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한이......소은지는 어떻게 이유영 앞에 나타났는지 몰랐다. 이유영은 은은한 달빛처럼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우아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유영아, 네가 이런 드레스를 입은 건 처음 보네!"소은지의 말투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던 이유영은 경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강씨 가문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지만, 강이한은 경제적으로 이유영에게 아낌없이 후했다.이유영이 입고 쓰는 대부분은 명품이었고 그녀는 체구가 작아 강이한은 원피스를 입히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런 전통적인 드레스는 거의 입지 않았다."우지 씨가 사준 건데, 예쁘지?""응, 우지 씨 눈썰미가 정말 좋네."키가 작은 사람이라 해서 전통 드레스를 못 입을 리가 없다. 이유영은 마른 체형이었지만, 전통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렸다. 그 드레스를 입은 이유영은 더욱 빛났고 정말 예뻤다.소은지는 복잡한 표정으로 의자를 끌어다 이유영 옆에 앉고는 이유영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유영아.""응?""최근 신씨 가문이랑 강이한이 엄청 얽히던데... 정말 네가 한 거야?""맞아."이유영은 덤덤하게 인정했다."..."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의 갈등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있어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이에게까지 손을 댄 것이 가장 큰 잘못이었다. 이온유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월이가 강이한의 딸인 걸 몰랐다고 해도 그러면 안 됐다.월이는 이유영의 딸이었다. 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이미 많은 상처를 주고도 아이에게까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줬다.하지만 소은지는 서재에서 수술 동의서를 보고 경악했다.예전에 이유영과 소은지는 강이한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한지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유영이 더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한지음도 오랫동안 시력을 잃었지만 강이한은 자신의 각막을 한지음에게 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이유영한테는 달랐다.“왜 그래?”이유영은 소은지가 말이 없자 눈살을 찌푸렸다.이유영은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선 이유영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소은지는 그 말을 듣고 침묵했다.틀림없이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강이한에 대한 결론이 나 있었다.이유영뿐만 아니라, 강이한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강이한에게 있어 이유영은 절대 한지음보다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없다고....파리에서.현우와 송연정의 일은 점점 더 커졌고 소은지는 처음에는 그저 지켜보았지만, 며칠 후부터는 아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볼수록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그날 저녁.소은지는 우천시의 야경을 보러 갔다. 정말 멋졌다. 청하시에 있을 때는, 우천시의 야경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곳으로 이곳만의 특징이라고 들었는데, 오늘 밤 직접 보고 나서 그 말이 정말 사실임을 알았다.돌아왔을 때, 마당 앞에 서 있는 차갑고 외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바로 현우였다!현우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파리의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 그런 데다 그와 송연정의 관계까지 점점 더 심각해지는 마당에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이유영 때문일까?혹시 이유영이 걱정돼서...그런 생각을 하자, 며칠 동안 겨우 진정되었던 소은지의 마음은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답답하고 불안한 기분이었다.소은지는 현우의 뒤에 서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박연준이 계속 이유영 곁에 지키고 있어요.”현우가 예전에 말했듯이 박연준과 강이한은 지금 이유영의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강이한이 지금 여기에 없더라도 박연준이 이유영 곁에 있으니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이유영 곁은 가장 평화로운 곳일 거였다.소은지의 목소리를 들은 현우가 뒤로 돌아섰다. 현우의 눈은 깊고 어두웠다. 현우가 많이 야윈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소은지가 반응하기도 전에, 현우는 소은지의 목을 잡아끌어 품에 안았다.“으...”아팠다!곧이어 현우의 키스가 쏟아졌다.마치 폭풍처럼 억눌렸던 감정을 터뜨렸다.현우의 감정이 소은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겁고 마치 갇힌 짐승처럼 세
