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변한 한지음의 표정에 강서희가 화들짝 놀랐지만 유영을 처리하겠다는 의지에 다시 표정을 수습했다.그녀는 오랜 시간 그들이 이혼할 날만 바라보며 살아왔고 더 이상 기다리기 싫었다.절대 실패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그 시각, 유영은 순정동으로 돌아왔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간단히 샤워를 마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소은지가 오기로 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주방장에게 부탁해서 간단한 요리도 준비했다.소은지는 그녀의 강아지를 안고 순정동으로 방문했다.해외에 있을 때 가장 그리웠던 것들 중에 반려견도 포함되어 있었다.소은지는 강아지를 안은 채 유영에게 다가오며 말했다.“전에는 네 외삼촌이 그냥 벼락부자인 줄 알았는데….”지금은 정국진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바뀐 순간이었다.포르쉐만 해도 조카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순정동을 방문하자 이런 멋진 삼촌이 다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이런 외삼촌이라면 트럭으로 가져다 줘도 환영할 것 같았다.유영은 강아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뭉치 이리 와.”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뭉치와 보낸 시간은 참 힐링되는 시간이었다.뭉치는 소은지네 집에서 대접 받고 지냈는지 전보다 무게가 더 나가는 것 같았다.소은지가 물었다.“외삼촌 결혼하셨어?”“그건 왜?”“아니, 결혼 안 하셨으면 나는 어떠냐 해서.”소은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항상 차분하고 냉정함을 않는 친구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정국진이 얼마나 유영을 총애하는지 알 수 있었다.유영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친구를 흘기며 답했다.“외숙모 건재하시거든? 안 그래도 외삼촌 때문에 강이한이 아버지 뻘 되는 남자 만난다고 나 엄청 욕했단 말이야.”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강이한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하지만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냥 강이한이 멍청한 것 같기도 했다.소은지도 비슷한 상상을 했는지 유영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강이한 그 자식, 그분이 네 외삼촌인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난 전혀 궁
해외에 거주하는 3개월 동안은 유영에게 꿈과도 같은 시간이었다.친절하고 자상한 외숙모와 외삼촌의 사랑, 그리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좋은 건 다 그녀에게 챙겨주던 동생까지.그들은 이산가족을 맞는 심정으로 유영을 품어주었다.강이한과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물질적으로 부족함을 느낀 적은 없지만 사실 마음은 계속해서 피폐해져 간 것 같았다.“은지야.”“응?”“난 한지음을 쉽게 용서하지 않을 거야.”유영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그녀를 악역으로 몰아가고 현재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그녀에게 압력을 가하는 존재들에게 이제는 반격을 해줄 시간이었다.전에는 박연준이 준 과제 때문에 시간이 없었지만 이제는 그녀의 진짜 힘을 보여줄 때가 왔다.“난 널 응원할게.”소은지가 말했다.세강 일가의 핍박을 오랜 시간 받아왔으니 이제 돌려줄 때도 되었다.그녀에게 해를 가한 자들은 아직도 유영을 만만하게 보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들에게 정국진과의 관계를 숨긴 건 태도가 급변하는 그들의 추악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지만 그렇다고 괴롭힘을 당하고도 반격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유영은 조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내일 오전에 기자회견을 열 생각이니까 준비해 주세요.”“알겠습니다.”오늘 아침까지 그냥 무시하겠다던 유영이 갑자기 정면에 나선 것이 의아했지만 조민정은 그녀의 말을 따라주기로 했다.어차피 이대로 공격이 계속되면 그냥 무시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유영이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강이한도 고역을 겪고 있었다.조형욱이 정국진 아내에게 보낸 문자는 바로 답장이 왔다.답장은 아주 간결했다.[남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하세요.]문자를 확인한 강이한은 또 깊은 분노를 삼켜야 했다.그는 상처를 입은 맹수처럼 온갖 곳에서 짜증을 드러냈다.“대체 뭐 하는 여자길래 이렇게 차분해? 남편한테 마음이 없는 거야?”조형욱은 난감한 얼굴로 코끝을 매만졌다.“아마 이 일을 크게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네요.”조형욱
