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아는 김태훈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기고는 매서운 눈빛으로 경계하듯 강지훈을 노려보았다.강지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슴 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저릿해졌다.“강지훈 씨, 가요.” 강지훈은 아무 말 없이 피식 웃더니 자리를 떠났다.소현아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안도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지훈은 성미가 불같아서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이는 그게 누구든 지옥 끝까지 몰아넣고야 만다.하여 조금 전 김태훈이 그런 행동을 했을 때 극심한 공포가 밀려왔다. 자신 때문에 김태훈이 이 일에 휘말리는 건 결코 원치 않았다.“현아야, 괜찮아? 내가 안아줄게.”김태훈이 창백한 얼굴로 몸을 숙이자 소현아가 그를 제지했다.“괜찮아, 태훈 오빠. 일단 들어와.”소현아가 문을 열어주자 김태훈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문이 다시 닫혔다. 강지훈은 그 자리에 서서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으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현아야, 방금 그 남자가 네 전남편이야?”김태훈은 자신의 상처를 처치해주는 소현아를 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팔려있는 듯했다.‘얼굴에 또 상처가 생겼겠네. 혼자서 잘 처치할 수는 있을까? 흉터 남는 거 아냐?’머릿속에서 그 몇 줄의 문장이 어지러울 정도로 끊임없이 맴돌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내가 아니어도 강지훈 옆엔 알아서 챙겨줄 여자들이 차고 넘치겠지. 나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소현아가 실수로 손에 힘을 많이 주는 바람에 김태훈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아, 미안해, 오빠. 잠깐 딴생각했어. 방금 뭐라고 했어?”소현아는 스스로도 짜증이 밀려왔다. 머릿속이 왜 온통 강지훈으로 가득하단 말인가.정말이지 미친 게 분명하다.“괜찮아, 현아야. 방금 그런 일을 겪었으니 정신없는 게 당연하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너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말라는 거야. 네가 날 남자로 받
소현아는 곁에 있는 남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2년이 지난 지금, 그의 얼굴엔 더 짙은 사나움이 깃들어 있었다.“왜 그렇게 멀리 앉아? 내가 너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강지훈은 옆에 앉은 소현아를 훑어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긴 다리를 뻗어 꼼짝하지 못하도록 소파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강지훈 씨, 만약 아이들 때문이라면 한 번 만나게 해줄게요. 하지만 옛날 일을 따질 생각이라면 미안하지만 저로선 어쩔 도리가 없어요. 벌써 2년이나 지났어요. 우리 혼인신고한 거 말고는 아무 관계도 아니잖아요. 왜 아직도 절 괴롭히려는 거예요?”소현아는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묘한 감정을 억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엔 약간의 장난기가 떠올라 있었다.“네가 나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괜찮아, 원망해도 돼. 오늘부터 나 너한테 제대로 내 마음 전할 거야. 내가 정말 진심으로 널 원한다는 거 보여줄게.”강지훈의 눈동자엔 반드시 해내겠다는 결의가 가득 차 있었다. 소현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강지훈 씨, 저 놀리지 말아요.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어떤 여자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고작 저 때문에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한다고요? 제가 당신 말 믿을 거라 생각해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 방 앞으로 걸어가 문을 살짝 열었다. 문틈으로 서로 끌어안은 채 달콤하게 잠들어 있는 두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봤죠? 난 당신 없이도 충분히 잘살고 있어요. 그리고 나한테는 이미 마음에 둔 사람도 있어요. 아이들도 그 사람을 받아들였고요. 더 할 말 없으면 가줘요. 여긴 당신 같은 대단한 분은 모시지 못하는 누추한 곳이거든요.”강지훈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네가 말한 그 마음에 뒀다는 사람, 김태훈이야?”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몸을 뒤덮자 소현아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려왔다.“맞아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강지훈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알아서
“나한텐 네가 제일 좋은 사람이야. 현아야, 지금 당장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네 옆을 떠나진 않을 거야. 바로 옆집에 살 거니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알겠지?”김태훈은 캐리어를 끌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시 멈춰 섰다.“현아야, 넌 내가 필요 없을 수 있어. 하지만 시윤이랑 시안이는 계속 아빠 없이 지낼 순 없지 않겠어?”소현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지훈이 집에 들어서자 고윤정이 굳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그녀는 그의 뒤를 살피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한심하다는 듯 강지훈의 어깨를 찰싹 내리쳤다.“현아는?”고윤정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안 데려왔어요.” 강지훈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소파에 앉아 눈을 질근 감았다.“안 데려왔다고? 으이구, 이 한심한 놈아. 내가 묻지 않았으면 절대 말 안 할 생각이었지?”고윤정은 초조한 마음에 하염없이 방안을 빙빙 돌아다녔다.고윤정은 소현아를 탓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소현아는 좋은 사람이란 것도,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했는지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하여 지난 2년간, 강지훈에게 소현아를 찾아오라고 압박을 가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제 소현아가 다시 나타났는데도 아들이 이렇게 멍하니 앉아만 있으니 그야말로 속이 터져버릴 지경이었다.“강지훈, 그런 못난 모습 다신 보이지 마. 너 아직 현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거 알아. 현아를 다시 데려오고 싶다면, 당장 그 고약한 버릇부터 버리고 진심으로 행동해. 또 예전처럼 한심한 짓거리나 하고 다니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내 말 여기까지야. 너 잘 생각해.”고윤정은 더는 조금도 아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듯 바로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강지훈이 천천히 눈을 떴다.“진심?”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너무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였다.다음 날 아침 일찍, 소현아는 초인종 소리에
