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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야… 네가 지금 여기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이혁수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목소리를 한없이 낮춰 말했다."나랑 같이 돌아가자꾸나. 가장 화려한 처소에 살게 하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으로 만들어주마…""전하."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말을 끊었다."물건은 전당포에 맡겼다 찾으면 그만이지만, 흩어진 마음은 억지로 붙잡아서는 안 됩니다.""안 된다. 내가 평생 너를 보살펴주겠다고 약조하지 않았느냐.""나와 함께 돌아가기만 하면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할 것이다. 내가 자리를 잡고 나면 너를 정식으로 맞아들여 아들딸도 하나씩 낳고…"나는 그가 이성을 잃은 듯 애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전하, 끝내 사람을 빼앗겠다면 그것은 곧 맹약을 파기하는 일입니다.""그렇게 되어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나면, 전하께서 그 죄를 감당할 수 있으십니까? 조정의 늙은 신하들은 전하를 어떻게 보겠습니까?"그 말에 이혁수는 멈칫했다.대월은 정말로 전쟁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다.해마다 이어진 전쟁에 자연재해와 사람이 부른 재앙까지 겹쳐, 나라의 재물은 진작 바닥나 있었다.내게 내린 하사품들도 그저 보기만 좋을 뿐 쓸모없는 것들이었다.만약 그가 지금 사람을 빼앗기 위해 맹약을 깬다면, 북연의 말 탄 군사들이 반드시 남쪽으로 밀고 내려올 터였다.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큰 고통을 겪고, 대월은 위태로워질 터였다.‘게다가… 이혁수가 정말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데려가 국가의 대의를 외면한다면, 태자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을까?’‘그가 갖은 애를 써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조희진은 또 어떤 자리에 두어야 한단 말인가?’"연화야…"전생에 이혁수는 항상 나를 대신해 결정을 내렸다.궁에 들어갈지, 첩이 될지, 죽을지 말지까지 전부 그가 대신 결정했다.이번엔 내가 그를 대신해 결정해줄 생각이었다.나는 그에게 절하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전하,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언제나
‘이혁수, 네 말대로 나는 돌이와 평생 함께하며 백발이 되도록 늙어가며 백년해로할 것이다.’나는 눈을 내리깔고 옷소매를 꽉 움켜쥐었다.심건우는 내 손을 토닥이며 겁 없이 호탕하게 웃었다."태자의 덕담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길시가 되었으니 가자꾸나."붉은 면사포에 시야가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아,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과거와 완전히 작별하게 된다.심건우가 먼저 내 손을 잡아 주었다.늘 건조하고 따뜻하던 손바닥이 웬일인지 땀으로 축축했다.그 역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순식간에 두려움이 사라졌다.우리 모두 앞으로 어떤 내일을 맞이하게 될지,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하지만 태양은 반드시 떠오를 것이고, 앞으로 날들도 분명 좋아질 것이다.‘서연화, 당당하게 내 길을 걸어가자.’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높은 단상 위로 올라갔다.부부로서 서로 절하고,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했다.이혁수는 덤덤하게 술잔을 들고 자리를 뜨려 했다.그런데 다음 순간, 은빛이 번뜩이며 칼이 붉은 면사포를 걷어냈다.그 순간 모닥불이 일렁이며 내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고,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사람들 너머로 이혁수의 시선과 정확히 마주쳤고, 나는 그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쨍그랑!"이혁수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그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서… 연화?"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탁자를 엎어버리고 비틀거리며 단상 위로 달려 올라왔다."어찌하여 네가 여기 있는 것이냐?!""내려오거라! 넌 내 부인이다, 내 태자비라고!""누구 없느냐! 태자비가 이 오랑캐들에게 납치되어 강제로 혼례를 치르고 있으니 당장 구하거라!"손님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헛소리 하지 말거라. 이분은 우리 왕비시다. 네놈이 친히 허락한 일 아니냐!"북연의 호위 무사들도 그 소란에 혈기가 치솟아 저마다 칼