오늘 저녁, 박연준과 이유영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소은지는 과감하게 도망치듯 외출했다.“그러면 안 돼요?”“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조심해야 해요.”“...”이유영을 자극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누가 말 안 해도 조심할 거였다.하지만 현우가 그런 말을 하니, 소은지는 마음이 답답해 났다.현우가 소은지에게 손을 내밀었다.“뭐 하는 거예요?”“같이 가요. 오늘 여기서 자지 말고.”“무슨 뜻이에요?”또 이유영에게 보여주려는 건가?“제가 말했잖아요, 굳이...”“읍!”말을 마치기도 전에 현우는 소은지를 끌어안았고 소은지는 세상이 빙빙 도는 느낌을 받으며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현우의 차에 태워졌다.그리고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호텔이었다.화려한 스위트룸을 보고도 소은지는 어리둥절했다.“설마, 본가에서 사람 시켜서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반산월에 있을 때부터 소은지와 현우는 한방을 썼다. 하지만 여긴 우천시다.현우가 소은지의 가는 허리를 감싸안았다.소은지는 현우에게서 느껴지는 무거운 기운을 감지했고 저항하던 몸짓도 멈췄다.“요즘 많이 힘들었죠?”회장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엔데스 가문은 난리가 났다.여섯째 도련님뿐만 아니라 다섯째 도련님, 넷째 도련님, 셋째 도련님, 그리고 큰 도련님까지 모두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엔데스 가문은 파리에서 100년 된 명문가인 만큼 모두가 파리로 모이고 있었다.가문은 잔인한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현우는 아무 말 없이 조명을 껐고 그렇게 두 사람은 밤을 보냈다.그날 밤, 두 사람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고 결국 소은지는 깊은 잠에 빠졌다.눈을 떴을 때, 현우는 방에 없었다. 그리고 어젯밤...소은지는 침대에 앉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소은지와 현우는 부부 관계지만, 그 관계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파트너일 뿐이었다.소은지는 현우와 그렇게까지 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 그들은 다른 소용돌이에 빠진 것 같았다. 이게 대체
그 후로, 소은지는 이유영이 약을 마실 때마다 곁을 지켰다.“어제도 아무런 느낌 없었어?”“...”이유영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소은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살을 찌푸렸다.“너 왜 박연준처럼 그래?”“...”박연준?박연준은 이유영이 약을 다 마시고 나서 매번 이 질문을 했었다.박연준이 돌아왔다.소은지는 박연준과 함께 서재로 향했다. 연서에 대해 알게 된 후로, 소은지는 박연준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물론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박연준은 소은지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소은지 씨, 무슨 일이세요?”“강이한 씨와 무슨 거래를 한 거예요?”소은지도 두 사람 사이에 거래가 오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계산과 거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봤어요?”박연준의 목소리는 깊고도 차가웠다.“이유영은 강이한 씨에게 이런 식으로 빚지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이유영이 강이한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만약 이유영이 알게 된다면, 절대 강이한의 각막을 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차라리 평생 눈이 멀더라도 말이다.“...”빚?“은지 씨가 잘못 생각했어요. 빚진 사람은 우리예요!”박연준은 '우리'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박연준의 말이 맞았다.빚진 사람은 이유영이 아니였다. 만약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다가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만약 박연준이 강이한을 이용하지만 않았다면, 이유영은 정국진과 임소미의 사랑을 받으며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하지만 그 모든 밝은 미래는 박연준과 강이한에 의해 깨졌다.언제부터였을까? 계산을 일삼던 박연준도 그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결국 사람은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결국 자신까지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그래도 이유영은 원하지 않을 거예요!”소은지는 이유영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박연준의 말처럼 그들이 이유영에게 빚을 졌지만, 강이한이 각막을 제공하고 나서 그 모든 것이 ‘빚 청산’으로 간단히 끝날 수 있을까?
