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의 약혼녀라고 해서 무조건 약혼녀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박연준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이유영은 정말 강인한 여자였다.박연준은 그녀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결국 박연준은 이유영을 품에 꽉 안았다. 마치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유영아, 넌 정말 마녀 같아.”그래, 이건 마녀다.이유영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 말을 들으면서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박연준은 어쩔 수가 없었다.사실 10년이나 지나오면서 이유영은 강이한에게 철저히 실망했다. 그리고 강이한은 한 사람을 잃는 슬픔을 느꼈다.하지만 왜 박연준도 비슷한 느낌일까.“장혜주한테 더 조사하지 말라고 해.”박연준은 이유영을 더욱 세게 안고 얘기했다.“너랑 강이한 다 나보고 조사하지 말라고 하니까 정말 궁금하네. 도대체 무슨 일인지.”“그런 말 못 들어봤어?”“뭐.”“호기심이 죄라고.”가끔은 모르는 게 상책이다,그래서 박연준은 굳이 알 필요가 없으면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이미 몇 년이나 지나지 않았는가.“호기심을 갖지 않았을 때도 죄는 없었지만 죽을 뻔했지.”‘사실은 죽은 거지만.’저번 생은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었다. 자기 옆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말이다.“유영아!”“두 사람이 이렇게 나올수록 난 더 알아야겠어. 두 사람이 이렇게 뜻이 맞는 일이 뭣 때문인지.”“...”“아니면, 내가 두 사람의 한계를 건드린 거야?”한계.강이한과 박연준의 동일한 한계가 도대체 무엇인지.만약 그렇다면 정말 한번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한계가 아니야.”그의 말투는 매우 진중했다.이 순간, 이유영은 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피하려고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박연준의 말투에서 아픔을 느낀 것만 같았다.‘아픔? 왜 아픈 거지? 도대체 뭐가?’“네가 내 한계야.”박연준의 말투는 더욱 의미심장해졌다.“...”그 순간 이유영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윽고 표정도 차가워졌다.‘말은 잘
저녁.호화로운 연회장에서 레드 와인과 샴페인이 오갔다.이곳에는 서주의 상류층 사람들이 다 모여있었다.박연준이 이유영과 함께 이곳에 나타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쏟아졌다.이유영은 그 순간 적의적인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서주에서 잘 먹고 잘사나 보네.”한번 훑어보자 수많은 여자들이 질투의 시선을 보내왔다.그 말은 약간의 풍자가 섞여 있었다.박연준과 강이한을 향한 풍자였다. 박연준은 그녀의 말을 듣고 더욱 힘을 줘서 이유영의 손을 잡았다. “이미 왔으니까 앞으로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알아가면 돼. 네 옆에 있는 남자가 얼마나 갖기 어려운 남자인지 말이야. 그러니까 이 기회를 소중히 생각해. 응?”박연준이 얘기했다.이유영의 풍자는 간단하게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되었다.그 순간, 이유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강이한은 도착한 후 이유영과 박연준이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여리고 얇은 그녀의 손은 박연준의 커다란 손에 감싸졌다.그리고 키 차이도...이유영의 키는 너무 작았다.박연준의 옆에 서 있는 그녀는 더욱 작아 보였다. 게다가 박연준은 마치 이유영이 세상 가장 소중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박연준 씨가 이런 여자를 좋아할 줄은 몰랐네요.”한 사람이 한숨을 쉬면서 얘기했다.전에 아무리 박연준 앞에 몸매가 좋고 예쁜 여자들을 데려다 놓아도 박연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박연준의 호감을 얻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결국은 박연준의 차가운 표정 밖에 보지 못했다.하지만 이유영이 박연준을 갖게 되다니.“너무 작은 거 아니에요?”“작기는요. 난 내가 저렇게 생겼으면 좋겠어요.”‘박연준이 좋아하니까 말이에요.’사람들은 부러운 시선을, 또는 질투의 시선을 보냈다.이시욱은 강이한 뒤에 서서 강이한에게서 느껴지는 한기를 눈치챘다.“그...”그 순간 박연준에게 향하는 시선이 있다면 강이한을 보는 시선도 있었다.아무리 큰 연회장이라고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은 알아차릴
