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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Author: Rose D' Arc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31 19:19:15

발레리

“왜 아직도 아래로 안 내려왔지? 부모님과 앨린이 널 기다리고 있는 거 몰라?” 트리스탄이 나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팩 하우스의 전통상 내가 참석하지 않으면 아침 식사는 시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침잠이 많은 나도 매일 억지로 일찍 일어나야 했다.

충격에 휩싸여 있지 않았다면 진작 눈치챘을 일이었다.

“저… 죄송해요. 저는 그냥….”

“변명하지 마.” 그가 내 말을 잘라 버렸다. “앨린은 겨우 감기에서 회복했는데 네가 식사도 못 하게 기다리게 할 셈이야? 얼른 내려와서 다들 식사하게 해.”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그가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게는 단 한마디 더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충격은 익숙한 아픔으로 바뀌었고,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그에게 중요한 사람은 오직 앨린뿐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겪으니 오히려 더 아팠다. 특히 지금은 더욱 그랬다.

“드디어 왔구나!” 내가 식당에 들어서자 어머니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음식이 다 식겠네. 앨린을 또 아프게 만들 셈이니?”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앨린은 원하면 언제든 식사를 할 수 있었고, 부모님도 원래라면 자기 집에서 식사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부모님은 사사건건 나와 트리스탄만의 집이어야 할 팩 하우스로 찾아왔고, 앨린까지 함께하면서 이곳은 거의 부모님의 집이나 다름없어졌다.

이 전통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고 살았을 것이다.

“엄마, 괜찮아요. 언니를 나무라지 마세요. 분명 다른 일이 있었을 거예요.”

앨린이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고백과 그 미소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탓에 속이 뒤틀렸다.

“감싸줄 필요 없어. 아무것도 안 하고 게으름만 피우고 있었겠지.”

내 옆에 선 트리스탄이 말했다. 그는 끝내 내 쪽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의 말을 묵묵히 삼킨 뒤 자리에 앉았다.

겉보기에는 전생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하지만 앨린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본능적으로 경계했다. 당장이라도 그녀가 내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다. 모두가 이미 그녀의 편이었으니까 굳이 악의를 드러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아침 식사가 이어지는 내내 부모님은 사사건건 모든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앨린은 조용히 앉아 형식적으로만 나를 감쌌고, 그럴수록 부모님의 독설은 더욱 심해졌다. 미묘했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광경에 속이 점점 쓰라려졌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생도 이와 다르지 않았으니까.

이제야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가 어떻게 부모님을 조금씩 내게서 떼어 놓고 자신에게 끌어들였는지, 그들의 사랑을 얻는 동시에 분노는 모두 내게 향하도록 만들었는지.

그리고 모두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생에서 나는 변화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하지만 결국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번에도 내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식탁 위의 음식은 입에 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울화가 치밀었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전부 앨린의 입맛에 맞춰 준비된 음식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음식을 먹은 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메스꺼움이 더욱 심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의 관심은 오직 앨린에게만 쏠려 있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삶은 이미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비참하고, 무력한 삶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식탁을 있는 힘껏 내리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이런 대우를 받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겪어 보니 모든 것이 더욱 선명해졌다.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 순간,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 냈다.

이제는 그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언제나 팩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싸워 왔지만 돌아온 것은 멸시뿐이었다. 그녀의 교활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고, 누구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나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왜 더 희생해야 하지? 내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조차 곁에 있어 줄 생각조차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서.

이미 승부는 끝났다. 승자는 그녀였다.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패배하고 비참하게 죽는 것은 나였다.

굳은 결심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이번만큼은 절대 그런 결말을 맞이할 수 없었다.

내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앨린이 다른 팩과의 갈등을 부추기면서 시작되었다. 내 말만 들어 주었다면 쉽게 해결될 일이었지만, 트리스탄과 팩은 내 의견을 철저히 무시했다.