“수술하고 나서 두 사람은 평생 만날 수 없게 될 거예요!”“...”소은지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이제야 알았다. 모두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과거 강이한이 한지음을 위해 했던 모든 일은 진정한 보답이었다. 보답 외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강이한이 이유영에게 각막을 언급했던 것도, 어쩌면 그저 이유영을 겁주기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화가 나서 한 말일 뿐, 강이한은 절대 이유영의 각막으로 한지음의 시력을 회복시킬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이유영과 한지음이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강이한의 첫 번째 선택은 염 선생이었지만 최악의 경우, 자신이 평생 어둠 속에서 살더라도 이유영의 시력을 되찾아주려 한 거였다.이 남자의 마음은 너무 깊어서 감정이라는 부분에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니, 사실 그건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에게 속은 것이다.강이한의 분노에 휩싸인 모습에 속았다.한참 뒤, 소은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강이한 씨는 박연준에게 양보했던 거예요?”“이제 와서 누굴 믿겠어요?”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라면, 강이한이든 박연준이든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이유영의 삶에 진심으로 다가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소은지는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들의 거래 내용은 강이한이 이유영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고 박연준이 이유영의 남은 인생을 함께하는 것이었다.“이유영은 원하지 않을 거예요!”“다른 건 이유영 마음대로 해도 돼요. 하지만 이 일은 이유영이 결정할 수 없어요.”박연준의 목소리가 깊어졌다.소은지는 침묵했다. 이유영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니...소은지의 머릿속에는 이유영의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처음 이유영은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었지만 박연준과 강이한이 나타난 후로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지금 이유영은 정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가 되었고 주변에 많은 남자들이 있겠지만, 그들은 모두 정씨 가문의 배경을 노리고 있을 뿐이었다.박연준과 강이한은 그런 모습을 원하지
소은지는 이유영의 눈가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복잡한 감정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넌 분명 괜찮아질 거야...”이유영은 미간을 찌푸렸다.소은지의 복잡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 복잡한 감정이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이유영은 소은지의 손을 붙잡고 뭔가 묻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은 결국 삼켜졌다.“은지야.”“응?”“너와 현우...”말을 하다가 이유영은 문득 망설였다.이유영은 소은지가 이렇게 복잡한 감정을 보이는 이유를 현우 때문이라고 착각한 것이다.현우...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소은지는 반사적으로 이유영의 손을 뿌리쳤다.“...”손에서 빠져나간 온기가 낯설었다. 이유영은 소은지의 감정 변화를 더욱 선명하게 느꼈다.소은지가 현우에게 보이는 감정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소은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소은지는 언제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감정 때문에 흔들리거나 힘들어한 적도 없었다.하지만 지금, 소은지의 모든 믿음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은지야.”소은지를 부르는 이유영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유영아, 현우 씨... 어떻게 생각해?”이유영을 바라보는 소은지의 눈빛에는 깊은 탐색의 기색이 가득했다.“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거야?”“네 곁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사람이잖아. 네가 보기엔 어떤 사람인 것 같아?‘어떤 사람?’이유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소은지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그녀는 이유영의 얼굴이 뚫어져라 바라보며 작은 표정 변화조차 놓치지 않으려 했다.그리고 이유영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소은지의 불안도 점점 커졌다. 단호하고 거침없는 성격 덕분에 소은지는 언제나 여유로웠고 이렇게까지 긴장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는 소은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소은지가 감당하고 있는 감정의 크기가 어떠할지 누구도 가늠할 수 없었다.잠시 후, 이유영은 소은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은지야, 너... 현우 씨 좋아하는구나.”
“난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소은지는 이 질문에 유독 집착하고 있었다.이유영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이 집착의 근원을 깨닫고는 조용히 답했다.“그 사람과는 일로만 만났을 뿐이야. 다른 건 잘 몰라.”“...”이유영의 대답을 듣고 소은지는 어쩐지 안도했다.단순한 업무 관계.그렇다면, 더 이상 깊이 알지는 못한다는 뜻이겠지?이유영은 소은지의 미묘한 안도감을 놓치지 않았다.이유영이 가만히 지은 미소 속엔 지울 수 없는 무력감이 스며 있었다.“은지야, 이번 한 번만이야.”이유영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애정과 함께 은근한 꾸짖음도 섞여 있었다.소은지는 순간 멍해졌고 이내 어색한 미소와 미안함이 섞인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나...”“예전에 넌 이런 감정을 드러난 적이 없었는데.”예전? 그때의 소은지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감정을 배제한 채 살아오던 소은지에게 지금과 같은 예민한 감정 표현은 있을 리 없었다.예전 일들을 떠올리자 이유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엔데스 가문이 어떤 곳인지 너도 잘 알잖아. 파리에서는 특히 더 복잡한 가문이고.”“응.”엔데스 가문이 어떤 곳인지 소은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이 떠난 뒤, 가문이 숨겨왔던 복잡한 문제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드러났고 혼란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이 상황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은지는 단 한 가지 확신했다. 엔데스 명우가 원하는 대로 두지는 않겠다고.엔데스 명우가 저지른 악행이 너무 많았으니까.만약 그가 가문의 우두머리가 된다면 해외로 도망가더라도 편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그리고 그가 소은지에게 했던 일들까지 생각하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윙윙윙.”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소은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발신지는 파리였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말에 소은지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질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알겠어.”소은지는 복잡
