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가 방 안으로 들어서서 조용히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저씨, 오늘은 몇 명이나 더 찾아올 것 같아요?”단순한 질문 같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탐색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남기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지금으로서는 일곱째 도련님 쪽에서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말뜻은 분명했다. 소은지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하라는 경고였다.소은지의 눈빛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가능하다면 이렇게 얽히고설킨 일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이 늪으로 끌어들인 건 도대체 누구였을까?엔데스 명우. 그 이름이 떠오르자 소은지의 머릿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다시 어른거렸다.송연미가 전해준 말을 떠올리며 소은지는 조용히 물었다.“남기 아저씨, 지금 제가 떠난다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송씨 가문의 결정을 떠올리자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현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뚜렷해졌다.남기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신 이후로 일곱째 도련님은 송연정 아가씨와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래요?”‘그렇다면 송연미가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소은지가 생각에 잠기자 남기가 말을 이었다.“일곱째 도련님은 언제나 눈치가 빠르십니다. 송씨 가문과 선을 그은 걸 보면 뭔가 그 속셈을 알아보신 듯합니다.”“...”“그리고 지금 사모님을 떠나게 하지 않는 이유는 사모님이 이 자리를 지켜주셔야 다른 사람들이 넘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물론입니다.”남기의 말에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우천시에 있었을 때,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며느리 자리를 노리는 가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송씨 가문이었다.예전엔 현우를 지지하는 송씨 가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오늘 송연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자 송씨 가문 회장님의 인품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그 사실을 인식하자 오히려 마
여진우의 목소리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묻지 말라고?’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소은지에 관한 것만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여진우는 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늘 그렇듯 그들은 단순한 적이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은지는 이제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야.”그 말에 이유영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소은지가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라고?’이미 어지러웠던 머릿속은 그 말 한마디에 더욱 복잡하게 뒤엉켰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오늘 송씨 가문 소식은 들었어?”“들었어.”이유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그 소식을 접한 뒤, 파리 전체가 마치 안개 속에 잠긴 듯 모든 게 흐릿하고 불길했다.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여진우의 품에 안긴 순간, 이유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에 짓눌렸다. 그의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느낀 이유영은 무언가 정말로 큰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긴 침묵이 흐른 후, 이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찾았어?”지금 그 도장과 문서는 엔데스 가문 사람들에게 극도로 민감한 존재였다.그 하나가 모든 걸 좌우할 수도 있었다.도장 이야기가 나오자 여진우는 그녀를 더 꼭 안아주며 낮게 말했다.“아무 일 없으면 곧 나올 거야.”그 말은 다짐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위로 같았다. 그 도장이 어떤 의미인지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잠시 뒤, 여진우는 자리를 떴고 정국진도 오늘 집에 없었다.백산 별장에는 임소미와 이유영, 그리고 조기 교육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월이만 남아 있었다.월이는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방 안을 돌아다녔고 그 모습은 한없이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예전엔 조기 교육 센터에 가기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즐거운 듯 아침마다 스
한 시간 뒤, 이유영은 풍산 그룹에 모습을 드러냈다.진영숙과 마주한 순간, 그녀의 눈빛엔 깊고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뜻밖에도 박연준은 진영숙을 파리에 남겨두었는데 아마도 그녀 스스로 떠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진영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강이한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손에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진영숙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네가 강이한의 딸을 낳았다니 믿기지 않는구나.”“...”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차디찼고 이어지는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왜요? 뱃속에서 죽이지 못해서 화가 났어요?”그 말에 진영숙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그녀의 눈에 스치는 감정은 슬픔이었다.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듯 쓸쓸함이 스며들었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눈빛엔 더 이상 분노가 없었다.남은 건 흩어진 슬픔뿐이었다.이유영의 싸늘한 태도 앞에서 진영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결국 고개를 돌리며 낮게 말했다.“우리 애 어디 있는지만 말해줘.”긴 시간이 흘렀지만 진영숙은 여전히 강이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이유영뿐이라 믿고 있었다.박연준이 사람들을 풀어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진영숙도 기약 없는 기다림만 계속됐다.박연준은 그녀와 함께 서주로 가자고 했지만 진영숙은 끝내 따라나서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모른다고 했잖아요.”“정말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진영숙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뭐라고요?”‘무엇을 의심하란 말이지?’“내가 들은 바로는 강이한이 너를 우천시로 데려갔던 건 염 선생을 찾기 위해서였대. 그땐 너도 몰랐겠지.”“...”“그런데 네 수술 시기에 맞춰 각막이 정확히 준비돼 있었어.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이 상황을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단 말인가?’그 말에 이유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그
