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강이한과 그의 품에 안긴 한지음을 바라보았다. 한지음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품에 깊숙이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강이한도 당황했는지 자신의 손과 유영을 번갈아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유영이 실망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게 대체 몇 번째야?”남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은 점점 막나가는구나.”“하!”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내를 막대하던 그의 아버지가 떠올랐다.강씨 가문에서 여자의 지위란 가장 하찮은 것이었다.남자 앞에서 여자는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강이한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둘의 의견이 맞지 않을 때는 강이한도 가장 권위적인 위치에서 모든 걸 그녀의 탓으로 돌렸다.”강이한, 당신 정말 역겨워.”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병원을 나섰다.이게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남자가 한지음 때문에 그녀에게 손찌검한 횟수.실망?아마 이 관계에서 가장 큰 실망감을 느낀 사람은 유영 본인이었다.“거기 서!”강이한이 뒤에서 그녀를 부르며 쫓아가려고 할 때, 한지음이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유영은 무슨 정신으로 병원을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찬 밤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얇은 옷깃을 파고들었다.뼛속까지 시린 이 느낌보다 마음이 더 추웠다.추위는 그에게 느낀 배신감과 실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은지야.”언제 전화를 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핸드폰은 소은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유영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수화기 너머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어디야?”“나 지금 병원.”“다쳤어?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지금 갈게!”말을 마친 소은지는 어디 병원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전화가 끊어진 순간 유영은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그녀는 억지로 참았다.하늘도 그녀의 조우에 슬픔을 느낀 건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병
소은지는 빗속에 아내를 홀로 버려두고 외간여자를 만나러 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었다.유영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은지야….”“이거 놔. 내가 그 여자 찢어버릴 거야.”“그럴 필요 없어.”“유영아, 넌 왜 이렇게 나약해빠졌어?”‘내가 나약하다고? 그래. 전생에는 그랬었지….’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과 똑 같은 사람이 되기는 싫었다.“의사 좀 만나서 검진을 받아야겠어.”“너 다쳤어?”“응.”유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은지는 또 한번 분노에 치를 떨었다.하지만 유영은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은 한지음을 병실에 안치한 뒤, 유영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핸드폰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밖으로 나와보니 소은지가 온몸이 홀딱 젖은 유영을 부축해서 차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그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하지만 병실에서 보였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눈빛은 다시 차가워졌다.소은지는 유영을 데리고 다른 병원으로 가서 검진을 받았다.아까는 밖이라서 제대로 안 보였는데 유영의 얼굴에는 시뻘건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그 망할 년 때문에 널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유영은 눈을 감았다.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이게 몇 번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데려다줄게.”처치가 끝나자 소은지가 말했다.유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무슨 일인데?”“강이한을 패배하게 만들 거야.”유영의 두 눈에는 증오가 가득했다.소은지는 그런 친구를 바라보며 섬뜩함을 느꼈다.친구가 이렇게까지 격렬한 감정을 내보인 건 흔치 않았다.얼마나 미웠으면 저런 표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고 있을까?병원을 나온 유영은 커피숍까지 데려다준다는 소은지의 제안을 거절했다.시간도 늦었고 소은지도 휴식이 필요할 터.평소였다면 절대 이 시간에 전화를 하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다.어쩌면 그 순간에 그녀도 기댈 곳이 필요했을 수도 있었다.커피숍으로 돌아오자 조민정과 팀원들
날이 밝고 작업을 끝낸 순간, 모두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보다 후련한 기색이 대부분이었다.일부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대로 뻗어버렸다.“정말 이대로 괜찮을까요?”조민정이 확신 없는 말투로 물었다.물론 이 거래가 실패한다고 다른 일을 못 받아올 건 아니지만 며칠을 밤새워 내놓은 설계도안이 퇴짜를 맞으면 꽤 뼈아픈 실패가 될 것이다.유영은 확신에 찬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통과할 거예요.”“그래요.”조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트북을 닫고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며칠 밤을 새우다 보니 이제 카페인에 대한 면역이 생겨버려서 커피를 마셔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다.유영은 그 길로 강성건설을 찾아갔다.안내데스크 직원은 그녀의 부은 뺨을 보고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다.“괜찮으세요?”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사실 비를 맞아서 그런지 온몸에서 열감이 느껴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여직원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아직 좀 이른 시간인데 나가서 뭐라도 드시고 오시지 그러세요.”