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데스 가문의 여러 남자들은 모두 자리를 비운 듯했고, 방에는 몇몇 여성들과 집사, 그리고 집사들이 배치한 하녀들만 남아 있었다. 하녀는 소은지에게 한 명씩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설명에 따르면 현재 엔데스 가문의 남자들 중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엔데스 명우와 다섯째 엔데스 예준뿐이라고 했다.나머지 형제들은 이미 결혼했으며, 엔데스 가문의 형제는 총 일곱 명이나 된다고 했다.그리고 엔데스 현우는 그들 중 막내였다.또한, 그는 세 명의 누나와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 모두 참석해 있었다."안녕하세요, 소은지 씨. 현우께서 정말 형수님을 잘 숨겨두셨네요. 아버지가 형수님을 데려오라고 했을 때도 끝까지 거절하더니."지금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지?큰일이었다.소은지는 사람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편이었다.예전에 낯선 사람들을 자주 만나던 일을 했던 후유증으로, 세 번 이상 연속으로 보지 않으면 상대방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래서 방금 하녀가 소개해 준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소은지는 당황하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마도 제가 예의에 익숙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그녀의 말투는 적당히 공손하면서도 딱히 나무랄 데 없는 태도였다.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소은지를 견제하던 큰형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막내는 원래 이렇게 세심한 아이죠. 그렇죠? 넷째?”“...”큰형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소은지가 방에 들어올 때부터 유독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던 여성이었다.‘넷째’라고 불린 그녀는 소은지의 시선을 피하며 눈길을 피했다.그때 다른 여성이 소은지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형수님, 큰형수님은 항상 그런 식이세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그리고 곧바로 큰형수를 바라보며 다소 가볍게 말했다."큰형수님도 참! 막내 형수님이 놀랄까 봐 걱정되네요." "그래, 막내 사적인 일에 내가 괜히 말이 많았네."위화영은 마치 사과하는 듯한
“저...” 아홉째 아가씨인 엔데스 란서는 미안한 듯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가보세요.”“그럼 막내 형수님, 돌아가는 길은 기억하시겠어요?”“...”솔직히 말하자면, 아까는 걷느라 정신이 없어서 길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엔데스 란서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까먹으셨군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자신을 부르러 온 하녀를 보며 말했다.“저기, 막내 형수님을 주 정원으로 모시고 가요.”“알겠습니다, 아가씨.”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엔데스 란서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고, 남겨진 하녀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소은지를 향해 말했다.“막내 형수님, 이쪽으로 오시죠.”“고마워요.”“형수님께서 저희에게 감사 인사를 하시다니요.”소은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조금 전, 엔데스 란서와 걷다 보니 꽤 멀리 온 듯했다.정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마치 미로처럼 복잡했다.“저기요.”“네, 형수님.”“정말 사모님께서 아이를 이렇게 많이 낳으셨나요?”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솔직히 말해, 아까 정원에서 하녀가 가족들을 소개할 때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대체 몇 명이야…”이렇게 많은 형제자매가 있는 가족에서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았다.앞서 걷던 하녀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어색하게 대답했다. “형수님께서는 모르셨나 보네요.” “뭐가요?” “여러 형제자매들이 모두 부인의 자녀는 아니에요. 사실...” 소커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하지만 소은지는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걸 이해했다. ‘역시 대가족은 이렇게 복잡할 수밖에 없지.’ 그녀는 속으로 머쓱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그동안 그녀는 엔데스 현우 곁에서 머무르며 주로 엔데스 명우에게 복수할 계획만을 고민했다. 게다가 그녀와 엔데스 현우의 결혼은 본래 거래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런 가문 내부 사정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복잡한 가족 관계에 대
그들은 모두 자유롭고 당당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 이곳의 규칙과 제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유영의 성격은 강이한의 곁에서 서서히 무너져갔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현우 씨는요?”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며 눈썹을 올렸다.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마음에 안 들어도, 끝날 때까지는 있어야 해요.”“아!”소은지는 다음에는 절대로 다시 이곳에 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오늘 저녁이 지나면 그녀는 꼭 엔데스 가문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특히, 현재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지켜보았다.두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너무나도 선명하고, 그들의 존재감은 누구보다도 강렬했다.그들을 지켜보는 엔데스 명우에게서는 적대적인 기운이 감돌았다.저녁 식사 중, 소은지는 드디어 전설 속의 엔데스 가주를 마주하게 되었다.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듯 보였다.이렇게 큰 가문 속에서, 엔데스 현우는 고령인 엔데스 가주의 옆에 앉았고, 소은지는 엔데스 현우의 옆에 앉았다.그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그녀는 분위기가 일순간 어색해짐을 직감했다.식사 중, 엔데스 가주는 소은지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소은지?”“네, 아버님.”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겉으로 보기엔 온화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마치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처럼 깊고 예리했다.한 가문을 이끌어 가는 사람의 기운은 무언의 압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엔데스 가문은 당신을 환영합니다.”“감사합니다, 아버님!”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소은지를 향해 집중되었고, 그들의 눈에는 분명 적대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엔데스 가문에서 여자의 위치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그렇게 큰 가문에서 새로 온 며느리가 가장에게 직접 질문을 받는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이 만찬이 단순한 가정의 식사가 아닌, 사실상 ‘엔데스 현우의 아내’를 맞이하는 자리라는 사실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엔데스 현
