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영아…… 가지 마. 제발……” 결혼 6년 차, 강신혁은 아내 이서하에게 단 한 번도 이토록 애절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면서도, 한 번도 아내에게 보여 준 적 없는 간절한 목소리로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강신혁을 구하기 위해 이서하는 자랑스러웠던 모델의 꿈을 포기했고,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까지 떠안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그의 차가운 외면과 무관심뿐이었다. 이서하는 마침내 마음을 접었다. 이혼 서류만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신혁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어느 깊은 밤, 강신혁이 갑자기 나타나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채 그녀를 바라보며 애원했다. “여보…… 나 혼자 집에 두고 가지 마. 제발……”
View More한남동, 고급 저택의 최상층.
이서하는 벽시계를 확인한 뒤 주방으로 향했다.
“이모님, 오늘이 신혁 씨랑 결혼한 지 6주년 되는 날이라서요. 오늘은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먼저 퇴근하셔도 돼요.”
가사 도우미는 식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사모님도 참, 이런다고 뭐가 달라진다고요.”
그녀는 앞치마를 벗어 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을 나갔다.
이서하는 이미 이런 태도에 익숙했다. 그녀는 조리대에 손을 짚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욱신거리는 오른쪽 다리를 주무르고 다시 식탁으로 향했다.
저녁을 준비하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음식은 벌써 세 번이나 데웠지만, 휴대폰에는 여전히 강신혁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결국 전화를 걸지 않았다.
신혁은 한성그룹의 총수였다. 요즘은 분명 많이 바쁠 것이다.
괜찮아. 조금만 더 기다리자.
오늘은 결혼 6주년이니까.
그때였다.
달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서하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뻣뻣해진 다리를 애써 감추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신혁 씨, 오셨어요?”
짙은 술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강신혁은 양복 재킷을 팔에 걸친 채 취기가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끌어당겼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그의 가슴팍으로 휘청이며 안겼다.
결혼한 지 6년.
꼭 함께 참석해야 하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고서야, 강신혁이 먼저 그녀를 안아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신혁 씨……?”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하지만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서하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입맞춤은 다소 다급했고, 술기운에 이성을 잃은 듯 거침없었다. 그는 그녀를 거실의 가죽 소파로 이끌더니 그대로 그녀의 몸 위로 몸을 숙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입술이 입가를 스치고 목덜미로 내려오더니, 이내 귓가에 머물렀다. 부드러운 입술이 귓바퀴를 스치자 그녀의 손가락이 소파를 움켜쥐었다.
6년이었다.
그는 그녀의 몸 상태를 배려한다는 이유로 단 한 번도 잠자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가 흉터로 얼룩진 몸을 혐오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토록 거침없이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그만 착각하고 말았다.
어쩌면 6년 동안의 기다림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 건 아닐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싸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 바짝 입술을 가져다 대고, 깊은 그리움이 묻어나는 쉰 목소리로 두 글자를 내뱉었다.
“……나영아.”
이서하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멍하니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던 그녀는 몇 초가
지나서야 그가 부른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깨달았다.
권나영.
그가 오랜 세월 마음속에 품어 온 첫사랑이었다.강신혁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이서하의 손목을 와락 붙잡았다.“너는 나영이 좀 본받으면 안 돼? 네가 나영이를 밀쳐서 다쳤잖아. 그런데 사과 한마디 없이 지금 어딜 가겠다는 거야?”“놔.”“먼저 나영이한테 사과해.”그는 고집스럽게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마치 이서하가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눈앞의 모든 일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듯이.“나영이가 다쳤는데 사과 한마디도 못 하겠어? 네 꼴을 좀 봐! 나영이처럼 행동할 수는 없는 거야? 왜 맨날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데?”이서하는 문득 더는 저항하지 않았다.천천히 고개를 들어, 오랫동안 좋아해 온 남자를 바라보았다.6년 전, 그녀는 그를 구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 뒤로는 그날의 사고를 입에 올리지 않고, 몸에 남은 흉터를 내세워 그에게 무언가를 보상해 달라고 하지 않으면, 그가 이 결혼을 부담스럽게 여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심지어 그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언젠가는 그도 자신의 좋은 점을 알아봐 주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바로 지금, 그녀는 깨달았다. 그 모든 것이 그저 자신 혼자만의 일방적인 바람이었다는 것을.다른 여자를 위해 몇 번이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강신혁을 바라보던 이서하는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기대마저 끝내 접었다.“강신혁.”그녀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강신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가 계속 변명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하지만 이서하는 그저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말했다.“후회해.”강신혁은 순간 멈칫했다.“뭐?”“널 구한 걸 후회해.”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예전에는 네 목숨을 구하다가 다쳤어도, 몸에 이런 흉터가 남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건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으니까. 난 한 번도 이 흉터로 널 붙잡아 두려 한 적 없어. 네가 내게 목숨을 빚졌다는 이유로
