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이렇게 깊다니... 도련님께서 밤늦게 돌아오지 않는 아가씨가 걱정되어 마중을 나갔으니 망정이지 더 큰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쩔 뻔했어요!”장소월이 웃으며 말했다.“그냥 넘어진 거예요.”“뭐라고요? 고작 넘어진 것뿐인데 이렇게 크게 다쳤다고요?”“춤 연습을 할 때 주의하지 않아 긁혔어요.”아주머니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안 되겠어요. 어르신에게 말씀드려 학원을 바꿔 달라고 해야겠어요. 어떻게 선생님이라는 작자가 책임감 없이 이렇게까지 다칠 때까지 가만히 놔둘 수가 있어요! 그런 사람이 무슨 선생이에요!”장소월은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가 다칠 때마다 가장 먼저 걱정해주는 사람은 항상 오 아주머니이다.“아주머니, 전 정말 괜찮아요. 집사님께 전화해 절 데리러 오라고 해주세요.”백윤서가 말했다.“소월아,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가. 널 혼자 이 시간에 보낸다면 나와 오빠가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 같아.”장소월은 설탕물을 반 컵 마시고 나니 한결 괜찮아졌다.“참, 이렇게나 늦은 시간까지 저녁도 안 먹었죠? 배고플 테니까 내가 국수를 말아 줄게요.”장소월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제야 그녀는 여긴 전연우의 방이라는 걸 알아차렸다.“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백윤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소월아, 네 집처럼 편히 있어. 나와 오빠가 널 보살펴 주는 건 당연한 일이야. 국수가 먹고 싶지 않으면 오빠한테 다른 걸 사 오라고 할까?”장소월은 너무 시끄러워 머리가 지끈거렸다.이곳은 그녀의 것이 아닌 백윤서와 전연우의 집이다.때문에 이곳에 머무르는 건 그녀에게 불편함만 안겨줄 뿐이다.장소월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여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백윤서의 것이었다.언제 그녀에게 옷을 갈아입혔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녀의 지갑과 핸드폰도 모두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여있었다.“나 좀 쉬면 돼. 나한테 신경 쓸 필요 없어.”전연우가
예전 그녀는 꽤나 오만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바늘이라도 무뎌지는 날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그녀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은 전생에서 그녀가 백윤서에게 줬던 것과 거의 비슷했다. 때문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치든 모두 참아내려 하는 것이다.이게 바로 자업자득이라는 거다.장소월은 굳은 표정으로 창문을 닫았다. 그녀는 앞으로 눈을 보지도, 좋아하지도 않을 것이다.장소월은 작은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저녁 12시 정각, 장소월이 문자 한 통을 받았다. 강영수가 보낸 것이었다.「생일 축하해, 공주님.」오늘의 첫 문자였다. 장소월은 깜짝 놀랐다. 강영수가 어떻게 그녀의 생일이 오늘이라는 걸 알고 있단 말인가? 그녀의 생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심지어 지금의 전연우도 알지 못한다. 주민등록증에 쓰인 생일은 틀린 것이다. 그녀의 진짜 생일은 12월 26일, 바로 오늘이다.순간 장소월의 마음을 가득 덮고 있던 먹구름이 걷히고 따뜻한 햇볕이 비추어 들어갔다.장소월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내 생일인 걸 어떻게 알았어?」강영수:「비밀이야. 어떤 선물 갖고 싶어?」「엄청나게 큰 핑크색 한정판 곰 인형을 갖고 싶어.」장소월은 이 문자는 보내지 못했다.전연우의 경고 때문이었다...“다시 강씨 집안 사람을 가까이한다면 그 후과는 온전히 네가 감당해야 할 거야.”장소월은 이내 썼던 문자를 지워버렸다.이제 거실에선 더이상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 다들 잠든 모양이다.장소월은 정 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부탁했다.그녀의 옷은 아마 오 아주머니가 세탁하러 가져갔을 것이다.장소월은 전연우의 옷장에서 곱게 접은 담요를 꺼냈다. 그녀는 오 아주머니의 정리 습관을 알고 있다. 하여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사실 전생에서 오 아주머니는 그녀에게 거의 모든 것들을 가르쳤다. 어떻게 ‘아내’역할을 하는지까지 포함해
