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게다가 출산조차 힘들어졌는데 당신은 어떻게 내가 어렵게 낳은 그 아이를 보내버리라고 말할 수 있어!?”“안 보내도 돼. 안 보내도 돼.”강이한은 앞으로 다가와 단번에 이유영을 와락 품속에 안았다.강이한의 품이 닿는 순간, 이유영은 그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떨림은 그녀에게 정말 아니꼬웠다.“보내지 말자.”그는 무의식적으로 두 팔에 힘을 주어 꽉 끌어안았다.“당신은 지금 상황이 우습지도 않아?”“유영아.”“우리 두 사람, 더 이상 우리 둘의 아이를 가질 수도 없어. 근데 당신은 날 곁에 두어서 뭐 해?”“유영아...”“한지음의 아이, 서재욱의 아이. 하하!”“그만 말해. 입 다물어. 그만 말하라고!”강이한은 지금 매 한마디가 다 너무 귀에 거슬렸다.마음이 아픈 나머지 그는 숨 쉬는 것마저 버거웠다.“당신은 아이의 새아버지가 되는 게 좋겠지만 나는 새엄마가 되기 싫어.”“유영!”한지음 딸의 일에 대해서, 이유영은 어느 때든지 물론하고 다 시종 이런 태도를 견지했다.그녀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하지만 이유영의 이 말을 들은 강이한은 가슴이 더없이 답답해졌다.“이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응?”얘기하고 싶지 않았다.계속 얘기하면 안 되었다.모든 것을 다 털어놓는 것은 이렇게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그는 줄곧 이유영더러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고만 했지, 전생의 그녀가 이렇게 힘들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유영의 짧은 몇 마디에서 강이한은 그녀가 전생에서 받은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다.이유영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강이한은 알 수 있었다.하지만 한지음에 대해...“유영아, 그 얘기는 일단 그만하자. 응?”너무 조급했다.전에는 강이한이 너무 조급하게 몰아붙였다.그 상처들은 아마 아직도 이유영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그녀더러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품에서 그의 떨림을 느
이유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응.”“그놈은 정말 못하는 짓이라고 없네! 난 심지어 그런 생각까지 했었어. 그 당시 그놈이 너를 아꼈던 감정들은 도대체 다 뭐야?”그랬다. 아꼈었다.그때 강이한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준 건 이유영에 대한 아낌이었다.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그 감정들은... 다 우습기만 했다.우습기 그지없었다.하지만 그런 아낌은 한지음이 나타나기 전까지였다.그리고 한지음이 나타난 이후로 모든 것들이 다 변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요즈음 네가 사교계에서 엄청나게 얼굴을 잘 드러내던데.”이유영이 말했다.맞는 말이었다. 엔데스 현우와 결혼한 뒤로, 소은지는 재빨리 사교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게다가 이유영은 소은지와 설유나 사이에 있었던 일화도 전해 들었다.소은지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맞아.”“예전에 넌 이런 것들을 안 좋아했잖아!”“앞으로는 좋아하게 될 거야.”소은지가 대답했다.예전에 싫어했던 건 해야 할 일들이 있었기에 상류사회 사람들의 행위를 이해할 시간도 전혀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지금의 그녀는 예전의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그럼 사람이 되었다. 사람은 자신이 선 위치에 맞게 일을 해야 했다.“설유나가 입원했어.”이유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결국 자기가 알고 있던 소식을 소은지에게 말해주었다.하지만 소은지는 전부 알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었다.“나도 알고 있었어!”“그럼, 여섯째 도련님 쪽은?”소은지가 알고 있었다는 것을 들은 이유영은 아주 자연스럽게 순식간에 포인트를 잡아냈다.‘설유나가 입원한 건 아마 은지와 상관이 있을 가능성이 아주 커.’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유영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그 사람? 하!”엔데스 명우의 얘기가 나오자, 소은지는 냉소를 지었다. 마치 엔데스 명우가 전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말했다.“유영아. 난 네가 내 걱정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나랑 그 사람은... 내가 현우 씨와 결혼한 순간부터 이미 대립 면에
