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발레리
연회장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모두가 나를 바라볼 뿐, 아무도 한마디 하지 못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갑자기 미친 거냐?” 아버지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고, 나는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속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미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내가 내린 결정 중 가장 명확하고, 가장 신중하게 생각한 선택이었다. 소문과 수치, 모욕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로 오늘을 선택한 것은 가장 완벽한 탈출 방법이었다. 의심을 사지 않고 이 자리에서 실행할 만한 충분한 명분이 있었고, 앨린의 행동은 내게 완벽한 방해 요소를 만들어 주었다. 중요할까?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알려 줄 생각도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 제 결정은 이미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한 뒤 트리스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알파 트리스탄, 당신을 내 운명의 짝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달의 여신께서 증인이 되어 주실 겁니다.” 그 순간, 인연의 끈이 고통스럽게 끊어졌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흔들리지 않고 버텼다. 타오르는 듯한 감각 속에서도 나는 완전히 숨이 막힌 표정으로 뒤로 휘청이는 그를 바라보았다. “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숨을 내뱉으며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애초에 나와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 곁에 있었으니까. 나는 그걸 방해하는 존재였겠죠.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나는 말했다. “그 소문들이 맞았어요. 우리의 인연은 달의 여신께서 내린 실수였고, 나는 그걸 바로잡아야 해요. 이제 당신은 처음부터 원했던 그 여동생과 함께할 수 있어요.” 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동의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당신은 나를 사랑한 적 없잖아.’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노력해 온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것은 너무 아팠기에 나는 시선을 앨린에게 돌렸다. 나는 의심 가득한 시선과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가늘게 좁혀져 있었고, 마치 내 의도를 읽으려는 듯했다. 그 모습에 나는 오히려 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모든 사람이 너 같은 건 아니야, 앨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나는 그녀를 위해 일을 더 쉽게 만들어 준 셈이었다. “두 분 모두 행복하시길 바라요.” 그 말을 남기고 나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떠났다.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나는 억지로 참았다. 이것이 내가 준비해 온 일이었다. 내가 반드시 필요로 했던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팩에 더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나는 죽게 될 테니까. 서둘러 침실로 돌아가자 짐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고, 밖에는 눈에 띄지 않는 차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화로운 공간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이곳에는 사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짐을 챙긴 뒤 떠나려던 순간, 나는 눈앞의 광경에 발걸음을 멈췄다. “루나.” 가방을 든 미나가 나를 향해 인사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나는 충격에 휩싸여 속삭이듯 물으며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녀도 알고 있었던 걸까? “네가 그 이상한 질문을 했을 때부터 뭔가 느꼈어. 처음에는 놀랐지만, 나도 대답을 정했어. 저도 함께 떠날게요. 루나는 언제나 제게 잘해 주셨어요. 그러니 이제부터는 곁에서 함께하고 싶어요, 루나.” 그녀가 말했다. 입술이 떨렸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부터는 나를 발레리라고 불러 줘. 나는 더 이상 네 루나가 아니니까.” 나는 훌쩍이며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천천히 떨어졌다. “팩 밖에서 사는 건 힘들 수도 있어. 그래도 정말 괜찮겠어?” 내가 물었다. “네, 루… 발레리.” 그녀가 미소 지었다.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혼자는 아니었다. … 두 달 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나는 떠나는 손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게 안이 텅 비자 그녀는 카운터에 기대며 긴장을 풀었다. “드디어 쉴 시간이네.”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투덜거렸다. “기대하지 마.” 나는 웃으며 카운터에서 나왔다. “우리 마실 차 가져올게.” “여신님, 감사합니다.” 그녀는 내가 생명줄이라도 내민 것처럼 감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녀의 과장된 반응에 눈을 굴리며 가게 밖으로 나섰다. 두 달 동안 모든 것이 변했다. 우리는 팩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완전히 다른 도시로 이사했다. 어떤 팩의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 지역에 위치한 곳이라 다른 팩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이곳을 선택했고, 평생 모아 둔 저축의 절반을 사용해 아파트와 그 아래에 딸린 작은 건물을 샀다. 우리는 함께 꽃집을 시작했고, 짧은 시간 안에 사업은 점점 성장했다.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지만 인간 세상에 잘 적응했고, 불안감도 서서히 사라졌다. 이곳에서 나는 마침내 나를 짓눌러 왔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났다. 더 이상 위험도, 감시도, 고통도 없었다. 나는 자유로웠다. 끊어진 인연의 흔적은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아직도 가슴 한편을 욱신거리게 했지만, 견딜 만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옆 카페 직원에게 윙크하며 인사한 뒤 밖으로 나왔다. 