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 내일 다시 얘기해. 여기 보안 시스템은 내가 잘 알아. 특정 열쇠로 열지 않으면 자동으로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 경찰이 들이닥치면 너한테도 나한테도 안 좋아.”소민아는 그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천천히 멀어져가다가 복도 끝에서 사라진 발걸음 소리도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소민아는 온몸에 힘이 풀려 눈을 질근 감은 채 벽을 타고 스르륵 내려왔다. 지금부터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날 밤, 소민아는 손에 칼을 들고 잠이 들었다 깨어났다를 반복했다. 집에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아 기성은의 패딩으로 몸을 감싸고 추위를 견딜 수밖에 없었다.밤이 지나가고 유기견이 짖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아침 일곱 시였다.어젯밤 일을 떠올린 순간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핸드폰을 들고 112에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소민아는 서재에 들어가 CCTV 영상이 담긴 기성은의 컴퓨터를 보여주었다. 경찰 두 명은 핸드폰으로 어젯밤 문 앞에 찾아왔던 용의자의 얼굴을 찍었다.소민아는 누군가가 또 찾아올지도 모른다며 경찰에게 남원별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그들이 허락하자 그녀는 얼른 짐을 챙겨 경찰차에 앉았다.백미러로 살펴보니 역시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뒤쪽 차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쫓아오지 않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검은색 승용차 안, 목에 문신을 새긴 남자가 전화로 말했다.“누님, 소민아가 경찰차에 앉아서 가버렸는데 저흰 따라가지 못하겠어요. 보아하니 누님 말씀대로 남원별장에 가는 것 같아요.”“알았어. 남은 일은 나한테 맡겨.”‘남원별장에 가면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아?’송시아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면 약점이 없어야죠. 약점을 없애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환이 될 뿐이에요. 전연우 씨... 당신이 나한테 알려준 거잖아요.”송시아는
그녀는 강지훈과 맞설 수 없다.‘소민아, 자신 있으면 평생 남원별장에서 기어 나오지 마.’소민아는 경찰차를 타고 남원별장에 도착했다. 경호원들이 그녀를 막아서자 중년 아주머니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이봐요. 그 아가씨는 들여보내요. 내가 잘 아는데 좋은 사람이에요.”그 아주머니는 바로 품에 별이를 안고 있는 은경애였다.주충재가 사진과 소민아를 대조해보았다. 옆에 있던 부하가 그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여서야 소민아를 들여보냈다.소민아는 집에 들어가려던 순간, 풀숲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저 풀숲에서 누군가 몰래 사진 찍고 있어요. 빨리 잡아요.”발각된 그 남자는 재빨리 도망치려 했지만, 주충재가 그를 향해 공포탄을 쏘았다.“도망치면 머리에 총알 박아넣을 거야.”그 귀를 찌를 듯한 총성은 나무에 앉아있던 새들도 놀라 퍼덕이며 날아가게 만들었다.남자는 너무 놀라 오줌을 질질 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민아는 그 틈을 타 재빨리 그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살펴보았다. 안엔 별이의 사진들이 가득했다.소민아는 그제야 일의 심각성을 눈치챘다.“당신 누가 보낸 거예요?”“전 몰라요! 전 돈 받고 일만 하는 사람이니까 아무 상관도 없어요. 정말 모른다고요! 죽... 죽이지 말아주세요!”“핸드폰 연락처 보여줘요.”남자가 보여준 낯선 번호에 전화를 걸어보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찍으라고 한 사진은 찍었어? 부대표님께서 직접 요구한 사진이야. 일이 잘못되면 가만 놔두지 않을 줄 알아!”소민아는 소피아임을 확신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아이의 사진이다.그녀는 그가 사진을 전송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카메라 메모리 카드를 빼내고 나머지는 모두 부숴버렸다.송시아는 참으로 극악무도한 여자다. 아이에게까지 손을 쓰려 하다니. 다행히 소민아가 빠르게 발견했으니 망정이니 아니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도 어렵다.“민아 씨, 물 마시세요.”도우미가 고민에 잠겨 있던 소민아를 불렀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민아가 은경
