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윤세린은 계약서에 마지막 서명을 마친 뒤에야 손바닥에 맺힌 땀을 닦았다.
온결의 첫 전국 백화점 입점. 지난 반년 동안 공장과 매장을 오가며 수정한 샘플, 새벽까지 고쳐 쓴 제안서, 대금을 맞추느라 잠을 설친 날들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회의실을 나서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지후가 보낸 사진이었다. 다섯 살 하람이 거실 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종이 위에는 세 사람이 손을 잡고 있었다. 엄마, 하람이, 그리고 지후 삼촌.
[하람이가 엄마 케이크 기다립니다. 축하할 준비는 다 끝났어요.]
세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딸기 케이크 사 갈게요.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주세요.]
사진 속 아이는 짙은 눈썹을 모으고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저렇게 집중할 때면 누군가를 너무도 닮았다. 세린은 화면을 껐다. 오래전에 끝낸 일로 오늘의 행복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을 때는 벌써 저녁이었다. 세린은 차 열쇠를 꺼내며 직원에게 감사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검은 세단 두 대가 통로를 가로막으며 멈췄다. 낯선 차에서 내린 경호원들이 주변을 살피는 모습에 세린은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늦췄다.
뒷좌석 문이 열렸다. 검은 구두가 바닥에 닿고, 익숙한 체격의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세린의 손에서 열쇠가 떨어졌다. 콘크리트 바닥에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차태건.
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섯 해 동안 악몽에서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던 남자였다. 세린은 숨을 들이마셨지만 공기가 목에 걸렸다. 손끝이 저려 왔고, 무릎이 제멋대로 떨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지? 회사 주소를 알아낸 걸까? 하람이는? 설마 아이도 알고 있는 걸까?
세린은 반사적으로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 잠금 화면에는 하람이가 그린 그림이 떠 있었다. 그녀는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휴대전화를 뒤집어 가방에 밀어 넣었다.
태건은 그녀를 발견하자 차에서 내린 자세 그대로 굳었다. 희끗해진 관자놀이와 깊어진 눈가에도 그의 시선만은 예전과 같았다. 다섯 해를 헤매다 마침내 숨을 되찾은 사람처럼 입술을 떨며 한 걸음 다가왔다.
“……세린아.”
그 목소리를 듣자 세린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떨어진 열쇠를 줍는 대신 뒤로 물러섰다. 등 뒤에는 기둥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주차장 출입구가 보였다. 출구까지 스무 걸음 남짓. 경호원 둘이 통로에 서 있었지만, 저쪽으로 달리면 호텔 직원이라도 만날 수 있을지 몰랐다.
태건이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세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오지 마세요.”
갈라진 목소리가 주차장에 울렸다. 태건의 걸음이 멎었다. 그가 무언가 말하려고 손을 들자 세린은 기둥을 돌아 출구 쪽으로 달렸다.
구두 굽이 미끄러운 바닥을 긁었다. 뒤에서 태건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가방이 어깨에서 흘러내려도 붙잡을 겨를이 없었다. 오직 사람 많은 곳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세린아, 잠깐만!”
세린이 출입구 앞에 이르렀을 때 경호원 하나가 당황한 얼굴로 길을 비켰다. 그러나 뒤따라온 태건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숨을 몰아쉬던 세린은 급히 방향을 틀다가 기둥에 어깨를 부딪쳤다.
“비켜요. 제발…… 비켜주세요.”
태건은 그녀를 붙잡으려다 손을 멈췄다. 세린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때문이었다. 반가움도 원망도 아니었다. 낯선 위험을 마주한 사람의 공포가 그 눈에 선명했다.
“나야. 세린아, 나라고.”
그 말이 세린에게는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에 도망쳐야 했다. 다섯 해 전, 그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무너졌던 밤이 떠올랐다. 다시는 그의 앞에서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떠났고, 그 뒤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이름 없는 도시들을 옮겨 다녔다.