앨린뿐만이 아니었다. 이 팩 전체가 나와 내 아이에게는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루나의 지위도, 운명의 짝이라는 인연도 모두 포기하고 이 팩을 떠나는 것. 그렇게 되면 나는 로그가 되어 평생을 함께해 온 사람들과 내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뒤로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지옥 같은 삶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장 책상으로 달려가 종이 한 장을 꺼내 계획을 적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삶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나는 팩을 위해서가 아니면 거의 손대지 않았던 저축이 있었다. 그 돈이면 인간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몇몇 도시는 다른 팩의 영역과 맞닿아 있었지만, 나는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몸을 숨기고 지낸다면 인간들 사이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가슴속에서 희망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이것이 해답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속박도 없이 진정한 나 자신을 다시 찾아가는 새로운 시작. 더 이상 이 무력하고 연약한 나를 가두는 곳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달의 여신께서 정말 나를 불쌍히 여기셨는지도 몰랐다.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이 기회를 절대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회귀란 바로 그런 기회를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미나가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아침을 제대로 못 드신 것 같아서 다시 준비해 왔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쟁반을 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분명 아침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모양이었다.

음식에서 풍겨 오는 향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블루베리 팬케이크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루나, 몸은 좀 어떠세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질문을 해 준 사람은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미나….”

나는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그저 시녀일 뿐이었지만 누구보다도 충직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죽어 가던 마지막 순간,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나를 붙들고 울어 주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끝까지 내 곁을 지켜 준 사람도,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 준 사람도 그녀뿐이었다.

순간 밀려온 감정에 나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곳을 떠나는 건 어떻게 생각해?” 내가 물었다.

“루나?” 미나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헛소리나 하고 있었어요 .”

나는 서둘러 화제를 끝내고 그녀를 돌려보낸 뒤, 다시 끄적이고 있던 공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직은 거친 계획뿐이었지만 내 결심은 확고했다.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

‘이제 때가 됐어.’

나는 한 번 겪었던 그 파티를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기념 파티 준비는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진짜 목표를 위한 계획을 세우는 데 쏟아부었다.

지난번과 똑같은 흰색과 금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나는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일부러 오늘을 선택했다.

곁을 흘끗 바라보자 가슴이 저려 왔다. 내 옆에서는 트리스탄이 앨린에게 몸을 기울인 채 음식을 먹여 주고, 함께 웃고, 다정하게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 오늘은 우리의 기념일 파티였지만, 그는 팩 사람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치 앨린이 자신의 루나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의 노골적인 모욕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모두 들렸다. 모두가 나를 비웃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앨린만 아끼는데 왜 운명의 짝은 발레리일까? 달의 여신께서 실수하신 걸까? 왜 발레리는 아직도 아이를 갖지 못한 걸까?

“루나가 된 지 벌써 1년인데도 아직 임신을 못 했대?”라는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루나 노릇만 제대로 했어도 지금쯤 후계자가 있었겠지.” 누군가가 유난히 크게 비웃었고, 연회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팩원들 모두가 긴장한 듯 숨을 죽였다.

그런 말을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가슴이 저려 왔다. 이를 악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회장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멀리 가지도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앨린이 내 옆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위로하려는 듯 다가왔다. 하지만 내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들고 있던 와인이 초록색 드레스 위로 쏟아졌고, 마치 내가 그런 것처럼 보였다.

“발레리!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트리스탄이 벌떡 일어서며 호통쳤다.

나는 충격에 휩싸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예전에는 저런 가식적인 연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것도 그녀의 계획이었다. 이미 모든 것이 자신에게 유리한데도 나를 더욱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려는.

“아니에요, 트리스탄. 실수였어요. 발레리 언니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그녀는 애원하듯 말하며 그의 품으로 몸을 기댔다.

“사과해!”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차갑게 말했다. 부모님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노려보았다.

‘정말 비참하지 않은가?’ 나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는 팩원들 앞에서조차 자신이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이 누구인지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내 체면은 안중에도 없었다.

전생에서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끝까지 항변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부모님은 내 말을 무시했고, 팩에는 내가 앨린을 일부러 해쳤다는 소문만 더 퍼졌다. 다음 날 나를 찾아온 사람도 앨린뿐이었다. 그녀는 순진한 얼굴로 자신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며 변명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나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앨린.”

고개를 들자 모두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고, 앨린의 가면도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계획은 실패했다.

그녀는 내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일을 더 키우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에게는 나만의 목적이 있었으니까.

그들에게서 한 걸음 떨어진 나는 팩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렇게 기쁜 날에도 결국 저는 또다시 팩을 부끄럽게 만들고 말았네요.”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어디를 가든 소문은 저를 따라다니고, 제가 섬기려 했던 이 팩조차 저를 짐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팩원들은 충격에 휩싸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계속 참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나는 말했다. “이 팩을 떠나기로요.”

나는 턱을 치켜들고 미소 지었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클립스 팩의 루나 직을 사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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