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지금 옷을 바꾸겠다고요?”
해경이 묻자 한별은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움직일 수 있는 걸로요.”
“브랜드에서 이걸 메인으로 골랐어요.”
“그럼 브랜드 담당자한테 입혀요.”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한국말을 알아듣는 건 네 사람뿐인데 표정은 다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승재가 물을 들고 다가왔다가 멈췄다.
해경은 재킷을 집었다.
“어디가 불편한데요.”
“팔 올릴 때 등하고 어깨요.”
“팔 올려봐요.”
그가 셔츠 차림으로 팔을 들었다. 해경은 잠깐 눈을 감았다.
“입고요.”
한별은 다시 재킷을 입었다. 그가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리자 등판에 가로 주름이 생겼다. 정면 사진에서는 잡히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해경은 옆선과 암홀을 확인했다. 의상 자체가 좁았다. 피팅 때는 서 있는 모습만 확인했고, 지금 감독이 요구하는 자세는 몸을 크게 틀어야 했다.
“이 자세면 한 사이즈 위가 낫겠네요.”
“그러니까 아까부터.”
“그런데 다음 사이즈는 없어요. 옷 바꾸거나 자세 바꾸거나 둘 중 하나예요.”
“류 실장님 답은 항상 두 개밖에 없어요?”
해경은 그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세 번째는 직접 만들어보세요.”
한별이 입을 다물었다. 승재가 그 틈에 물병을 꽂아줬다.
해경은 감독과 통역을 불렀다. 감독은 의자에 기대는 편안한 느낌을 원했다. 브랜드 담당자는 메인 재킷의 형태가 보여야 한다고 했다. 한별은 지난 화보와 똑같이 서 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세 사람의 말을 듣고 나니 재킷에 사람 셋을 넣어야 할 것 같았다.
해경은 의자를 돌려 등받이가 한별의 옆으로 오게 했다.
“앉아서 몸을 다 틀지 말고, 한쪽 팔꿈치만 올려봐요.”
한별이 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애매해요.”
“찍어보고요.”
테스트 사진이 모니터에 떴다. 이번에는 옷이 살았지만 턱을 괸 얼굴이 지나치게 얌전했다. 한별은 화면을 보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
해경은 한 걸음 비켜섰다.
“그럼 배우님이 원하는 걸 보여주세요. 옷은 제가 볼게요.”
그는 의자 뒤에 서서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상체를 조금 숙이고 카메라를 봤다. 방금까지 예민하게 굳어 있던 입가가 풀렸다. 감독이 손을 들었다.
연달아 셔터가 울렸다.
해경은 화면보다 재킷 밑단을 봤다. 숙인 몸 때문에 안감이 벌어졌다. 촬영을 잠깐 멈추고 안쪽에 작은 클립을 댔다.
“고개만 돌려요. 허리까지 돌면 빠져요.”
한별은 바로 다음 컷에서 허리를 돌렸다.
클립이 바닥에 떨어졌다.
해경과 한별이 동시에 내려다봤다.
“방금 뭐라고 했죠?”
“들었는데 몸이 먼저.”
“몸에도 전달해요.”
감독은 클립을 주워주며 웃었다. 한별은 웃지 않았다. 해경도 웃을 여유가 없었다. 지금 멈출수록 다음 착장 시간이 줄었다.
그녀는 클립 대신 임시 고정용 테이프를 썼다. 안감 테스트를 끝내고 다시 붙이자 이번에는 버텼다. 촬영은 십오 분 늦게 끝났다.
모니터 앞에 선 한별이 사진을 넘겼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면 됐잖아요.”
“처음부터 그 자세 보여주셨으면요.”
승재가 두 사람 사이에 수건을 놓았다.
“사진 잘 나왔네요. 그렇죠? 잘 나왔어요.”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로 덕분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점심은 샌드위치였다. 한별이 소스를 한 번 빼달라고 하자 해경이 쳐다봤다.
“그렇게 매번 쳐다보실 필요 없어요. 안 흘려요.”
“옷 갈아입으라는 뜻인데요.”
그는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가운을 걸쳤다.
소담은 구석에서 신발을 닦고 있었다. 해경이 왜 밥을 안 먹느냐고 묻자 아침에 자신의 짐 정리가 늦어 촬영이 밀린 줄 알았다고 했다.