“알아요. 그래서 피하는 거예요.”
세린은 그를 지나치려 했다. 태건이 한 발 옆으로 움직이자 그녀는 곧바로 멈춰 섰다. 두 사람 사이에 몇 걸음의 거리가 있었지만 세린에게는 벽이 생긴 것처럼 느껴졌다.
태건의 얼굴이 무너졌다. 다섯 해 동안 그리던 재회였다. 세린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무엇이든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보자마자 도망쳤다. 그 사실이 가슴을 후벼 팠다.
“해치려는 게 아니야. 네가 살아 있는지만…….”
“그럼 길을 열어주세요.”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조사팀에서 보낸 첫 번째 자료였다.승재는 화면을 확인하다가 눈썹을 찌푸렸다.“회장님, 온결의 유통 계약과 관련해 확인된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태건이 고개를 돌렸다.“뭔데?”“오늘 윤 대표님이 체결하신 전국 백화점 입점 계약 말입니다. 계약 상대방의 유통 운영을 맡는 회사가 저희 그룹 계열사와 공동 사업 관계에 있습니다.”태건의 눈빛이 달라졌다.“정확히 어떤 관계지?”“현재 운영 협약을 맺고 있습니다. 다만 계약에 직접 관여할 권한이 있는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합니다.”태건은 승재에게 손을 내밀었다.“자료 줘 봐.”승재가 휴대전화를 건네자 태건은 화면을 천천히 훑었다. 세린이 지난 반년 동안 공들여 준비했다는 전국 백화점 입점 계약이었다.그녀가 오늘 그렇게 행복해했던 이유이자,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새로운 출발이었다.태건은 계약 관련 회사의 이름을 확인한 뒤 승재를 바라보았다.“이 회사 대표가 누구지?”“정민유통의 박정민 대표입니다. 저희 계열사와 공동 물류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태건은 익숙한 이름을 확인하고 손가락을 멈췄다.“지난달에도 우리 쪽에 사업 확대를 요청했던 곳 아닌가?”“맞습니다. 다만 윤 대표님의 계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태건은 휴대전화를 승재에게 돌려주었다.“내일 오전에 박 대표와 약속 잡아.”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직접 만나시겠다는 겁니까?”“확인할 게 있어.”“회장님, 온결이 이번 계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자금을 투입했는지 아십니까? 입점 일정이 틀어지기만 해도 윤 대표님께는 상당한 손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태건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린이 호텔에서 계약서를 받아 들고 환하게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녀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제 그 기쁨을 지켜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있는 위치에 자신이 서 있을지 몰랐다.“계약을 깨라는 지시는 아직 안 했어.”“하지만…….”“우선 내가 어디까지
태건은 사진 속 지후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렸다.“그 남자가 세린이 곁에 계속 있을 수 있을지 알아봐. 내가 가진 힘으로 어디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지도.”승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그렇게 하시면 윤 대표님은 회장님을 평생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태건의 손이 멈췄다.그는 한동안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세린이 자신을 향해 외치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회장님은 저를 버린 분이에요.’‘제가 누구를 만나든 상관하실 자격 없습니다.’‘제 인생에서 다시 사라져 주세요.’태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미 용서하지 않고 있잖아.”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오늘 그 눈을 봤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고, 가까이 가기만 해도 겁부터 내더군.”태건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그런데도 그 남자한테는 웃었어. 내가 다섯 해 동안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던 얼굴로.”태건은 사진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내가 뭘 더 잃을 수 있겠어?”승재는 그 말을 듣고 등골이 서늘해졌다.태건은 이미 세린의 사랑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미움이 더 깊어지는 것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그러나 승재가 보기에 태건은 아직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게서 멀어질 수 있지만,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든 사람에게서는 목숨을 걸고 도망치기도 한다는 사실을.태건은 의자에 앉아 사진 속 세린의 얼굴을 손끝으로 쓸었다.“내가 다섯 해 동안 잘못 생각했어.”승재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기다리면 돌아올 줄 알았지.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게 되면, 언젠가는 한 번쯤 나를 만나 줄 거라고 생각했어.”태건은 낮게 웃었다.“그런데 아니더군. 그 여자는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어. 오늘 그걸 똑똑히 봤어.”그는 사진을 내려놓고 승재를 바라보았다.“그러니까 이제는 나 없이 살 수 없게 만들어야겠어.”승재의 얼굴이 굳어졌다.“회장님, 제발 다시 생각해 보십
