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햇살의 임신은 어느새 3개월에 접어들었다. 배는 아직 옷 위로 크게 티 나지 않았지만 진성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자리를 바라봤다. 장미는 그런 진성을 볼 때마다 혀를 찼다. “야, 계진성. 애는 햇살이 배에 있는데 니가 임신한 것처럼 굴지 마.” 진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일은 여전히 밤마다 나갔다. 다만 햇살에게서 전화가 오면 달랐다. 한밤중에 딸기가 먹고 싶다고 하면 문 닫기 직전 과일가게를 찾아갔고, 갑자기 팥빙수가 생각난다고 하면 겨울에도 파는 가게를 몇 군데씩 뒤졌다. 한번은 햇살이 새벽 두 시에 말했다. [오빠. 군고구마.] 진성은 한참 화면을 내려다봤다. [지금 여름이야.] [사랑이가 먹고 싶대.] 결국 인터넷까지 뒤져 군고구마를 파는 곳을 찾아냈다. 장미는 재킷을 챙기는 진성을 보고 기가 막혀 했다. “또 어디 가!” “고구마요.” “한여름에?” “네.” 장미가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저 미친놈을 내가 왜 가드로 뽑았지.” 그래도 진성이 돌아올 때까지 다른 가드를 복도에 붙여줬다. 정기검진 날도 마찬가지였다. 밤새 일한 뒤에도 진성은 집에 들러 씻고 햇살과 함께 병원에 갔다. 햇살은 대기실 의자에서 꾸벅꾸벅 조는 진성을 옆구리로 찔렀다. “오빠 그냥 집에서 자라니까.” “싫어.” “검사 내가 받는데.” “알아.” “그럼 왜 따라와.” 진성은 햇살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내 애도 있으니까.” 햇살은 결국 웃었다. 진성은 초음파 화면 속 작은 움직임을 볼 때마다 말이 없어졌다. 햇살이 옆에서 물었다. “신기하지?” “응.” “벌써 아빠 된 것 같아?” “응.” 짧은 대답뿐인데 얼굴은 전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진성은 그런 날들이 좋았다. 퇴근하면 햇살이 소파에서 기다리고 있고, 냉장고에는 먹다 남은 과일이 들어 있고, 욕실에는 햇살이 사놓은 아기용품 광고지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생활. 거창한 건 없었다. 그게 오히려 좋았다. 처음으로 오래 가져보고 싶은 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앨리 복도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닫힌 문마다 음악과 웃음소리가 새어나왔고, 진성은 복도 끝 벽에 기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주머니 안에서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진성이 화면을 확인했다. 햇살이었다. [오빠.] 잠시 뒤 하나가 더 왔다. [나 초코케이크 먹고 싶은데.] 진성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먹어.] 답장을 보내자 바로 말풍선이 올라왔다. [집에 없어.] 진성의 표정이 다시 무덤덤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정적인 문자가 왔다. [나 사러 가도 돼?] 진성은 시간을 봤다. 12시 17분.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안 돼.] 답장을 보내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왔다. [왜애애애.] [밤이야.] [편의점 금방인데.] [안 돼.] [나 임산부인데.] 진성의 손이 잠깐 멈췄다. 곧바로 또 문자가 왔다. [사랑이가 먹고 싶대.] 진성은 한동안 화면을 내려다봤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게 없다던 여자였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뱃속 아이까지 끌어들이고 있었다. [집에 있어.] [싫어.] 진성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햇살.] 이번에는 답이 없었다. 십 초. 이십 초. 일 분. 진성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왜. 햇살의 목소리가 잔뜩 삐쳐 있었다. “문 열지 마.” -나 아직 소파인데? “계속 있어.” -초코케이크는? “사갈게.” 잠깐 정적이 흘렀다. -진짜? 목소리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진성은 벌써 복도에서 몸을 떼고 있었다. “응.” -큰 걸로. “둘이 먹는데 왜 큰 걸 사.” -셋이거든? 진성이 잠깐 말을 잃었다. 전화기 너머로 햇살이 킥킥 웃었다. -그리고 딸기 올라간 거 말고. 초코 많이 든 거. “알았어.” -생크림도 조금. “초코라며.” -초코랑 생크림 같이 있는 거 있잖아. “알았어.” -우유도. 진성은 한숨을 쉬었다. “또.” -음…… 귤? “끊