하지만 만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한지음의 존재는 그녀에게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했고 연서라는 사람을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정말이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경고할게요. 제 딸에게 다시는 접근하지 마요. 그 아이는 강이한과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이유영!”진영숙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녀의 눈빛 속엔 끓어오르는 분노가 맺혀 있었다.하지만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뒤섞여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냉정할 수가 있어?”이유영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진영숙은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저토록 무심할 수 있을까?’냉정하다는 말을 들은 이유영의 입가엔 오히려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냉정하다고?’“지금 강이한이 살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또렷하게 힘주어 말했다.강이한이 서주에서 모두 철수한 것에 대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사실상 생사불명이었다.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유영은 이렇게 냉담하게 말할 수 있다니 진영숙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의 마음은 돌보다도 더 차갑고 무정했다.아무리 돌이라도 오랜 시간 함께 있었다면 어느 정도는 온기가 스몄을 텐데 이유영은 아니었다.강이한이 생사불명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한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냉정하다고요?”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진영숙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녀의 두 눈엔 오로지 분노만 가득했다.“그럼 아니야?”‘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어떻게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생사불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조차 이유영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
“강이한은 2년 동안 자신을 가둔 채 보냈어.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지금의 이유영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이토록 담담한 걸까?심장이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걸까?“네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이겨내기 시작했어.”그때를 떠올리자 진영숙은 한층 더 괴로워졌다. 그녀는 마치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다.강이한은 아직도 그 안에 있었고 이건 그가 내린 선택이었다.“강이한은 지금 혼자 그 벌을 받는 거야. 네가 겪었던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겪고 있어. 알기나 해?”이유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저 자기만 강이한 곁에서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렇게 뛰어난 강이한이 결국 이유영 때문에 그런 비극적인 끝을 맞았다. 그녀를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거나 다름없었다.이제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이유영은 그저 묵묵히 아무 미동도 없이 모든 것을 보고만 있었다.이 모든 사실을 이유영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진영숙은 생각했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진영숙이 이런 사실을 이유영에게 말한 이유는 그녀가 너무 차갑게만 강이한을 생각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강이한의 실종에 조금의 반응이라도 보여줬으면 했다.강이한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랐다.진영숙의 삶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그녀는 이유영만 편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친듯이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것이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모든 걸 다 말했음에도 이유영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건 그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대가였어요.”“...”순간 머릿속이 무언가에 부딪친 듯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정하고 차가운 말을 뱉는 사람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도대체 무엇이 두 사람의 10년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걸까? 사랑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은 대체 어디 갔을까?’이유영은 풍산 그룹에서 나오기 전, 진영숙에게 아이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진영숙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시윤이 방으로 들어섰다.“사모님.”“왜... 도대체 왜...”진영숙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감정은 이미 한계를 넘어 통제 불능 상태였다.시윤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에 대해 그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진영숙 곁에 있었던 이들은 예전에 진영숙과 이유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이 결국 인과응보라고 여겼다.“이유영에게 다 말했어. 하지만...”진영숙은 여기까지 말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강이한이 끝내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진영숙은 모두 이유영에게 털어놓았다.하지만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이유영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강이한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사람 같았다.“사모님, 작은 사모님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어쨌든...”시윤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가 결국 말을 멈추고 진영숙을 바라보았다.과거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진영숙도 이유영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이미 모든 대가를 치렀다.하지만 여전히 과거를 놓아주지 않는 이유영이 마냥 이해되지 않았다.‘아무리 미워도 지금 강이한이 사라진 마당에 그 분노를 조금은 억누를 수도 있지 않을까?’과거에 무슨 원한이 있었든 이렇게까지 무심할 일이란 말인가? 강이한은 서주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졌다.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도 여전히 냉정한 이유영의 태도에 진영숙은 마음이 아팠다.“대체 어떻게 해야 그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왜 박연준의 사람들조차
