔다.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그녀는 침착한 얼굴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태연하게 반문했다."황후마마, 저와 대인의 일은 이미 언니께서 알고 계십니다.""언니께서 직접 황후마마께 설명하지 않으셨습니까?""그 모든 것이 단순한 오해였다는 것도 아시지 않습니까?""그런데 지금 뭐라고 하셨죠? 제가 같은 수법을 쓰려 한다고요?"유영은 마치 황후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네요. 설마 저희가 추석 연회에 참석하려는 것이 황제 폐하를 가까이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그녀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억측입니다!""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만을 총애하신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누가 감히 폐하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그리고 제 딸 정희는 이미 강주에서 혼인까지 했던 몸입니다. 불행히도 지아비를 일찍 여의었지만요…""또한 정희에게는 세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시댁에서 강제로 빼앗아 갔고, 지금 저희에게 남은 건 기댈 곳조차 없는 처참한 현실뿐입니다.""황후마마, 저희는 그저 의지할 곳이 필요했을 뿐입니다!"정희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손끝을 꼼지락거렸다.그러나 어머니의 말을 듣고 그녀도 정신을 차렸다.‘맞아! 황후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황후가 단순히 의심하고 있을 뿐,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한다면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정희는 순간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그리고 고개를 들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황후마마, 저희를 정말 오해하고 계십니다.""제가 감히 황제 폐하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저는 단지…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혼인하신 후, 강주에 있는 제 아이들을 되찾고 싶을 뿐입니다.""그 아이들은 제 친자식들입니다! 하지만 시댁에서는 저를 내쫓고 아이들까지 빼앗아 갔습니다!"그녀는 애절한 눈빛으로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게… 저의 유일한
유영과 정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머물던 객잔에 황후의 첩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황후가 어째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지, 왜 그들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는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우리는 이제 끝났구나."정희는 자신이 했던 말들을 되새기며, 숨이 점점 가빠졌다.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고,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팔을 붙잡았다."어머니…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유영 역시 손끝이 떨렸다.그녀는 이 상황을 뒤집을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이 모든 게 내 실수다…'그녀는 스스로를 원망했다.너무 성급했다.황후는 단순한 후궁 싸움에서 살아남은 여인과는 차원이 달랐다.그녀는 궁정의 중심에서 권력을 손에 쥔 황후였다.그 어떤 여자들보다도 철저하고, 냉철하고, 잔혹했다.이곳은 강주가 아니다. 황성이었다.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과 권모술수만이 아닌 더 거대한 권력이 필요했다.그러나,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봉 대인은 혼란스러웠다.유영과 정희를 번갈아 바라보며, 곧장 오백의 손목을 붙잡았다."오백 장군, 황후마마께 전해 주시오!""이건 다 모함이오. 나는 저들의 계획에 대해 전혀 몰랐소!""유영… 저 자와 혼례를 치르지 않을 것이라 전해주시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황후를 향해 가차 없이 불효라며 비난을 퍼부었다.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은 한없이 비굴했다.얼마 전까지의 오만과 격노는 어디로 갔는지, 그는 고개를 조아리며 애처롭게 변했다."황후마마,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그의 얼굴에는 뼈저린 후회가 가득했다.마치 이제야 유영과 정희의 본색을 깨달은 사람처럼.그러나 황후는 이미 모든 걸 꿰뚫고 있었다.이제 와서 후회하는 그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제발, 황후마마께 전해주시오."오백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조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봉 대인,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황후마마를 찾아뵙겠다고 난리를 치지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
