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투는 아주 담담하고 가벼웠다.소은지는 마치 속박에서 벗어난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꼈다.약점?“그래?”엔데스 명우는 살기 가득한 눈으로 소은지를 쳐다보면서 얘기했다.“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몰랐어?”이기적이다.소은지는 본인에 대한 평가를 그렇게 마쳤다.이기적이고 이익을 중시하는 잔인한 사람.그게 바로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에 대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이제 소은지는 그 점을 인정하려고 한다.“진심이야?”엔데스 명우가 한층 더 진지해진 말투로 물었다.“당연하지.”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엔데스 명우의 눈에는 살기가 넘실거렸다. 소은지는 오히려 짐을 덜었다는 듯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소은지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소은지를 무너뜨리려고 할수록 소은지는 반대로 움직일 것이다. 그런 소은지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그럼 파리를 떠나 봐.”말을 마친 엔데스 명우가 몸을 일으켰다.그 모습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넘실거렸다.엔데스 명우는 걸어 나가다가 입구에서 멈춰서서 소은지를 쳐다보았다.“그렇다면 넌 아마 영원히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할 거야.”말을 마친 엔데스 명우가 떠나갔다.소은지는 그 자리에 앉아서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눈을 감은 소은지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이성을 찾았다.소은지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많은 모순적인 생각이 오갔는지,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소은지는 그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저 왜 소은지를 버린 것인지, 왜 아버지를 떠난 것인지 궁금했다.하지만 그 진실을 위해서 소은지가 바쳐야 하는 대가가 그것이라면 소은지는...대가를 생각해 보면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아도 괜찮았다.이미 지나간 과거니 더 생각해 봐도 소용없다.그렇게 생각하면서 소은지는 떠나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핸드폰에 이유영의 번호가 떴다.전화를 받은 후 두 사람은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그래서 떠날 거야?”“응.”공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근래 소은지
“...”그렇게까지.왜?“할리 가문과 척을 지고 그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더욱 힘들 겁니다.”“제가 그때 뭘 겪었는지, 아저씨는 알잖아요?”그때... 엔데스 가문의 남자들이 반산월을 쥐잡듯이 잡으려고 했다.하지만 엔데스 현우가 사라졌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되었기에 소은지는 매일 엔데스 가문의 남자들을 상대 해왔다.하지만 그때... 엔데스 현우는 할리 연과 함께 있었다.소은지는 알고 있었다.그때의 송연미도 소은지를 찾아왔으니까.송연미는 본인이 엔데스 현우의 마음속 여자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냥 모든 것이 다 우스웠다.소은지나, 송연미나 아무것도 아니었다.엔데스 현우는 엔데스 가문에서 가장 속을 깊숙이 감추고 있던 남자였다.“난 그저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 힘들어도 상관없어요. 엔데스 현우도 쉽지 않을 테니까.”소은지는 몸의 물기를 닦아내면서 얘기했다. 엔데스 현우에게는 할리 가문이 정말 필요했다. 그래서 할리 가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꼭 붙잡고 있는 것이다.소은지가 없었더라면 엔데스 현우는 순조롭게 할리 가문과 결혼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은지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그 말을 들은 남기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여기서 떠나는 것이 최선의 선택입니다.”“아저씨, 아저씨도 알잖아요.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봐요. 내가 파리를 떠나서도 정말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있을까?모두가 알고 있다. 소은지가 파리를 떠나기만 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걸.그래서 파리에서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소은지는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모두 엔데스 현우가 만들어 놓은 함정이니까. 그러니 소은지는 엔데스 현우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소은지는 다른 사람의 협박이나 회유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아무도 소은지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어느 날 엔데스 명우가 왔다.엔데스 명우는 기사 하나를 소은지 앞에 던져주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소은지는 그 기사를 확인했다. 엔데스 현우가