해경은 샌드위치 하나를 가져다줬다.
“의자 사진 때문에 늦은 거예요. 소담 씨 일 아니에요.”
“제가 여분 재킷을 더 챙겼으면.”
“있지도 않은 사이즈를 어떻게 챙겨요. 먹고 다음 거 확인해요.”
한별이 옆에서 물병 뚜껑을 돌리다 말을 보탰다.
“제가 자세 바꿔달라고 했어요. 소담 씨는 잘못한 거 없어요.”
해경은 그를 보지 않았다. 그 말은 잘했다. 다음에도 잘할지는 별개였다.
오후 촬영은 오히려 빨랐다. 한별은 옷마다 다른 표정을 만들었고 해경은 그가 다음에 어느 쪽으로 돌아설지 예상해 매무새를 잡았다. 오래 같이 일한 값은 이런 데서 나왔다.
그렇다고 성격까지 잘 맞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마지막 착장이 끝나자 브랜드 담당자가 손뼉을 쳤다. 내일 짧은 홍보 영상을 하나 더 찍자고 했다. 한별이 바로 입을 열었다.
“일정 확인하고 답할게요.”
해경도 휴대폰을 꺼냈다. 이번에는 그 말에 이견이 없었다.
문제는 제안서였다. 내일 영상은 편안한 주말 룩인데 가져온 옷은 모두 정장과 가죽 재킷이었다. 담당자는 근처 매장에서 고르면 된다고 했다. 제품 구매 비용과 차량은 제공하겠다고 했다.
해경이 사이즈를 묻자 한별이 말했다.
“내일도 입어보지도 않고 고르실 거예요?”
“오늘 입어보고도 바꾸셨잖아요.”
담당자가 통역을 통해 제안했다.
“그러면 배우님도 같이 가시면 되겠네요.”
해경은 통역을 봤고 한별은 담당자를 봤다.
승재가 다음 날 시간표를 펼쳤다. 오전 두 시간만 비어 있었다.
한별이 먼저 말했다.
“옷 고르는 데 그렇게 오래는 안 걸리죠?”
해경은 그의 구두부터 머리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누가 입느냐에 달렸죠.”
“배우 때문에 안 하시게요?”프로듀서는 돌려 묻지 않았다. 해경은 무릎 위 시안을 내려다봤다. 열두 벌의 옷과 네 사람의 변화가 있었다. 주연이 마음에 안 든다고 전부 덮기에는 오래 준비한 기회였다.“배우 때문만은 아니고요. 제 역할을 확인하고 싶어요.”“의상 총괄입니다. 기존 전담 업무와는 별개예요.”“한별 씨 현장 수정은 제가 봐도, 다른 배우 의상 결정 중에는 보조가 맡아야 해요. 그때마다 저를 부르면 일정이 안 돌아가요.”프로듀서는 바로 메모했다. 필요한 인원부터 잡자고 했다.해경은 한 장 더 넘겼다. 지방 촬영이 끼어 있었다. 촬영일에는 근처 숙소에 머물고, 쉬는 날에는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샵 예약을 정리할 수는 있었다. 대신 몸이 두 개가 될 수는 없었다.“배우분들한테도 먼저 설명해주세요. 준비 시간이 모자라면 제가 밤새우면 된다는 식으로 시작하고 싶지 않아요.”“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해경은 그제야 자료를 덮었다. 당장 계약서에 서명하지는 않았다. 인력과 예산을 확인할 하루를 달라고 했다.회의실 밖에 한별이 남아 있었다. 승재가 차를 가져오는 동안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해경이 지나가자 그가 물었다.“할 거예요?”“배우님은요?”“대본은 괜찮아서요.”“저도 일은 괜찮아서요.”두 사람 사이에서 엘리베이터 숫자가 하나씩 바뀌었다.한별이 먼저 말했다.“내가 싫다고 할 때마다 일정 얘기부터 안 하시면 좋겠는데.”해경은 그를 봤다.“싫다고만 하지 말고 뭐가 싫은지 말씀하시면 되죠.”“다 설명해야 알아요?”“제가 배우님 속마음까지 스타일링해요?”그의 턱이 조금 들렸다. 해경은 시안 모서리를 가지런히 맞췄다.“제 의견도 끝까지 들어보시고요. 오늘 다음 장에 다 있었잖아요.”한별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내리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둘 다 옆으로 비켰다. 해경은 반대쪽 계단으로 향했다.“안 타요?”“한 층 아래 사진팀 만나러 가요.”굳이 같이 타야 할 이유도 없었다.재하는 회의실에서