뜨거운 찻물이 피부에 닿으면서 가슴 저리는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소은지의 눈빛은 그저 그렇게 뚫어져라 배천명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넌 내가 일곱째 사모님인 거 알고 있네?”“일곱째 사모님...”“꺼져!”소은지는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름이며 싸늘하게 두 글자를 내뱉었다. 동시에 아주 짙은 위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배천명은 잠시 넋이 나갔다.비록 전에 엔데스 명우의 곁에 있었을 때도 소은지가 여러 차례 여섯째 도련님한테 반항하는 것을 보아서 그녀의 성격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정도로 성격이 나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꺼져라는 두 글자는... 절대 엔데스 가문의 여인한테서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일곱째 사모님,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일곱째 도련님을 위해...”“아직도 헛된 꿈을 꾸고 있네!”배천명의 말은 다시 소은지 때문에 끊어졌다. 지금, 이 순간 소은지는 아니꼬운 눈빛으로 배천명을 바라보고 있었다.배천명은 어안이 벙벙했다.‘꿈을 꾼다고? 누가...?’배천명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소은지는 비꼬면서 웃으며 말했다.“다들 이젠 어린아이들도 아닌데 설마 여섯째 도련님은 아직도 소문 속에 자기랑 일곱째 도련님이 사이가 좋다는 것을 믿고 있는 건가?”이 말을 듣자, 배천명의 안색은 순간 확 변했다.소문이라는 두 글자가 세게 그의 신경을 자극한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것들이 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은지가 엔데스 현우와 결혼한 후로 두 형제의 사이는 금세 긴장해졌다.조금 전 배천명은 소은지더러 엔데스 현우의 체면을 생각해 여섯째 도련님한테 너무 강경하게 맞서지 말라고 망상이 담긴 말을 했다.소은지는 자신의 손톱을 어루만지면서 배천명을 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거의 죽어가?”말투는 유달리 각박했다.배천명은 침묵을 지켰다.소은지는 계속해서 말했다.“죽어도 사실 별로 나쁠 게 없지.”“일곱째 사모님!”“난 한 번도 그 여자를 살려주겠다고 약속
바닥에서 매를 맞고 있는 배천명을 보고 있으니 그 순간 이유영은 마치 엔데스 명우를 본 것만 같았다.소은지는 막연하게 몸을 일으켜 서면서 말했다.“죽도록 패지는 마세요.”“네.”그러고는 몸을 돌려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소은지는 뒤의 혼란한 상황을 뒤로 한 채, 그저 그렇게 자리를 떴다.한때 그녀가 가장 싫어했던 것이 바로 이런 장면이었다. 세력을 믿고 함부로 하는 짓은 그녀의 세계에서 단 한 번도 없었다.하지만 지금, 엔데스 명우의 사람만 보면 그녀는 그들을 패버리고 싶었다.설유나의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엔데스 명우는 온몸에 중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돌아온 배천명에게 눈길을 한번 주고는 또 그의 몸 뒤를 한번 보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어떻게 된 일이야?”“오기 싫다고 하셨습니다.”배천명은 소은지를 위해 뭘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그러자 엔데스 명우의 별로 안 좋던 안색은 순간 어두워졌으며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음흉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오기 싫다면 다야?’“너 언제부터 이렇게 쓸모가 없어졌어?”상처투성이인 배천명의 모습을 보며 엔데스 명우의 말투는 더욱 차가워졌다.배천명은 공손하게 고개를 떨구었다.그의 몸에 있는 상처들은 더구나... 지금 파리에서의 여섯째 도련님과 일곱째 도련님의 관계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만약 예전에 이미 소은지 때문에 서로 얼굴을 붉히는 사이였다고 하면 지금은 더욱... 세게 붉히는 것이었다.“명우 오빠.”병실 침대 위의 설유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짧디짧은 시간에 그녀의 입술은 이미 말랐다.사실 설유나의 병은 더욱이 음식을 조심해야 했으며 평상시에도 보양에 주의해야 했다.게다가 사교 연회의 어떤 것들은 그녀에게 적합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엔데스 명우 곁의 여자라는 입장을 굳히기 위해, 중요한 연회가 있을 때마다 꼭 따라가곤 하였다.하지만 설유나의 몸이 이렇게 빨리 악화할 줄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도 당황했다.“괜찮아.”