어전.“폐하, 서왕 전하와 왕비마마께서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서왕 전하께서 지금 궁문 밖에 대기 중이며, 아뢸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이 말을 들은 소욱은 지체 없이 명하였다.“어서 들라.”얼마 지나지 않아, 서왕은 발걸음을 옮겨 어전으로 들어섰다.그는 문턱을 넘자마자 곧장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신, 폐하를 뵙나이다!”소욱은 그 기색을 살피고, 정신이 온전한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무사하다니 다행이로구나.”헌데, 서왕의 안색은 심상치 않았다.“폐하, 신이 납치당한 이유는… 그들이 신의 피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신의 부친께서 돌아가시던 때가 떠올랐습니다.”소욱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그는 눈빛을 가라앉히고 그를 바라보았다.“너의 피를 왜 필요로 한단 말이냐? 그자들이 정말 피를 취하였느냐?”서왕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취하지는 못하였사오나, 그들의 목적이 분명 피에 있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신 그 사건 역시, 이번 일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소욱의 미간이 좁게 모아졌다.그는 전대의 왕부, 곧 서왕의 아버지에 관한 억울한 일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 일로 선황은 오랫동안 후회하며 침식을 잊고 괴로워했었다.그래서 소욱 또한, 이후 누구에 대해 반역 운운하는 소문이 돌 때마다 쉽게 믿지 않았다.선왕이 저지른 실책을 그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허나 지금 와서 다시금 드러나는 의혹은 그 죽음이 단순한 누명이나 정치적 숙청이 아닌, 무언가 깊은 연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소욱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자세히 말해 보아라.”……황성 서쪽.봉구안의 행차가 한적한 관로에 이르렀을 때, 한 일행이 그녀를 막아세웠다.오백이 곧장 검을 뽑아 방어 태세를 취했으나, 막아선 이들이 익숙한 인물임을 곧 알아보았다.바로 자재각을 지키던 소욱의 친위 호위병들이었다.그들은 마차를 둘러싸며 호위 진형을 갖추었다.“마마, 저희는 폐하의 명을 받아 마마를 궁으로 모
소욱은 한참을 고심한 끝에, 어느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천명을 믿지는 않았으나, 담대연이 말한 ‘인성’은 부정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언제나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과거 그녀가 이미 단회욱을 마음에서 지웠음에도, 그를 구하기 위해 주저 없이 죽음을 택했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했다.서여국은 외환보다 내우가 깊은 나라였다.아무리 소주와 정국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안으로는 여전히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이번에 봉구안이 직접 서여국에 가게 되면, 그 혼란 속에서 국주로 추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그녀의 성정상 그 책임을 외면하진 못할 터였다.결국엔 남제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소욱의 가슴을 옥죄었다.담대연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천하통일. 그러나 그보다 무서운 건, 그 길목에서 아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진한길.”“신, 여기 있습니다!”“황후를 몰래 다시 데려오거라. 사람을 붙여, 은밀히.”진한길은 순간 의아함을 품었다.폐하께서 왜 이리도 갈팡질팡하시는 걸까………한편, 황성 서쪽 교외.담대연이 도착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하궁의 비밀 통로를 찾아냈다.그가 손을 쓰자 거대한 암석이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진 지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담대연은 호위들에게 엄중히 이르렀다.“이곳은 함정과 기계장치가 많습니다. 제 발을 따라오십시오. 