반산월로 돌아온 소은지는, 어떻게든 엔데스 현우와의 거래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끝내야겠다고 결심했다.오늘 밤, 그녀는 그 가문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누구든지 이 가문에 얽히지 않으려면, 그 안에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그것은 곧 진흙탕에 빠지는 것이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엔데스 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은지는 마음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며, 그가 자꾸 신경이 쓰여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제가 늪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정말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이 거래를 어떻게든 빨리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 모든 일이 끝난 후에도 그녀는 평온함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이제야 알았어요?”그렇게 말하는 엔데스 현우의 눈빛은 차갑고 무표정했다.소은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차분하게 들리며 이어졌다.“그의 곁에 있으면, 언젠가는 당신도 이 일에 끌려들게 될 겁니다.”소은지의 마음은 다시 한번 요동쳤다.“그렇지만 결국 이 일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당신이에요.”그녀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엔데스 명우가 자신을 진흙탕으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그녀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소은지는 그가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렇지만 이건 소은지가 선택한 길이었고, 결국 또다시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녀는 단연코 엔데스 현우의 곁을 선택할 것이다.절대로 그 남자의 수술대 위로 잡혀가기는 싫었다.“어떻게 된 거예요?”엔데스 현우는 침묵하는 소은지를 미소가 더 깊어졌다.소은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예요.”그녀의 마음은 이미 결정이 난 상태였다.오늘만큼은 그녀도 이 진흙탕의 시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일찍 자요. 저는 잠시 나가
“이제 조금 속이 풀렸어?” 박연준은 생각에 잠긴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이유영은 잠시 말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속이 풀리다니. 그럴 리 없지.”신씨 가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강이한에게 큰 선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의 눈 속에서 냉소적인 미소를 발견하고, 더 깊어진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이유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박연준,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박연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너는 정말...”그녀는 정말로 할 말은 다 하고, 해야 할 일은 다 하는 사람이다. 강이한과 박연준 모두에게 그렇게 당당했다.“강이한은 지금 너와 이런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을 거야. 그런데, 전기봉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전기봉!이유영이 엔데스 명우에게 넘겨준 그 파일, 이제는 엔데스 현우도 알고 있었다.박연준은 전기봉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전기봉이 그의 곁에 있지 않다는 것뿐이었다.전기봉이 엔데스 가문에 의해 잡히면 어떻게 될지, 그는 알 리가 없었다.“한마디 해줄게. 엔데스 가문이 그 파일을 원한다고 하지만, 나는 엔데스 가문이 네가 아니라 차라리 강이한과 손을 잡으려고 할 것 같아.”강이한은 엔데스 가문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여전히 이런 데 신경을 쓴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영은 박연준이 말하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너는 그 파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만 알지, 그게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는 것 같아.”이유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는 정말로 알지 못했다. 서주의 늪은 너무 깊었다. 어느 순간에는 자기가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저 표면만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그렇지만 네가
“너 진짜 신경 많이 썼네.”이유영이 무심하게 말했다.강이한보다는 확실히 신경을 쓰는 것 같았지만, 박연준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경계심이 생겼다.박연준은 그런 이유영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박연준.”“응?”“그 일, 너희한테는 도대체 무슨 의미야?”장혜주에게 부탁한 일, 바로 그 일을 말하는 거였다. 알프산에 오기 전에는 장혜주의 연락을 받지 못했지만, 박연준이 이렇게 급하게 자신을 데리고 온 걸 보면, 확실히 장혜주가 그 일을 알아낸 게 틀림없었다.그 전도 장혜주에게 조사를 부탁할 때 박연준과 강이한의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던 것 같았다. 그렇게 되니, 이유영은 점점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졌다.단순히 관계가 멀어지고, 서로 복수하려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 뒤에 더욱 큰 문제가 있는 것만 같았다.“유영아.”“응?”“적어도 이번 달은 묻지 마, 알겠어?”이유영은 말없이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묻지 말라니!?”“한 달 동안, 넌 나를 잘 지켜보고 알아가면 돼. 나머지 일은 한 달 후에 말하자.”한 달이라니… 너무 길었다.“아빠한테 전화 좀 하고 싶어.”“걱정하지 마,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내가 다 얘기해놨어.”“너...!” 이유영은 이미 짜증이 나 있었는 데다가 박연준이 이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차분해질 수 없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한 달…’이유영은 이제 알았다.박연준은 항상 말한 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었고, 하지 않겠다 하면 정말로 하지 않았다. ‘이건 정말…!’“한 달 이후에는 뭐가 되든 나는 돌아갈 거야!”이유영은 그 말에 극한까지 참으며 말했다.박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그녀가 결국 순순히 양보한 모습을 보자, 남자는 한숨 돌린 듯 보였다.계속 이러고 있으면, 머리도 아플 거니까.“이 알프산에서 못 구하는 게 많아서, 가져오는데 꽤 힘들었어. 내가 청하에서 데려온 요리사도 있어, 한번 먹어 봐.”
