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서부터 이번 생까지, 두 사람의 사이는 셀 수 있을까?‘예전?’이유영은 더욱 비웃으며 말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예전을 운운하는데?”이유영의 평온하고 비꼬는 웃음은 순간 강이한을 정신 차리게 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이유영한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마침 이때, 최익준의 차가 도착했다. 이유영은 차 소리를 듣고, 그리고 반짝이는 차 불빛을 보고는 강이한을 보며 웃었다. 더욱 진하고 비웃는 웃음이었다.이유영이 입을 열었다.“강이한, 내가 예전에 얼마나 악독한 사람이었든 간에 당신은 다 인정하고 그냥 넘겨버리는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그리고 이온유, 내가 그 애랑 가까이해서 그 애를 다치게 한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얼마든지 그 애를 데리고 파리를 떠나가면 되잖아!”“...”이 말을 들은 강이한은 머리가 띵 해나는 것만 같았다.이유영의 눈 밑은 평온함과 풍자함, 그리고는 막연함이었다, 이런 막연함은 전혀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것만 같았다.이유영이 이렇게 막연하다는 태도를 보이자 강이한의 마음은 유달리 당황했다.그는 입을 열어 뭐라고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해명?사실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생겼을 때 해명은 적지 않게 했었지만, 해명하는 중점이 틀렸었다. 지금...“유영아. 지음은 사실...”강이한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를 대답하는 건 쿵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이유영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차 문을 닫았다.강이한은 제자리에 선 채 찬바람만 맞았다.한참 동안,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이유영이 한지음과 이온유에 대한 저촉 심리가 얼마나 강렬한지 강이한은 보아낼 수 있었다.심지어 그의 곁에 이온유가 있으면 이유영이 있을 수 없고, 반대로 이유영이 있으면 이온유가 있을 수 없게 되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아무것도 모른다. 한지음이 그녀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지잉 핸드폰이 진동하였으며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이유영이 보내온 문자 메시지였다.그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이미 11시가 넘었다. 도우미는 나가 계셨고 이유영은 침대 옆의 울타리를 다 세웠다.이래야만 월이의 안전을 더 보장할 수 있었다.“엄마, 엄마.”꼬맹이는 헤헤 웃으면서 이유영의 몸 위로 바라 올랐는데 아주 신나 보였다.월이를 쳐다보는 이유영의 눈빛은 점점 더 자상해졌다.“우리 공주님!”꼬맹이는 이유영의 품에서 비비적거렸다. 아이의 몸은 아주 민첩한 것이 이유영의 품에서 구르는가 하면 또 그녀의 몸 위를 바라 올라가기도 하고 아니면 자신의 작은 얼굴로 이유영의 얼굴을 비비기도 했다.두 사람은 웃음꽃이 활짝 핀 상황에서 아주 화목하였다.이유영은 저도 모르게 이온유에게 부드럽게 대하는 강이한이 떠올랐다. 비록 그녀는 강이한에게 별 감정이 남아있진 않았지만, 그가 이온유를 대하는 모습을 생각하자 마음이 다소 조금 불편하였다.그건 아마도... 이유영이 강이한의 세계에서 항상 뒷전에 놓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저도 모르게 월이와 이온유를 비교하게 되었다.‘만약 이온유와 월이에게 동시에 사고가 일어난다면 그때 강이한은... 아마도 예전에 나랑 한지음을 대했던 것처럼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겠지?’이유영이 보기엔 강이한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지금 그가 이온유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면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엄마. 우유.”꼬맹이는 이유영의 품에서 비비적거리며 웅얼거리는 것이 딱 봐도 졸려 보였다.이유영은 월이를 제대로 안고는 흐리멍덩해진 꼬맹이의 눈을 보며 그저 마음이 떨리는 것만 같았다.‘우리 꼬맹이 왜 점점 갈수록... 닮아가지? 강이한과 월이를 최대한 못 마주치게 해야겠어.’딸은 갈수록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말이 있으니, 이유영은 지금 강이한이 파리에 있는 것 자체가 큰 복병이라고 생각했다.월이에게 우유를 풀어주자, 꼬맹이는 우유병을 안고 한쪽으로 돌아누웠다. 엉덩이가 이유영을 향한 채 조용하게 있는 월이의 모습은 정말 귀엽기 그지없었다.이유영이 작은 담요를 잡아당겨 월이에게 덮어주었더
