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내일 전시회에 가기 위해 짐을 싸러 20평짜리 2인실 숙소에 들어갔다. 경제 상황을 고려해 친구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리사는 내일 파티 준비로 바빠 늦은 시간에야 돌아온다.점심을 대충 해결한 뒤 집 안 청소를 시작해 저녁 6시까지 바삐 돌아쳤다. 그녀는 힘든 일이 생기면 몸을 혹사시켜 잡생각을 떨쳐버리는 습관을 아직도 갖고 있었다. 거실이 차근차근 말끔히 정리되었다.6시, 장소월은 슈퍼에 가 저녁 식사 재료를 준비했다.그녀는 반찬 몇 개를 만들어 먹은 뒤 남은 것은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리사가 그녀가 만든 요리를 좋아하고 장소월도 야식을 먹는 걸 즐기니 리사가 돌아온 뒤 같이 먹으면 좋을 것이다.어느덧 하루가 지나가고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았다.그녀는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뒤 수면제 두 알을 삼키고 잠에 들었다.그때, 개인 전용 비행기 안.기성은은 프랑스에서 전해온 소식을 받자 곧바로 전연우에게 보고했다.“프랑스 쪽에 의뢰한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조사한 결과 영상 속 사람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날 확실히 예술 아카데미 사람들이 룩셈부르크 공원에 왔었다고 합니다. 이건 파리 예술 아카데미에서 보내온 올해 졸업생 명단입니다. 그중 아가씨의 이름도 있더라고요. 그리고, 아가씨는 4년 동안의 학비를 모두 장학금으로 해결하셨다고 합니다.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고요.”“이건 아가씨의 파리 주소와 연락처예요.”전연우는 기성은에게서 장소월과 관련된 자료를 받았다. 모두 그녀가 최근 몇 년간 해왔던 학교와 일상생활 자료였다. 성적란엔 크고 작은 많은 수상 내역이 적혀 있었다.나머지는 파파라치가 찍은 장소월의 사진이었다. 한 장은 화실에서 하얀색 목폴라를 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내리뜨리고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창밖 햇살이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니 시간이 멈춘듯한 평온한 느낌이 깃들었다.다른 한 장은 그녀가 얇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가방을 메고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는 사진이었다. 인행도 양쪽엔 오동나무가 무성하게 자
전연우는 이제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그럼에도 왜 아직도 장소월을 찾으려 한단 말인가.지금의 전연우는 장씨 가문과 상관없는 사람이다. 장소월의 존재가 없다 하여 전혀 문제 될 게 없다.설사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전연우는 털끝만큼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그저 전연우가 자신을 밀어 넣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장소월의 귀국은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 테니 말이다.8시간의 비행시간을 거친 뒤 전용 비행기가 7성급 소피아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측에선 VIP 대우로 깍듯이 그들을 대접했다. 전연우는 이곳 호텔의 최대 주주였기 때문이다.방에 들어가자 호텔 지배인이 입장권 한 장을 가져왔다.“대표님께서 원하셨던 전시회 입장권입니다. 시간은 점심 12시, 아직 3시간이 남아있네요. 저희가 이미 아침 식사를 준비해두었습니다.”“대표님, 이쪽으로...”기성은은 옆에서 일을 보고했다.“파티를 마친 뒤 이곳에서 2주 정도 머무를 겁니다. IT기업 몇 군데에서 저희와 협력하기를 원한다고 연락을 취해와 모레 시간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자선 경매 파티도 있습니다.”전연우는 컵 안 물을 마시고 말했다.“일정을 반년으로 연장해.”기성은은 화들짝 놀랐다.“반년이라고 하셨습니까? 시간이 너무 깁니다. 국내 회사 일도...”“내 말대로 해.”기성은이 고개를 숙였다.“네.”장소월 한 명 때문에 돌연 일정을 모두 바꾼다고?기성은이 이마를 찌푸렸다.“에취!”액자를 닦고 있던 장소월이 연속 몇 번 재채기를 했다.눈꺼풀이 점점 더 빨리 떨려왔고 심장박동도 점점 더 거세졌다.박원근이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힘들면 집에 돌아가요 나, 서현이 시윤이 세 명이면 충분하니까.”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저 할 수 있어요.”점심, 전시회가 시작되었다.장소월은 손님 접대 임무를 맡았다. 유창한 언어로 각계 유명 인사들에게 그림을 소개했다.쉬는 시간, 주시윤이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진짜 이해가 안 돼. 허 교수님은 왜 장소월만 수제자로