저녁 식탁에서 이유영은 조용히 국을 먹고 있었다국물의 맛은 정말... 별맛이었다.아마도 이유영이 아침에 성질을 부린 것 때문인지, 강이한은 그 뒤로 주방한테 최대한 이유영이 좋아하는 것들로 하라고 시켰다.“온유야, 왜 그래?”이온유가 시무룩해하는 것을 본 강이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특히 그동안 아이가 밥을 먹을 때의 습관에 대해 강이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지금 이렇게 밥을 먹고 있는 것은 분명 오늘 저녁의 음식들이 입맛에 안 맞아서였다.“먼저 좀 먹어봐.”“네.”이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의식적으로 여전히 눈빛이 쌀쌀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이유영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비꼬면서 말했다.“두 사람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역겹네!”“...”“...”그 순간 강이한의 안색은 확 어두워졌다.비록 오전에 나눴던 얘기들 때문에 강이한은 마음속으로 이유영이 조금 안쓰러웠지만 그녀가 이온유의 면전에 대고 대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으니, 강이한은 마음이 어느 정도 불편했다.“어떤 사람은 참 가식을 잘 떤다니까. 그 사람과 같은지 모르겠네?”강이한이 말이 없는 것을 보자 이유영은 더욱 세게 비꼬면서 말했다.이에 강이한은 정말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젓가락을 내려놓는 순간, 힘이 조금 셌기에 그 누가 들어도 강이한이 화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아빠.”이온유는 나지막하게 강이한을 부르며 안절부절못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강이한은 고개를 숙여 국물을 먹고 있는 이유영을 한 눈 보고는 이온유에게 말했다.“아빠가 우리 온유 데리고 나가서 먹을까?”말을 마친 뒤, 그는 아이를 확 일으켜 세웠다.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피식 웃었다.‘어디서 좋은 아버지 행세야? 참 잘 놀고들 있네.’강이한은 이유영을 보며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말을 도로 삼켜버렸다. 이때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그는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식탁에 이유영 혼자만 남았을 때, 그녀의 입맛은 오히려 더
‘한번? 무슨 말이지?’분명한 건 이유영은 정국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하지만 그녀가 모르게... 사실 아주 일찍이 이유영이 퀘벡으로 갔었을 때, 강이한은 무슨 방법을 써서인지 모르게 비밀리에 정국진과 협의를 달성하였다.하지만 그때 강이한이 한 말들은 정국진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결국... 정국진은 이번 한 번만 봐주겠다고 약속하였다.만약 이번 한 번의 시도 끝에 성공을 이루지 못하면 그럼 그는... 앞으로 더 이상 이유영에게 집착하지 않겠다고 했다.“아빠...”“됐어. 난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어. 나중에 봐!”이유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국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 안에서 뚝뚝 소리가 나는 것을 들으며 이유영은 제자리에 앉은 채 오래도록 정신을 되찾지 못했다.‘두 사람...’탈칵 도어록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이유영은 순간 정신을 다잡았다.고개를 돌려보니 강이한이 온몸의 기운을 짓누른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저녁 식사 자리가 불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온 하루 세 끼에서, 아침은 이유영 때문에 난리가 났고 점심때 강이한은 이온유를 데리고 그냥 밖에서 먹었다. 온 하루가 지나 이유영의 기분도 조금 괜찮아졌을까 했는데 결국 저녁에도 그는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외식했다.어찌 됐든 하루라는 시간이 이렇게 흘러갔다...“우린 꼭 이렇게 지내야 해?”강이한은 이유영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앞에 웅크리고 앉더니 그녀의 차가운 손을 끌어 잡았다.그는 말하면서 얼마나 자신의 불쾌함을 애써 억눌렀는지 모른다.이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자기 앞에 웅크리고 앉은 강이한을 보며 자신의 손을 따뜻한 그의 손에서 빼내려고 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다 당신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이유영은 냉랭하게 말했다.맞는 말이었다.두 사람은 원로 서로를 간섭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각자 자신의 삶을 살면서 누구도 상대방에게 영향 주지 않아도 되었다. 강이한이 이온유의 좋은 아빠가 되겠다고 해