유영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통과를 해야 밥이 목안으로 넘어갈 것 같았다.여직원이 그녀에게 감기약 하나를 건넸다.“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약부터 드세요..”“감사해요.”유영은 이름도 모르는 직원의 친절에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다시 유심히 살폈다. 생판 모르는 남도 이렇게나 친절을 베푸는데 그녀와 강이한은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걸까?그 순간, 남자와 이혼해야겠다는 생각은 더 확실해졌다. 어젯밤만 떠올리면 머리에 피가 솟구쳤다.전에도 이럴 거라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한지음의 장님 행세가 연기였다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순간 받은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박연준이 회사에 도착했을 때, 유영은 로비 소파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안내데스크 직원이 그를 발견하고 공손히 인사했다.“대표님, 나오셨어요?”“어떻게 된 거지?”남자가 싸늘한 눈빛으로 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박연준은 철두철미하고 강박증이 심한
‘기분이 안 좋을 때 더 까다로워질 텐데….’유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서류를 펼쳤다.“요청하신 대로 수정한 방안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세요.”박연준은 서류를 펼치고 대충 훑어보았다.그 모습을 보고 있는 유영은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뭔가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남자에게서 풍기는 강렬한 카리스마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퇴짜를 맞으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유영은 혼란스러웠다.“감기 걸렸어요?”갑작스러운 질문에 유영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네?”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잠시 당황한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찬바람을 맞았더니 그런 것 같네요.”남자는 말없이 다시 시선을 서류로 돌리고 한 장씩 뒤로 넘겼다.오기 전까지 자신만만했던 유영이었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불길한 예감부터 들었다.박연준에게 퇴짜를 맞게 된다면 아마 입찰 때 심사도 통과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이대로 진행하죠. 잘했어요.”유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이대로 통과한 건가?“토… 통과인가요?”“또 수정하고 싶어요?”“아… 아니요!”더 이상의 수정은 사양하고 있었다.이미 며칠 사이에 십 년은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남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아까까지 표정이 어둡던 남자가 웃고 있으니 유영은 더 불안했다.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큰 키 때문에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가요.”“어디를요?”어딜 같이 간다는 거지?“병원에 가요.”남자가 먼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유영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같이 일을 했지만 아직 남자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그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그가 강성건설 대표라는 것과 성이 박씨라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그런데 이름도 모르는 거래 업체 대표가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준다고?“상태가 많이 심각해 보이네요. 주사라도 맞지 않으면 오후에 있을 최종 심사에 참여하지 못할 것 같은데 이런 기회를
유영은 차에 오른 뒤로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병원에 거의 도착할 때쯤에는 온몸에 한기가 돌면서 떨렸다.옷을 두껍게 입었는데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면 전형적인 고열 증상이었다.“추워요?”귓가에 남자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영은 피곤한 듯, 눈을 잠깐 뜨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당장이라도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남자가 겉옷을 벗어 그녀의 몸에 덮어주고 있었다.유영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잠들어 버렸다.병원에 도착한 뒤, 문 비서는 초조한 기색으로 박연준의 눈치를 살폈다.“대표님, 제가 할게요.”박연준이 소매를 걷어올리고 유영을 안으려 하자 문 비서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남자는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의 비서를 힐끗 바라보았다.문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요즘 이유영 씨에 대한 여론이 뜨겁습니다. 오해가 생길만한 상황은 피하시는 게….”“문 비서가 안고 들어가면 이상한 소문이 안 생길 것 같아?”문 비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사실 유영이 지금 누구와 함께 있든 그건 걸어다니는 화제거리였다.물론 상대가 박연준이라면 오히려 그의 눈치를 봐서 기사를 안 낼 수도 있었다.청하시에서 박연준은 저승사자로 유명했다. 강이한이 대외적으로 부드러운 이미지라면 박연준은 냉철하고 강직한 이미지였다.유영은 고열에 이미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아마 박연준을 찾아왔을 때도 억지로 버텼던 것 같았다.박연준은 그녀를 안고 응급실로 들어갔다.마침 병원을 나오던 강이한은 그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박연준의 품에 안긴 여자를 노려보았다.반면 박연준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박연준!”강이한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그는 현재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해외의 로열 글로벌 회장과 잠잠하나 싶더니 이번에는 강성의 박연준이 나타났다.대체 아내의 주변에는 왜 이렇게 남자가 꼬이는 걸까?한참이 지난 뒤, 유영은 추위에 잠