절대 멋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명심하겠습니다!”……지하궁 내.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서왕과 완부옥은 이미 허기와 피로로 맥을 잃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그 인물은 이전에 죽은 자의 시체를 발견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시체를 끌고 나갈 뿐이었다. 마치 이곳에서 죽음은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시체를 처리한 뒤, 그자는 곧장 서왕을 데리고 가려 했다.완부옥은 그를 향해 소리쳤다.“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대답은 없었다. 그저 서왕을 밀어내듯 이끌 뿐이었다.하지만, 그들은 이미 내공
그 뱀은 영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슥, 하고 순식간에 주실 안으로 기어들어가더니 어디에 숨어버렸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뱀을 잡기 위해선 황후의 물건들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고, 이는 반드시 폐하께 고해야 할 사안이었다.때마침 소욱은 밤이 깊어도 봉구안이 그리워져 자유각을 찾았다.호위들은 이 일을 곧장 아뢰었다.소욱의 눈썹이 짙게 찌푸려졌다.그는 친히 방으로 들어가 사방을 뒤적이다, 마침내 침상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뱀을 발견하였다.그 순간, 그는 뱀의 눈과 마주쳤다.소욱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이놈을 당장 잡아내라…”막 명하려던 찰나, 그는 그 뱀이 어딘가 익숙하단 걸 느꼈다.이 뱀은… 분명 완부옥이 기르던 그 뱀과 닮아 있었다.완부옥과 서왕이 함께 실종된 걸 떠올린 소욱은 곧 심중에 짚이는 바가 있었다.그는 즉시 명하여 뱀을 그물망에 넣게 한 뒤, 서왕부로 보내어 확인하게 하였다.서왕부의 호위, 유화가 그 뱀을 확인하였다.그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억누르며 가까이 다가갔고, 잠시 후 단호하게 말했다.“왕비마마께서 기르던 뱀입니다.”자유각.소욱은 전갈을 받은 후, 이 일에 더없이 의아해졌다.완부옥의 뱀이 어찌 자유각까지 온단 말인가?설령 이 뱀이 길을 안다 하여도, 돌아간다면 당연히 서왕부로 가야 할 터였다.그는 곧 봉구안에게 전령 비둘기를 날렸다.그 시각, 봉구안은 황성을 갓 벗어난 참이었다.편지를 받아든 그녀는 곧장 완부옥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예전에 완부옥이 똑같은 짓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곧장 회신을 써서 다시 소욱에게 전했다.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봉구안은 잠시 고심한 끝에, 두 번째 편지를 써 보냈다.그 안엔 한 마디 당부가 적혀 있었다.[폐하, 부디 경솔한 행동은 삼가 주시옵고, 무엇보다 폐하의 안전을 우선으로 삼으소서.]소욱은 첫 번째 편지를 받고 곧장 진한길을 불렀다.“서왕의 흔적을 찾을 실마리를 얻었다. 몇 사람을 데려가 뱀을 풀고, 그 자취를 따라가 보아라.”“예, 폐
지하궁은 온통 어둠뿐이었다.완부옥과 서왕은 감금되어 있던 방을 빠져나왔으나, 사방이 캄캄하여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었고, 출구를 찾는 것조차 막막하였다.서로 떨어질까 염려된 완부옥은 명령조로 말했다.“제 옷소매를 붙잡아요. 바짝 따라와요.”“알겠다.” 서왕은 그녀의 뒤를 따르는 수행자처럼 움직였다.그가 조심스레 속삭였다.“조심하거라. 혹시 저들이…”“쉿. 소리 들리십니까?”완부옥이 숨을 죽이며 물었다.그 순간, 어둠 속에서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둘은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인 채, 벽에 몸을 바짝 붙여 섰다.다행히도 어둠이 그들의 몸을 감추었고, 다가오던 자는 그들을 발견치 못한 채 멀어져갔다.발소리가 사라지자, 완부옥은 서왕의 귀가에 바싹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벽을 더듬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출구가 보일 겁니다.”서왕이 대답하였다.“네가 앞장서거라. 나는 네 옷자락을 붙잡으마.”“……”‘참, 한 손가락도 까딱 안 하려 드는군.’예전 소환과 함께 위기에 빠졌을 때는 달랐다.그저 조금 투정만 부리면, 소환은 그녀를 안고서 척척 길을 찾아주곤 했다.‘하… 또 소환이 그리운 하루네.’완부옥은 ‘짐짝’ 하나를 등에 지고서 벽을 더듬으며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한 걸음마다 온몸이 긴장되었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적들의 기척에 늘 귀를 곤두세워야 했다.지나치게 어두운 환경에 눈이 점점 아파왔고, 이윽고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걸음을 멈췄다.서왕은 그녀가 지친 줄 알고 말했다.“내가 앞장서마. 넌 내 옷자락을 붙잡거라.”완부옥은 비웃듯 말했다.“이제야 남자였던 게 기억난 겁니까?”“……”그녀의 말은 확실히 가시가 있었다.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모든 위기는 결국 그녀가 그를 구하려다 엮인 결과였다.명색만 아내인 그녀가 이토록 의리를 지닌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그리하여 둘은 번갈아가며 벽을 더듬었고,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게 돌고 돌다가 결국, 처음 그 시체가