차 안에서 이유영은 월이를 다시 안으려고 했지만, 순간 아이의 몸 상태가 엄청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월이는 잠시 경련을 하더니 어두운 불빛 아래서도 보일 정도로 얼굴에 빨간 점들이 돋아났다.이건 체온이 너무 높아서 생긴 것 같았다.이유영은 놀란 나머지 냉기를 한숨 들이켰다.“월아...”여진우는 월이를 감싼 담요를 휙 떼어내더니 월이의 몸에 있던 옷들을 다 벗겼다. 이것을 본 이유영은 마음이 싸늘했다.“너...”“아이 지금 체온이 너무 높아.”이렇게 열이 계속 났다가는 정말 큰일 날지도 몰랐다. 아직 채 2살도 안 되는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이유영은 가슴이 턱턱 막혔다.금방 병원에 도착했다.의료진들은 이미 대기하고 있었으며 여진우를 본 순간 아주 공손하게 앞으로 다가왔다.“여진우 도련님!”그러고는 얼른 아이를 넘겨받고는 응급실로 들어갔다.이유영은 그들이 월이를 데려가는 것을 보고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여진우가 입을 열고 물었다.“집에 있었을 때 체온이 얼마였어?” “39.5도!”“왜 의사를 안 불렀어?”열이 났을 때 진작에 의사를 불러야 했다.이렇게까지 열이 높게 나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갑자기 열이 난 거야.”이유영은 온밤 별로 잠들지 않았다. 월이의 이마가 뜨겁다는 것을 느낀 순간, 이유영은 바로 체온을 쟀다.하지만 그때는 이미 체온이 높았으며 이유영은 전혀 반응할 겨를이 없었다.이유영은 응급실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눈을 한시도 떼지 못했다. 심장은... 이미 목구멍까지 차올랐다.이유영은 두려웠다!“진우야.”“난 네 오빠야.”“...”그 순간 이유영은 여진우의 말투가 유달리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엄숙하고 심각하게 압박 하에 이유영은 가족의 든든함을 절실하게 느꼈다.그녀는 기억이 있고부터 평생 줄곧 외동딸이었으며 주변에는 형제자매가 없었다.그 뒤에 갑자기 한지음이 나타났지만, 이유영은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한지음한테서 제일 많이 받은 건 보복이었지 추호의 가족애를 느끼지
현장 분위기는 순간 터져버렸다.“진우야, 넌 먼저 아이랑 가...”여진우가 주먹을 꾹 쥐고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이유영이 입을 열었다.두 남자의 눈빛이 서로 마주친 순간, 마치 두 무리의 늑대가 서로 맞붙은 것처럼 살벌했다.“가라니까.”여진우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을 본 이유영은 매섭게 그에게 경고의 눈길을 보냈다.결국 여진우는 강이한을 한눈 째려보고는 자리를 떴다.월이는 이미 병실로 옮겨졌다.주차를 마치고 들어온 엄수현은 의사가 밀고 가는 아이를 힐끔 보았다... 비록 한 눈이었지만 그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앞에 있는 광경을 보았다. 특히 그의 앞으로 지나가는 여진우는 몸에서 차가운 기운을 가득 내뿜고 있었다.비록 그가 기운을 단속하긴 했지만, 서주에서 여진우를 만난 적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가 차가운 기운을 얼마나 많이 감추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여진우가 떠난 뒤, 강이한은 이유영을 소독수 냄새가 가득한 벽에다 대고 세게 누르고는 붉은 두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전화는 왜 안 받았어?”“지금 당신은 내가 매정하다고 탓하는 거야? 그 애가 아파서 엄마를 찾는데 내가 전화를 안 받았다고 지금 내게 뭐라고 하는 거야?”이유영은 비꼬며 강이한에게 되물었다.“...”순간 강이한의 두 눈은 분노 때문에 더욱 붉어졌다.강이한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유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그 애를 위해 나한테 전화를 얼마나 많이 한 거야? 아니면 당신은 여태껏 내가 어떤 태도인지 모르겠어?”‘알아볼 때도 됐잖아. 이젠 알아봐야지!’“유영아, 넌 온유한테 그렇게 대하면 안 돼!”이런 똑같은 말을 강이한은 정말 여러 번이고 말했다. 하지만 도대체 이유영이 왜 이온유를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 그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한지음에 관한 얘기가 나오기만 하면 뒤에 얼마나 큰 이야기가 엮여있는지를 막론하고 화제는 단 한 번도 계속 이어진 적이 없었다.“강이한, 내 딸도 열이 39.5도로 났어.