허태현과 전시회관 관장이 회의실에서 나왔다. 그들 옆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중절모를 쓴 남자가 검은색 지팡이를 짚고 우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허태현이 그에게 장소월을 소개하자, 루이스 관장이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장소월 씨, 허 교수님한테 말 많이 들었어요. 아주 천재적인 화가라고 하더라고요. 이건 내 명함이에요. 앞으로 화실을 차리는 데에 자금이 필요하면 나한테 연락해요.”루이스가 유창하지 않은 한국어로 말했다.장소월은 허 교수님을 쳐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루이스의 명함을 받았다.장소월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과찬이십니다. 전 천재가 아닙니다. 그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조금 더 노력할 뿐입니다.”루이스가 웃으며 말했다.“장소월 씨 정말 겸손하네요. 난 이미 소월 씨의 작품을 봤어요. 수준이 대단하던데요.”“감사합니다...”허 교수는 전시회장을 완전히 그녀에게 맡겼다. 인터뷰가 잡혀 있어 가봐야 했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이 자리를 떴다. 장소월은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이제 사람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장소월은 2층 전시회장으로 올라갔다. 2층엔 유럽풍 작품들이 걸려있었는데 모두 서현 등 세 사람의 작품이었다. 반면 장소월의 입상했던 작품은 모두 1층에 자리했다.2층은 아주 조용했다. 장소월은 커피 세 잔을 들고 걸어가던 중 세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한 명도 올라오지 않는데 우리 그냥 돌아가자. 아래층 VIP들은 소월이 한 명으로 충분할 거야. 소월이는 이뻐서 참 좋겠어. 운이 좋으면 돈 많은 남자를 잡아 사모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교수님은 우리가 못생겨서 창피하신 거야. 호텔에 돌아가 게임이나 할까?”“주시윤, 너 양심 있어? 방금 그 말 소월이가 들으면 얼마나 실망하겠어. 허 교수님은 이번 전시회를 위해 4년을 준비했어. 세계 각지 절경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위험을 무릅썼는지 몰라? 소월이는 교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한 번도 우리한테 불평불만을 쏟은 적이 없어. 사막에서 죽을 뻔했
복도에 나타난 그림자를 본 주시윤은 도둑이 제 발 저린 양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서 장소월에게 다가가 커피잔을 받고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이런 일을 왜 네가 해. 교수님이 아래층에서 손님을 접대하라고 했는데 왜 올라왔어?”장소월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선생님은 인터뷰가 있어서 가셨어요. 선배님들이 저 대신 아래로 내려가 보실래요? 업계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잖아요. 저 잠시 후 일이 있어 나가봐야 해요. 이곳은 선배님들에게 부탁드릴게요.”주시윤이 말했다.“또 아르바이트하러 가려고? 너 올해 상 많이 받아서 상금도 꽤 받았잖아. 왜 아직도 그런 일을 하는 거야?”장소월이 받은 상금은 확실히 프랑스에서 몇 년 지내기에 충분한 금액이다. 주시윤의 예상을 빗나간 대답이 장소월의 입에서 나왔다.“그 돈은 모두 기부했어요.”세 사람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 미쳤어?”장소월은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고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전 갈 준비해야 해야 하니까 얼른 내려가세요. 아래층엔 아직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남아 계세요. 선배님들, 이런 기회 놓치지 마세요.”서현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불편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좋은 사람인 척 위선 떨지 마. 지금 우리한테 교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다고 유세라도 부리는 거야? 누가 알아? 네가 무슨 더러운 방법으로 교수님의 마음을 샀는지!”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직된 분위기가 2층을 뒤덮었다.그때, 전시회관 아래층에서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소월은 힘든 마음에 관여하지 않고 곧바로 휴게실로 향했다.박원근이 멀어져가는 장소월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 주시윤이 했던 장소월을 좋아하냐는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그가 서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서현아, 너 말이 심했어.”말을 마친 뒤 그는 주시윤과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전시회장에 어떤 대단한 인물이 등장했는지, 사람들은 그림도 보지 않고 그 사