꽃집이 가까워질수록 본능이 강하게 경고음을 울렸다. 뭔가 잘못됐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낯선 남자들이 꽃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진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존재였다. 늑대인간. 미나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붙잡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당신들은 누구죠?” 나는 꽃집을 에워싼 남자들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나 발레리.”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우린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알파 알리스테어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알파 알리스터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알리스테어. 섀도 문 팩의 알파. 전생에서 이클립스 팩과 갈등을 빚었던 바로 그 팩. 트리스탄 암살을 시도했던 팩. 그리고 결국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팩이었다. 공포가 목을 죄어 왔지만 나는 억지로 삼켜 냈다. 이 도시는 그의 영역과 가까웠지만, 들킬 만큼 가까운 곳은 아니었다.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좋아요.”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미나는 곧 풀려났지만 내게 다가오지는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괜찮다는 눈빛을 보내려 했지만, 그들은 곧 나를 데리고 떠났다. 차에 올라탄 나는 눈을 감고 앞으로 닥칠 일을 받아들일 각오를 다졌다. 삼십 분 가까이 달린 끝에 우리는 악명 높은 그 팩에 도착했다. 불안감이 밀려왔다.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두 팩의 갈등이 시작되기도 전에 떠났고, 애초에 그 갈등은 내 탓이 아니라 여러 팩의 회담에서 무례를 저질렀던 앨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과 한마디면 끝날 일이었지만 트리스탄이 그녀를 감싸고 나서면서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 일은 아직 몇 달이나 남아 있었고, 이번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였다. 그는 어떻게 나를 찾아냈고,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걸까? 내가 순순히 따라온 탓인지 그들은 나를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안내를 묵묵히 따르다가 그들이 멈춘 방 앞에 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가 만나야 할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알리스테어를 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졌던 그 회담에서였다. 당시의 나는 그의 분노가 팩 전체와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하기만 했기에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홀로 떠도는 로그가 되어 있었다. 어떤 마음으로 그를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이클립스 팩을 무너뜨리겠다고 선언하던 날 느꼈던 숨 막히는 압박감이 다시 밀려왔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집에서 꽤 멀리 왔군요, 루나 발레리.” 우렁찬 그의 목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긴 짙은 금발은 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뚜렷한 광대뼈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잘생겼다.’ 나는 무심히 그렇게 생각했다. 잘생겼지만 예측할 수 없는 남자. “전 더 이상 루나가 아니에요. 그 정도는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나는 애써 심장의 떨림을 감추며 받아쳤다. “그럼 사실이군요. 정말 팩을 떠난 겁니까?”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절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뭐죠?” 나는 그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인 뒤 입을 열었다. “내 영역 근처에서 로그가 된 이상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내 팩에 들어와 제 개인 고문이 되어 주십시오.” 나는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왜죠?” 얼떨떨한 목소리로 묻자 그가 낮게 웃었다. “당신이 팩에서 얼마나 유능했는지 들었습니다. 뛰어난 루나라는 평판이 자자하더군요. 그런 사람을 그렇게 쉽게 놓아줬다는 게 오히려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은… 흥미롭습니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대답은 어떻습니까, 루나… 아니, 발레리 양?”발레리 팩 홀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아린의 모습은 공허한 눈빛뿐이었다. 경비들이 그녀를 끌고 나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무관심한 얼굴로, 주변의 모든 것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어쩌면 어떤 것들은… 어떤 사람들은 끝내 변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생각을 떨쳐냈다. 사용인들에게 홀을 정리해 달라고 말한 뒤 몸을 돌려 떠나려던 순간— “발레리.”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온몸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부모님과 눈을 마주했다. 두 사람은 마치 순식간에 십 년은 늙어 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얼굴에는 주름이 깊어졌고, 표정에는 피로와 상심이 짙게 어려 있었다. 기시감이 밀려왔다. 예전에도 바로 이 홀에서 부모님과 마주치기 전에 도망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만큼은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내게 다가와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그들의 표정을 보는 순간 가슴이 묵직해졌다. 피로와… 차마 읽어낼 수 없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이번에는 또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 속에서 그들이 다음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판결을 내려줘서 고맙구나. 그런 일을 당하고도 저 아이에게 그렇게 관대한 판결을 내려 준 건… 정말 너다운 자비였어.”