이혁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차갑게 웃었다."북연왕께서는 귀한 미인을 참으로 깊이도 숨겨 두셨군요.""이 신발에 수 놓은 무늬가 제 오랜 지인의 것과 참으로 닮았습니다."심건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비웃으며 받아쳤다."천지에 널린 것이 자수 무늬다.""태자가 사람을 찾는 거야 마음대로 하거라. 허나 남의 북연 땅까지 와서 뒤지고 다니며 눈에 띄는 사람마다 옛 지인 같다 하니, 정녕 실성이라도 한 것이냐?""그렇게 지극정성이면 왜 처음부터 잘해주지 않은 것이냐.""잃어버리고 나서야 찾아다니다니, 참으로 꼴사납구나."그 말은 이혁수의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참으로 변방의 무식한 분들이시군요! 저는 태자입니다. 시간을 들여 주변을 정리하고 장애물을 없애야 마음 놓고 그녀를 제 곁으로 데려올 수 있습니다.""부하들이 여인 하나 간수 못 할 줄은 몰랐습니다.""됐습니다. 당신처럼 싸움밖에 모르는 멍청이에게 설명해 봐야 소용없지요. 가자꾸나."이혁수는 호위 무사들을 데리고 물러났다.나는 심건우의 품에 숨어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연화야, 무서워하지 말거라. 내가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마."그는 나를 북연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데려갔다.우리가 말을 타고 산 정상에 올랐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고, 바람이 조금 차가웠다.심건우는 나를 품에 안고 발밑의 초원과 쏟아지는 별들을 가리켰다."연화야, 난 너희 한족의 예법은 잘 모른다. 허나 내가 맹세하마. 내가 죽지 않는 한,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것이다.""내 부인이 되어주겠느냐? 첩도, 후궁도 아닌 나와 동등한 부인이 되어주거라.""앞으로 하고 싶은 건 다 하거라. 세상에서 가장 큰 유리 무대를 만들어줄 테니 이곳 왕의 본거지 사람들을 다 모아 놓고 네 그림자 인형극을 보게 하자꾸나.""누구든 너를 욕하면 내가 그 사람들의 뺨을 때릴 것이다!"나는 그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남자의 심장은 돌로
눈앞에 다시 폭설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나는 심건우의 표정을 똑똑히 볼 수 없었지만, 그는 나를 힘껏 품에 끌어안았다."미안하다…"풀 내음에 모래바람 냄새가 뒤섞여 서늘하게 코끝을 스쳤고,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미안하다, 연화야. 내가 너무 늦게 왔지.""다시는 이러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늘 네 곁에 함께 있어주마. 그래도 되겠느냐?"나는 손가락이 부러져 더는 그림자 인형극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도, 독주를 마시고 동궁의 눈 속에 묻힐 때도 울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품에 안기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나는 그저 미친 사람처럼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두 생에 걸친 억울함을 모두 울음으로 깨끗이 씻어내고 싶었다.나는 그의 품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다시 깨어났을 때, 천막 안은 밝은 햇살로 가득했다.심건우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인형 상자를 보고 한참 마음을 가라앉혔다.그리고 어머니의 인형들을 꺼내 햇볕에 말리기로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심건우가 따라왔다.옆에 쪼그리고 앉아 내 손에 든 인형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았다.위풍당당한 장군 인형의 눈매에서, 그를 닮은 구석이 어렴풋이 느껴졌다."이 인형은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냐? 나한테도 가르쳐 주거라."나는 손을 멈칫했고, 무의식적으로 그림자극 인형을 감추려 했다.이혁수는 이것을 천한 직업이라며, 궁에서는 자기 앞에서만 부르라고 했다.하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광대는 천해서 태자의 체면을 깎아먹는다는 것을.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같은 길을 걸을 사람이 아니었고, 애당초 함께 있어서는 안 되는 사이였다."너는… 이것이 온갖 밑바닥 사람들이나 하는 천한 광대놀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그 말에 심건우는 잠시 멍하니 굳어 버렸다.그러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누가 그러느냐? 네 손이 이렇게 야무진데.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제 힘으로 먹고사는 데 뭐가 천하다는 것이냐?""너는 인형극을 하고, 나는 사람을 죽이니, 우리
