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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합니다

Autor: 안나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7-14 21:02:07

옥상 정원에서의 그 짧고도 강렬했던 조우가 지나간 다음 날 아침, 9층 기획팀 사무실의 공기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박 차장에게 아이디어를 약탈당하고 선배들의 침묵 속에 고립되었던 신입 사원. 하지만 연수는 단 한 자락의 처량함도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연수는 빳빳하게 각이 잡힌 네이비색 테일러드 재킷에 깃이 높은 화이트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단하게 묶어 올린 그녀의 얼굴은 파리했지만, 투명한 눈동자만큼은 얼음송곳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하연수 씨, 이번에 프랑스 본사에서 급하게 내려온 ‘글로벌 럭셔리 라인 컨셉 보완 건’이 있어. 다들 기존 프로젝트로 손이 모자라는데, 연수씨가 새 기획안을 한번 맡아볼래?”

장 차장이 눈치를 보며 던진 서류 봉투는 사실상 독이 든 성배였다. 본사의 까다로운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독박을 쓰기 십상인 버려진 과제. 하지만 연수는 주저 없이 그 서류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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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170화. 용서 할 수 없는 사과

    그날 오후. 강 회장은 자택 정원에서 연수를 따로 만났다. 겨울을 앞둔 정원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뭇가지에는 잎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회색빛 하늘 아래 앙상한 가지들만 조용히 흔들렸다. 연수는 정원 중앙의 작은 연못 앞에 서 있었다. 짙은 갈색 코트를 입은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하얗고 단정한 얼굴에는 차분함이 깃들어 있었지만, 눈빛 안에는 여전히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남아 있었다. 오늘 강 회장의 사과를 들었다. 세상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도 보았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사과로 이십 년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뒤에서 지팡이 소리가 들렸다. 연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강 회장이 수행원의 도움을 거절한 채 홀로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몇 걸음 앞에 멈춘 그는 한동안 연수를 바라보았다. 연수의 눈매와 입술,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오래전 하정우의 얼굴을 본 듯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많이 닮았구나.” 강 회장이 낮게 말했다. “네 아버지와.” 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 회장은 지팡이 위에 두 손을 포갠 채 시선을 내렸다. “정

  •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169화. 너무 늦은 고백

    하정우의 명예가 공식적으로 회복된 뒤에도 세상의 관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검찰의 수사 결과가 발표되자 언론은 연일 태성그룹의 과거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이창석이 조성한 불법 비자금과 정우산업의 몰락,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알고도 침묵했던 강 회장의 책임까지 하나씩 세상에 드러났다. 사람들은 태성그룹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지켜보고 있었다. 끝까지 책임을 회피할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쌓아 올린 권력의 기반을 허물고 진실 앞에 설 것인지. 며칠 뒤, 태성그룹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발표했다. 기자회견 당일. 태성그룹 본사 대강당은 이른 시간부터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단상을 향해 설치됐고, 기자들은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 강 회장의 등장을 기다렸다. 정면 대형 화면에는 태성그룹의 로고만이 떠 있었다. 평소라면 자부심과 권위를 상징했을 그 로고는 오늘따라 무겁고 차갑게 느껴졌다. 마침내 대강당 옆문이 열렸다. 강 회장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평소처럼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아니었다. 넥타이는 조금 느슨하게 매여 있었고, 병원 생활로 야윈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한 손에는 검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강 회장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한 걸음씩 단상으로 향했다. 대강당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수십 년간 대한민국 재계를 움직여온 인물이었다. 그가 회의장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의 모습에는 거대한 그룹의 지배자가 지닌 위압감이 없었다.

  •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168화. 다시 시작하는 이름

    태성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연수는 그 온기에 의지해 간신히 무너지지 않고 서 있었다. 브리핑이 끝나자 기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많은 취재진이 연수와 태성을 향해 몰려왔다. “하연수 씨, 아버지의 무혐의가 공식 확인된 심경이 어떠십니까?” “하정우 대표의 명예 회복을 위해 추가적인 법적 조치를 진행하실 계획입니까?” “태성그룹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실 생각입니까?” “강태성 대표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순식간에 수십 개의 마이크가 연수 앞에 들이밀어졌다.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태성은 본능적으로 연수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그러나 연수가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태성이 그녀를 돌아봤다. 연수는 괜찮다는 듯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큼은 숨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뒤에 가려지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은 하정우의 딸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이름을 세상 앞에서 당당히 부를 수 있는 날이었다. 연수는 아버지의 사진을 가슴 앞에 들고 기자들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많은 분이 오늘을 승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브리핑룸 안이 조용해졌다. 연수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수많은 마이크를 통해 또렷하게 전달됐다. “저도 언젠가 이 순간이 오면 기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아버지의 사진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의 이름이 돌아