“도련님, 조금 전 나간 사람 소월 아가씨예요?”장소월은 문을 닫는 순간 오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지금은 인적이 드문 시간이라 엘리베이터는 짧은 시간 안에 그녀를 아래로 내려다 주었다. 그녀는 오 아주머니가 쫓아와 돌아가야 한다고 설득할까 봐 두려웠다.장소월은 마음이 약해 아주머니가 애원한다면 차마 거절하지 못해 전연우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오늘 저녁, 전연우는 그녀에게 본심을 드러낸 거나 마찬가지였다.그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 장씨 집안의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이다.이제 와 생각해보니 장소월은 전연우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했다.그는 마치 블랙홀과도 같이 자신과 가까워지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킨 뒤 망가뜨리려 한다.하지만 그녀는 토사화처럼 그를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건물 앞, 장소월은 거친 바람 속에서 담요로 몸을 감싼 채 집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남원 별장에서 출발해 올 것이니 아마 30분, 길이 막히지 않는다면 십여 분 정도 걸릴 것이다.목은 추위에 시뻘겋게 얼어붙었고 팔목에선 찢어질 듯한 고통이 피어올랐다. 장소월은 잠옷을 거두고 간단히 붕대를 감아 응급처치를 한 상처를 바라보았다. 내일은 병원에 가봐야 하니 아마 학원에 가지 못할 것이다.전연우가 그녀에게 행한 모든 일에 대해 그녀는 항상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사람들 앞에서 그녀에게 했던 부드럽고 따뜻했던 행동은 모두 거짓이다.그녀와 단둘이 있을 때 전연우는 적어도 그녀를 걱정하는 척은 했었다.하지만 이제 그것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눈은 여전히 펑펑 쏟아졌다. 호수와 푸른 나뭇잎에 한 층의 눈송이가 뒤덮였다.등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장소월이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색 코트를 입은 전연우가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전연우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눈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왜 여기까지 내려왔단 말인가?전연우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호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낸 뒤 차 문을 열었다.전연우가 찬 타가 그
차가 시동을 걸고 전연우의 집에서 멀어졌다.장소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줄곧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고의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연우는 창문을 절반 정도 열어놓았다. 차가운 바람에 그녀는 온몸이 꽁꽁 얼 것 같았으나 불만을 말하지 못하고 억지로 추위를 견뎠다.장소월은 이렇듯 고집에 세다. 전연우가 자신과 결혼을 한 건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절대 자신의 결정을 되돌리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집과 반대 방향인 걸 번연히 알면서도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하여 걸어간다.전연우 또한 추운 건 마찬가지였다. 코트 절반이 눈을 맞아 푹 젖어버렸으니 말이다.20분이 지나도 그들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고 장소월은 너무 추워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드디어 남원 별장 입구에 도착했다.장소월은 차에서 내린 뒤 채 닫히지 않은 거실 커튼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한 줄기의 빛을 발견했다.순간 그녀는 커튼을 잡고 있는 하얀 손과 뒤엉켜있는 두 사람의 실루엣을 보기도 했다.안으로 들어가니 거실에서 야릇한 소리가 들려왔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움직임이 느껴졌다.장소월은 즉시 몸을 돌리고 눈을 맞지 않는 곳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곳은 조용해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눈 밟는 소리와 함께 전연우가 가까이 다가왔다.“이곳에서 밤새 쭈그리고 있을 생각이야?”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못마땅한 듯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전연우는 얼마 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그녀를 보았었고, 지금은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가엾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는 때로는 장소월에게 한없이 잘해주면서, 아닐 땐 너무나도 냉담하다...전연우를 만날 때마다 그녀는 항상 상처를 입었다.“여긴 제 집이에요. 저 이제 갈 곳이 없어요... 오빠, 나한테 상처 주지 않고 가엾게 여겨주면 안 돼요? 이럴 거면 처음부터 나타나지 말지 그랬어요.”“도와줘서 감사해요. 이제 난 상관하지 말고 돌아가요.”그녀가 전생에서 백윤