승재는 순간 말을 잃었다.태건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온결의 유통망, 투자 유치 내역, 은행 대출, 진행 중인 납품 계약까지 전부 조사해. 강지후가 관여한 부분도 빠짐없이 확인하고.”“윤 대표님이 끝까지 도움을 거절하시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태건은 대답하지 않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에는 아직도 세린이 도망치려 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급하게 달려 나가다 미끄러졌던 잔디밭과 경호원들이 가로막고 섰던 대문이 보였다.그녀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자신에게서 벗어나려 했는지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보내 줄 수 없었다.“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면 되겠지.”승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회장님, 그건 윤 대표님을 돕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힘들게 쌓아 올린 모든 걸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알아.”태건은 망설이지 않았다.그 짧은 대답에 승재는 오히려 더 큰 불안을 느꼈다.“알면서도 그러시겠다는 겁니까?”태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눈가에는 깊은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희끗한 머리카락이 늘어 있었다.다섯 해라는 시간이 자신에게 남긴 흔적이었다.“오 실장, 내가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승재는 대답하지 못했다.“세린이는 그 남자한테 돌아가겠지.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 남은 평생도 나 없이 살 거야.”태건은 창틀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나는 그걸 못 보겠어. 그 여자가 다른 남자 옆에서 웃는 걸 더는 못 견디겠다고.”승재는 태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다섯 해 동안 세린을 찾아 헤매던 태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자신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남자의 후회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도 믿었다.하지만 태건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린을 찾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예민해졌고, 그녀와 닮은 여자를 보았다는 제보 하나에도 모든 일정을
태건은 책상 위에 놓인 사진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강지후의 곁에서 웃고 있는 세린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자신이 지난 다섯 해 동안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동안, 저 남자는 그녀의 곁에서 함께 웃고, 밥을 먹고, 평범한 일상을 나누었을 것이다.사진 속 세린은 낯설 만큼 편안해 보였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늘 어딘가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때는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였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결국 곁에 남을 거라고 믿었다.그런데 세린은 떠났고,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저런 얼굴로 웃고 있었다.태건은 사진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오 실장, 온결의 주요 거래처부터 전부 파악해.”승재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윤세린의 지난 행적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어렵게 일으킨 회사였다.“온결에 투자를 검토하시려는 겁니까?”“투자는 무슨.”태건은 사진 속 지후의 얼굴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 남자가 없었다면 세린은 자신에게 돌아왔을까. 적어도 오늘 밤처럼 다른 남자에게 의지하며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자 억눌렀던 분노가 다시 치밀었다.“온결이 지금 누구와 거래하고 있는지, 자금은 어디서 조달하는지 전부 확인해. 계약 하나가 끊어졌을 때 어디부터 문제가 생기는지도 알아보고.”승재의 표정이 굳어졌다. 단순히 회사의 경영 상태를 살펴보라는 지시가 아니었다. 태건은 세린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손에 쥐려 하고 있었다.“회장님, 윤 대표님이 이 사실을 아시면 지금보다 더 멀어지실 겁니다.”“멀어져?”태건이 낮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오늘 봤잖아. 그 여자는 나한테서 도망칠 생각밖에 없어.”그는 사진을 뒤집어 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경찰관 앞에서 자신을 가리키던 세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강제로 끌려왔다고 진술했다.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자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던 모습도 생생했다.다섯 해 전에