“내가 말하지 않았나? 역한 냄새 나니까 내 곁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강지훈은 매정히 여자의 손을 뿌리쳐버리고는 옆에 있던 휴지로 손을 빡빡 문지르다가 피부가 벌겋게 변한 뒤에야 멈추었다. “지훈 씨, 진심으로 기분 풀어주려고 왔는데 저한테 왜 그래요? 그리고 제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여자는 얼굴을 굳히며 자신의 체취를 맡으려 고개를 숙였다.“허정문, 내가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네 아버지 체면 때문에 널 억지로 곁에 두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계속 이렇게 귀찮게 굴면 나도 더이상은 못 참아.”강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갑게 등을 돌렸다. 여자는 결국 성질을 참지 못하고 흥 콧방귀를 뀌고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나가버렸다.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는 방금 사무실에 있었던 남자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챘다.“강지훈 요즘 대체 뭘 하는 거야? 뭔가 비밀스러운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말해.”그녀는 손목을 문지르며 짜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아가씨, 그게...”한참을 기다려도 남자가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하자 허정문은 다짜고짜 그의 뺨을 후려쳤다.“쓸모없는 놈! 말 안 하면 우리 아빠한테 말해서 너 잘라버릴 거야. 그러니까 똑똑하게 굴어. 강지훈한텐 절대 말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지만 입을 열지 않으면 네 인생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기대해.”허정문은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 긴 손톱을 남자의 살에 찔러 넣었다. 남자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한 여자 때문입니다. 소현아 씨.”“소현아?” 허정문은 굳은 얼굴로 손톱을 더 깊게 박아넣었다.소현아라는 이름은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강지훈의 마음속에서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는 여자다. 그녀가 돌아왔을 줄이야.허정문은 코웃음을 치며 남자를 뿌리쳤다.“앞으로 상황 계속 보고해. 다시 말하는데 똑똑히 굴어.”하이힐 소리가 멀어지자 남자는 식은땀이 흥건해진 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아저씨, 아저씨!
강시안이 슬쩍 강시윤의 작은 손을 잡아끌자 소현아는 피식 웃으며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 매일 이렇게 버리는 건 낭비지. 차라리 이 음식들을 바깥 유기견들한테 주는 건 어때?”두 아이는 그 말에 즉시 찬성했다.그렇게 셋은 손을 잡고 아파트 아래로 내려갔다.단지 안에는 굶주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안쓰러운 유기견들이 꽤나 많았다. 향긋한 음식 냄새가 풍겨오자 빠르게 우르르 몰려들었다.유기견들은 위험할 수 있으니, 소현아는 미리 두 아이를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두었다.유기견들은 순식간에 게걸스럽게 음식을 해치우고는 마치 고마움을 전하는 듯 소현아를 향해 멍멍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다.그중 한 마리는 총총 달려가 소현아의 손에 애교스럽게 몸을 비비기도 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강아지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현아야, 오랜만이야.”그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고개를 들어보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태훈 오빠?”소현아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김태훈은 김혜지의 오빠였다.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는 다른 배다른 남매였음에도 둘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어떻게 벌써 돌아온 거야? 그쪽 일 다 처리했어?”소현아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김혜지가 그 이야기를 꺼낸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김태훈이 벌써 나타난 것이다.김태훈은 늘 끼니조차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었다. 하여 김혜지는 소현아와 친구가 된 이후로 종종 그녀에게 부탁해 김태훈에게 물건을 전해주도록 했다.그렇게 오가다 보니 자연스레 친해졌다.“중요한 건 다 처리했어. 자잘한 일은 여기서도 할 수 있고. 그보다 너... 혜지가 다 말해줘서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바로 거절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오늘도 버렸어?”강지훈은 책상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옆에 있던 부하는 한참을 쭈뼛거리다 결국 아
김혜지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녀는 소현아의 방문을 두 번 노크했지만 안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다시 노크하려고 팔을 들어 올린 순간 문이 열렸다. 소현아가 김혜지의 팔을 잡고 방안으로 끌어당겼다.“현아야, 무슨 일이야?”김혜지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오늘 걷다가 넘어졌는데 좀 아파서 그래.” 소현아는 애써 고개를 들어 웃는 것보다도 더 괴로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그 어색한 미소에 속을 김혜지가 아니었다.“됐어. 웃지 마. 내가 널 몰라? 넌 머리가 나빠서 넘어지면 그런 울상을 짓는 게 아니라 깔깔대며 웃었을 거야. 빨리 말해. 계약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괜찮아. 그놈들이 너 괴롭혔다면 내가 지금 당장 쳐들어가서...”씩씩거리며 소매를 걷어붙이는 김혜지의 모습에 소현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옷깃을 잡았다.“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해? 어떤 남자를 좋아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결혼은 하기 싫어서 도망쳤다고.”소현아는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꺼냈다.그 시절은 그녀에게 달콤씁쓸한 온갖 감정이 뒤섞인 시간이었다. 그동안엔 누구에게도 털어놓고 싶지 않아 가장 친한 김혜지에게도 대충 둘러대곤 했었다.김혜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거 거짓말이야. 사실은...”소현아는 간략하게 전후 사정만 설명하려 했지만, 어느덧 이야기는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김혜지는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앉아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얼마 후 소현아가 어깨를 툭툭 두드려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소현아는 이미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난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처럼 지능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는데, 예전엔 지금보다 더했었다니. 소현아, 너 진짜 불쌍해.”김혜지는 소현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그러니까... 다시 그 못된 남자를 만났다는 거야? 그리고 너한테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고?”김혜지는 소현아의 어깨를 붙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쩐지 우스꽝스러운 그 모습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