“선생님, 제가 소개해드릴게요.”서현이 용기 내 걸어와 진지한 얼굴로 전연우에게 말했다.“이 그림을 보세요. 교수님께선 이 그림에 ‘생기’라는 이름을 지으셨어요. 이건 저희가 열대우림 깊숙한 곳에서 담은 경치예요. 여기에 그려져 있는 나무 한 그루, 풀 하나... 모두 당시 보았던 생생한 모습 그대로예요.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 숲속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하죠. 하지만 사실... 당시 저희가 머물렀던 이곳은 정말 위험했어요...”모든 사람들이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숨을 죽인 채 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겪어온 경험을 이야기하니 마치 판타지 모험 속을 거닐고 있는 듯했다.“우린 총알개미도 만났어요. 처음엔 잘 알지 못했으나 알고 보니 독성이 가장 큰 10대 동물 중 하나더라고요. 개미의 일종인데 멀리서 보면 벌 같았어요. 하지만 단단하고 힘 있는 머리와 날카롭고 독을 지닌 꼬리를 갖고 있었죠.”이어 서현은 그들이 우림에서 마주했던 모든 일들을 상세히 얘기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일들과 혼비백산해 정신을 잃을 뻔했던 일들까지 모두 말이다.기성은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오랫동안 장소월의 행적을 찾지 못한 이유가 바로 허 교수님 팀과 함께 다녔기 때문이었다.서현은 그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위험과 좌절을 겪었는지 하나하나 설명했다. 전연우는 그렇게 서현으로부터 장소월이 지난 4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듣게 되었다.그 경험은 일반인에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전연우는 예전에 주방에서 칼조차 잡지 못했던 아가씨가 그런 고생을 하고도 안전히 돌아왔다는 걸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전연우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약간 조롱 같기도 했다.잔뜩 부풀린 이야기거나 황당하게 지어낸 소설일 것이다.하지만 그건 전연우에게 상관없는 일이었다.“제가 알기론 허 교수님에겐 학생이 4명 있어요.”주시윤이 곧바로 말했다.“저희들의 후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장소월이요.”기성은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정말
장소월은 확실히 직원 통로로 빠져나갔다. 그녀 역시 단 한걸음 차이로 위험을 빗겨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마이바흐 세단이 전시회장을 떠나던 그때, 장소월은 마침 코너를 돌아 달리는 차와 등졌다. 하여 서로가 서로를 보지 못했다.전연우는 파리에 도착한 뒤 쉬지도 못하고 밥만 대충 먹은 채 달려왔다. 그럼에도 간발의 차이로 늦었을 줄이야.전연우가 눈을 질근 감았다.“지금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어?”기성은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제가 보낸 사람들이 아파트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가씨가 돌아가시면 곧바로 연락할 겁니다.”“그래.”전연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4년이라는 시간도 견뎌왔건만, 짧은 이 몇 분을 기다리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는 미친 듯이 장소월이 보고 싶었다.조용했던 차 안에 전연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차 돌려. 아파트로 가자.”“하지만 저흰 약속이...”“취소해.”“네.”기성은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30분 뒤, 전연우는 장소월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한눈에 봐도 보잘것없이 낡아 있었는데 적어도 지은 지 4, 50년은 되어 보였고 치안도 좋지 않았다.기성은이 문을 두드렸으나 답이 없었다.“아가씨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조금 기다리시죠.”전연우는 고개를 숙여 발아래 붉은색 매트를 쳐다보았다. 고급스러운 검은 구두로 매트를 밟아보니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기성은이 곧바로 허리를 숙여 매트를 옮겼다.“열쇠입니다! 대표님, 어떻게 아셨어요?”전연우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문 열어.”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저 그녀의 습관을 알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덜렁이여서 학생증, 은행카드 등을 잃어버리기가 일쑤라 몇 번이나 다시 만들었는지 모른다.이후 전연우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의 카드로 만들어 열쇠고리에 걸어주었다.하지만 그녀가 집 열쇠마저 잃어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도우미가 집에 없었던 그 날, 그녀는 또 수업 땡땡이를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미 독촉 전화를 세 개나 받고 들어온 기성은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대표님, 파티가 시작된 지 30분이나 지났습니다. 이제... 정말 가야 합니다.”전연우는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까지 보고 난 뒤 고개를 들었다. 