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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후 동궁을 떠나다

회귀 후 동궁을 떠나다

By:  눈과 함께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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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호위 무사들이 나의 허름한 집 마당을 에워쌌을 때, 이혁수는 나를 위해 장작을 패고 있었다. 도끼를 휘둘러 단숨에 베어 버리자, 그 모습을 본 호위 무사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시골 아낙인 나에게 태자 곁에서 떨어지라며 더는 얽히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이혁수는 손을 뻗어 내 앞을 막아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서연화는 내 부인이다. 반드시 나와 함께 돌아갈 것이다." "누구든 동의하지 못하겠다면, 먼저 내 의견부터 물어보거라." 그 말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다음 순간, 나는 손날로 이혁수의 목을 쳐 기절시킨 뒤, 그를 한 손으로 붙잡고 찔리는 마음으로 흥정을 시작했다. "싱싱한 태자 전하가 필요하십니까?" "비싸지 않습니다. 딱 오십 냥이면 됩니다." 호위 무사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서 낭자, 황궁으로 가지 않으실 겁니까?"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생에 이미 한번 가본 적이 있었다. 동궁의 백옥 계단은 너무도 길어서, 시골 아낙의 피가 튀어도 얼룩 하나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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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호위 대장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서 낭자, 정말 오십 냥만 받으면 되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통행증도 필요하고, 마차도 한 대 필요합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주십시오."

호위 대장은 왜 하늘이 내린 부귀영화를 걷어차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태자를 데려가 임무를 완수해야 했기에 선뜻 승낙했다.

그는 은자를 세어보더니, 그 자리에서 돈과 이혁수를 맞바꿨다.

그런데 호위 무사들이 기절한 이혁수를 데려가려던 찰나, 그가 눈을 떴다.

내가 돈을 챙기는 모습을 본 그는 순식간에 두 눈이 붉어졌다.

"서연화, 나를 고작 오십 냥에 팔아넘긴 것이냐? 돈이 그렇게 급했느냐?"

마치 내가 부군과 자식을 버린 매정한 사람이라도 된 듯한 말투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주변의 호위 무사들은 하나둘 고개를 숙이며, 자기 주인이 웃음거리가 되는 꼴을 감히 보지 못했다.

나는 묵묵히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

"전하, 이것이 제가 가진 마지막 돈입니다."

우리 집은 그림자 인형극을 하던 집안이었다. 3년 전 전란 중에 어머니가 병에 걸려 끝내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묻어드린 뒤, 며칠 동안 나는 넋이 나간 채 지냈고 아무것도 실감 나지 않았다.

어느 날, 피투성이가 된 이혁수가 우리 집 대문 앞에 쓰러져 있었고, 그제야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의지할 데 없이 외롭게 지내는 꼴을 어머니가 차마 보지 못하고 보내 주신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이혁수는 칼자국과 화살 자국으로 온몸이 성한 곳이 없었고,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그가 죽을까 봐 밤낮없이 상처에 약을 갈아 주었고, 평소 광대라며 무시하던 의원들을 찾아가 애원했다.

그때 나는 전 재산을 털었고, 집안의 값나가는 물건은 죄다 팔아치웠다.

이것저것 다 합쳐보니 딱 오십 냥이었다.

이혁수는 여기까지 듣고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연화야, 나와 함께 돌아가자꾸나."

"오십 냥이 아니라, 궁으로 돌아가면 오천 냥이든 오만 냥이든 내가 다 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나를 붙잡으려 했고, 호위 무사들에게 나를 마차에 태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허리를 깊이 숙여 절하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전하께서는 큰 고비를 넘기셨으니, 더는 시골 부부라는 신분으로 숨어 지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가는 길이 멀고 험하니,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혁수의 손이 허공에 굳어버렸다.

그의 호흡이 갑자기 거칠어지더니,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서연화,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

"신분을 숨긴 건 내 잘못이고, 네가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다."

"허나 괜한 고집 부리지 말거라. 이런 말로 나를 자극하지도 말고."

나는 절하는 자세를 유지한 채 고개도 들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조정의 높은 자리에 계셔야 하니, 세상의 온갖 일에 휘말리셔서는 안 됩니다."

"소인은 땅에서 먹을 것을 캐며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사는 몸입니다. 전하, 걸어온 길이 다르니 억지로 이어가려 하지 마십시오."