“배준석을 데려와.”배준석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안과 전문의였다. 어린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오른 인물이자 강이한과는 말할 것도 없이 깊은 친분이 있었다.“알겠습니다.”“그리고 수술할 때, 강이한이 용성시에 있었는지도 확인해.”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진영숙의 마음은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알겠습니다.”남기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진영숙은 소파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강이한이 사라지기 전, 이유영과 함께 우천시에 가서 진료를 보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곳의 염 선생이 이유영의 눈을 치료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그리고 그 누구도 지금 진영숙의 마음속 상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특히 지금 이유영의 눈이 치료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의심을 더욱 깊게 했다.어머니로서 그런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이유영이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하든 진영숙은 강이한이 이유영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강이한이라면 이유영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오늘, 이유영이 청하시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진영숙의 마음은 피가 더욱 아파졌다.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억울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그 아이는 정말로 강이한을 똑 닮았다....한편 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의 방문객들을 침착하게 맞이하고 있었다.하지만 예기치 않게 여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로 분위기가 얼어붙은 듯 긴장감이 맴돌았다.특히 여진우에게서 풍기는 것은 단순한 차가움 이상의 것이었다.소은지는 말없이 찌푸린 눈으로 여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조용히 소은지를 응시했다.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무슨 일이에요?”“정씨 가문이 엔데스 가문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는 건 소은지 씨도 알고 있죠?”“알아요.”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세상 모든 이가 아는 일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유영을 그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 태도는 무척이나 강경했다.“제가 너무 당돌했어요.”정씨 가문이 엔데스 가문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줬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우의 실종에 소은지의 마음은 여전히 심란했다.이유영이 의지할만한 곳은 정씨 가문이었다.이유영이 소은지를 도와준다는 것은 곧 정씨 가문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오늘 여진우가 소은지를 찾아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소은지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우리 여진우 씨의 소식 더 이상 기다리지 말아요. 그쪽 사람들은 이미 완전히 철수했어요.”남기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소은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점점 더 깊어졌다.“이 일, 단순한 일이 아니에요.”처음에는 분명히 여진우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빠져나간 상태였다.‘혹시 그가 무언가를 눈치챘던 걸까?’소은지도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여진우는 막 차에 오르고 있었다. 차가 출발하려던 찰나, 소은지가 급히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브레이크가 작동하고 남자의 눈에는 차가운 기운이 번졌다.소은지는 차 문 앞까지 다가가서 말했다.“일곱째 사모님, 이러면 위험한 거 몰라요?”이런 행동은 단순히 무모한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일이었다.소은지는 창백한 얼굴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도대체 뭘 알아내신 거죠?”‘금유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정말로 무언가를 알아챘던 걸까?’그는 소은지에게 일곱째 사모님의 역할을 잘하라던 말은 조금 전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기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여진우는 묵직한 눈빛으로 소은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깊은 생각과 차가운 확신이 서려 있었다.“지금 소은지 씨는 잘하고 있습니다.”그 말은 곧 현우의 소식을 숨긴 일에 대한 지지였다.“여진우 씨.”그녀는 여진우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
진영숙에 관해서 정국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조금이라도 이성적인 사람이었다면 오늘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품위를 지켜야 할 이유도 없었다.악인은 악하게 다스려야 했다. 진영숙에게야말로 딱 맞는 말이었다.“그러니까 박연준과 이혼해.”정국진은 이 한마디만을 반복했다.지금 정씨 가문 입장에서 보면 이유영과 박연준의 결혼이 이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그림이었다.하지만 그는 이유영이 두 남자에 관해 이미 증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강이한이 눈을 잃은 이유를 아무도 선뜻 이유영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유영은 그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설령 강이한이 자신을 위해 그토록 희생했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존재였다.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상황은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다.박연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정국진은 아버지로서 이유영이 복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이유영만이 아니라 정국진조차도 박연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알았어요.”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가서 쉬어.”“응.”큰 소동이 지나갔으니 이유영은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진영숙은 여전히 파리에 있다. 이미 시작된 일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그녀가 앞으로 어떤 소란을 일으킬지 아무도 몰랐다.그러니 이유영은 무엇보다 자신을 지켜야 했다.임소미는 이유영이 돌아온 것을 알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이유영은 샤워를 마친 뒤, 월이를 품에 안았다.강이한을 빼다 박은 옆모습을 보며 이유영의 가슴에는 잔잔한 아픔이 스며들었다.결국, 그녀는 잘못 생각했다.자기 몸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아이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너무나 복잡하고 얽히고설킨 문제였다.월이를 낳을 때만 해도 그녀는 아이의 삶에 진영숙 같은 인물들이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이유영은 밤새 잠들지 못했