일주일이 지났지만 엔데스 현우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할리 가문과의 일이 틀어져 남기를 포함한 엔데스 현우의 사람들도 소은지를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어느덧 하선희가 퇴원했다.엔데스 현우가 돌아오지 않던 그 일주일이 지난 뒤, 소은지를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은 바로 하선희였다.“엔데스 현우를 기다리고 있나요?”하선희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얬다.소은지는 입술을 말고 맞은편에 앉은 하선희를 쳐다보았다.그 눈빛에는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하선희는 레몬차를 한입 마시고 내려놓았다.몸이 허약했기에 커피는 입에도 못 대는 처지가 되었다.미소를 지은 하선희가 비웃듯이 얘기했다.“그 사람은 여기 오지 않아요. 할리 연과 함께 해외로 떠났거든요.”거기까지 얘기한 하선희는 잠시 입술을 닫았다.그리고 어두워지는 소은지의 표정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홀로 이 집에 있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하지만 지금이라도 괜찮아요. 두 사람이 돌아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요. 그러면 남은 생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줄게요.”“그동안 받은 수모로는 부족했나요?”소은지는 하선희를 보면서 차갑게 입을 열었다.“...”“애쓰지 마세요. 더 그래봤자 할리 가문만 우스워지니까요.”“당신...”가뜩이나 병약함 가득했던 하선희의 얼굴 위로 금이 가는 것 같았다.하선희는 그동안 원하는 것들을 손쉽게 이루며 살아왔을 것이다.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할리 가문이 원하는 것이라면 아무도 빼앗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소은지는...하선희는 이미 최선의 대책을 마련해주었다.하지만 소은지가 듣지 않으니 방법이 없었다.이렇게 고집이 센 사람은 처음이었다. 하선희에게 있어서 소은지는 정말 약점 하나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니 그 어떤 조건을 내걸어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하선희는 더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파리에서 할리 가문을 이렇게 웃음거리로 만든 사람은 처음이었다. 하선희는 그대로
그 말을 들은 소은지가 얘기했다.“그 사람은 내 목숨을 가져가려고 했어요. 파리를 떠난다면 나는...”소은지는 말을 더 잇지 않았다.소은지는 파리를 떠날 수 없다.여진우가 도와준다고 해도 말이다.엔데스 현우가 이미 그런 마음을 품었으니...그 순간 여진우가 소은지를 보면서 물었다.“엔데스 현우는 왜 당신한테 그러는 거예요?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요?”“...”원한이라니.그 말에 소은지는 영주의 일을 떠올렸다. 엔데스 현우가 엔데스 명우의 원한을 소은지에게 덮여 씌우고 소은지의 모든 퇴로를 막은 것을 말이다.그리고 실종되었을 때도, 사실은 소은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다른 일은 괜찮다고 쳐도 영주의 일은 영원히 용서할 수 없었다.엔데스 현우는 엔데스 명우가 얼마나 소은지를 증오할지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엔데스 현우는 아마 소은지가 파리를 떠나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일 것이다. 소은지만 사라지면 할리 가문과의 혼인이 더욱 순조로울 테니까.하지만 그럼에도 소은지의 모든 퇴로를 막아놓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때문에 소은지는 어디도 가지 못하고 파리에 묶여 있었다.여진우의 질문에 소은지가 미간을 찌푸리고 얘기했다.“그러게요. 나는 엔데스 현우와 아무 원한도 없어요.”“그게 아니라면... 여태껏 뭔가를 놓치고 있던 건 아니예요?”“...”뭘 놓치고 있었던 걸까?소은지는 원래 엔데스 현우와 모르는 사이였기에 아무 원한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엔데스 현우를 알게 된 것도 이유영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인데...소은지는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원한도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런데... 왜 엔데스 현우는 소은지를 못살게 구는 것일까?...소은지는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엔데스 현우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할리 연은 이미 떠나갔다.소은지는 차가운 눈빛으로 남기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언제 돌아오는 거죠?”“그런 걸 묻지 마세요.”“전화를 걸어요. 엔데스 현우를 만나야겠어요.”소은지가 딱딱한