“의상 총괄을 저한테요?”해경이 기획서를 다시 펼쳤다. 패션 브랜드가 제작하는 여덟 편의 짧은 드라마였다. 재하는 포스터와 화보 촬영 제안을 받은 상태였다.“네 작업 사진 보고 먼저 물어봤어. 배우 누구 하느냐보다 캐릭터별로 옷을 다르게 만들 사람이 필요하대.”해경은 출연진 칸부터 확인했다. 주연 두 자리 모두 협의 중이었다.여섯 주 촬영, 주 삼 일. 촬영 없는 날에는 기존 고객을 받을 수 있었다. 예산표에는 의상팀 인건비와 구매비가 따로 잡혀 있었다. 셋을 넘기지 못하던 자기 포트폴리오가 처음으로 여러 캐릭터의 옷장이 될 기회였다.“나 이런 규모 총괄은 처음인데.”“그러니까 자료 보고 결정해. 못 하겠으면 지금 말하고.”재하가 남은 샌드위치를 밀어줬다. 해경은 한 입 먹고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 주 월요일 미팅이었다.“갈게. 대신 네가 추천했다고 가격 깎아주진 않아.”“그 말을 내가 제작사에 그대로 전하면 돼?”“응. 앞에 실력 좋다는 말 붙여서.”재하가 웃었다. 해경은 일정표에 시간을 적었다.같은 시각, 한별은 차 안에서 기범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브랜드 드라마 주연 제안이었다. 해외 영상 반응이 좋아 우선 미팅을 원한다는 말에 그는 대본부터 보내달라고 했다. 소속사는 일찌감치 출연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의상 쪽은 류 실장님 얘기가 나와요.”한별이 창밖에서 눈을 뗐다.“내가 추천한 거 아니에요.”“알아요. 거기도 후보로 올랐대요.”“다른 사람도 볼 수 있잖아요.”기범이 잠깐 조용해졌다.“두 분 무슨 일 있어요?”“일밖에 없죠. 그게 문제지.”그는 전화를 끊고 대본을 열었다. 오래된 동네 수선집에 돌아온 아들과 그 건물을 맡은 건축가의 이야기였다. 전작의 말끔한 검사와는 달랐다. 옷을 잘 입는 장면보다 남의 옷을 만지는 장면이 많았다.세 장만 보려다가 끝까지 읽었다.이틀 뒤 대본 미팅에서 한별은 윤세린을 만났다. 서른두 살, 예전에 상대역으로 호흡을 맞춘 배우였다. 그녀는 먼저 와서 대본에 표시하고 있었다
금요일 오후 두 시, 해경은 한별의 전화를 끊었다.정확히는 받지 않고 무음으로 돌렸다. 모델이 갈아입고 나오는 동안 바닥에 떨어진 귀걸이를 찾는 중이었다. 오늘은 그의 촬영장이 아니었다.“안 받아도 돼?”재하가 조명을 옮기며 물었다.“응. 오전에 인계 끝냈어.”해경은 의자 밑에서 귀걸이를 찾아 소독 솜으로 닦았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아침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소담을 먼저 보내고, 샵에 짐을 내려놓고, 씻고 나온 게 한 시간 전이었다.몸은 피곤했다. 그런데 행거에 걸린 옷을 보면 잠이 달아났다. 자신이 고른 질감과 색이었다. 한별에게 어울리는지부터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재하가 모델의 어깨에 걸친 장식을 가리켰다.“그거 그대로 갈 거야?”“왜. 어제는 좋다며.”“사진으로 볼 때랑 달라. 조명 받으니까 얼굴을 가려.”해경이 모니터 앞에 섰다. 테스트 사진의 은색 장식이 턱 옆에서 빛났다. 예쁘기는 했지만 시선이 그쪽으로만 갔다.“등으로 넘겨볼게. 없애지는 말자.”“응. 그렇게 한 번.”재하는 카메라를 들었다. 해경이 장식을 고쳐 달자 바로 다음 컷이 이어졌다. 안 된다는 말 뒤에 왜 안 되는지가 붙었고, 바꾼 다음에는 확인했다. 일이라는 게 늘 싸워야만 굴러가는 건 아니었다.휴대폰이 또 울렸다. 이번에는 승재였다.