“얘기하세요.”이유영은 아주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마치 엄수현이 무슨 얘기를 할 것을 알아차린 것만 같았다.오늘 도원산에서 떠날 때, 이유영은 강이한 주변의 사람들이 원념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마음이 참 독해... 고작 어린애인데 아이한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그래서 지금 엄수현이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이유영이 도대체 어떤 여자인지를 얘기하려고 하는 줄로 생각했다.엄수현은 이유영을 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이유영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내내 두 사람은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졌다.이유영이 엘리베이터에서 나가려는 순간, 엄수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사모님, 그 아이가 왜 도련님을 닮았죠?”엄수현의 말이 끝나자, 이유영은 머리가 팡 터지는 것만 같았다.이유영은 고개를 돌려 충격이 가득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두 눈으로 엄수현을 바라보았다.‘이 사람... 월이를 딱 한 눈 보았는데 월이와 강이한이 닮았다는 것을 보아낸 거야?’이유영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이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 어떤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저녁에 침대 위에서 이유영은 월이의 변화를 보면서 강이한이 파리에 있는 한 시종 큰 복병이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이렇게나 빨리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강이한 주변의 엄수현이 이렇게 쉽게 눈치를 챘다니 그녀는 정말 믿기지 않았다.이유영은 크게 숨을 몇 모금 들이켰지만, 여전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사모님, 만약 도련님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사모님께 더...”“더 잘해 줄 거라고요?”엄수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이유영의 호흡은 조금 가빠졌다.‘강이한의 신변에서 지내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냐? 강이한이 나한테 잘해 줄 거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이유영은 연달아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그제야
병실 안에서 여진우는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든 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열이 난 아이는 쉽게 졸려 했기에 집에서 병원으로 오는 길 내내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다.여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꼬맹이의 작은 코와 입이 다 그 사람이랑 많이 닮았어!”이유영은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조금 전 엄수현이 자기를 막아선 것이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만약 그녀를 막지 않고 바로 강이한에게 사실을 얘기했으면 아마 전 파리가 떠들썩해졌을 것이었다.강이한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이렇게 큰 난리를 피우는 사람인데 만약 아이의 정체를 알아버리면 일이 어떤 지경까지 이르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그 얘기는 그만해줘.”“강이한이 아까 서주 쪽에 전화했대.”“또 너를 건드렸어?”이유영은 골치가 아파 나는 것만 같았다.강이한의 성격은 줄곧 이랬다. 일의 시비곡직을 따지지도 않고,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매번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놨다.예전에 결혼하기 전에 이유영은 강이한의 성격이 이런 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인간은 왜 성격이 점점 더 지랄 같아지는 거 같지!?’“강이한이 너에게 나를 정씨 저택에서 내보내라고 제기했어?”“어.”확실히 그 말을 했었다.하지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이 미친 사람같이 느껴졌다. 이혼까지 한 마당에 이런 짓거리까지 만들어 내다니 이유영은 어이가 없었다.“연회는 3일 뒤에 진행될 거야.”“그럼, 네 쪽에는...”“넌 서재욱 씨 쪽이나 신경 써.”3일 뒤, 연회에서 여진우와 이유영의 신분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그럼, 강이한은 자연스럽게 더 이상 여진우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었다.하지만 서재욱 쪽은?강이한이 이유영에게 하는 짓거리를 보면, 서재욱과 이유영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안 이상, 강이한은 절대 서재욱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 뻔했다.그 사람과는 얘기가 전혀 안 통하는 것이 문제였다. 자격이 없다고,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말해도 그는 전혀 듣지를 않았다. 강이한은 그저