그녀의 무덤덤한 반응은 남자의 분노만 더 자극했다.강이한의 준수한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이유영, 당신 이렇게 방탕한 여자였어? 해외에서 돌아온지 얼마나 됐다고 또 남자를 후리고 다니는 거야? 박연준은 대체 이런 여자를 뭐가 좋다고 따라다니는지 몰라!”“그건 잘 모르겠고 내가 좋나 보지.”유영은 이제 그에게 해명하는 것조차 귀찮았다.그런 태도가 강이한에게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졌다.사실 유영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병실에서 눈을 뜨고 옆에 강이한이 있다는 걸 발견했을 때, 전생에 끌려가듯 수술대에 오르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고 두 사람은 누구도 지지 않으려고 서로를 노려보았다.“참 할 말 없게 만드는구나, 당신은! 이러면서 이혼할 때 재산분할까지 해달라고?”“잘못을 해도 당신이 먼저 했는데 위자료를 요구하는 건 당연하잖아?”유영이 당연하다는 듯이 반문했다.결국 분을 못 이긴 강이한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유영은 침대에 머리를 기댄 채, 씁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수액이 끝난 뒤, 유영은 조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조민정은 시간이 좀 남았다면서 같이 밥을 먹고 강성건설로 가서 박연준과 만나기로 했다.오후에는 박연준과 함께 최종 입찰 심사 현장으로 가기로 했다.차에 오른 유영은 바깥을 바라보며 조민정에게 물었다.“밥은 어디서 먹어요?”어쩐지 점점 더 시내와 멀어지는 느낌이었다.조민정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순정동 별장으로 갈 거예요. 바로 거주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뒀거든요.”“순정동이요?”유영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순정동은 청하에서도 유명한 부자 동네였다. 5백만 평의 넓은 부지에 별장 단지 세 곳이 전부였고 거기 사는 입주민은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인물들이라고 들었다.그런데 순정동으로 간다고?조민정이 말했다.“회장님 지시예요. 소은지 씨네 집에 계속 있으면 이상한 사람들 때문에 서로 안 좋은 영향만 받으니까 순정동에 거처를 마련하라
순정동.전에 말로만 들었을 때는 막연하게 호화 단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직접 와보니 왜 그렇게 많은 부자들이 이곳으로 오길 희망하는지 알 것 같았다.별장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유영이 보기에 이곳은 단단한 성채에 가까웠다.여왕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은 상상해 봤을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외삼촌은 언제 여길 구매했대요?”유영이 물었다.그때는 청하 시민 중에 구매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외에 거주 중인 외삼촌이 이곳을 소유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회장님은 세계 각지의 가치 있는 부동산에 투자를 많이 하셨습니다. 사실 잊고 있었던 곳인데 유영 씨가 거주할 곳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집사가 생각해 낸 곳이 이곳이에요.”유영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조민정을 바라보았다.“고용인들도 어제 모집했어요. 급하게 치우느라 미흡한 점도 많을 텐데 그건 이해해 주세요.”부자들은 다 이럴까?이렇게 좋은 땅과 집을 소유했으면서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니.유영은 저절로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여기 오기 전까지 외삼촌한테 이렇게 귀한 선물을 받아도 되나 고민했던 그녀였는데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 걱정할 것 하나 없었다. 기억도 못했던 곳을 갑자기 내어주었다는 건 그만큼 중요도가 떨어진다는 얘기였다.“미흡한 점이라뇨. 나한테는 아주 감지덕지죠.”유영이 말했다.홍문동으로 돌아가지만 않는다면 어디든 좋았다.식사가 끝난 뒤, 유영은 옷을 갈아입으러 옷 방으로 들어갔다.옷장을 열자 신세계가 펼쳐졌다. 물론 강이한도 그녀에게 사치품을 많이 설명했지만 이곳에는 세계 각지의 명품을 다 모아놓은 백화점을 떠올리게 하는 스케일이었다.“유영 씨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시즌 상품마다 한 벌씩 구매했대요. 앞으로 좋아하는 스타일 있으면 꼭 말해달라고 하시더군요.”“다 좋아요!”유영이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싫을 리가 없었다.예쁜 옷을 싫어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외숙모랑 유라는 소박하게 입고 다녔던 거 같은데 외삼촌이 이번에 신경을 많이 썼네요.”유영이 감개무량한
정유라가 갑자기 자원봉사를 간다고 아프리카행을 선포한 뒤, 외삼촌은 모든 애정을 유영에게 쏟아부었다. 그녀를 데리고 각종 중요한 자리에 참석했고 온갖 보석과 액세서리를 사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유영은 세강 일가에게 아직은 자신과 정국진의 관계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이런 명품 차를 끌고 다니는 걸 강이한이 안다면 미심쩍게 생각하고 조사에 착수할 게 분명했다.물론, 강이한은 이미 정국진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유영은 모르고 있었다.그는 오해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10년을 동고동락한 여자가 갑자기 변심하고 다른 남자에게 간다는데 이유도 모르고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결국 유영은 조민정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조민정은 회장님 지시라고 딱 잘라 말했다. 유영은 그제야 조민정은 정국진의 말을 가장 우선으로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입찰 현장.유영은 박연준과 함께 자리했다. 박연준의 반대쪽에는 강이한과 조형욱이 자리했다.분위기는 좀 삭막했다.강이한은 조형욱에게 눈길을 보냈지만 조형욱은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유영이 박연준과 함께 입찰 현장에 나타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강이한을 포함해서 조형욱마저도 그녀가 박연준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강이한은 분노에 치를 떠는 반면, 유영은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베이지 톤의 깔끔한 정장은 그녀의 유려한 이목구비와 차분한 분위기를 더욱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했다.몇몇 회사들에서 설계 도면을 제출했지만 모두가 심사 탈락이었다.그만큼 정부에서 동교 신도실 개발을 중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잠시 후, 박연준과 강이한이 설계 도면을 가지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유영은 긴장한 얼굴로 박연준을 바라보았다.반면 박연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핸드폰에서 문자 알림이 뜨면서 유영의 집중력을 분산싴켰다.확인해 보니 강이한에게서 온 문자였다.“나가서 얘기 좀 해!”유영은 박연준 옆으로 고개를 살짝 틀고 싸늘한 시선으로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