신씨 가문?신지수라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 여우 같은 눈이 아주 매혹적이라고 말이다. 이유영의 시선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넌?”이유영은 박연준을 보면서 웃더니 물었다.박연준이 이유영을 마주 보았다.그는 마치 이유영의 기분을 다 읽어낸 것만 같았다.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나?”“그래, 너.”“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야.”“난 지금 네 약혼녀야. 넌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원래의 밸런스를 맞출 건데?”‘밸런스?’이유영의 입에서 밸런스라는 단어를 들은 박연준의 시선이 한순간 차갑게 식었다.“그러니까 강이한이 이렇게 된 것도 네가 의도한 것이라는 뜻이야?”“반쪽짜리 서류 때문에 골치 아픈 건 두 사람뿐만이 아닐 텐데.”이유영이 비꼬는 말투로 얘기했다.‘골치 아픈 일만 있으면 다행일지도.’장혜주가 조사한 자료들을 이유영에게 가져다주었을 때, 이유영은 그 서류가 사라지면서 서주에 보이지 않는 힘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이유영이 서류에 손을 대 이 밸런스를 깨부쉈다.박연준이 이유영의 손목을 확 잡았다. 이윽고 이유영을 품에 안더니 손가락으로 이유영의 턱을 천천히 쓸어올렸다.“그래서, 약혼자의 신분으로 나랑 서주에 온 거야? 그것도 의도한 거겠네?”이유영은 박연준의 부드러운 시선을 보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 애매모호한 감정에 박연준은 심장이 더욱 빨리 뛰었다.그에게 있어서 이유영은 정말 천년 묵은 구미호가 아닐 수 없었다.“이게 우리를 향한 복수야?”복수.강이한뿐만이 아니라 박연준까지. 그 두 사람을 향한 복수였다.겉으로 보기에는 박연준의 편에 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녀의 복수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신씨 가문은 서주에서 어떠한 존재인가. 만약 선택이 가능했다면 신씨 가문의 신지수가 왜 여태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겠는가.신씨 가문은 감히 넘볼 수 있는 가문이 아니다. 그걸 잘 알기에 아무도 먼저 다가가지 않았던
“신지수랑 아는 사이야?”박연준의 눈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윽고 이유영의 손목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이유영은 고개를 돌렸다. 박연준은 더 힘을 주기 시작했다.“이거 놔.”“이유영.”“그래, 아는 사이야.”이유영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박연준은 약간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이유영의 눈에 담긴 감정이 더욱 깊어졌다.박연준이 멍해 있는 찰나 이유영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옆에 앉았다.“두 사람, 어떻게 아는 사이야.”신씨 가문의 사람이라니.서주의 사람들은 신씨 가문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다. 그 가문과 얽히기만 해도 재앙을 불러올 것만 같았다.이유영은 그저 가정주부였지 않은가. 알고 지내면서 이유영이 신씨 가문과 접점이 있을 거라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신지수도 그 반쪽짜리 서류의 일을 알아?”“박연준!”이유영의 말투가 진중해졌다. 이윽고 비웃음 가득한 눈빛으로 얘기했다.“지금 온 세상 사람들이 이 일을 아는데, 궁금하면 신지수한테 가서 물어봐.”“...”그 말을 들은 박연준은 멍해졌다.맞는 말이다.지금 온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때 사라진 서류가 박연준과 강이한의 손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사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박연준은 강이한 손에 남은 반쪽이 있을 줄 몰랐다. 강이한도 마찬가지로 박연준에게 남은 절반이 있을 줄 몰랐다. 하지만 이유영은...이유영의 눈을 마주한 박연준은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그는 감정의 파도에 휩싸여 오랜 시간 동안 진정하지 못했다.박연준은 이유영을 보면서 예전의 이유영이 얼마나 온순했는지를 떠올렸다.지금의 이유영은 박연준에게도, 강이한에게도 그저 미스터리일 뿐이다.“이게 바로 네가 서주에 와서 설계한 거야?”“굳이 내가 설계할 필요까지 있었을까.”그래, 신지수는 이유영의 설계가 없었어도 결국 이 판에 휘말려 들어오게 될 것이다.지금 서류의 일 때문에 강이한과 신지수 사이뿐만이 아니라 박연준의 곁에도 문제가 생겨나고 있었다.이유영은 제