완부옥은 지금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자만했던 탓에 전부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서왕은 그저 이름만 걸친 지아비일 뿐, 생사 여부는 그녀와 무관한 일이었다.허나 그를 구하겠답시고 나섰다가 결국 본인까지 덩달아 갇혀버린 셈이었다.“정말이지, 손해도 이런 손해가 또 있을까.”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지금 가장 급한 일은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완부옥은 숨을 죽이고 목소리를 낮추어 서왕에게 말했다.“제가 폐하보다 먼저 깨어났습니다.”“이놈의 곳은 온통 함정투성이인데다, 한밤중이면 어딘가에서 귀신 울음소리 같은 것까지 들려옵니다.”“도망치려면 단번에 노려야 합니다.”“그러니 우선 생각해보세요. 대체 어떤 자가 폐하를 납치했겠습니까? 목적을 알아야 그것을 역이용할 수 있습니다.”서왕은 긴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딱히 떠오르는 자가 없다.”그는 평소 온화하고 무던한 성격이었기에 원한을 살 일이 별로 없었다.완부옥은 그런 그를 보며 속이 터졌다.“정말 생각 안 나십니까?”“어찌 되었건 노린 건 폐하였고, 전 구하러 따라왔다가 덤으로 잡힌 겁니다!”서왕은 머리를 부여잡았다.“미안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안 되는구나…”완부옥은 이를 갈았다.“그럼 지금 움직일 수는 있습니까? 무기는 있습니까?”서왕은 한숨을 내쉬었다.“전신에 기운이 없구나”“게다가 발엔 쇠사슬까지 채워져 있지. 무기라니, 입궐할 때 무기를 지니는 건 금지 아닌가.”완부옥은 말문이 막혀 한동안 침묵했다.서왕이 조심스레 물었다.“그쪽은 어떠한가. 몸을 움직일 수는 있겠느냐?”“내가 움직일 수 있었으면 진작 나갔다!”완부옥은 못마땅하다는 듯 쏘아붙였다.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혹시 약쟁이 무리의 짓이 아닐까요?”최근 조정에서 집중적으로 수사 중인 사건이었고, 서왕이 맡았던 설가 조사도 결국 그 사건과 맞닿아 있었다.서왕은 반박하지 않고 침묵에 잠겼다.그때였다.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바깥에서조차 한 줄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서왕이 누군가에게 노려질 줄은 말이다.소욱은 곧바로 도성의 모든 성문을 봉쇄하도록 지시하고, 서왕의 행방을 찾기 위한 대대적인 수색을 명했다.아울러 도성 안에 방을 붙여 백성들에게 제보를 구하게 하였다.서왕부의 호위들 또한 사태 발생 직후 각지로 흩어져 수색과 감시를 병행했다.이튿날, 성 외곽에서 한 무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유화를 발견했다.유화는 서왕의 호위무사로, 전날 서왕이 꾀임에 빠져 마차에 올라탔을 때도 곁에 있었다.그가 정신을 차리자 곧 일행에게 상황을 설명했다.“마차가 중간쯤 갔을 때, 방향이 이상하단 걸 눈치채셨습니다. 제가 마차를 세우려 하자, 마부놈이 제게 발길질을 해 마차 밖으로 떨어졌지요.”“그때 왕비께서 뒤따라 오셨습니다. 마마께서는 놀랄 만큼 민첩하게 마차 위로 뛰어올랐고… 그다음은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마차가 서쪽으로 향한 것은 분명히 기억납니다.”이윽고 유화는 다급히 물었다.“전하께서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은 폐하께서 알고 계십니까? 구하러 가신 분은 있습니까?”……황궁, 어전.소욱의 얼굴은 짙게 드리워진 먹구름처럼 어두웠다.서왕을 납치한 자가 누구인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약쟁이 무리의 소행일 가능성이 가장 컸지만, 그들의 본거리는 이미 파괴되었고 대부분이 체포된 상황이었다.남은 잔당들이 있다 해도, 서왕 같은 인물을 일부러 노리고 데려갈 이유는 부족해 보였다.만약 도망이 목적이었다면, 오히려 짐이 되는 인물을 굳이 데려갈 리가 없었다.무언가, 납득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그날 밤, 자유각.소욱은 발걸음을 옮겨 봉구안이 있는 자유각을 찾았다.하루가 멀다 하고 가까운 인물들이 위험에 처하는 이 시국에, 그의 마음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었다.“구안아, 오늘 밤은 나와 함께 궁으로 돌아가자.”“이렇게 궁 밖에 두는 건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하지만 봉구안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눈빛이 깊어졌고,