그 시각, 유영은 소은지와 함께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소은지가 말했다.“살면서 이런 진수성찬은 처음 먹어 봐. 너희 외삼촌, 입맛도 꽤 까다로운가 봐?”입맛이 까다로운 주인을 모시고 사는 주방장만 만들어낼 수 있는 풍미였다.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외삼촌이 모든 면에서 좀 까다롭긴 하지.”매번 정국진과 함께 외식을 나갈 때면 그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기 드물었다.“부럽다. 넌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이잖아. 내가 너희 집에서 같이 살면 아마 한 달에 10킬로는 찔 것 같아.”소은지는 키가 컸지만 먹는 대로 살이 찌는 체질이었다.반면 유영은 체중 변화가 거의 없었다.그녀의 외모는 10년 전과 비교해도 전혀 달라진 게 없을 정도로 동안이었다.“그렇긴 하지만 나도 고민 정도는 있어. 잘 챙겨 먹느라고 해도 머리가 자꾸 빠져. 이러다 탈모 오는 거 아닌지 몰라.”아마 머리카락이 자꾸 빠지는 이유는 세강 일가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었다.“괜찮아. 넌 원래 머리숱이 많잖아. 좀 빠져도 돼.”소은지가 말했다.그렇게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데 핸드폰이 울렸다.낯선 번호인 것을 확인한 유영이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유영 씨, 맞죠?”수화기 너머로 유경원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목소리를 알아들은 유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무슨 일이시죠?”유영이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강이한과 살면서 그와 관련된 스캔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대놓고 집까지 찾아온 여자는 유경원이 유일했다.지난 생에서는 나타나지도 않았던 인물이었다.조민정에게 부탁해서 알아봤더니 진영숙이 왜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훌륭한 가정 환경에서 사랑 받고 자란 공주님, 그게 유경원이었다.“내일 이한 씨가 본가로 같이 가자고 할지 모르는데 가지 마세요.”온화한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지만 묘하게 신경이 거슬리는 말투였다.유영은 순간적으로 분노를 느꼈다.아직 공식적으로 이혼한 것도 아닌데 이젠 별별 사람들이 다
유경원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다.진영숙이 그녀를 그만큼 예뻐하지 않았으면 절대 그녀를 데리고 강이한이 사는 집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가고 싶으면 가도 돼요. 하지만 그러면 위자료는 한푼도 받아갈 생각하지 말아요.”협박 섞인 발언에 유영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이 여자가 왜 그렇게 칠순잔치에 집착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유경원뿐이 아니라 아마 한지음도 참석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것이다.어쨌든 세강의 안주인 자리를 바라보는 여자들은 강이한과 함께 참석하는 가족행사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최근 유영과 강이한의 이혼설이 도는 시점에 그와 함께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할머니의 칠순잔치에 참석한다면 은연 중에 가족들의 인정을 받은 거와 다름없었다.홍문동에서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유경원은 꽤 머리를 쓸 줄 아는 여자였다.하지만 내일 강이한은 어떻게든 유영을 끌고 칠순잔치에 참석하려고 할 것이다.“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요?”유영이 싸늘한 어투로 물었다.여자는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건 아니고요. 그냥 그쪽이 이한 씨랑 이혼을 진심으로 바란다면 제가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얘기였어요.”“하!”유영은 헛웃음만 나왔다.뻔뻔한 말을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하는 인간은 처음이었다.더 이야기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걱정스럽게 그녀를 지켜보던 소은지가 물었다.“누구야?”“강이한 추종자.”유영은 결혼 상대로 너무 잘난 남자는 별로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소은지가 먹던 킹크랩을 내려놓고 말했다.“그 여자들은 너희가 이혼하기만 기다리고 있을걸?”“누가 아니래?”아직 이혼 절차도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저렇게 안달을 내다니.한심하고 우스웠다.소은지가 물었다.“병원에 있는 걔는?”“누구든 상관없는데 걔는 안 되지.”유영은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진영숙이 그렇게까지 싫은 티를 냈으니 한지음도 지금쯤 안달이 나 있을 것이다.그 시각, 강이한은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들을 둘러싼 여론은 계속되고 있었다.한지음을 비난하던 여론도 가세해서 유영을 공격하고 있었다.그녀가 한지음의 병실을 찾아간 사진이 뉴스 일면을 장식하면서 모든 여론은 한지음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이날 아침, 유영은 간단히 아침을 먹고 회사로 향했다. 