사라졌다. 그렇다면 어디로 간 것일까?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에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만약 두 사람이 강이한에게서 도망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떠난 것이라면?“어찌 되었든, 일단 찾아내야 해요.”소은지가 진지한 말투로 얘기했다.여기까지 오는 길에, 소은지는 이유영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소용없었다.아무리 전화를 걸어보아도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폰이 꺼져있다는 말뿐이었다.그래서 소은지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지금 다들 급하게 찾고 있어요.”여진우도 진중한 말투로 얘기했다.소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무조건 이유영을 찾아내야 한다.“조심해요. 유영이는 계속 은지 씨를 걱정했으니까. 엔데스 가문은 그렇게 쉽게 볼 사람들이 아니에요.”“...”“특히 소은지 씨한테는 더욱더요.”여진우가 또박또박 얘기했다.“...”소은지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다만 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던 것이 소은지라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약간 아팠다.가슴이 답답해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언제부턴가 이유영과 소은지는 서로에게 가장 따뜻한 위안이 되어주었다. 두 사람은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큼은 아주 가까웠으니까 말이다.“알겠어요. 감사합니다.”여진우가 이렇게 얘기해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소은지는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자신이 마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이유영에 대해 더 얘기했다. 그러다가 반 시간 후, 소은지가 자리를 떠났다.몸을 돌리는 순간, 여진우가 얘기했다.“만약 정말 떠나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요.”이유영의 친구니까.소은지는 고개를 돌려 여진우를 쳐다보았다.여진우는 그저 이유영의 얼굴을 봐서 소은지를 도와주는 것이다. 다만 지금 이 상황에서 소은지를 돕기란 쉽지 않았다.소은지는 심호흡한 후 한숨을 푹 내쉬고 얘기했다.“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떠나지 않을 거예요. 진짜 도와줄 수 있다고 해도 말이에요.
해야 할 일이라고 얘기하는 엔데스 신우를 보면서 이유영은 마음이 설렜다.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엔데스 신우가 얘기했으니 이유영은 이제 고개를 끄덕이는 일만 남았다.“그럼 종수를 시켜 준비하도록 할게.”“우리 어디로 가요?”“그건 비밀이야.”엔데스 신우가 싱긋 웃었다. 이유영에게 끝까지 비밀로 할 모양 같았다.비밀이라니.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 이사이길 바라며... 이유영과 엔데스 신우는 이미 눈치챘다. 강이한이 있는 곳이라면 편안하게 지낼 수 없다는 것을.그래서 유일한 방법은 바로 강이한을 피해 멀리 이사 가는 것이다.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3일. 3일이 지났다.사건 하나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엔데스 저택에서 아침을 먹고 있던 소은지는 기사를 듣고 놀라서 숨이 턱 막혔다.쨍그랑.손에 들고 있던 컵이 그대로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그러니 소은지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 수 있었다.아무리 소은지라고 해도 이제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자리에서 일어난 소은지는 외투도 챙기지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남기가 할리 연을 데리고 들어올 때, 나가려는 소은지를 발견했다. 하지만 소은지는 할리 연을 무시한 채 지나갔다.“사모님, 할리 연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남기는 할리 가문의 할리 연에게 공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통보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인 것이다.“그렇다면 아저씨가 잘 대접해 드리면 되겠네요.”소은지는 안주인처럼 얘기한 뒤 남기와 할리 연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소은지의 등 뒤로 칼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꽂혔다. 평소였다면 소은지는 할리 연이 걸어오는 시비를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오늘은 안 된다.소은지는 다급하게 정씨 가문으로 왔다. 지금의 정씨 가문 가주는 여진우였다. 이유영이 여진우에게 전화를 한 뒤, 여진우는 소은지를 이것저것 도와주었다.이유영이 전화를 하던 그날, 여진우는 대외적으로 소은지의 신분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