이 말이 끝나자, 이유영의 눈빛에는 짙은 위험한 기운이 퍼졌다.“내가 도원산으로 왔다고 해서 당신이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그녀는 이를 악물며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전화 안의 사람은 마치 그녀의 감정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만 같았다.“내 목적은 당신이 생각해야 할 바가 아니야. 당신은 그 서류나 빨리 찾아!”말투에는 온통 위험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핸드폰을 부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조금 전 상대방이 한 말이 떠올라 늠름한 말투로 물었다.“그 애가 열이 난 것도 당산과 연관이 있어?”“추측해 봐!”“난 이런 질문 놀이를 하나도 안 좋아해!”이유영의 말투는 더욱 심각해졌다.전화 안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안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자신감이 없는 거야?”“난 당신처럼 아이조차 가만히 놔두지 않는 변태가 아니야!”비록 그녀는 마음속으로 한지음을 지극히 미워했고 이온유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그건 엄마인 그녀가 한 아이를 무정하게 이용하고 상처를 줄 수 있게 눈감아 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아니야!”“당신이랑 상관이 없어야 할 거야. 아니면...”여기까지 말한 이유영은 잠시 멈칫하였다. 동시에 그녀의 눈빛은 더욱더 싸늘해졌다.전화 안에서 남자의 그윽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당신 한 가지 잊고 있나 본데, 당신은 나랑 조건을 따질 권한이 없어!”“...”‘권한이 없다고?’그랬다. 그녀는 그럴 권한이 없었다.강이한의 마음속에서 그녀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이유영은 줄곧 잘 알고 있었다.이유영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상대방은 이미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순간... 공기는 조용해졌지만, 그녀의 삶은 오히려 엉망이 되어버렸다.‘박연준이...’그랬다. 방금 이유영과 통화한 사람은 박연준이었다!이유영이 박연준과 사이가 틀어진 뒤로, 두 사람은 이런 관계가 되었다.이유영은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눈망울은 반짝거렸다. 마치 얼음이 빛에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박연준은..
앞으로 다가가려던 강이한의 발길은 그 순간 마치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는 이유영을 향해 반걸음도 다가갈 수 없었다.하지만 아직 혼수상태에 있는 이온유를 생각하니 강이한은 그저 마음이 답답해났다....곧장 방으로 돌아온 이유영은 안색이 차가운 것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만 같았다. 하지만 조금 전 도우미들의 곁을 지날 때, 이유영은 그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사람들의 눈 속에서 매정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이유영은 사실 아직도 이해가 안 갔다.‘한지음의 딸이 강이한에게... 왜 그토록 중요한 거지? 한지석 때문일까?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만약 한지석 때문이라면 이번 생의 한지음은 그토록 중요하지 않을 건데. 아니면 정말로 강이한의 말처럼 내가... 한지음한테 빚진 것인가?’이 생각이 들었을 때, 이유영의 눈빛은 더욱 싸늘해졌다.‘내가... 한지음한테 빚졌다고? 그래. 빚진 것이 있다고 한들 뭐? 그때의 그 불길, 그리고 내 끝장, 그것들로 맞바꾼다고 쳐도 내가 더 피해 본 게 아니야?’...강이한은 아주 어렵게 이유영을 자기 곁에 남게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했다.이유영이 그의 곁으로 돌아온 것은 맞았지만 그가 원하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는 않았다.강이한과 이유영의 상황은 그야말로 엎질러진 물처럼 정말 수습하기 어려웠다.“엄마, 엄마...”이온유는 열이 세게 났다. 다행히 해열 주사를 나서 열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하지만 해롱해롱한 와중에 이온유는 여전히 이유영을 찾고 있었다.이온유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기억이 있고부터 이유영을 엄마로 알고 있었기에 아이의 세상에는... 종래도 한지음이라는 사람이 없었다.“온유야.”강이한은 애틋하게 이온유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아직 열이 조금 있었기에 이마는 뜨거웠으며 얼굴도 열 때문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엄마, 엄마.”“...”이온유는 몸이 허약했기에 매번 아플 때마다 엄청나게 사람 손을 탔다.그리고 이온유가 아플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