시계를 보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나있었다.4년 동안의 경험이 고스란히 이 책에 담겨 있었다. 남자는 그중 한 페이지를 찢어 기성은에게 건넸다.“이걸 서울 강씨 집안에 보내.”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거대한 크루즈 위에서 성대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무대 위엔 유혹적인 옷을 입은 여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세계적인 유명 연예인이거나 톱모델들이었다. 남자들은 각자의 파트너와 함께 술잔을 부딪치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장소월은 주방에서 디저트를 만들었다. 처음 그녀는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기에 면접을 볼 자격도 갖추지 못했었다. 만약 그녀가 출중한 요리 실력으로 맛있는 디저트를 만들지 않았다면 결코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길거리에서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대부분 주방일을 맡았다. 가끔씩 시간을 내 조금씩 프랑스어를 익혔고 이젠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을 자랑하고 있었다.이곳 주방장인 후크가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장소월을 바라보았다.“소월 씨는 정말 나의 행운의 여신이에요. 소월 씨가 아니었다면 너무 바빠 미쳐버렸을 거예요. 정말 다행이에요.”장소월이 배시시 웃으며 접시를 받았다.“이런 두둑한 일당을 받을 기회는 저에게도 흔치 않은 거예요.”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장소월이 매달 남은 돈 모두를 보육원에 기부하기 때문에 경제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가면을 쓴 리사가 디저트 존을 채울 디저트를 가지러 들어왔다.“오늘 사람이 진짜 많아. 다들 네가 만든 디저트가 맛있다더라. 내가 나가기만 하면 가져다 달라고 성화야. 소월아, 나 이제 진짜 나가기 싫어.”주방 유니폼이 없으니 장소월은 어쩔 수 없이 검은색 종업
장소월은 손을 씻은 뒤 물을 털어냈다.“전 잠깐 쉬고 올게요. 멀미가 좀 나서요.”“그래요.”그녀가 가고 싶어 하지 않자 후크도 강요하지는 않았다.후크가 종업원과 함께 나갔다.앨리스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으론 포크를 전연우의 앞에 내밀었다.“맛보세요. 이건 그쪽 한국 음식이니까 먹어본 적 있을 거예요.”전연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거절한 뒤 하얀색 요리사 유니폼을 입은 건장한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주방장님 오셨어요. 앨리스 씨.”그를 본 앨리스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한국인인 줄 알았어요.”후크가 말했다.“확실히 한국에서 온 미녀분이 만든 거예요. 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쉬러 가는 바람에 제가 오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연우 씨, 어디 가요?”장소월은 속이 메슥거렸다. 처음엔 괜찮았으나 멀리 나갈수록 파도가 거세져 울렁이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화장실에서 속에 있는 걸 모두 토해낸 뒤 세수를 하고 밖에 나갔다.조명이 망가졌는지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복도에서, 장소월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머리에서 모자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모자를 주운 뒤 그녀에게 돌려주려 했다. 그녀가 허리를 펴고 보니 여자가 남자 한 명을 끌고 어두운 구석으로 가고 있었다.여자의 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기 정말 크죠. 갖고 싶지 않아요? 연우 씨?”장소월이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 심장을 짓누르기라도 한 듯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연우?오랫동안 보지 못해 희미해졌던 그 사람의 모습이 순간 선명해졌다.아니... 전연우일 리가 없다!서울에 있는 그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나겠는가!장소월은 애써 자신을 안심시켰다.“앨리스 씨, 이거 선 넘는 거예요.”남자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찰나, 장소월은 화들짝 놀라며 손에 쥐고 있던 모자를 바닥에 떨어뜨렸다.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였다.장소월은 그 순간 머리가 백지장같이 새하얘졌다.누군가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들려와서야 장소월은 간신