월이의 머리에 꽂혀있는 주삿바늘을 보더니 임소미는 마음이 정말 아팠다.이유영이 입을 열었다.“제가 이렇게 잘 보살피고 있었잖아요!”“그래도 병원에 들어갈 때 나한테는 말해 줬어야지.”임소미는 화병 나 죽을 것만 같았다.“저랑 진우가 다 있었는데요.”“진우라니. 넌 오빠라고 불러야지!”“...”만약 예전 같았으면 이유영은 꼭 말대꾸를 한마디 했었을 텐데 오늘은 특히 월이의 상황 때문에 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가 있으니 사실 좋은 것도 있네.’...이유영의 상황과 달리 강이한 쪽 이온유의 상태는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날이 밝은 뒤 이온유는 퇴원했다. 병원의 로비에서 나갈 때, 여진우는 냉기를 한가득 내뿜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강이한의 차가운 두 눈동자랑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은 대 아침부터 눈빛으로 스파크를 일으키곤 하였다.“아빠.”잠에서 깬 이온유는 강이한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강이한은 정신을 차리고 안절부절못하며 품속에 있는 이온유를 쳐다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가자. 집으로 가자.”“네.”이온유도 여진우의 적의를 선명하게 느꼈으며 조금 불편했다.아이들은 그런 것이었다. 일단 불편함을 느끼면 무조건 피하는 것을 선택하곤 하였다.차 안에서, 강이한은 이온유를 잘 안착시키고는 저린 미간을 주물럭 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만난 여진우의 쌀쌀한 눈빛이 계속 떠올랐다.그토록 낯익어 보였으며 그의 얼굴 윤곽이...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엄수현 씨.”“네, 도련님.”“조금 전 여진우를 봤을 때 무슨 느낌이었어요?”‘여진우?엄수현은 눈썰미가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그는 어젯밤에 월이와 강이한이 닮았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도 당연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수 있었다.하지만 그동안, 상류사회에서 떠도는 소문들은 무시할 수 없었다.“제가 느끼기에는 여진우 도련님이랑 사모님이 무척 닮았습니다!”‘그래, 무척 닮았어. 조금 닮은 정도가 아니야.’그저 남자와
3일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전날, 이유영은 맞춤 예복을 여러 벌 받았으며 게다가 자기네 회사 크리스탈 가든에서 보낸 브랜드들도 있었다.메이크업 선생님도 다 안배해 놓았다.스케일이 이렇게 큰 것을 보면서 이유영은 골치가 아팠다.“엄마,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요.”“왜 필요가 없어? 내일 너는 진우랑 같이 오프닝 댄스를 춰야 해. 우리 공주님은 당연히 제일 이쁘고 제일 아름다워야지.”임소미는 강조하면서 말했다.“그래도 이건 너무...”“...”“제 물건이 너무 많아서 넘칠 지경이에요.”이유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물건은 정말 넘칠 정도로 많았다.정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 그 당시 외숙모인 임소미는 정말 온 천하에서 제일 좋은 것들을 다 이유영에게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자기와 정유라 사이의 차별에 대해 이유영은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알아차렸다.게다가 이 2년 동안, 정국진은 줄곧 여진우를 찾고 있었기에 로열 글로벌이라는 큰 짐은 자연스럽게 이유영의 어깨에 놓인 것이었다.지금 여진우도 돌아왔으니, 정국진의 정신도 돌아온 셈이었으며 이유영도 한결 편안해졌다.“유영아.”임소미는 이유영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면서 부드럽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요?”“너무 좋다.”임소미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그녀의 눈시울은 살짝 붉어졌다.지금 이런 삶은 진실을 알고 난 뒤 임소미가 꿈에도 그리던 장면이었다. 지금은 드디어 이뤄졌다... 딸과 아들이 다 돌아왔다.자고로 사람은 평소에도 선을 행하고 덕을 쌓아야 한다더니, 진실을 알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다 그녀의 품속으로 돌아왔다.이 2년 동안, 임소미는 자선을 엄청나게 중요시하게 여겼다.하나님의 연민에 감사드렸다.“엄마.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예요? 나랑 진우가 엄마 곁에 있잖아요.”“바보야. 진우는 네 오빠야.”임소미는 이유영의 호칭을 바로잡았다.이유영도 아마 혼자로 지내던 것이 습관 되어서인지 갑자기