특히 과거와 얽힌 일이었기에 누구도 함부로 나서기 어려웠다.“유영아.”“네?”“월이는 여기에서 아무도 데려갈 수 없어.”그 말 한마디에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뜨겁게 끓어올랐다.진영숙 앞에서 아무리 강해 보였던 그녀도 정국진의 이 짧은 한마디에 모든 긴장이 풀려 말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네.”가족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만약 지금 혼자였다면 진영숙의 횡포를 어떻게 감당했을지 이유영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랬다면 어땠을까?’그녀는 자신에게 수없이 질문했다.하지만 단 하나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진영숙이 다시 예전처럼 그녀를 억누르는 일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다른 일은 네 마음대로 처리해. 너무 걱정하지 말고.”이런 것이 바로 가족이었다. 짧은 말 한마디가 이유영에겐 그 어떤 말보다 큰 위로였다.부서지고 흔들리던 세상 속에서 그녀는 드디어 위안과 버팀목을 얻었다.“고마워요, 아빠.”“박연준과는 이혼해.”“...”그 말에 그녀는 순간 숨을 멈췄다.물론 그녀도 박연준과의 이혼을 원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너무나 복잡했다.엔데스 가문이 얽혀 있었기에 이유영은 자신의 이혼이 정씨 가문에 피해가 갈까 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정국진은 담담히 말했다.“증오보다 중요한 건, 가족이야.”정국진의 삶을 돌아보면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증오를 받아왔다.그때마다 그에게 복수로 응수했다면 지금의 정씨 가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가 이렇게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아버지...”정국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네가 그 사람을 증오하는 건 알아. 정말로 증오하는 사람이라면 네 마음속에서 이미 중요하지 않은 존재야. 그런데 왜 그런 사람 때문에 아직도 마음 쓰는 거야?”증오하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 그런데 그 증오가 마음을 잠식한다면 그건 결국 자신의 자유를 빼앗는 일이었다.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이유영은 강이한과
위험할 거라는 그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신우 씨가 정씨 가문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이유영의 말끝이 흐려졌다.차는 이미 백산 별장에 도착해 있었고 이유영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하지만 곧장 들어가지 않고 등진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 순간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밀려왔다.강이한과 함께했던 너무나 찬란하고 아팠던 순간들 말이다.한지음 이후로 그녀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이었다.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무거움을 억눌렀다. 이 밤하늘 속 별빛조차 오늘은 감당하기 힘들었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 계세요.”“...”그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유영은 이미 저 멀리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작은 체구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지만 그녀의 등에는 증오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엔데스 신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이내 눈빛이 변했다.복잡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날카롭고 위험한 기운이었다.“민성아.”“네, 도련님.”“예전 강씨 집안에 있을 때 교양 있고 품위 있었다는 사실, 확실해?”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지금의 이유영은 '교양'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자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조사 결과대로라면 그녀의 내면에는 아마 맹수가 숨어 있는 거라고 신우는 생각했다.겉모습은 순진해 보였지만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조사 결과를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후회돼.”“뭐가요?”운전석의 윤민성이 놀라서 물었다.그가 생각한 셋째 도련님의 사전에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었다.그렇기에 후회된다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곧 엔데스 신우는 짧게 덧붙였다.“로한에게 서둘러 진행하라고 해. 난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놔줘요.”그러자 엔데스 신우가 조용히 말했다.“늦었어요. 제가 바래다줄게요.”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오늘 그의 차에 타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유영은 급히 대답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예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에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지금은 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이유영을 자연스럽게 차에 태웠다.“제가 말했잖아요...”“늦었어요. 여자 혼자 집에 가게 하는 건 신사의 예의가 아니죠.”“엔데스 가문에 신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이유영은 날카롭게 받아쳤다.엔데스 가문에 대한 반감은 소은지 때문이었을 것이다.지금 눈앞의 엔데스 신우까지 더해져 이유영의 마음속 엔데스 가문 남자들은 모두 막무가내로 보였다.특히 그녀가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다섯째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엔데스 예준의 강렬한 기운은 단번에 각인되었다.“제 차가 싫다면 택시를 불러드릴게요. 그럼 좀 안심이 되겠어요?”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는 듯 말했다.“...”그런 굴욕적인 제안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시력은 되찾은 그녀는 지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어디든 갈 수 있었다.결국 그녀는 남자의 차에 올랐다.차가 출발하자 남자는 조용히 서류를 꺼내 펼쳤다.좁은 공간에 정적이 흘렀고 백산 별장이 가까워질 즈음, 이유영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엔데스 신우가 옆자리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꼭 그 사람과 이혼해야 할까요?”“아직 마음이 있는 모양이네요.”그 말투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 있었다.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직 마음이 있냐는 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