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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1화

하예정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다음에 우빈을 데리러 오면 내가 직접 말씀드려야겠어요. 우빈은 체질이 약해서 간식들을 많이 먹으면 안 돼요. 조금만 먹어도 목이 염증이 생기거든요.”그녀는 우빈의 친이모로서 주씨 집안과도 오랜 세월을 연락하며 살았다.하여 그녀가 이야기하면 오히려 더 부드럽게 전해질 것이다.주경진 부부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하예정의 말을 듣고 언짢아하지는 않을 터였다.하지만 만약 노동명이 그런 말을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주씨 집안은 괜히 그가 우빈과 친가 쪽의 관계를 이간하려 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우빈이 엄마를 따라 노동명과 재혼 가정으로 들어간 건 그들에게 여전히 마음속의 가시 같은 일이었으니까.물론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예전에 김은희는 아들에게 우빈의 양육권을 다시 찾아오는 건 어떠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나 주형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했다.“우빈은 엄마와 함께 있는 게 더 안정적이에요. 하예진은 경제적으로도 생활 환경도 저보다 훨씬 나아요.”결국 주경진 부부도 더는 고집하지 않았다.현실적으로 보더라도 하예진 쪽이 훨씬 나은 조건이었으니까.게다가 하예정은 여전히 관성에 남아 있었고 그녀가 우빈을 거의 키우다시피 했다.그녀는 우빈을 자기 친아들처럼 돌보았다.적어도 손자가 노동명의 집에서만 자라는 건 아니었으니까.그들은 또 알고 있었다. 하예진과 노동명이 혼인 신고를 하고도 노동명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노동명 부부는 하예진의 집에서 따로 살고 있었다.그 점도 주경진 부부에게는 묘한 위안이 되었다.노동명은 하예정이 자신을 대신해 조심스레 나서주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는 낮게 대답했다.“그래. 다음에 그분들 오시면 한마디 해줘. 너무 많이 먹지 말라고. 먹고 싶으면 우리가 집에서 직접 만들어준다고 전해줘.”우빈이 좋아하는 음식들은 사실 대부분 사람 눈에는 쓰레기 음식이었다.하지만 집에서 직접 만들어주면 조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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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2화

하예정이 다가와 정겨울 맞은편에 앉았다.“형부한테 물어봤어요. 지난주 토요일에 우빈이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데리고 그분들 집으로 가셨대요. 그때 치킨이랑 감자튀김, 감자칩 같은 걸 잔뜩 먹였대요. 여긴 날씨가 따뜻해서 그런 음식 많이 먹으면 금세 목에 염증이 생기죠.”하예정은 결혼 전에도 가끔 햄버거를 즐겨 먹곤 했다.하지만 먹고 나면 꼭 한약방에 들러 한약재로 끓인 차를 마셨다.안 마시면 이틀도 안 되어서 목이 붓고 통증이 생겼기 때문이다.그래서 관성 사람들은 대부분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한 음식을 선호했다.그건 단순한 식습관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생활 방식이었다.“운초 씨는 좀 나아졌어요?”하예정이 다정하게 물었다.여운초는 요즘 몸을 조리하는 중이었고 완전히 회복되어야 정상적인 임신이 가능했다.정겨울은 앞에 놓인 따뜻한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올해 안으로 몸 다 회복하면 약을 끊어도 돼요. 반년 정도 조심하면 임신 준비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여운초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출산을 고려해도 서른 살 안팎이니 전혀 늦지 않았다.일에 바쁜 여성들은 대개 30대에 결혼을 생각하기 시작해 출산 시점이면 이미 고령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자녀는 한 명만 낳는다.여운초 부부는 아이를 매우 좋아했기에 정겨울은 그들이 적어도 두 자녀를 가질 것이라고 예상했다.전이진의 경제적 능력도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그녀 본인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에 그들은 돈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잘됐네요. 운초 씨도 아이를 무척 좋아하잖아요. 도련님도 그렇고요. 겉으로는 아이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운초 씨가 부담 가질까 봐 그런 말 하는 거죠.”정겨울이 부드럽게 웃었다.“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정말 다 좋네요.”“정겨울 씨네도 다를 바 없잖아요. 준일 씨도 좋은 사람이고요. 둘째는 생각 없어요?”정겨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저는 없어요. 예준일 씨도 둘째 생각 없어요. 저는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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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3화