위험할 거라는 그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신우 씨가 정씨 가문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이유영의 말끝이 흐려졌다.차는 이미 백산 별장에 도착해 있었고 이유영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하지만 곧장 들어가지 않고 등진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 순간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밀려왔다.강이한과 함께했던 너무나 찬란하고 아팠던 순간들 말이다.한지음 이후로 그녀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이었다.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무거움을 억눌렀다. 이 밤하늘 속 별빛조차 오늘은 감당하기 힘들었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 계세요.”“...”그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유영은 이미 저 멀리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작은 체구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지만 그녀의 등에는 증오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엔데스 신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이내 눈빛이 변했다.복잡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날카롭고 위험한 기운이었다.“민성아.”“네, 도련님.”“예전 강씨 집안에 있을 때 교양 있고 품위 있었다는 사실, 확실해?”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지금의 이유영은 '교양'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자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조사 결과대로라면 그녀의 내면에는 아마 맹수가 숨어 있는 거라고 신우는 생각했다.겉모습은 순진해 보였지만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조사 결과를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후회돼.”“뭐가요?”운전석의 윤민성이 놀라서 물었다.그가 생각한 셋째 도련님의 사전에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었다.그렇기에 후회된다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곧 엔데스 신우는 짧게 덧붙였다.“로한에게 서둘러 진행하라고 해. 난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놔줘요.”그러자 엔데스 신우가 조용히 말했다.“늦었어요. 제가 바래다줄게요.”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오늘 그의 차에 타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유영은 급히 대답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예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에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지금은 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이유영을 자연스럽게 차에 태웠다.“제가 말했잖아요...”“늦었어요. 여자 혼자 집에 가게 하는 건 신사의 예의가 아니죠.”“엔데스 가문에 신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이유영은 날카롭게 받아쳤다.엔데스 가문에 대한 반감은 소은지 때문이었을 것이다.지금 눈앞의 엔데스 신우까지 더해져 이유영의 마음속 엔데스 가문 남자들은 모두 막무가내로 보였다.특히 그녀가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다섯째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엔데스 예준의 강렬한 기운은 단번에 각인되었다.“제 차가 싫다면 택시를 불러드릴게요. 그럼 좀 안심이 되겠어요?”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는 듯 말했다.“...”그런 굴욕적인 제안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시력은 되찾은 그녀는 지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어디든 갈 수 있었다.결국 그녀는 남자의 차에 올랐다.차가 출발하자 남자는 조용히 서류를 꺼내 펼쳤다.좁은 공간에 정적이 흘렀고 백산 별장이 가까워질 즈음, 이유영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엔데스 신우가 옆자리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꼭 그 사람과 이혼해야 할까요?”“아직 마음이 있는 모양이네요.”그 말투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 있었다.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직 마음이 있냐는 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