기자회견장에서 경호원들과 경비팀이 질서 유지에 힘쓰고 있었다.기자들은 요즘 돌고 있는 소문에 대해 유영에게 해명을 바라는 입장이었지만 유영은 앞으로의 사업 방향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질문지까지 준비해서 온 기자들도 듣다 보니 그녀의 화려한 언변에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에게 알려진 유영은 호화저택에서 두문불출하는 전업부부에 바쁜 남편 때문에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으로 알려졌다.그래서 남편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그녀를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수단이 너무 잔혹해서 욕을 먹었다.하지만 지금 단상에서 조리정연하게 사업 기획을 발표하는 그녀를 보며 기자들은 그녀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비록 원하던 답변은 못 들었지만 미래를 향한 그녀의 열정과 자신감에 찬 말투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앞으로 5년 동안 저는 부단히 노력하여 오로라 스튜디오를 전국 최강 디자인 작업실로 이끌어나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사회에 외면당한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단체를 설립하여….”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마친 유영은 담담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갑자기 열린 기자회견이라 참석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연설을 다 들은 현장의 기자들은 너도나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그녀는 자신의 노력을 통해 성과를 내겠다고 선언했으며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세강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오늘 연설의 모든 주체가 이유영 본인이었다.조민정은 단상으로 올라가서 공손한 자세로 유영을 에스코트했다.“아주 잘했어요.”그녀가 유영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유영은 내려오면서 현장 분위기를 살폈다.일부 기자들이 그녀에게 몰려오고 있었다.“유 대표님, 간단한 인
그리고 기자들은 그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일부는 그녀가 찔려서 그런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계속 웃음만 짓고 있던 유영이 갑자기 깊은 슬픔에 잠기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답했다.“저는 사건이 있던 날 오전에 친구랑 아침을 먹다가 그분을 처음 만났어요. 그리고 오후에 그분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고요.”현장이 갑자기 숙연해졌다.“남편은 줄곧 제가 그분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강요했어요. 사실 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한지음 씨한테 뭘 잘못했는지. 그날 아침에도 저는 한지음 씨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거든요.”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현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항상 냉정하게 취재를 이어가던 기자들마저 들뜨는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유 대표님 말씀은 남편분께서 대표님의 해명을 전혀 믿지 않고 한지음 씨의 말만 들었다는 말씀인가요?”“남편은 항상 저를 믿어주던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번 지음 씨 사건이 너무 잔혹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가 꼭 사과를 해야 그분의 기분이 풀릴 거라고 했어요. 아마 기분이 좋아지면 회복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겠죠.”유영은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고 대답했다.오늘의 기자회견은 생방송으로 송출되고 있었다.플랫폼에서 회견을 시청하던 사람들 중에는 오늘 칠순잔치 때문에 다망한 본가 식구들을 제외하고도 병원에 있는 한지음 일당과 강이한도 있었다.아까 단상에서 조리 정연하게 자신의 목표를 말하던 아내에게 감탄한 순간에 갑자기 절언 발언이 나오자 그도 순간 당황했다.유영은 자신은 한지음에게 해를 가한 적이 없으며 단지 사건이 잔혹해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가해자로 지목한다고 돌려 말하고 있었다.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었다.“강 대표님은 어떻게 아내를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지?”“그러니까. 그러니까 상간녀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서 자기 와이프한테 하지도 않은 잘못을 사과하라고 강요한 거잖아?”현장의 기자들마저 이렇게 수군대고 있었다.현재 생방송을 보