“아가씨가 오시니까 잠이 다 깼어요. 우리 노가리나 깔까요?”장소월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노가리... 노가리가 무슨 뜻이죠?”은경애가 허벅지를 탁 치며 말했다.“어머, 그걸 모르는 거예요? 제가 알려드릴게요. 노가리를 깐다는 건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이에요.”장소월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은경애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아까 제가 집을 나설 때에도 소리를 들었어요. 제가 보기에 어르신이 곧 아가씨의 동생을 만들어줄 것 같아요.”은경애는 어느 쪽 사투리를 쓰는지 알 수 없으나 꽤 재밌었다.그녀의 말투는 너무나도 호탕했다.장해진은 적지 않은 여자와 관계를 가졌지만 외부에 아이를 남겨놓는 법이 없었다. 설사 생겼다고 해도 깔끔하게 처리했다.언젠가 서른 살 남짓한 여자가 아이를 안고 찾아와 난리를 피웠지만, 그 후 장소월은 단 한 번도 그녀와 아이의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그런 일 또한 한 번밖에 없었다.책상 위에 희미한 등불이 놓여있었고 방 안엔 목탄 타는 냄새가 풍겨왔다. 은경애의 코 고는 소리와 손목의 통증 때문에 장소월은 전혀 잠들지 못했다.좁은 침대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깨어났을 때 햇빛이 창문을 타고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장소월은 은경애를 깨우지 않으려 조용히 일어나 담요를 몸에 덮은 뒤 조심스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밤새 눈이 내린 터라 밖엔 눈이 꽤나 두껍게 쌓여있었다.어젯밤 젖었던 슬리퍼도 이제 완전히 말라 발에 신어보니 보송보송 산뜻한 느낌이었다.사람들에게 자신이 어젯밤 이곳에서 잤다는 걸 숨기기 위해 그녀는 뒷문으로 에돌아 들어갔다.마당에선 도우미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그녀를 본 도우미들이 소리쳤다.“아가씨.”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현관으로 들어갔다. 순간 악취가 코를 찔렀고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는 욕실에 들어가 상처를 피해 샤워를 하고는 목에 난 흔적을 몇 번이고 연속 닦아냈다. 당시 그녀는 남자 두 명에게 모욕
그녀는 대학에 입학해야 한다. 또한 반드시 자신의 실력으로 서울 대학교에 입학해야 한다.연성에 가지 못한다고 해도,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장소월은 더는 전생처럼 남자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장소월이 병원에 간다고 하자 정 집사는 그녀를 강남 병원에 데려다주었다.“아가씨, 도착했어요.”“네.”장소월은 차에서 내린 뒤 응급실로 들어갔다.간호사가 손에 감았던 붕대를 풀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불편한 곳 있으세요? 다시 상처를 봉합한다면 감염될 수도 있어요.”장소월이 대답했다.“상처가 좀 간지러워 혹시 다른 원인이 있나 해서 왔어요. 감염된 건 아닐까요?”“그럴 수도 있어요. 붕대가 상처에 붙어버렸어요. 조금만 참으세요.”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장소월 씨? 여긴 무슨 일이에요? 어디 다쳤어요?”시선을 돌려보니 서철용이 두 손을 하얀색 가운 호주머니에 넣고 거들먹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의 눈빛이 너무나도 불편했다.전연우와 어울려 다니는 그 역시 좋은 사람은 아니다.서철용은 손을 호주머니에서 꺼낸 뒤 간호사의 손에서 가위를 건네받고는 여자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나한테 맡기고 가봐요.”간호사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보며 발그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응급실을 떠났다.서철용은 장소월의 하얗고 가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기름진 눈빛으로 말했다.“소월 씨, 왜 이제야 병원에 온 거예요? 상처에 염증이 생겼잖아요. 오빠가 알았다면 엄청 마음 아파했을 거예요.”장소월은 전생에서도 서철용에게 조금의 호감도 갖지 않았다. 여자만 보면 스킨십을 해대고 군침을 흘리는 그 버릇은 이번 생에도 여전하다.그가 엄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문질렀다. 마치 발정 난 짐승처럼 말이다.장소월은 자신의 손을 빼내려 했으나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작업을 마치자 서철용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이렇게 예쁜 손에 앞으론