나는 이번 생에도 벙어리와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이혁수도 말이 없었고, 돌이도 그랬으니까.그해 폭설로 산길이 막혔을 때,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산나물을 캐러 갔다.그때 눈밭에서 늑대 새끼 같은 아이 한 명을 발견했다.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도 그는 들토끼를 꽉 물고 날로 뜯어 먹고 있었고, 입가에는 토끼털까지 묻어 있었다.몸과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나는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찐빵 하나를 주고 집으로 데려왔다.아마 먹을 것이 생겨서인지, 그는 더 이상 생고기를 뜯지 않았고 전처럼 무섭지도 않았다.나도 처음 만났을 때의 무서운 모습은 차츰 잊고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어떻게 장난을 쳐도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는 데다 성깔까지 고약하고 뻣뻣해서, ‘돌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그는 말은 없었지만 항상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사실 나는 그가 나와 같이 다니는 걸 바라지 않았다.마을 아이들은 우리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늘 내게 돌멩이를 던지며, 기생집에서 일하는 여인이 낳은 천한 년이라고 했다.원래 나는 익숙해져 있었다.말하지 않고 상처를 감추기만 하면 어머니를 속상하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정말로 조금만 참으면 지나갈 일이었다.하지만 돌이는 아무 말 없이 달려들어 그 아이들의 이가 다 빠질 만큼 흠씬 두들겨 팼다.그날 밤, 나는 그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울면서 물었다."돌이야, 너도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느냐? 우리 엄마도 더럽느냐?"그는 대꾸 없이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땅에 비뚤비뚤 글씨를 썼다.글씨가 엉망이었지만, 나는 그 글자를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너와 아주머니는 내가 본 사람들 중 가장 깨끗한 사람이다."내 인생에서 들은 가장 아름다운 말이었다.산 밖에는 눈이 흩날리고 있었고, 내 눈앞에도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그동안 우리 집 창고엔 항상 고기가 가득했다. 그가 잡아온 꿩과 토끼 덕분이었다.어머니도 덕분
이혁수가 자루 가장자리를 잡아당겼다.그 순간,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익숙한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완전히 끝장이었다."챙-!"두 눈을 질끈 감은 바로 그 순간, 차가운 빛줄기가 번쩍 스쳤다.북연왕의 칼이 칼집에서 조금 뽑혀 나와 이혁수의 손목 앞을 가로막았다.그는 거만하게 웃으며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대월 태자, 주제넘게 나서는군. 살아서 돌아가고 싶으면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이혁수는 멈칫하더니 소매를 매만졌다.그러고는 세상을 가엾이 여기는 어진 태자의 체통을 내세우며 말했다."저는 그저 이 낭자가 대월의 백성인데, 강제로 끌려와 억울한 일을 당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을 뿐입니다.""낭자, 만약 원치 않는다면 제가 대월로 돌아갈 수 있도록 호위해 보내줄 것입니다."정말 너무나도 다정했다. 예전에 낡은 사당에서 나와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맹세하던 모습과 똑같았다.하지만 시녀장이 나를 눈밭에 짓누르고 조희진의 손수건을 망쳤다며 뺨을 때릴 때, 그는 그저 담담히 지켜보며 참으라고만 했다.나중에 내가 그의 처소 앞 백옥 계단에 무릎을 꿇고, 피가 흐를 때까지 머리를 조아리며 나를 놓아 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그는 차갑게 궁문을 닫으며, 궁의 법도가 엄격하니 동궁에 들어온 이상 밖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다.그런데 지금은 만난 적도 없는 낯선 여인에게는 뭐든 다 받아 주려 하고 있었다.이혁수는 참으로 다정했다.누구에게나 잘해 주면서, 유독 나에게만 그렇게 모질었다.내가 대답이 없자 이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 했다.북연왕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보아하니 아가씨는 태자의 호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그는 자루 너머로 내 머리를 툭툭 치며 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저 위선자를 따라가고 싶느냐, 아니면 나를 따라가고 싶느냐?"이혁수는 내가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하지만 나는 자루 속에서 북연 왕을 향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이혁수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아무리 위험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