두 시간이 넘는 기자회견에서 유영은 자신이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과 이상을 설명했다. 기자들이 민감한 질문을 던질 때, 유영이 초라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녀는 모든 잘못의 근원을 강이한과 한지음에게 돌리고 혼자 유유히 빠져나갔다.“넌 네 오빠랑 저 여자가 이혼하면 목표를 이룬 거겠지만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한지음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이제 그 사과마저 저 여자는 네 오빠가 강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어. 더 깊게 파고 들면 내가 여우짓을 해서 네 오빠를 그렇게 만든 거라고 얘기한 거나 다름없다고!”아마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한지음은 지금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였다.유영이 이토록 완벽한 반격을 준비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전에는 그냥 나약하고 아무 힘도 없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고단수가 따로 없었다.강서희가 일그러진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여우 같은 년!”기나긴 악플과 택배 폭탄에 반쯤 미쳐버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여론을 뒤집을 줄은 몰랐다.이제 유영은 그들이 건드릴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갔다.그녀는 무능한 전업주부 이미지를 철저히 벗어던졌다. 예전에 사람들은 세강의 안주인은 능력도 없고 남편에게 기대어 사는 기생충으로 알았다.하지만 이제 모두의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냈다.기자들마저 그녀를 대표님으로 호칭하지 않았던가?이 짧은 시간 안에 그녀는 확고히 자신의 영역을 다졌다.한지음의 두 눈은 증오로 가득했다.대체 뭐가 잘나서? 왜 이렇게 된 걸까?세강과 관련된 모두에게 커다란 엿을 선사한 유영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사무실로 돌아갔다.사무실 문을 여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이상했다. 수시로 그녀를 곁눈질하는 직원들도 있었다.그런데 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불청객이 와 있었다.언제 온 건지, 강이한이 그녀의 자리에 앉아 담배까지 피우고 있었다.과거에 그는 담배를 즐겨 피우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은 언제 봐도 몸에서 담배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내가 당신한테 사과하라고 강요했어. 하지만 기자들한테 그걸 사실대로 말해버리면 한지음 입장이 얼마나 곤란해질지 생각해 봤어? 대체 왜 한지음한테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쾅!유영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강이한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과격한 모습이었다.그녀의 주변으로 진한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강이한은 분노도 잊고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강이한 씨,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한지음한테 뭘 했어? 내가 한지음 납치하는 거 당신이 봤어? 내가 그 여자 눈을 멀게 하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거 봤냐고?”강이한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당신이 말도 안 되는 죄명을 나한테 갖다 뒤집어씌운 거잖아!”“납치범들한테 돈을 준 건 당신이야. 당신 계좌에서 돈이 흘러나갔다고!”“하!”유영은 냉소를 지었다.남자는 그 증거를 아직까지 믿고 있었단 말인가?결국 쟁점은 그 은행 카드의 입금 기록으로 돌아왔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나가!”그와 이야기하는 매 순간이 지치고 괴로웠다.자리에서 일어선 강이한이 말했다.“이유영, 적당히 해. 오늘 같은 일은 다시없었으면 좋겠어.”“그럼 시비가 생길 일을 하지 말든가! 또 나한테 협박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그녀는 혼자서 모든 오물을 뒤집어쓰고도 가만히 있을 정도로 보살이 아니었다.강성건설과의 계약 때문에 처리가 늦어지긴 했지만 기자회견도 예정된 수순이었다.시간적 여유가 되면 자신에게 해코지했던 사람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안겨줄 생각이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자 유영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전에는 내가 오해할 만한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지금부터 명심해. 난 당한 만큼 갚아주는 사람이야.”온순하고 순종적인 현모양처?사랑이 사라진 지금 그런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사람마다 참을 수 있는 한계점이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