"전하의 앞날에 꽃길만 가득하고 만수무강하시길 바랍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그를 밀어내는 말들이었다.

이혁수는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눈까지 벌게졌다.

"서연화, 아주 잘하는 짓이구나."

그는 돌아서며 호위 무사들에게 소리쳤다.

"줘라! 그렇게 돈을 밝히니 오백 냥을 주거라! 지금 당장!"

호위 무사들은 허둥지둥 은표를 꺼내 나에게 건넸고, 이혁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은표 뭉치를 쥔 채 그의 뒷모습을 보며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것이 아닌 것은 탐하지 말 것.’

이 교훈은 전생에 이혁수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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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호위 대장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서 낭자, 정말 오십 냥만 받으면 되겠습니까?"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통행증도 필요하고, 마차도 한 대 필요합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주십시오."호위 대장은 왜 하늘이 내린 부귀영화를 걷어차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하지만 태자를 데려가 임무를 완수해야 했기에 선뜻 승낙했다.그는 은자를 세어보더니, 그 자리에서 돈과 이혁수를 맞바꿨다.그런데 호위 무사들이 기절한 이혁수를 데려가려던 찰나, 그가 눈을 떴다.내가 돈을 챙기는 모습을 본 그는 순식간에 두 눈이 붉어졌다."서연화, 나를 고작 오십 냥에 팔아넘긴 것이냐? 돈이 그렇게 급했느냐?"마치 내가 부군과 자식을 버린 매정한 사람이라도 된 듯한 말투였다.그는 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주변의 호위 무사들은 하나둘 고개를 숙이며, 자기 주인이 웃음거리가 되는 꼴을 감히 보지 못했다.나는 묵묵히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전하, 이것이 제가 가진 마지막 돈입니다."우리 집은 그림자 인형극을 하던 집안이었다. 3년 전 전란 중에 어머니가 병에 걸려 끝내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어머니를 묻어드린 뒤, 며칠 동안 나는 넋이 나간 채 지냈고 아무것도 실감 나지 않았다.어느 날, 피투성이가 된 이혁수가 우리 집 대문 앞에 쓰러져 있었고, 그제야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내가 의지할 데 없이 외롭게 지내는 꼴을 어머니가 차마 보지 못하고 보내 주신 가족이라고 생각했다.그때 이혁수는 칼자국과 화살 자국으로 온몸이 성한 곳이 없었고,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그가 죽을까 봐 밤낮없이 상처에 약을 갈아 주었고, 평소 광대라며 무시하던 의원들을 찾아가 애원했다.그때 나는 전 재산을 털었고, 집안의 값나가는 물건은 죄다 팔아치웠다.이것저것 다 합쳐보니 딱 오십 냥이었다.이혁수는 여기까지 듣고 말투를 누그러뜨렸다."연화야, 나와 함께 돌아가자꾸나.""오십 냥이 아니라, 궁으로 돌아가면 오천 냥이든 오만 냥이든 내가 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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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혁수를 보내고 나서, 나는 서둘러 짐을 챙겨 마을 전당포로 향했다.몇 년 전 이혁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인형극 상자를 전당포에 맡겼었는데, 그것은 어머니가 남겨주신 마지막 유품이었다."주인장, 맡긴 물건을 찾으러 왔습니다."주인장은 고개를 들어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싱긋 웃으며 계산대 밑에서 상자를 꺼내왔다."서 낭자, 부군께서 진작에 찾아가셨습니다.""은자도 넉넉히 더 얹어 주면서, 낭자에게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집에서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라고요."나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인형극 상자를 어루만지며 낮게 읊조렸다."이제 그럴 필요 없습니다."처음 이혁수를 살려냈을 때, 그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그를 벙어리라고 놀려댔다.그는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자존심이 상할까 걱정스러웠다.그가 말하지 못하니 내가 대신 말해주기로 했다.누군가 그를 비웃으면, 나는 마치 억척스러운 아낙네처럼 달려들어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욕을 퍼부었다.또 그가 심심해할까 봐, 매일 밤 등잔불 아래에서 그림자 인형극을 보여주기도 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노래로 불렀다. 어느 날 밤, 극 중 주인공이 담을 넘는 대목을 부르다가 손에 든 인형이 그만 넘어졌다.그때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참 재미있는 재주를 가졌구나."그 순간, 나는 비로소 선비들이 말하던 ‘맑은 샘물이 바위 위를 흐르는 소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바로 이혁수의 목소리였다.그는 자신이 과거시험을 보러 도성으로 가던 길에, 집안의 상인 일행이 습격을 당해 화를 당했다고 했다.하지만 그 처참한 화살과 칼에 베인 상처는 한눈에 봐도 평범한 산적에게 당한 것 같지 않았다.