소민아는 발아래 소파 앞 장난감을 쥐고 놀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결혼식 날엔 너무 바빠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오늘 자세히 보니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이 아이... 정말 대표님께서 보육원 문 앞에서 주워온 아이 맞나요? 바깥에서 다른 여자랑 낳은 사생아가 아니고요?”“아니면 소월 언니가 자신이 아이를 낳았다는 걸 잊어버렸을까요?”은경애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아이고,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요. 대표님의 비서도 증명해주실 수 있어요. 정말 대표님께서 주워온 아이 맞아요. 아가씨가 혼자 집에서 외로워할까 봐 키우라고 데려오셨어요.”“눈썹과 눈이 대표님과 소월 아가씨를 많이 닮았어요. 우연이겠죠.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신기한 일들이 많잖아요.”소민아가 물었다.“저 안아봐도 될까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별이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장난감을 내려놓고 소민아에게 걸어가 두 손을 벌렸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그녀는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 도련님은 정말이지 대표님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그녀는 자세히 아이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눈이 대표님과 똑같이 생겼어요. 그리고 이 입술... 눈만 가리면 완전히 소월 언니잖아요.”“두 사람이 낳은 아이가 아니라는 말 정말 믿기 힘드네요.”“민아 씨, 도련님이 민아 씨가 좋은가 보네요. 이 별장 안에서 대표님과 아가씨 외에 누구 품에 안겨도 울음을 터뜨리시거든요.”“대표님께선 이 아이와 친자 검증 해보셨나요?”“해보셨을 리가 없죠. 바깥에서 주워왔으니 당연히 혈연관계는 아닐 거잖아요.”소민아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소월 언니와 대표님 두 분 모두 친자 검증 안 하셨다는 거죠?”은경애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집 안에서 소월 언니 머리카락 찾을 수 있어요? 대표님의 것도 상관없어요. 제가 보기에 한 번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에 하나... 정말 친자식이면요?”은경애가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민아 씨,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제
소민아는 남원별장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어느덧 5일이 지났다.그녀가 기성은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송시아가 아이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 그리고... 친자 검증을 해야겠다는 계획까지 모두 말해주었다.문자 십여 개를 보내도 감감무소식이었지만 소민아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그에게 오늘 일을 모두 말하고 난 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핸드폰이 줄곧 감시를 당하고 있으며, 기성은에게 보냈던 문자는 모두 송시아에게 향하고 있음을.성세 그룹.송시아는 소민아가 보낸 문자 내용을 보며 쿡쿡거리며 웃고 있었다.“기성은한테 정말 진심인가 보네. 하지만 기성은이 대체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 목을 매는 거야?”‘기성은, 여자가 너한테 이렇게 매달리는데 네 감정은 어떤지 궁금하네. 지금까지 충분히 자유를 만끽했으니 이젠 고생을 할 때도 됐지.’송시아는 기성은의 번호로 소민아에게 다른 말 없이 주소 하나를 보냈다. 그 후 그녀는 흐뭇한 얼굴로 컴퓨터를 껐다.그녀는 이제 가만히 앉아 물고기가 미끼를 물기만을 기다리면 된다.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소민아가 곧바로 확인해보니 기성은이 보내온 문자였다.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왜 주소 하나만 보낸 거지?”그녀가 연속으로 문자 몇 개를 보냈어도 기성은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소민아는 자신이 함정에 빠진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 주소는 천하 일성 룸이지 않은가.소민아의 마음속 불안감이 그녀에게 함정일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갈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기성은이 정말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고, 그녀가 가지 않아 그가 목숨이라도 잃는다면 그녀는 평생 제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소민아는 더는 고민하지 않고 차를 불렀다.그녀가 떠나려 하자 은경애가 말했다.“송시아는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 목적을 빨리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아요.”소민아가 말했다.“오후 다섯 시 반