해경은 모델에게 잠깐 쉬라고 한 뒤 전화를 받았다.“네. 무슨 문제 있어요?”“실장님, 내일 시사회 재킷이요. 배우님이 다른 걸 입고 싶다고 하셔서.”“원장님께 사진 세 개 보내놨어요. 지금 샵에 계세요?”“네. 그런데 배우님이 실장님이랑 얘기를.”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바뀌었다.“이거 소매가 짧아요.”해경은 눈을 감았다 떴다.“소매 안쪽에 시침해놨어요. 원장님께 풀어달라고 하세요.”“아까 다른 사람한테 물었는데 모르던데.”“신입한테 물으신 거 아니에요? 원장님께 여쭤보세요.”“그냥 잠깐 와서 보면 안 돼요? 오래 안 걸리는데.”해경은 스튜디오 안쪽을 봤다. 모델이 거울 앞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대관은
“연인 설정은 빼주세요.”해경이 말하자 한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모처럼 의견이 맞았다. 원인은 아주 분명했다. 서로의 옆에 붙여놓은 하트 그림이었다.영상 담당자는 실제 연애가 아니라 콘셉트라고 설명했다. 삼십 초짜리 옷 고르기 영상이고, 두 사람의 말싸움이 자연스러워서 떠올렸다고 했다.해경은 시안의 제목을 짚었다.“직원과 배우로 찍어도 되는 거잖아요.”한별이 옆에서 덧붙였다.“제가 옷 고르고 이분이 반대하는 건 연기 안 해도 되는데.”“배우님이 고르시는 걸 보면 반대할 만해요.”담당자가 웃었다. 통역도 웃다가 곧장 말을 옮겼다.결국 콘셉트는 배우의 취향과 스타일리스트의 선택을 비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해경의 얼굴이 나오는 만큼 별도 출연료를 받기로 했다. 분량은 짧았고 금요일 귀국에도 지장이 없었다.해경은 완성본에서 자신의 이름과 직함이 어떻게 나오는지까지 확인했다. 한별은 그동안 휴대폰으로 대본을 읽었다.“다 됐어요?”“네.”“저는 여기 앉아 있는 시간도 출연료 나와요?”“소속사에 물어보세요.”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경도 기획안을 접었다. 같은 편이었던 시간은 정확히 십칠 분이었다.다음 날 촬영은 호텔의 작은 연회장에서 시작됐다. 한쪽 벽에 행거를 세우고 브랜드 로고를 붙였다. 해경은 대기 중인 한별에게 회색 바지를 건넸다.“이게 제 선택인 거죠?”“배우님이 고르신 검은 바지는 저쪽이에요.”“이건 누가 봐도 회색이 더 어울리게 준비했잖아요.”해경은 검은 바지에 맞는 상의를 하나 더 가져왔다.“이제 이겨보세요.”첫 촬영은 한별이 검은색 옷을 고르는 장면이었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자 능숙하게 소매를 들어 보였다. 편하고 실패하지 않는 선택이라고 설명했다.해경의 차례가 되자 감독이 손을 내저었다. 그녀가 마이크를 단 쪽을 옷걸이로 가린 탓이었다.“다시 갈게요.”해경이 옷걸이를 내렸다. 이번에는 말을 너무 빨리했다. 통역을 붙일 틈이 없었다. 세 번째에는 시선이 카메라 옆 모니터로 갔다.한별이 행거에 기대
“그건 싫어요.”옷걸이에서 셔츠를 꺼내기도 전이었다. 해경은 한별을 봤다.“뒷면만 보셨는데요.”“앞도 대충 알 것 같아서.”해경은 셔츠를 앞으로 돌렸다. 아무 무늬 없는 흰색이었다.“대단하시네요. 맞혔어요.”아침 아홉 시, 브랜드 매장은 영업 전이었다. 현지 담당자가 직원에게 부탁해 문을 먼저 열어줬다. 소담은 사이즈별 제품을 챙겼고 승재는 차량 기사와 통화 중이었다. 한별과 해경은 문을 연 지 사 분 만에 싸우고 있었다.한별이 고른 건 검은 티셔츠였다. 해경은 다시 걸었다.“어제도 검은 옷 입었어요.”“편한 주말이라면서요. 주말에 저는 이거 입어요.”“배우님 주말을 고증하는 영상이 아니에요.”그가 팔짱을 꼈다. 해경은 연한 파란 셔츠와 회색 바지를 건넸다. 