나는 눈치껏 묻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뜻이 맞아 함께 살아갔다.이혁수가 장작을 패면 내가 밥을 지었고, 그가 글을 쓰면 나는 인형극을 했다.그러던 어느 날, 삼황자의 부하들이 근처를 돌며 남은 무리를 수색했다.그때 이혁수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고,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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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전하께서 저 여인의 귀를 막을 수는 있어도, 온 천하 사람들의 수군거림까지 막을 수 있겠습니까?"말을 마친 노인은 옆으로 비켜서며 귀한 댁 아가씨 한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승상…"나는 이혁수의 표정과 그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보며 단번에 알아차렸다.인형극에서 늘 보던 장면이었다.군주는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혼인을 해야 한다.그날, 나는 나를 감싸고 있던 이혁수의 손을 스스로 뿌리친 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웃으며 말했다."대감, 오해하셨습니다.""소인은 그저 극이나 하는 광대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저를 이곳에 두신 것도 그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소인과 전하는 아무런 사적인 감정이 없으니, 아가씨께서는 안심하십시오."이혁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심지어 고마워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승상과 그 딸인 조희진을 배웅하러 나갔다.그날 이혁수는 나랏일을 논하느라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그때 나는 이제 떠나야 할 때라는 것을 직감했다.나의 작은 욕심도 이제는 거두어야 했다.광대라면 마땅히 막을 내려야 하는 법이니까.밥을 먹고 짐을 챙겨 조용히 떠나려던 그때, 나는 마당에서 하늘 높이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았다.이혁수가 화로 앞에서 내 인형들을 태우고 있었다.어머니가 칼로 한 땀 한 땀 새겨 만든 인형들이 불길 속에서 타고 있었다.나는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 불길 속에서 인형들을 구하려 했다.하지만 이혁수가 나를 가로막았고, 그는 차마 나를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연화야, 희진이가 화가 났다. 이것들을 태워야만 희진이의 화가 풀릴 것이다."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전하, 저것이 우리 어머니께서 만드신 것이라는 걸 아시잖습니까! 제 목숨이나 다름없단 말입니다! 전하께서 어떻게…"이혁수는 타오르는 불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는데, 그 눈에는 침묵과 슬픔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나를 향한 감정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럼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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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나는 이리저리 심하게 흔들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머리에는 자루가 씌워진 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감히 움직이지도 못했다."저는 그냥 극이나 하는 광대일 뿐입니다. 돈도 권력도 없는데 저를 왜 붙잡아 가시는 겁니까…"그 사람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인형극을 잘하더구나. 마음에 들었다."목소리에는 소년 특유의 능글맞은 기색이 묻어 있어 듣는 사람의 귓불이 화끈거릴 정도였다.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당장은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전하, 대월(大越)에서 강화 협상을 하자며 사람을 보내왔는데, 계속 약탈하시겠습니까?"‘북연왕이라고?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그 북연의 왕?’‘그의 손에 잡혔으니 무사하긴 글렀구나.’나는 다급한 마음에 이 틈을 타 도망치려 했지만, 북연왕은 가볍게 나를 제압했다."당연히 가야지. 대월 놈들이 알아서 돈과 땅을 바치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그는 양털로 만든 밧줄로 내 손을 꽉 묶었다.그의 뜨거운 숨결이 내 귓가에 닿았고, 낮은 목소리로 위협했다."더 움직이면 늑대 밥으로 던져버릴 것이다."북연왕은 나를 강화 협상이 열리는 천막 안으로 데려갔다.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차갑고 피곤에 찌든 목소리가 들려왔다."대월 태자 이혁수, 북연왕께 인사 올립니다."나는 온몸이 굳어버렸다.‘이맘때면 이혁수는 승상의 딸을 끌어들이고 즉위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야 하지 않나.’‘그런데 어찌하여 직접 이런 곳까지 와서 강화 협상을 논한단 말인가?’게다가 지난 생에 북연군이 쳐들어오긴 했어도 이곳까지 공격해 오지는 않았다.‘혹시 내가 궁에 들어가지 않아서 다른 일들도 바뀐 건가?’북연왕은 입을 열자마자 성 네 곳과 2년간의 조공을 요구했다."저희는 요구한 재물은 해마다 드릴 수 있습니다. 허나 땅을 내주는 것은 결코 불가합니다."이혁수의 목소리는 어딘가 지쳐 있었다.