소민아의 눈에 손에 와인잔을 들고 롱 원피스 차림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 조용히 소파에 앉아있는 여자가 들어왔다.송시아는 꼬았던 다리를 내려놓고 우아한 자태로 허리를 굽히고는 빨갛게 칠한 손톱으로 소민아의 아래턱을 들어 올렸다. 소민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해 머릿속이 백지장같이 새하얘졌다.“쯧쯧, 가엾어라! 피가 나오잖아요! 이리 와봐요. 내가 소독해줄게요.”송시아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녀는 들고 있던 와인을 피가 흐르고 있는 소민아의 이마에 들이부었다.“아직도 발버둥 친다고? 너희들 당장 와서 이 여자 다리 붙잡아!”두 남자가 다가와 발을 소민아의 종아리에 올려놓았다. 소민아는 고통스러움에 울부짖었다.“으악! 부대표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전 부대표님한테 잘못한 거 없잖아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데요!”송시아가 통쾌함이 넘실거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소민아 씨, 정말 멍청한 거예요,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거예요? 내 앞에서 연극하지 말아요. 지금 이렇게 된 건 다 소민아 씨가 내가 열어준 길을 거절하고 나한테 대항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잖아요.”“난 민아 씨한테 세 번이나 기회를 줬어요.”“하지만 민아 씨는 계속 내 일을 방해하려 했죠. 오늘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송시아는 어린 강아지를 길들이기라도 하듯 소민아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민아 씨가 좋아하는 그 소월 언니는 민아 씨가 이렇게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네? 한번 불러봐요. 민아 씨를 구하러 오는지 보자고요.”완전히 가면을 벗어던진 송시아의 모습에 소민아는 더는 연기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래턱을 올리고 송시아를 노려보았다.“부대표님, 이 나라는 법치국가예요. 오기 전 이미 30분 뒤에도 제가 나가지 않으면 부대표님이 절 납치했다고 신고하라고 말해뒀어요.”“이제 좀 영리해졌네요!”“하지만 아직 시간은 일러요. 급할 필요 없어요. 나한텐 시간이 많거든요. 천천히 같이 놀아보죠.”“마
갖은 괴롭힘을 당한 소민아는 바닥에 쓰러진 채 눈을 감고 숨만 간신히 쉬고 있었다. “컥...”소민아는 피를 한 움큼 토해내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시간이 조금씩 흘러갔음에도 답장이 오지 않자 송시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일어나 발로 소민아의 가슴팍을 밟고는 핸드폰으로 쓰러져있는 그녀를 찍었다.옆에 있던 뚱뚱하고 기름진 남자가 말했다.“진짜 독한 년이에요. 살려달라고 한마디도 안 하더라고요. 누님... 계속 이렇게 가다간 죽을지도 몰라요. 그럼 일이 시끄러워져요.”“걱정하지 마. 아직 안 죽어.”그때, 마른 몸집의 남자가 문자를 하나 받았다.“큰일 났습니다.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었는지 누군가 위치를 경찰에 알렸습니다. 지금 경찰들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다들 수배자 신분으로 도망치고 있는 신세다 보니 경찰이 온다는 말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송시아의 멸시에 찬 눈동자가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너희들은 이년 데리고 가. 기성은이 정말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을 거야.”소민아는 음산한 지하실에 누워있었다. 희미한 정신으로도 입속 쓰디쓴 맛을 느낄 수 있었다.소민아는 3일이 지나도록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송시아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약을 먹였으나 효과는 보지 못했다.그녀 몸에 깃든 한기는 아무리 이불을 두껍게 덮어도 가실 줄을 몰랐다.감옥 밖의 남자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안에서 생사를 헤매고 있는 여자를 보며 분노에 차올라 술잔을 내던졌다.“제기랄! 송시아 사악한 년! 우리한테 던져주고 상관도 안 하고 있잖아. 죽으면 우리한테 다 뒤집어씌우려고.”“형님, 우리 그냥 병원에 보냅시다. 아직 돈을 받은 것도 아닌데 사람까지 보살피는 건 손해 보는 거잖습니까!”“송시아한테 놀아난 겁니다!”우두머리가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오늘 밤 병원에 던져놓자. 죽을지 살지는 이년 명에 달렸겠지.”그날 밤 새벽 두 시.먹구름이 낮게 가라앉은 하늘을 보니 당장이라도 폭우가 내릴 것 같았다.하얀색 승용차가 잠깐 멈춰 섰다가