장소월은 첫 번째로 학교에 도착했다. 하지만 교실에 들어가니 어디가 그녀의 자리인지 알 수 없었다.본래 한 줄씩 앉았지만 이제 짝꿍과 함께 두 사람이 앉게 된 것이다. 장소월은 하나하나 찾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운도 없이 그녀의 짝꿍이 되었을까.장소월의 자리는 항상 마지막 줄이었다. 하여 뒤쪽에 가서 살펴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녀의 자리는 변하지 않았고 책상 위 물건도 그대로였다. 다른 점이라면 책상 서랍 안에 분홍색 편지가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봉투 위 하트 안에 그녀의 이름까지 쓰여있었다.장소월은 책가방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그녀는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 때문에 많은 남자아이들의 고백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치근덕거리는 남학생들은 모두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호되게 당했고, 그런 일이 반복되자 감히 그녀에게 호감을 갖는 남학생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장소월은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전연우와 결혼했고 그 후 그녀는 매일같이 새벽까지 일 때문에 바쁜 전연우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하여 그녀는 매일 밤 그를 기다리는 것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다.그들이 소통하는 방식은 아주 단조로웠다. 장소월은 연애의 설렘을 종래로 느껴본 적이 없다.지극히 일반적인 손을 잡고, 함께 영화를 보는 등...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다.장소월은 편지를 뜯어보지 않고 책 속에 끼워 넣었다.그녀의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어쩌면 주인 없는 빈자리일 수도 있을 것이다.8시 30분.책상에 엎드려있던 장소월의 귀에 시끌벅적거리며 교실에 들어오고 있는 학생들의 소리가 들렸다. “저 뒤에 앉은 학생 누구야?”“세상에, 장소월 아니야? 학교에 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 왜 다시 돌아온 거지?”“왜긴 왜겠어. 쫓겨나온 거겠지.”“불길해.”“모르면 말이나 하지 마. 아무도 널 벙어리라고 하지 않으니까!”장소월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그녀의 입꼬리가 차갑게 위로 곡선을 그렸다.“그리고.
백윤서가 망설인다는 건 그 대답은 이미 정해졌다는 걸 의미한다.오 아주머니는 그녀의 집에서 많은 일들을 도맡아 한다. 빨래, 청소 등...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주머니가 직접 만든 음식도 먹을 수 있다. 때문에 절대 쉬이 아주머니를 보내줄 수 없을 것이다.장소월이 몇 번 기침을 하자 백윤서는 교묘하게 화제를 돌렸다.“소월아, 말을 하면 목이 더 아플 테니까 하지 마. 내가 약을 사 올게! 넌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일단 따뜻한 물을 마셔.”백윤서는 재빨리 책가방을 내려놓고는 바깥으로 달려나가 뜨거운 물을 받았다. 교실마다 정수기가 놓여있었는데 그 아래엔 일회용 컵도 준비되어 있었다.“소월아, 물 마셔.”“일단 놔. 나 아직은 마시고 싶지 않아.”“그럼 조금만 기다려. 내가 양호실에 가서 약을 받아올게.”“그럴 필요 없어. 곧 괜찮아질 거야. 어젯밤 충분히 쉬지 못해서 그래. 나한테 신경 쓸 필요 없어.”백윤서는 장소월의 옆에 붙어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월아, 오빠와 함께 나간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한테 말해줄 수 있어? 설마 오빠가 널 혼낸 거야? 그래서 병이 난 거고?”백윤서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다. 장소월은 이를 똑똑히 보아낼 수 있었다. 백윤서는 장소월이 전연우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두 사람이 단둘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전연우만 생각하면 악몽이 떠오른다.그녀가 못마땅한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알고 싶으면 전연우한테 직접 물어봐. 난 어젯밤 일을 생각하면 괴로워서 말하고 싶지 않아.”백윤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젯밤 일이 찝찝하게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으니 말이다.어젯밤 집에 돌아온 전연우의 얼굴은 너무나도 어두웠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그녀를 휘감았다.그녀는 전연우가 또다시 장소월 때문에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