나는 그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건 아닌지 걱정하다가, 곧바로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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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이혁수가 자루 가장자리를 잡아당겼다.그 순간, 그의 몸에서 풍기는 익숙한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완전히 끝장이었다."챙-!"두 눈을 질끈 감은 바로 그 순간, 차가운 빛줄기가 번쩍 스쳤다.북연왕의 칼이 칼집에서 조금 뽑혀 나와 이혁수의 손목 앞을 가로막았다.그는 거만하게 웃으며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대월 태자, 주제넘게 나서는군. 살아서 돌아가고 싶으면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이혁수는 멈칫하더니 소매를 매만졌다.그러고는 세상을 가엾이 여기는 어진 태자의 체통을 내세우며 말했다."저는 그저 이 낭자가 대월의 백성인데, 강제로 끌려와 억울한 일을 당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을 뿐입니다.""낭자, 만약 원치 않는다면 제가 대월로 돌아갈 수 있도록 호위해 보내줄 것입니다."정말 너무나도 다정했다. 예전에 낡은 사당에서 나와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맹세하던 모습과 똑같았다.하지만 시녀장이 나를 눈밭에 짓누르고 조희진의 손수건을 망쳤다며 뺨을 때릴 때, 그는 그저 담담히 지켜보며 참으라고만 했다.나중에 내가 그의 처소 앞 백옥 계단에 무릎을 꿇고, 피가 흐를 때까지 머리를 조아리며 나를 놓아 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그는 차갑게 궁문을 닫으며, 궁의 법도가 엄격하니 동궁에 들어온 이상 밖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다.그런데 지금은 만난 적도 없는 낯선 여인에게는 뭐든 다 받아 주려 하고 있었다.이혁수는 참으로 다정했다.누구에게나 잘해 주면서, 유독 나에게만 그렇게 모질었다.내가 대답이 없자 이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 했다.북연왕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보아하니 아가씨는 태자의 호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그는 자루 너머로 내 머리를 툭툭 치며 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저 위선자를 따라가고 싶느냐, 아니면 나를 따라가고 싶느냐?"이혁수는 내가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하지만 나는 자루 속에서 북연 왕을 향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이혁수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아무리 위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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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나는 이번 생에도 벙어리와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이혁수도 말이 없었고, 돌이도 그랬으니까.그해 폭설로 산길이 막혔을 때,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산나물을 캐러 갔다.그때 눈밭에서 늑대 새끼 같은 아이 한 명을 발견했다.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도 그는 들토끼를 꽉 물고 날로 뜯어 먹고 있었고, 입가에는 토끼털까지 묻어 있었다.몸과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나는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찐빵 하나를 주고 집으로 데려왔다.아마 먹을 것이 생겨서인지, 그는 더 이상 생고기를 뜯지 않았고 전처럼 무섭지도 않았다.나도 처음 만났을 때의 무서운 모습은 차츰 잊고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어떻게 장난을 쳐도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는 데다 성깔까지 고약하고 뻣뻣해서, ‘돌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그는 말은 없었지만 항상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사실 나는 그가 나와 같이 다니는 걸 바라지 않았다.마을 아이들은 우리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늘 내게 돌멩이를 던지며, 기생집에서 일하는 여인이 낳은 천한 년이라고 했다.원래 나는 익숙해져 있었다.말하지 않고 상처를 감추기만 하면 어머니를 속상하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정말로 조금만 참으면 지나갈 일이었다.하지만 돌이는 아무 말 없이 달려들어 그 아이들의 이가 다 빠질 만큼 흠씬 두들겨 팼다.그날 밤, 나는 그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울면서 물었다."돌이야, 너도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느냐? 우리 엄마도 더럽느냐?"그는 대꾸 없이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땅에 비뚤비뚤 글씨를 썼다.글씨가 엉망이었지만, 나는 그 글자를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너와 아주머니는 내가 본 사람들 중 가장 깨끗한 사람이다."내 인생에서 들은 가장 아름다운 말이었다.