소은지가 처한 상황을 생각할수록 이유영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하지만 소은지는 언제나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었고 일 처리 방식도 정확하고 단호했다.이유영은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의 얽힌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말로도 엔데스 명우가 그 자리에 오르는 걸 막으려는 소은지의 결심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결국 소은지가 파리로 돌아가려는 건 단순히 현우 때문이 아니라 엔데스 명우 때문이었다.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유영은 모든 상황을 이해했고 그 때문에 더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은지야, 엔데스 명우는 정말 위험한 사람이야. 완전히 미친놈이라고!”과거, 설선비 사건 때는 소은지의 목숨을 위협했고 이후 설유나 사건으로 인해 둘은 완전히 원수가 되었다.그렇기에 이유영은 더욱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그 남자의 이름이 나오자, 소은지의 눈빛이 깊고 어두워졌다.소은지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후, 차분히 말했다.“유영아, 어떤 미움은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어떤 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거야.”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을 넘어선 사람마저 용서한다면 그다음엔 무엇이 남을까? 소은지는 그 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복수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은지야.”“엔데스 명우는 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소은지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또렷이 내뱉었다.소은지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그리고 이건 사실이었다.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 설유나 사건 모두 소은지에게 덮어씌웠고 한 번도 소은지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처음 설선비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소은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둘의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운명이란 걸.그 남자는 절대 소은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고 소은지 또한 그가 원하는 자리에 앉는 걸 막을 것이다.“하지만 현우가 이긴다고 해도, 너와 엔데스 명우의 일은 이대로 끝나지 않아.”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라면 소은지가 어디에 있든 어떻게든 찾아낼
위험할 거라는 그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신우 씨가 정씨 가문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이유영의 말끝이 흐려졌다.차는 이미 백산 별장에 도착해 있었고 이유영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하지만 곧장 들어가지 않고 등진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 순간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밀려왔다.강이한과 함께했던 너무나 찬란하고 아팠던 순간들 말이다.한지음 이후로 그녀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이었다.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무거움을 억눌렀다. 이 밤하늘 속 별빛조차 오늘은 감당하기 힘들었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 계세요.”“...”그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유영은 이미 저 멀리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작은 체구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지만 그녀의 등에는 증오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엔데스 신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이내 눈빛이 변했다.복잡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날카롭고 위험한 기운이었다.“민성아.”“네, 도련님.”“예전 강씨 집안에 있을 때 교양 있고 품위 있었다는 사실, 확실해?”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지금의 이유영은 '교양'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자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조사 결과대로라면 그녀의 내면에는 아마 맹수가 숨어 있는 거라고 신우는 생각했다.겉모습은 순진해 보였지만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조사 결과를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후회돼.”“뭐가요?”운전석의 윤민성이 놀라서 물었다.그가 생각한 셋째 도련님의 사전에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었다.그렇기에 후회된다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곧 엔데스 신우는 짧게 덧붙였다.“로한에게 서둘러 진행하라고 해. 난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놔줘요.”그러자 엔데스 신우가 조용히 말했다.“늦었어요. 제가 바래다줄게요.”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오늘 그의 차에 타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유영은 급히 대답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예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에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지금은 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이유영을 자연스럽게 차에 태웠다.“제가 말했잖아요...”“늦었어요. 여자 혼자 집에 가게 하는 건 신사의 예의가 아니죠.”“엔데스 가문에 신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이유영은 날카롭게 받아쳤다.엔데스 가문에 대한 반감은 소은지 때문이었을 것이다.지금 눈앞의 엔데스 신우까지 더해져 이유영의 마음속 엔데스 가문 남자들은 모두 막무가내로 보였다.특히 그녀가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다섯째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엔데스 예준의 강렬한 기운은 단번에 각인되었다.“제 차가 싫다면 택시를 불러드릴게요. 그럼 좀 안심이 되겠어요?”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는 듯 말했다.“...”그런 굴욕적인 제안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시력은 되찾은 그녀는 지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어디든 갈 수 있었다.결국 그녀는 남자의 차에 올랐다.차가 출발하자 남자는 조용히 서류를 꺼내 펼쳤다.좁은 공간에 정적이 흘렀고 백산 별장이 가까워질 즈음, 이유영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엔데스 신우가 옆자리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꼭 그 사람과 이혼해야 할까요?”“아직 마음이 있는 모양이네요.”그 말투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 있었다.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직 마음이 있냐는 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