이서하는 휴대폰에 뜬 메시지를 못 본 척했다. 최 감독과 여유롭게 개인 연락처를 주고받고, 다음 주 리허설 현장에 가서 돕기로 약속까지 마친 뒤에야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건넸다.1층 로비를 막 나서자 저녁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이서하가 길가로 나가 택시를 잡으려던 순간, 물빛 푸른 그림자가 한발 앞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권나영이 하이힐을 신고 다가왔다. 얼굴에는 어느새 억울하고 가련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서하의 팔을 붙잡더니, 듣기만 해도 역겨울 만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서하 언니, 아까 안에서는 정말 죄송했어요. 제가 너무 당황해서 그랬어요. 화내지 마세요…… 신혁 오빠도 탓하지 마시고요. 오빠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권나영은 이서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그룹 사업에 지장이 갈까 봐 그랬던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부부인 걸 그냥 묵인한 거고요…… 언니는 이해해 주실 거죠, 서하 언니?”말하는 동안 권나영은 별생각 없다는 듯 치맛자락을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손끝으로 “무심코” 이서하의 옷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울퉁불퉁한 흉터를 스쳤다.순간, 구역질 나는 혐오감이 신경을 타고 터져 나왔다. 이서하는 속이 격하게 뒤집혔고, 눈빛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인내심마저 바닥났다.“손대지 마!”이서하는 차갑게 팔을 뿌리쳤다. 본능적으로 권나영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떨어지려 했다.힘도 거의 주지 않았다. 그런데 권나영은 “꺅” 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지나치게 과장된 몸짓으로 그대로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나영아!”벼락같은 고함이 터졌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강신혁이 성큼성큼 달려와, 낯빛이 시퍼렇게 질린 채 바닥에 쓰러진 권나영을 와락 품에 안았다.권나영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듯 강신혁의 품에 웅크렸다. 눈물은 말 그대로 뚝뚝 떨어졌고, 그녀는 손목을 문지르며 흐느꼈다.“신혁 오빠…… 서하 언니 탓하지 마세요. 제가 혼자 못 버티고 넘어진 거예요…… 서하 언니
“아! 스미스 씨!”권나영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이서하의 말을 억지로 끊어 버렸다.그녀는 허둥지둥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손끝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더니, 다음 순간 마치 손이 미끄러진 것처럼 와인 반 잔이 하늘색 고급 맞춤 드레스 위로 쏟아졌다.진한 와인이 순식간에 치맛자락을 적시며 눈에 띄게 붉은 얼룩으로 번져 나갔다.“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부주의했네요!”권나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황급히 냅킨을 집어 들고 얼룩을 닦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말까지 더듬거렸다.“갑자기 생각났는데…… 신혁 오빠, 우리 중요한 회의에 가야 하잖아요! 거기 일이 급해서 지금 바로 가야 해요. 정말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날게요!”입으로는 사과하면서도 손은 쉴 새 없이 치맛자락을 문질렀다. 어색하게 화제를 돌리려는 속셈이 뻔히 보였다.“괜찮아요. 어서 닦아요.”최 감독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친절하게 냅킨을 건넸다.권나영은 일단 이서하의 말을 막는 데는 성공했다.하지만 이서하가 정말 말을 이으려 했다면, 누가 그녀를 막을 수 있었을까?테이블 맞은편에서 강신혁은 와인잔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당장이라도 잔을 깨뜨릴 기세였다.그는 깊고 검은 눈동자로 이서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지금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당황과 경고, 그리고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애원이 뒤섞여 있었다.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그는 그녀에게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흥.이서하는 찻잔을 들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 모금 마셨다.그저 평소 높은 곳에서 군림하던 두 사람이 얼마나 추한 꼴을 보일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최 감독은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흥미롭게 물었다.“참, 서하야. 너 결혼했니? 남자 친구는 있고?”“네, 결혼한 지 벌써 6년 됐어요.”이서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제 남편도 강 씨예요.”그 말이 떨어지자 맞은편 두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 숨소리마저 멎은 듯했다.
이서하는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치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권나영은 자연스럽게 ‘강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받아들였고, 강신혁마저 입을 열어 부인하지 않았다.이서하의 입가에 자조적인 냉소가 번졌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반걸음 물러난 뒤, 역겨운 광경에서 멀어지려 몸을 돌렸다.“서하야? 서하 맞니?”그때, 등 뒤에서 놀라움과 반가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서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카리스마가 넘치는 중년 여성이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얼굴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기쁨이 가득했다.최 감독이었다.과거 이서하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그녀를 정상급 패션쇼 무대에 세워 준 사람이 바로 최 감독이었다. 이서하가 가장 빛나던 시절에도 그녀의 재능을 아낌없이 칭찬하고 인정해 준 사람이었다.“세상에, 정말 너구나!”최 감독은 이서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목소리마저 가늘게 떨렸다.“그동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줄 알았잖아! 그 사고 이후로…… 너, 괜찮았어?”오랜만에 받는 따뜻한 걱정이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밀려들었다.이서하는 코끝이 시큰해지고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사고 이후, 한때 자랑스러워했던 그녀의 커리어는 한순간에 멈춰 버렸다. 흉터와 다리를 저는 후유증은 그녀가 마주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고, 그녀는 좁은 세상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과거의 모든 사람과 조금씩 연락을 끊었다.익숙한 사람들을 더는 만나지 않으면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하지만 오늘에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자신을 가두고 있던 것은 결코 몸에 남은 상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이서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천천히 허리를 폈다.“감독님, 오랜만이에요.”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다시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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