산 밖에는 눈이 흩날리고 있었고, 내 눈앞에도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그동안 우리 집 창고엔 항상 고기가 가득했다. 그가 잡아온 꿩과 토끼 덕분이었다.어머니도 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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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눈앞에 다시 폭설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나는 심건우의 표정을 똑똑히 볼 수 없었지만, 그는 나를 힘껏 품에 끌어안았다."미안하다…"풀 내음에 모래바람 냄새가 뒤섞여 서늘하게 코끝을 스쳤고,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미안하다, 연화야. 내가 너무 늦게 왔지.""다시는 이러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늘 네 곁에 함께 있어주마. 그래도 되겠느냐?"나는 손가락이 부러져 더는 그림자 인형극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도, 독주를 마시고 동궁의 눈 속에 묻힐 때도 울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품에 안기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나는 그저 미친 사람처럼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두 생에 걸친 억울함을 모두 울음으로 깨끗이 씻어내고 싶었다.나는 그의 품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다시 깨어났을 때, 천막 안은 밝은 햇살로 가득했다.심건우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인형 상자를 보고 한참 마음을 가라앉혔다.그리고 어머니의 인형들을 꺼내 햇볕에 말리기로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심건우가 따라왔다.옆에 쪼그리고 앉아 내 손에 든 인형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았다.위풍당당한 장군 인형의 눈매에서, 그를 닮은 구석이 어렴풋이 느껴졌다."이 인형은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냐? 나한테도 가르쳐 주거라."나는 손을 멈칫했고, 무의식적으로 그림자극 인형을 감추려 했다.이혁수는 이것을 천한 직업이라며, 궁에서는 자기 앞에서만 부르라고 했다.하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광대는 천해서 태자의 체면을 깎아먹는다는 것을.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같은 길을 걸을 사람이 아니었고, 애당초 함께 있어서는 안 되는 사이였다."너는… 이것이 온갖 밑바닥 사람들이나 하는 천한 광대놀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그 말에 심건우는 잠시 멍하니 굳어 버렸다.그러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누가 그러느냐? 네 손이 이렇게 야무진데.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제 힘으로 먹고사는 데 뭐가 천하다는 것이냐?""너는 인형극을 하고, 나는 사람을 죽이니,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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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이혁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차갑게 웃었다."북연왕께서는 귀한 미인을 참으로 깊이도 숨겨 두셨군요.""이 신발에 수 놓은 무늬가 제 오랜 지인의 것과 참으로 닮았습니다."심건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비웃으며 받아쳤다."천지에 널린 것이 자수 무늬다.""태자가 사람을 찾는 거야 마음대로 하거라. 허나 남의 북연 땅까지 와서 뒤지고 다니며 눈에 띄는 사람마다 옛 지인 같다 하니, 정녕 실성이라도 한 것이냐?""그렇게 지극정성이면 왜 처음부터 잘해주지 않은 것이냐.""잃어버리고 나서야 찾아다니다니, 참으로 꼴사납구나."그 말은 이혁수의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참으로 변방의 무식한 분들이시군요! 저는 태자입니다. 시간을 들여 주변을 정리하고 장애물을 없애야 마음 놓고 그녀를 제 곁으로 데려올 수 있습니다.""부하들이 여인 하나 간수 못 할 줄은 몰랐습니다.""됐습니다. 당신처럼 싸움밖에 모르는 멍청이에게 설명해 봐야 소용없지요. 가자꾸나."이혁수는 호위 무사들을 데리고 물러났다.나는 심건우의 품에 숨어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연화야, 무서워하지 말거라. 내가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마."그는 나를 북연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데려갔다.우리가 말을 타고 산 정상에 올랐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고, 바람이 조금 차가웠다.심건우는 나를 품에 안고 발밑의 초원과 쏟아지는 별들을 가리켰다."연화야, 난 너희 한족의 예법은 잘 모른다. 허나 내가 맹세하마. 내가 죽지 않는 한,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것이다.""내 부인이 되어주겠느냐? 첩도, 후궁도 아닌 나와 동등한 부인이 되어주거라.""앞으로 하고 싶은 건 다 하거라. 세상에서 가장 큰 유리 무대를 만들어줄 테니 이곳 왕의 본거지 사람들을 다 모아 놓고 네 그림자 인형극을 보게 하자꾸나.""누구든 너를 욕하면 내가 그 사람들의 뺨을 때릴 것이다!"