이유영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원래 복잡했던 관계가 박연준의 말로 인해 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짧은 한마디로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연준이 말한 뒷얘기를 듣고, 이유영은 그가 말하는 소은지를 엔데스 가문에 데려가는 일이 사실은 눈속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무슨 관계야?” 엔데스 현우는 예전에 이유영 곁에 있었던 사람이지만, 이유영은 엔데스 현우의 사생활에 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그 말을 마치자마자, 박연준은 깊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 속에서 이유영은 이들 사이에 숨겨진 복잡한 사연이 있다는 걸 느꼈다. 마치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처럼 말이다.정국진의 서재에 있는 그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이 예전엔 특별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왜 이렇게까지 멀어졌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엔데스 현우는 예전 그녀의 곁에서 뛰어난 비서 역할을 했던 사람인데, 이유영은 그가 숨기고 있는 것들에 대해 아무도 몰랐다. 그것들은 아마 믿을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다. 박연준은 앞에 있던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송연미랑 엔데스 현우는 대학 시절부터 알았고, 심지어 연애도 했었어! 하지만 결국 송연미는 엔테스 운빈이랑 결혼했지.” 이유영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거, 진짜 드라마 같네.” “왜?” 서로 사랑했던 두 사람이었고, 둘 다 엔데스 가문 사람이었는데, 왜 엔데스 운빈을 선택했을까? 박연준이 대답했다. “송연미와 엔테스 운빈 사이에 어떤 약속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송연미는 결국 그 사람과 결혼했어.” “헉!” 이유영은 그저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이 관계들은 말로 설명하기에도 믿기 힘들었다. “그럼 지금 상황은, 송연미가 엔테스 운빈에게 시집갔지만, 여전히 엔데스 현우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거야?” 이 말을 들으니, 이유영은 혼란스러워졌다. “그래, 그렇게 보는 게 맞지. 그렇게 되면 좀 엉뚱한 일이 되잖아?” 박연
“이 몇 년 동안, 송씨 가문은 송연미가 엔데스 운빈 옆에 있으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노렸고, 엔데스 운빈 역시 마찬가지야! 하지만 송연미는 엔데스 운빈에게 시집갔음에도 불구하고, 엔데스 현우와 관련된 일들은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어.” “엔데스 현우의 일들?” “응, 사실 엔데스 현우는 송연미에게 진심이었으니까, 송연미한테 털어놓은 것들도 많아.” “그럼 네 말은, 송씨 가문이나 엔데스 운빈, 둘 다 송연미를 가족으로 대하지 않고, 그저 그녀가 아는 엔데스 현우의 정보를 얻으려 했다는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그런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도, 엔데스 현우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심스러웠다.그들이 송연미를 엔데스 현우에게서 빼앗아 가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그 입에서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한 거니까. 지금 또 그와 같은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건, 결국 누군가가 은밀히 의도적으로 퍼뜨린 거라는 건 분명하다. 엔데스 현우는 이 모든 세월 동안, 밖에서 무슨 일을 겪었든, 여전히 엔테스 집안에서 사랑받고 있었다. 그 사랑은 모든 것을 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엔테스 가주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엔데스 가문 내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었다.“엔데스 가문의 여인들은 아무리 지위가 낮아도, 결혼 중에 다른 남자와 사귀면 큰 죄야.” 박연준은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유영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엔데스 현우를 그렇게 괴롭히고도 또 그러려는 거야?” 그 말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그 순간, 이유영은 소은지가 이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잠시 잊은 채, 엔데스 현우가 이런 가문에서 참으로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생각이 바뀌었다. “혹시 송연미를 이용해 엔데스 현우를 협박하는 거야?” 그래,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엔데스 현우와 송연미 사이의 관계를 떠올리면, 그들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