  •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167화. 되찾은 아버지의 이름(2)

    검은 정장을 입은 그의 얼굴은 세월 때문에 조금 바래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따뜻했다. 연수의 뒤로 태성이 들어왔다. 그가 나타나자 브리핑룸 안의 시선이 잠시 그에게로 향했다. 태성은 검은색 정장에 짙은 회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오래되지 않아 얼굴에는 아직 옅은 피로가 남아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창백한 피부와 선명하게 드러난 턱선은 그가 겪은 시간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총상을 입었던 오른쪽 어깨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재킷 안쪽으로 얇은 보조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 탓에 한쪽 어깨의 움직임은 조금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키가 크고 곧게 선 모습과 깊고 차분한 눈빛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예전의 태성이 날카롭고 차가운 완벽함으로 사람들을 압도했다면, 지금의 그는 고통을 지나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단단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태성은 연수 곁으로 다가가 아무 말 없이 섰다. 그리고 다치지 않은 왼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 손길은 연수를 끌어당기거나 보호하려는 과장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조용한 약속이었다. 연수는 태성을 올려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태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오늘을 함께 보겠다고. 아버지의 이름이 되돌아오는 순간을 그녀 혼자

  •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166화. 되찾은 아버지의 이름(1)

    구급차 안에서 연수는 태성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아버지에게 조용히 약속했었다. 이제 곧 이름을 돌려드리겠다고. 그 약속이 세상 앞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폐공장에서 이민우가 체포된 뒤,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태성그룹과 정우산업의 과거는 거대한 퍼즐이 맞춰지듯 빠르게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검찰청은 사건의 규모와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했다. 그동안 여러 사람의 손에 흩어져 있던 증거들이 하나의 수사 기록 안으로 모였다. 강 회장과 이창석이 나눈 마지막 통화 녹음. 오랜 죄책감 끝에 박성규가 남긴 증언과 육성 기록. 화재 현장에서 회수된 원격 발화 장치의 작동 기록. 화재가 발생하기 전 미리 작성된 기사 초안. 태성과 진혁이 추적한 비자금 계좌의 거래 명세. 그리고 연수가 목숨을 걸고 확보한 납치 현장의 녹음 파일까지. 서로 상관없어 보였던 증거들은 정교하게 맞물렸다. 하나의 증거가 또 다른 증거를 뒷받침했고, 또 다른 기록은 누락된 시간과 인물을 채워 넣었다. 흩어져 있던 진실의 파편들은 이제 이민우와 그 일당이 빠져나갈 수 없는 견고한 그물이 되어 있었다. 특히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해 복원된 불탄 장부의 잔해는 결정적이었다. 대부분의 종이는 검게 타버렸지만, 불길이 완전히 삼키지 못한 몇몇 페이지에서는 계좌번호

  •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165화.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았다

    현장 감식반은 불길이 미처 삼키지 못한 장부의 잔해를 조심스럽게 수거하고 있었다. “물을 뿌리지 마십시오. 종이 조직이 더 훼손될 수 있습니다.” “보존 용기에 바로 옮기세요.” 장부는 대부분 검게 타버린 상태였다. 가죽 표지는 형태조차 알아보기 어려웠고, 수많은 페이지가 재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두꺼운 장부를 묶고 있던 금속 잠금장치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안쪽에 있던 몇 장의 페이지도 불길이 완전히 닿지 않아 일부 글자와 숫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감식 요원 한 명이 핀셋으로 검게 탄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여기 계좌번호가 남아 있습니다.” 진혁이 다가왔다. 그는 태성이 가져온 복사 자료를 꺼내 페이지에 남은 숫자와 대조했다. M-17 특별관리계좌. 남아 있는 계좌번호와 날짜, 송금 금액이 태성과 연수가 이미 확보해둔 자료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진혁의 표정이 굳었다. “틀림없습니다.” “원본이라는 뜻입니까?” 현장 감식관이 물었다. 진혁은 금속 잠금장치 안쪽에 새겨진 작은 번호를 확인했다. 강 회장의 금고에서 발견한 장부 보관 기록에 적혀 있던 관리번호와 같았다. “네.” 진혁이 낮게 대답했다. “이게 우리가 찾던 원본 장부입니다.” 감식관은 곧바로 사진을 촬영하고 잔해를 증거물 용기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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