나는 그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남자의 심장은 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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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이혁수, 네 말대로 나는 돌이와 평생 함께하며 백발이 되도록 늙어가며 백년해로할 것이다.’나는 눈을 내리깔고 옷소매를 꽉 움켜쥐었다.심건우는 내 손을 토닥이며 겁 없이 호탕하게 웃었다."태자의 덕담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길시가 되었으니 가자꾸나."붉은 면사포에 시야가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아,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과거와 완전히 작별하게 된다.심건우가 먼저 내 손을 잡아 주었다.늘 건조하고 따뜻하던 손바닥이 웬일인지 땀으로 축축했다.그 역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순식간에 두려움이 사라졌다.우리 모두 앞으로 어떤 내일을 맞이하게 될지,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하지만 태양은 반드시 떠오를 것이고, 앞으로 날들도 분명 좋아질 것이다.‘서연화, 당당하게 내 길을 걸어가자.’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높은 단상 위로 올라갔다.부부로서 서로 절하고,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했다.이혁수는 덤덤하게 술잔을 들고 자리를 뜨려 했다.그런데 다음 순간, 은빛이 번뜩이며 칼이 붉은 면사포를 걷어냈다.그 순간 모닥불이 일렁이며 내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고,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사람들 너머로 이혁수의 시선과 정확히 마주쳤고, 나는 그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쨍그랑!"이혁수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그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서… 연화?"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탁자를 엎어버리고 비틀거리며 단상 위로 달려 올라왔다."어찌하여 네가 여기 있는 것이냐?!""내려오거라! 넌 내 부인이다, 내 태자비라고!""누구 없느냐! 태자비가 이 오랑캐들에게 납치되어 강제로 혼례를 치르고 있으니 당장 구하거라!"손님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헛소리 하지 말거라. 이분은 우리 왕비시다. 네놈이 친히 허락한 일 아니냐!"북연의 호위 무사들도 그 소란에 혈기가 치솟아 저마다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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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연화야… 네가 지금 여기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이혁수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목소리를 한없이 낮춰 말했다."나랑 같이 돌아가자꾸나. 가장 화려한 처소에 살게 하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으로 만들어주마…""전하."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말을 끊었다."물건은 전당포에 맡겼다 찾으면 그만이지만, 흩어진 마음은 억지로 붙잡아서는 안 됩니다.""안 된다. 내가 평생 너를 보살펴주겠다고 약조하지 않았느냐.""나와 함께 돌아가기만 하면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할 것이다. 내가 자리를 잡고 나면 너를 정식으로 맞아들여 아들딸도 하나씩 낳고…"나는 그가 이성을 잃은 듯 애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전하, 끝내 사람을 빼앗겠다면 그것은 곧 맹약을 파기하는 일입니다.""그렇게 되어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나면, 전하께서 그 죄를 감당할 수 있으십니까? 조정의 늙은 신하들은 전하를 어떻게 보겠습니까?"그 말에 이혁수는 멈칫했다.대월은 정말로 전쟁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다.해마다 이어진 전쟁에 자연재해와 사람이 부른 재앙까지 겹쳐, 나라의 재물은 진작 바닥나 있었다.내게 내린 하사품들도 그저 보기만 좋을 뿐 쓸모없는 것들이었다.만약 그가 지금 사람을 빼앗기 위해 맹약을 깬다면, 북연의 말 탄 군사들이 반드시 남쪽으로 밀고 내려올 터였다.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큰 고통을 겪고, 대월은 위태로워질 터였다.‘게다가… 이혁수가 정말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데려가 국가의 대의를 외면한다면, 태자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을까?’‘그가 갖은 애를 써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조희진은 또 어떤 자리에 두어야 한단 말인가?’"연화야…"전생에 이혁수는 항상 나를 대신해 결정을 내렸다.궁에 들어갈지, 첩이 될지, 죽을지 말지까지 전부 그가 대신 결정했다.이번엔 내가 그를 대신해 결정해줄 생각이었다.나는 그에게 절하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전하,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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