오후가 되자 진성은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검은 셔츠 소매를 걷고 시계를 차는 동안, 햇살은 소파에 길게 누워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임신 사실을 안 지는 며칠 되지 않았다. 배는 아직 평평했다. 그런데 햇살은 벌써부터 틈만 나면 배에 말을 걸었다. 진성이 재킷을 집어 들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왜.” 햇살은 진성 앞으로 와서 두 손을 배 위에 얹었다. 그리고 일부러 목소리를 가늘게 바꿨다.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 사랑아~” 진성의 손이 재킷 위에서 멈췄다. 햇살은 고개를 들고 씩 웃었다. “왜.” “뭐 하는 거야.” “인사.” “누가.” 햇살이 자기 배를 톡톡 두드렸다. “우리 애가.” 진성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내려갔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손을 뻗어 햇살 배 위에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올렸다. “아무것도 안 느껴져.” “당연하지. 아직 콩알이라니까.” “콩알은 아니야.” “그럼 뭐.” “몰라.” 햇살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가 그것도 몰라?” 진성은 대답 대신 허리를 숙여 햇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햇살은 그의 셔츠 끝을 잡았다. “오빠.” “응.” “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바로 사줄 거야?” 진성이 햇살을 봤다. “뭐 먹고 싶은데.” “아직 없어.” “그럼 왜 물어.” “미리 확인하는 거지.” 햇살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딸기 먹고 싶다 하면 딸기.” “응.” “한밤중에 붕어빵.” “사올게.” “여름에 군고구마.” 진성의 미간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 “그건 좀.” “봐. 벌써 싫다잖아.” “찾아볼게.” “새벽 세 시에 냉면 먹고 싶으면?” “사줄게.” 햇살의 눈이 휘었다. “진짜?” “응.” “그럼 애가 좋겠다.” 진성은 피식 웃었다. “네가 먹는 거잖아.” “애가 먹고 싶은 걸 수도 있지.” “벌써 핑계 만들지 마.” 햇살은 진성 가슴을 툭 쳤다. “다른 아빠들은 다 사준다던데.”
앨리의 문을 열고 들어선 햇살은 평소와 달리 담배부터 찾지 않았다. 카운터 안쪽에서 장부를 넘기던 장미가 그 모습을 보자 눈부터 가늘게 떴다. “왜.” 햇살이 웃었다. “언니.” “왜 그렇게 웃어. 사고 쳤냐?” “비슷해.” 뒤따라 들어온 진성이 말없이 서자 장미의 시선이 둘 사이를 오갔다. 햇살은 가방에서 작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병원에서 받아온 초음파 사진이었다. “이거 봐.” 장미가 받아 들었다. 처음에는 무슨 사진인지 몰랐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야.” 햇살은 배 위에 손을 올리고 씩 웃었다. “나 임신했어.” 장미가 눈을 감았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두야…….” 햇살이 킥 웃었다. “왜 좋아하지도 않고 머리부터 잡아.” 장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미친년아!” 분장실에서 화장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내밀었다. 햇살은 익숙하다는 듯 귀를 막았다. 장미의 시선이 그대로 진성에게 꽂혔다. “그리고 너.” 진성은 조용히 서 있었다. “이 짐승 같은 새끼야! 햇살이 몇 살인지나 알아?!” “스무 살입니다.” “내가 숫자 물었냐!” 장미가 손에 든 초음파 사진으로 진성의 팔을 철썩 때렸다. “넌 서른둘이야! 열두 살 어린애 데리고 살더니 아주 애까지 만들어?” 햇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 나 애 아니거든?” “넌 조용히 해!” “왜 맨날 나만 조용히 하래.” “입 열면 더 열받으니까!” 직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정이 수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도 마담 언니 좋아 죽는 얼굴인데.” 장미가 바로 돌아봤다. “다 들려, 이년아!” 둘은 얼른 분장실로 숨었다. 장미는 다시 햇살을 위아래로 훑었다. “병원은?” “갔다 왔지.” “몇 주래?” 햇살이 대답하자 장미는 진지한 얼굴로 다시 초음파 사진을 봤다. 조금 전까지 진성을 잡아먹을 듯하던 눈이 아주 천천히 누그러졌다. “몸은 괜찮고?” “응. 의사도 괜찮대.” “술은