소민아는 따뜻한 손이 자신을 잡고 있음을 느꼈다. 간신히 눈을 떴지만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소민아가 응급실에 들어간 뒤 여우림은 창백해진 신이랑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별일 없을 거예요. 이랑 씨 몸은 어때요? 괜찮아요?”신이랑은 괴롭게 자신의 위 부분을 만지며 벽에 기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아무런 징조도 없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이랑 씨!”...면북.인기척 하나 없는 아무의 관심도 받지 않는 변경 지대, 바로 그가 자랐던 익숙한 곳이다.“형님, 서울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소민아 씨는 이제 병원에 보내졌고 괜찮다고 합니다. 이 사진 보시겠습니까?”기성은은 부하가 건네주는 사진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들고 있는 단도의 칼날을 문질렀다.“앞으로 이런 거 내 눈에 보이게 하지 말고 다 없애버려.”“네.”발갛게 물든 석양이 맑은 호수에 드리웠다. 물 위에 세워진 마을은 먼 곳에서 바라보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요새와도 같았다.주위엔 고요함이 내려앉아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아름다운 풍경과는 달리, 이곳에선 시시각각 예측하지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조금만 경계심을 풀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그는 그녀에게 평안한 삶을 줄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신이랑에게 가는 것이야말로 그녀에게 최고의 선택이다.소민아가 깨어났을 땐 이미 3일이나 지나있었다. 눈을 뜨고 처음 본 건 걱정 가득한 얼굴의 신이랑이었다.“민아 씨? 깼어요?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의사가 들어와 그녀의 몸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한다.소민아는 돌연 울컥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멈출래야 멈출 수가 없었다.신이랑은 옆에서 끊임없이 그녀를 위로했다.“괜찮아요. 괜찮아요.”“이제 민아 씨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앞으로는 내가 아무도 민아 씨 괴롭히지 못하게 할게요.”소민아는 한동안 울다가 몽롱한 정신으로 다시 잠이 들었다.신이랑은 아직 신고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소민아가 의식을 회복했을 땐 어느덧 금요일 아침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몸엔 위험천만한 내장 출혈이 있었다. 조금만 더 심각했다면 세 시간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신이랑은 그동안 매일 병원에서 소민아를 보살폈다. 몸 상태가 어떤지는 그녀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날까 봐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오늘은 부드럽게 햇살이 내리쬐는 따뜻한 날이다. 하여 신이랑은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햇볕 쪼임을 하러 나갔다.며칠이 지나도록 소민아는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그 누구보다 활달하고 웃기 좋아하던 그녀가 지금처럼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신이랑은 너무나도 괴로웠다.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창백하고 초췌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민아 씨, 걱정되는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요. 한마디라도 좋으니까 말 좀 해봐요. 이렇게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걱정되는지 알기나 해요?”신이랑은 그녀에게 영양죽을 만들어 주었지만, 소민아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억지로 먹일 수는 없으니 링거액으로 그녀의 신체 기능을 간신히 유지시킬 수밖에 없었다.눈에 띄게 야위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신이랑은 가슴이 저릿해졌다.그때, 돌연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신이랑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송시아가 손에 꽃 한 다발을 들고 선글라스를 낀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에선 경호원들이 소민아에게 줄 선물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소민아가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송시아를 빤히 쳐다봤다. 그렇게 선글라스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소민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부대표님, 정말 죄송하게 됐네요. 저 안 죽었어요. 실망이 크시겠어요.”송시아는 목에 칼날이라도 박힌 듯 좀처럼 말을 뱉어내지 못했다.“어떤 보상을 원하든 내가 다 해줄게요.”“이건 도라지꽃이에요. 서울시 전체를 뒤져 겨우 사 온 거예요...”송시아가 팔을 뻗자 소민아는 손을 휘둘러 그녀를 뿌리쳤다.“또 절 괴롭히려고 이러시는 거죠? 기성은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