궁 밖, 자유각.소욱은 드물게 여유를 낼 수 있는 날이었다.곧장 자유각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는 오늘만큼은 봉구안과 함께 저녁상을 나누고자 했다.헌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여러 권의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고개도 들지 않고 책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소욱이 조용히 다가서자, 그제야 봉구안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폐하,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소욱은 그녀의 말에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오는 게 싫은 것이냐?”그 말과 함께 그는 주저 없이 그녀를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직접 의자에 앉은 그는 그녀의 허리를 품에 안고, 손으로 봉구안의 배를 부드럽게 쓸며 아이에게 말하는 척 투정을 부렸다.“들었느냐, 너희 어미는 참 정이 없는 여자다.”“부디 보러 온 아비를 반가워해 줘야 할 텐데 말이다.”봉구안은 그 손을 떼어내며 어이없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싫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폐하께서 상주서를 다 보시지 못하실까 염려되어서입니다.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으시잖습니까.”그녀의 속뜻을 알게 된 소욱은 그녀의 손을 잡고, 가만히 입술을 가져가 살며시 입을 맞췄다.그의 눈빛에는 은근한 정과 깊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내 걱정은 할 줄도 아는구나.”그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책상 위 책들을 훑었다.“이번엔 또 뭘 보고 있느냐.”“궁에서 은육에게 부탁하여 가져오게 하였습니다.”“혹시라도 모용가 선조들에 대해 알아두면 약쟁이 사건에 도움이 될까 해서요.”소욱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몸을 살짝 기댔다.“그럴 필요 없다. 그냥 내게 물어보면 되지 않느냐.”봉구안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폐하께서… 알고 계십니까?”소욱은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모용가라면 나도 잘 아는 편이지.”그리고 그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모용가의 시조는 남산왕과 서왕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태조 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공신이었다.”“하지
황성 동쪽 교외.약쟁이 무리의 본거지가 발각되어 관군의 손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었다.그곳에 몸 담고 있던 무리 또한 하나하나 사로잡혀 옥에 갇혔다.이어진 엄한 문초 끝에, 그들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약쟁이 무리는 수년간 약쟁이를 만들어 여기저기 팔아넘겨왔다고 했다.그 대상에는 반란을 꾀하던 천룡회는 물론, 동산국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문초하던 관리가 다시 물었다.“이 일에 설가가 어떤 연관이 있느냐. 설 대인을 죽인 것도 너희냐.”“예… 저희가 했습니다. 현비마마께서 두 번째로 잡혀가신 이후, 주인어른께서 직접 명을 내리셨습니다. 설가를 제거하라 하셨지요.”“그날 설 대인께서 댁을 나서자마자 손을 썼습니다.”“그가 너희를 고발하려 했던 것이냐.”문초자는 낮게 목소리를 눌렀다.“그렇습니다. 하지만… 설 대인께서 무언가를 알아내신다 하여도 주인어른께서 직접 엮일 일은 없었습니다.”“그분이 아신 건 기껏해야 홍련초와 관련된 일 정도였습니다.”“딸을 살리기 위해서였지요. 그래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으셨습니다.”“설 대인이 알던 건 무엇이더냐.” 관리의 어조가 더욱 날카로워졌다.잡힌 자는 낮게 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그해, 영비마마께서 현비마마를 제거하고자 하셨습니다.”“허나 궁 안의 약물은 태의원이 일일이 기록하여, 함부로 쓸 수 없었습니다.”“영비마마께선 귀가하시는 날을 틈타 독약을 구하려 하셨고, 어디서 들으셨는지 저희 주인어른께서 독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손을 내미셨습니다.”“주인어른께선 처음엔 약을 지어드렸지만, 영비마마께서 제멋대로 약창고에 들었다가 엉뚱한 약을 들고 나왔습니다.”“그 탓에 약쟁이의 독이 세상에 드러날까 주인어른께선 설 대인을 찾아가 경고하셨습니다.”“‘딸을 살리고 싶다면 입을 다물라’는 뜻이었지요. 대신 해독약을 주셨고, 홍련초를 심게 하여 해독제를 만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동시에 저희도 독을 더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지요.”“설 대인께서는 저희를 몰래 추적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