발레리 남은 이틀은 마치 시냇물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정신없이 잠들어 버릴 정도로 지쳐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날 눈을 뜨자마자 나는 트리스탄이 돌아올 준비를 하나씩 해 나갔다. 소피아와 다른 하녀들이 내 곁을 도왔고, 다른 사용인들 역시 내 지시를 기다리며 움직였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해 왔다. 더 이상 루나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이것저것 정리하는 동안만큼은 마치 다시 루나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야 내가 그것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달았다. 이상할 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책임의 무게는 예전보다 가벼워졌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할 일을 마칠 때마다 나는 저택과 병원을 오가며 가능한 한 오래 트리스탄의 곁을 지켰다. 이야기를 나누든, 농담을 주고받든, 아무 말 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든 상관없었다. 그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충분했다. 그 이틀 동안 우리는 아린도, 부모님도, 다가올 재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쩌면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다. 나는 거대한 팩 홀을 바라보았다. 나를 다시 이 팩으로 불러들였던 연회가 열렸던 장소. 하지만 오늘 이곳에 모인 이유는 전혀 달랐다. '이제 시작이야.'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문득 이 순간쯤 이미 퇴원했을 트리스탄이 떠올랐다. 전날 밤 그는 재판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때 그의 눈빛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히 전해졌다. 이건 내 선택이었다. 내가 내려야 할
발레리 '뭐?' 너무도 뜻밖의 말에 온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상상은 했지만, 이건 가장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트리스탄, 그럴 순 없어….” “정당하고 합법적인 판결이야.”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나를 살해하려 한 죄의 대가는 사형이다.” “난 더 이상 루나가 아니야.” 나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반박했다.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전 루나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알파까지 공격했어.” 가슴 한쪽이 조여 왔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평생의 대부분을 그녀를 지키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이제는 모든 인연을 끊었고, 더 이상 그녀를 평범한 팩원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해도, 트리스탄은 원래 잔인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그런 결정을 내리다니. '앨린을… 죽인다고?' “트리스탄….” “발레리.”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잿빛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내가 알지 못하는 기억의 그림자가 그 눈동자 속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모습은 내 가슴을 저미게 만들었다. “난 이제 모든 걸 알아.” 그가 낮게 내뱉었다. “그 아이 마음속 악의는 너무 깊어. 그런 사람을 이 팩에 그대로 둘 수는 없어. 그렇다고 추방해서 밖으로 내보내 또 다른 위험을 만들게 둘 수도 없고.” 어느새 그의 손이 내 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부드럽게 감
발레리 방 한구석에 앉아 나는 제라드 박사가 트리스탄의 상태를 살피며 차분히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벅찬 감정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지만, 나는 결국 그를 위해 팩의 주치의를 불러오고 말았다. 나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몇 분씩 그의 얼굴선을 따라 눈길을 머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일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증거였으니까.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 내 곁에 있다는 증거. 그리고 조금 전의 모든 일이 현실이었다는 증거. 그는 나를 사랑했다. 그 사실이 천천히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몇 주 동안 이어졌던 그 애매한 경계가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나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피투성이가 된 채 창백하게 쓰러져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그 마음은 그를 기다리는 내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병실에서 홀로 그의 유일한 보호자로 남아 몇 번이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오직 한 가지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죽으면 안 된다. 내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그를 잃을 수는 없었다. 더 이상 내 감정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예전처럼 모든 것을 안다고 믿으면서도 아무것도 몰랐던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진정한 그를 알게 된 지금의 트리스탄을 사랑했다. 그의 결점과 실수까지도 모두 품은 채. 나는 그의 결점을 알면서도 그를 사랑했다. 그는 자신
트리스탄 눈부신 빛이 눈을 파고들자 희미하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둔한 통증이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지만, 밝기에 익숙해지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병원이었다. 앨린의 협박, 발레리, 그리고 총성이 뒤섞인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의식을 잃은 뒤에 있었던 일들까지도... 몸을 일으키려다 묵직한 감각에 멈칫했다. 침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 머리카락만큼은 어디서든 알아볼 수 있었다. 발레리.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침대의 빈 공간 위에 두 팔을 포개 베개 삼아 얼굴을 기댄 채였다. 푸른 침대 위로 백금빛 금발이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눈가는 붉게 부어 있었고, 이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볼을 따라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트리스탄! 안 돼! 정신 차려!” 그 절박한 외침이 아직도 귓가를 맴돌았다. 목이 꽉 메어 왔다. 이제는 모든 것이 기억났다. 그녀가 죽은 뒤 이어졌던 전생의 기억들까지도.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는 더욱 커졌다. 그때도 그랬다. 너무 늦어서야 모든 것을 깨닫고, 비참함과 죄책감, 후회와 이루지 못한 사랑에 갇힌 채 생을 마감했다. 진실은 고통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해방감을 안겨 주었다. 결국 모든 길의 끝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너무 눈이 멀어 그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품었던 소원이었다. 그 소원 때문에 내가 이 시간으로 돌아온 걸까? 모든 것을 바로잡으라고? 애초에 내가 그런 기회를
트리스탄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앨린은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그녀를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가끔 마주쳐도 그녀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나를 이용하려 했던, 술에 취한 내 몸을 탐하려 했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수시로 연기를 하며 피해자인 척 행동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랐다. 이제는 그것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끝없는 피해의식. 내가 알고 있던 그녀의 모습은 산산이 깨져 있었고,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만 맴돌았다. 왜? 나는 그녀를 외면했다. 그저 거리를 두었다.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짓눌려 그녀의 행동에 일일이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순진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애써 넘기려 했다. 분명 그날의 일은 한 번의 실수일 뿐이고, 언젠가는 잊힐 거라고. 적어도 어느 날 밤, 한밤중에 눈을 떠 알몸의 그녀가 내 위에 올라타 있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불길한 기분에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실루엣을 확인한 순간에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앨린이 무엇을 하려는지. 몸을 움직이려던 나는 그녀가 적막 속에서도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시작하자 멈춰 섰다. 이것만이 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이제야 모든 것이 완벽해질 거라고. 발레리에게 이것마저 빼앗길 수는 없다고. 그리고 발레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모두를, 심지어 나까지도 발레리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기 위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내 피가 차갑게 식어 갔다. 나는 충격과 믿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