몇 달이 흘렀다. 늦은 아침, 창문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거실 바닥을 길게 덮고 있었다. 진성은 소파에 앉아 셔츠 소매를 걷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일한 탓에 눈가에는 아직 피곤이 남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반쯤 마신 커피와 담배갑이 놓여 있었다.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오빠.” 진성이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맨발로 서 있었다. 평소라면 나오자마자 뭐라도 한마디 붙였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한 손은 등 뒤에 숨겨져 있었다. “왜.” “이거 봐.” 햇살이 손을 내밀었다. 작은 임신 테스트기였다. 진성의 시선이 그 위에 멈췄다. 두 줄.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햇살은 오히려 눈을 반짝였다. “우리 아이 생겼대.” 진성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있었다. 햇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 “싫어?” 그제야 진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햇살 앞까지 다가온 진성이 테스트기를 다시 한번 내려다봤다. “확실해?” “두 번 했어.” 햇살이 등 뒤에서 하나를 더 꺼냈다. “이것도 두 줄.” 진성의 입술 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햇살은 그 표정을 보자마자 웃었다. “좋지?” “응.” “그럼 좀 웃어봐.” 진성은 말없이 햇살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햇살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 답답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 두 팔은 허리를 감쌌다. 진성의 손이 햇살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병원 가자.” “오늘?” “응.” “출근은?” “안 가.” 햇살이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오빠는 가야지.” “너랑 병원 가.” “과보호 시작했네.” 진성은 대답 대신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햇살은 기분 좋은 듯 웃다가 테이블 위 담배갑을 발견했다. 곧장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거.” 진성이 눈을 내렸다. “뭐.” “이제 밖에서 펴.” “알아.” “집에서는 절대 안 돼.” “응.” 햇살은 자기 담배갑도 화장대 위에서 가져왔다
분장실 안은 잠시 조용했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방에 들어갔다. 햇살은 흐트러진 머리를 빗어 내리다 손목을 한번 내려다봤다. 아까 진성이 잡았던 자리였다. 자국이 남을 만큼 세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진성이 들어왔다. 한 손에는 검은 보온 가방이 들려 있었다. “뭐야.” “밥.” 진성이 테이블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자 도시락통 두 개가 나왔다. 계란말이와 볶은 김치, 장조림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햇살이 눈을 깜빡였다. “이거 오빠가 했어?” “아니.” “그럴 줄 알았어.” “아침에 샀어.” 햇살은 피식 웃었다. “근데 왜 이제 줘.” “먹을 시간 없었잖아.” 진성은 도시락을 햇살 쪽으로 밀었다. “먹어.” 햇살은 젓가락을 들었다가 멈췄다. 진성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오빠는?” “됐어.” “같이 먹자. 오빠도 안 먹었잖아.” “안 배고파.” 햇살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화났어?” 대답이 없었다. 햇살은 몸을 돌려 진성을 올려다봤다. “나한테?” “아니.” “거짓말.”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그럼 아까 왜 그렇게 잡았는데.” 진성의 눈이 햇살 손목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벽에서 등을 뗐다. “미안해.” “보기 싫었어.” “뭐가.” “다.” 햇살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빠.” “알아. 네 일인 거.” “그것만?” “내가 선 넘은 것도.” 햇살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알면 됐어.” 그녀는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진성 입 앞으로 내밀었다. “먹어.” “너 먹어.” “입 벌려.” 진성이 가만히 쳐다봤다. “빨리.” 결국 입을 벌렸다. 햇살은 계란말이를 넣어주고 웃었다. “잘하네.” “애 취급하지 마.” “오빠가 맨날 나한테 하잖아.” 진성이 옆 의자를 끌어 앉았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복도에서는 음악이 웅웅 울렸고, 멀리서 장미가 누군가를 혼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햇살은 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