한별은 색을 한 번 보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커튼이 열렸을 때 소담이 고개를 들었다. 해경은 바지 밑단부터 접었다.“어때요.”“아까부터 제 의견 들어주시는 거예요?”“입어보지도 않고 고른다고 하셔서요.”한별은 거울을 보며 소매를 걷었다.“너무 멀쩡해요.”해경이 고개를 들었다.“찢어드려요?”“그 뜻이 아니잖아요.”그는 셔츠 단추를 두 개 더 풀었다. 해경은 그중 하나를 다시 잠갔다. 두 사람의 손이 같은 단추 앞에서 멈췄다.“덥잖아요.”“안에 흰 티 입을 거예요.”“그걸 먼저 말하면 되는데.”“말 끝나기 전에 푸시니까요.”소담이 티셔츠를 가져왔다. 한별은 다시 커튼을 닫았다. 해경은 그 앞에 벨트 두 개를 들고 섰다. 자기 샵 거울 앞과 달라진 건 외국어로 나오는 음악뿐이었다.두 번째로 나온 옷차림은 괜찮았다. 한별도 이번에는 거울을 오래 봤다. 소담이 카메라로 앞뒤를 찍었다.해경은 액세서리 진열대로 갔다. 반지를 고르는 사이 휴대폰에 재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금요일 모델 확정. 시안은 언제 줄 수 있어?해경은 사진 두 장을 보내고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두 번째는 어깨 장식 빼고 갈게. 조명으로 잡아줘. 옷보다 사람이 먼저 보이게.”뒤에서 한별의
“지금 옷을 바꾸겠다고요?”해경이 묻자 한별은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움직일 수 있는 걸로요.”“브랜드에서 이걸 메인으로 골랐어요.”“그럼 브랜드 담당자한테 입혀요.”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한국말을 알아듣는 건 네 사람뿐인데 표정은 다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승재가 물을 들고 다가왔다가 멈췄다.해경은 재킷을 집었다.“어디가 불편한데요.”“팔 올릴 때 등하고 어깨요.”“팔 올려봐요.”그가 셔츠 차림으로 팔을 들었다. 해경은 잠깐 눈을 감았다.“입고요.”한별은 다시 재킷을 입었다. 그가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리자 등판에 가로 주름이 생겼다. 정면 사진에서는 잡히지 않았던 부분이었다.해경은 옆선과 암홀을 확인했다. 의상 자체가 좁았다. 피팅 때는 서 있는 모습만 확인했고, 지금 감독이 요구하는 자세는 몸을 크게 틀어야 했다.“이 자세면 한 사이즈 위가 낫겠네요.”“그러니까 아까부터.”“그런데 다음 사이즈는 없어요. 옷 바꾸거나 자세 바꾸거나 둘 중 하나예요.”“류 실장님 답은 항상 두 개밖에 없어요?”해경은 그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세 번째는 직접 만들어보세요.”한별이 입을 다물었다. 승재가 그 틈에 물병을 꽂아줬다.해경은 감독과 통역을 불렀다. 감독은 의자에 기대는 편안한 느낌을 원했다. 브랜드 담당자는 메인 재킷의 형태가 보여야 한다고 했다. 한별은 지난 화보와 똑같이 서 있고 싶지 않다고 했다.세 사람의 말을 듣고 나니 재킷에 사람 셋을 넣어야 할 것 같았다.해경은 의자를 돌려 등받이가 한별의 옆으로 오게 했다.“앉아서 몸을 다 틀지 말고, 한쪽 팔꿈치만 올려봐요.”한별이 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애매해요.”“찍어보고요.”테스트 사진이 모니터에 떴다. 이번에는 옷이 살았지만 턱을 괸 얼굴이 지나치게 얌전했다. 한별은 화면을 보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해경은 한 걸음 비켜섰다.“그럼 배우님이 원하는 걸 보여주세요. 옷은 제가 볼게요.”그는 의자 뒤에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