이유영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렇게 간단한 미소가 아니다. 박연준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약혼을 깬다고...? 그렇다면...이유영은 정씨 가문의 딸이다. 정씨 가문에서 이유영의 신분을 밝힌 후 파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씨 가문을 찾아왔던가.그러니 만약 박연준이 파혼을 선서한다면 박연준에게 잇따르는 결과가 어떤지는 불 보듯 뻔했다.“윽, 아파!”박연준은 갑자기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 마치 아이를 대하듯, 어쩌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이유영은 아파서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아픈 건 아네?”“당연하지!”그녀는 원망스레 박연준을 쳐다보았다.진중했던 분위기가 덕분에 조금 나아진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것도 찰나일 뿐, 박연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했다.“이유영, 네가 강이한과 날 싫어하는 건 알아. 하지만...”여기까지 얘기한 박연준은 약간 멈칫했다. 이유영은 정말 강이한을 극도로 증오하는 것만 같았다. 서주에 오자마자 강이한에게 신씨 가문이라는 선물을 줬으니 말이다.이유영은 박연준을 보면서 장난스러운 시선을 거두었다.그리고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박연준도 그런 이유영을 마주했다.“서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넌 온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아무것도 모르잖아.”“강이한 옆에 있던 때처럼 말이야?”이유영이 비웃으면서 얘기했다.강이한 곁에 있던 때와 마찬가지가 아닌가.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볼 줄 모르던, 그때.“...”강이한과 이유영의 10년을 떠올린 박연준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런 적은 처음이었다.예전의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무슨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든지, 결국 이유영을 서주로 끌어들이지 않았다.하지만 박연준은 달랐다.차 안의 분위기는 약간 심각해졌다.정원에 도착해 차에서 내릴 때, 박연준과 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에서 내릴 때,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상한 기운을 알아차렸다.문기원은 박연준이 돌아온 것을 보고 앞으
“날 보러 오라고 해.”박연준이 힐끔 보더니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문기원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아시다시피 여진우 씨의 사람들은 여태껏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그 사람들은 명령만 들을 뿐, 감성팔이는 안 통하는 사람들이다.“...”문기원의 말에 박연준의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여진우의 사람.신씨 가문은 서주에서 교활하기로 유명한 반면, 여진우의 사람은 고집이 세기로 소문이 났다.문기원은 침묵하고 있는 박연준을 보면서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만약 여진우의 사람을 회유하려 든다면 그 일은 영원히 실패할 것이다.문기원은 어두운 표정의 박연준을 보더니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하지만 이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혹시 지금...”그 뜻을 눈치챈 박연준이 고개를 홱 들어 문기원을 쳐다보았다.어두운 불빛 아래, 위험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를 엄습했다. 지금 두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일은 이유영이 알면 안 되는 일에 가까웠다.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것은 장혜주를 막는 것이다.하지만 박연준은 그 생각을 접고 얘기했다.“됐어.”“그럼...”“우리보다 더 조급한 사람이 있을 거야.”10년 동안 이유영을 이용했으니 박연준과 이유영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게다가 여기서 장혜주를 건드려 무슨 일이라도 나면 안 된다.사람은 감정에 따라 움직이면 안 된다. 감정은 변하는 것이니 문제가 생기기 쉽다.하지만 지금은...“강이한 쪽을 얘기하시는 건가요?”“우리 주변에 있지만 쉽게 경계를 풀지 못할 거야.”박연준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맞다.그 시간 동안 박연준의 사람뿐만이 아니라 강이한의 사람도 장혜주를 관찰하고 있었다. 다만 시간이 오래 지난 일을 결국 알아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네.”문기원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진중한 목소리로 박연준에게 대답했다.“장혜주가 알았으니 여진우 쪽도 알게될 겁니다.”다 여진우의 사람이니 말이다.그 말의 뜻은 분명했다.강이한은 장혜주를