한참 고민하던 소현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천효연의 납작한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 그럼 아가씨도 강지훈 씨의 아기를 가져요. 그럼 자꾸 나한테 와서 자지 않을 거잖아요!” 천효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녀는 은빛 치아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주변 도우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바보가 이토록 충격적인 말을 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주인님과 효연 아가씨의 잠자리 빈도를 생각하면, 주인님이 허락만 하셨다면 그들의 아이는 이미 몇 명은 됐을 것이다. 이 바보는 입만 열면 효연 아가씨의 급소를 찌르곤 한다! 규영과 미진도 소현아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천효연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지자 규영이 황급히 나서서 분위기를 무마했다. “효연 아가씨, 저희 현아 아가씨는 어린아이와 같은 분이라 이런 걸 잘 모르십니다. 부디 마음에 두지 마세요.” 소현아는 긴장감에 옷자락을 꽉 말아 쥐며 말했다. “제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나요?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좀 멍청해서 그래요. 혹시 제 말 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말해주세요. 사과할게요.” 그녀는 자신이 조금 떨어지는 지능 때문에 자주 말실수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예전 이것 때문에 자주 괴롭힘을 당했었다. 한때는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상황을 알아차린 엄마가 말해주셨다. 마음속에 말을 담아두면 병이 생기기 마련이니 그냥 용감하게 말하면 된다고 말이다. 그릇된 말을 했을 땐 제대로 사과해서 용서를 빌면 된다고도 하셨다. “맛있는 거 줄게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네?” 한참을 기다려도 천효연이 대답하지 않자, 소현아는 탁자 위의 간식을 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천효연의 불쾌한 향수 냄새가 또다시 코를 찔렀다.소현아는 즉시 코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또다시 천효연을 화나게 할까 봐 최선을 다해 참아냈다. 천효연은 자신 앞에 내밀
잔뜩 일그러지는 소현아의 얼굴을 본 천효연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 바보가 먼저 선수를 친다고? 천효연은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소현아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배를 만지려 했다. “현아 씨, 아기 태어나려면 몇 달 남았어요? 나도 아이 정말 좋아해요. 전에 현아 씨가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 강지훈 씨가 그랬어요. 아기가 태어나면 나더러 맡아 키우라고요.” 농담하듯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소현아를 쳐다보는 그 눈동자엔 독사 같은 살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소현아는 불시에 벌떡 일어섰다. 자신의 말에 자극을 받았다고 생각한 천효연은 득의양양하게 아래턱을 들어 올렸다. 소현아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커다란 눈동자를 사방으로 뒤룩뒤룩 굴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불안하고 다급한 표정이었다. “현아 아가씨!” 규영과 미진이 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애처롭게 서 있는 소현아를 본 그들은 급히 달려왔다. 소현아는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규영은 곧바로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화장실로 모셔다드릴게요.” 그녀는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소현아를 1층 화장실로 데려갔다. 화장실 안에서 구역질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천효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효연 아가씨, 죄송합니다. 요즘 현아 아가씨의 입덧이 좀 심해요. 임산부라 요즘 많이 예민하십니다. 가까이 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약 현아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주인님 성격 아시죠?” 미진은 느긋하게 가져온 음식을 펼쳐놓으며 경고를 담아 공손하게 말했다. 천효연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고작 도우미 주제에 감히 내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해?” 미진은 겁을 먹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봐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천효연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잠시 뒤, 화장실에서 구역질 소리가 멈췄다.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