같은 시각, 강지후는 세린의 마지막 통화가 끊긴 시각을 다시 확인했다.호텔 보안팀과 통화한 뒤 경찰에 신고했고, 세린이 탔던 차량의 번호와 이동 방향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통화가 끊기기 직전 들린 남자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차태건.다섯 해 전, 세린이 작은 여행 가방 하나를 끌고 찾아왔을 때 끝내 이름을 말하지 않으려 했던 남자였다.거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지후 삼촌.”하람이가 곰 인형을 안고 서 있었다. 잠옷 소매가 손등까지 내려와 있었다.“엄마는?”지후는 아이 앞에 무릎을 굽혔다.“조금 늦어지고 있어. 삼촌이 데리러 갈게.”하람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숫자를 전부 읽지는 못해도 엄마가 돌아올 시간을 지나쳤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케이크 사 온다고 했는데.”“응. 엄마도 그 약속 기억하고 있을 거야.”아이는 곰 인형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지후의 소매를 잡았다.“삼촌, 엄마가 전에 말했잖아.”“무슨 말?”“나쁜 아저씨가 찾아오면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고.”지후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하람이의 짙은 눈썹과 눈매가 노트북 화면 속 남자를 닮아 있었다.“혹시 그 아저씨가 엄마 데려갔어?”지후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를 안아 올려 소파에 앉혔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강지후 씨, 경찰입니다. 호텔 측 CCTV에 윤세린 씨가 도움을 요청하고 차량에 강제로 탑승하는 장면이 확인됐습니다. 현재 차량 동선을 확인 중입니다.”지후는 하람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통화를 이어 갔다.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아이가 곰 인형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전화를 끊은 지후는 오래전 세린의 말을 떠올렸다.‘그 사람이 저를 찾으면 안 돼요. 제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 더더욱요.’그때 지후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세린이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르고, 다시 일할 수 있도록 곁을 지켰다.그런데 결국 그 남자가 그녀를 찾아냈다.지후는 휴대전화를 다시 들었다. 경찰에게 차량 이동 방향을 전
태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세린은 그 틈에 가방을 열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지후의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남아 있었다.[세린 씨, 무슨 일 있어요? 하람이가 엄마 찾고 있어요. 전화 주세요.]세린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람이는 약속을 잘 기억하는 아이였다. 엄마가 케이크를 사 오겠다고 했으니 잠들지 않고 현관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그녀는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태건이 화면을 보고 다가왔다.“그 남자한테 또 전화해?”세린은 휴대전화를 가슴 쪽으로 감쌌다.“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정말 돌아가야 해요.”태건의 시선이 휴대전화 화면으로 떨어졌다. 그 위에 뜬 강지후의 이름을 확인하자 그의 얼굴에서 마지막 남은 온기가 사라졌다.세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람이의 이름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이 남자가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무슨 일을 벌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태건은 그녀의 침묵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그래. 그 남자겠지.”그는 천천히 넥타이를 풀었다. 손가락이 매듭을 한 번에 풀지 못하고 헛돌았다. 세린은 처음으로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네가 다른 남자와 사는 걸 내가 어떻게 봐.”“보실 필요 없어요. 저희는 끝난 사이니까요.”태건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피곤하고도 사나웠다.“나는 끝낸 적 없어.”“끝내지 않은 건 회장님 혼자예요.”그는 가까이 다가와 세린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세린이 고개를 돌리자 손이 허공에 멈췄다. 잠시 후 태건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다섯 해 동안 하루도 너를 잊지 못했어.”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처음엔 찾아내서 따지려고 했어. 왜 나를 버렸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네가 살아 있는지만 확인할 수 있어도 좋겠더라.”세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진심이라고 해서 그가 저지르는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그렇게 그리웠다면 저를 놓아주세요.”태건은 현관 쪽을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