강이한은 연회에서 나온 후 바로 신지수와 떨어졌다.하지만 차에 올라타자마자 이시욱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강이한은 짜증 가득해서 미간을 좁히고 넥타이를 풀었다.이유영은 정말 그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신씨 가문이라니...강이한이 두 주먹을 꽉 쥐자 관절에서 뚝 소리가 났다.“그래서 장혜주가 모든 것을 알아낸 건가?”“네. 그 해 홍산파의 애슐리를 찾아냈습니다.”이시욱이 진중하게 얘기했다.애슐리... 그녀는 강이한 곁의 중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난 후 강이한은 그녀 곁의 모든 사람을 처리하고 애슐리만 남겨두었다.그래서 그해의 일에 연관된 사람 중 살아남은 건 애슐리뿐이었다.하지만...“여진우의 사람은 정말 대단한 놈들이네.”강이한의 말투에서 짜증이 확 묻어났다.애슐리...이건 이미 몇 해나 지난 일이다. 애슐리도 이제 거의 40살이 될 것이다.전에는 장혜주가 애슐리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애슐리를 찾아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박연준은 알고 있나?”강이한이 짜증을 내면서 물었다.“이유영 씨가 불쾌해하셔서 박연준은 자기 사람을 철수했습니다.”“저 구렁이 같은 게...”강이한의 짜증이 점점 쌓여갔다.작은 공간 안에서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졌다.장혜주는 정말 인정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는 지금 알지 말아야 할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이시욱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강이한을 쳐다보았다.“그럼 이제...”“장혜주는 어디 있지?”“아직 감시 중입니다. 이유영 씨를 찾아가지 않았으니 이유영 씨는 아직 이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그래!’아무래도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다. 장혜주가 애슐리를 알아냈으니 그해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자를 불러. 내가 만나봐야겠어.”강이한이 차가운 말투로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이시욱은 약간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정은 돌아왔나?”“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이시욱은 진지하게 얘기했다.이정은 이번
“이유영한테도 알 권리가 있어.”“네.”그들은 이 사건을 정말 깔끔하게 잘 처리해 놓았다. 서주에 그렇게 오래 있으면서도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 이런 원한이 있었던 줄은 몰랐다. 게다가 서주에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여진우의 여동생이 여기에 엮이다니.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유영이 여진우 없이도 서주에서 홀로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을 만나지 말고 바로 이 정보를 이유영한테 전해.”“네, 알겠습니다.”“그리고...”거기까지 생각한 여진우가 차가운 눈을 번뜩였다.이유영이 서주에서 하는 일들을 지켜본 그는 이유영이 쉽게 휘둘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그렇기에 이유영이 이 정보를 알게 된다면 서주는 아마 뒤엎어질 것이다.“그리고 루브를 곁에 붙여줘.”“네.”루브를 이유영한테 붙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장혜주는 사건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전화를 끊은 순간, 여진우는 차가운 시선으로 밖을 내다보았다.정국진은 들어오는 순간 여진우의 눈빛을 보고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하지만 여진우는 정국진이 서재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빠르게 표정을 감추었다.“진우야.”“네.”여진우가 대답했다.하지만 정국진의 눈에는 약간의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왜냐하면 여진우가 한 번도 그들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신씨 가문과 강이한이 같이 나타나게 된 건... 유영이 짓이니?”“네.”여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들은 정국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이유영과 강이한이 이렇게 되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하지만 강이한이 이유영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떠올리면 죽어도 용서할 수 없었다.게다가 그건 이유영이 아이를 낳을 때가 아닌가.많은 고생을 했고 많은 위기를 넘겼다.그러니 이유영이 어떻게 강이한이 자기 아이한테 그런 짓을 하는 걸 보고만 있었을까.“아이고.”정국진이 한숨을 내쉬었다.“두 사람 사이의 일이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