“강성 쪽은 이윤미 씨가 곧 떠날 예정이래요. 언니랑 일을 빨리 인수인계하고 나면 바로 물러난대요. 이씨 그룹은 정월 초여드레부터 업무를 재개했으니까 언니가 일찍 강성으로 간 것도 그 때문이에요. 언니는 앞으로 이씨 가문을 정식으로 맡게 돼요. 그러려면 가문의 어른들과도 시간을 보내고 직접 챙겨야 할 일들이 많거든요.”하예정은 부드럽게 배를 쓰다듬었다.“나도 언니 따라가서 도와주고 싶긴 한데 지금은 이 몸이라 언니가 혼자 다 해야 해요.”이경혜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다.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하예진에게 모든 권리를 맡겨주었다.하예진이 직접 부딪히고 해결하며 이씨 가문의 일들을 감당해야 진정한 리더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시험이자 위엄을 쌓는 일이기도 했다.노동명은 몸이 불편해 동행할 수도 없었다.괜히 따라갔다가 언니의 신경만 더 쓸 일 생길 테니까.지금의 하예진은 말 그대로 혼자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정겨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사실 예정 씨가 몸이 괜찮더라도 따라가는 건 좋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예진 언니가 오히려 주변 사람들한테 인정받기 어려워질 수도 있어요. 원래부터 갑자기 후계자로 떠오른 사람이니까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는 모습을 보여야 해요. 이씨 가문 안에도 젊고 유능한 사람들과 연륜 있는 어른들이 많을 텐데... 그분들이 정말 아무 생각이 없겠어요? 당장은 가문의 오래된 규칙 때문에 가만히 있지만 만약 예진 언니가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새로운 후계자를 세우자는 이야기가 나올 거예요. 그런데 언니는 일을 잘하잖아요. 복귀한 지는 2년밖에 안 됐지만 원래 능력 있는 사람이었어요. 당신은 너무 걱정하지 마요. 스스로 잘 해낼 사람이에요. 이윤미 씨가 진심으로 가문을 넘기려는 거라면 더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 사람은 생각이 올바르고 동시에 결단력도 있는 사람이에요. 게다가 옆에는 방 비서님도 있잖아요. 두 사람은 정말 완벽한 파트너예요. 이윤미 씨는 자기 아버지와 세 명의 형제를 상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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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4화

하예정은 조카를 키워본 덕분에 어느 정도 경험이 있었다.그녀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다.특히 몇 개월 된 아기들을 보면 그 작고 부드러운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게 느껴졌다.정겨울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난 그게 제일 힘들어요. 울음소리... 아기들은 다 그런 거라고 머리로는 알아도 막상 계속 울면 진짜 힘들어요. 엄마 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어요. 그래서 엄마 되고 나니까 스승님한테 더 감사해졌어요. 저의 스승님은 결혼도 안 하시고 자식도 없으신데 고아인 저를 거두시면서 억지로 부모가 되셨죠. 저를 키워주시고 가르쳐주시고 의술까지 전해주셨고요. 친부모보다 더한 사랑을 주셨거든요. 저한테는 그분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인이고 평생 보답해야 할 분이에요. 지금도 훈이를 봐주시고 제자를 봐주시잖아요. 용정은 거의 스승님께서 직접 가르치고 계시거든요. 제 제자지만 사실상 스승님의 제자나 다름없어요.”정겨울은 시간이 날 때마다 용정을 지도했다.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에 용정은 김청산과 몇몇 세외고수와 함께 지내며 그들 곁에서 배우고 있었다.하예정이 부드럽게 웃었다.“신의님은 예훈이를 엄청 예뻐하시잖아요. 예훈이도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그분도 한때 손주 안겨보는 게 소원이었을 거예요. 지금 훈이를 돌보시면서 그 행복을 느끼고 계시잖아요. 그것도 효도죠. 용정이도 잘 크고 있고 어르신들께서도 워낙 아껴주시니까 시름이 놓이지 않아요? 그리고 어르신들과 겨울 씨네 사형제자들이 다 그 아이를 사랑하잖아요. 그런 사랑 속에서 자란 아이가 나중에 삐뚤어질 리 없어요.”용정은 어릴 적부터 김청산의 곁에서 자라났다.다시 말해 수많은 거물의 눈앞에서 성장한 셈이었다.지금부터 이삼십 년이 흘러 용정이 복수할 능력을 갖추고 돌아왔을 때 그 거물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들은 결코 손 놓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며 용정이가 다치는 일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모연정 부부가 그를 김청산에게 맡기기로 한 것은 가장 현명한 결정이다.정겨울이 미소를 지었다.“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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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5화

우빈은 하예정이 자신을 안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몸이 아픈 탓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이모 품에 기대고 싶었다.“이모, 죽 먹고 싶어요.”유치원에서도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아이였다.그런데 이제 열이 내리고 나니 허기가 밀려왔는지 따뜻하고 부드러운 죽이 먹고 싶다고 한다.하예정은 아이를 살포시 품에 안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온 듯했다.그녀는 아이를 안은 채 아래층으로 내려와 체온계를 꺼내 들고는 주방에 일러 죽을 준비하게 했다.“이모가 미리 죽을 끓여두지 못했네. 우빈아, 죽은 좀 기다려야 해.”우빈은 그녀의 품속에 얼굴을 파묻고 힘없이 속삭였다.“근데 저 너무 배고파요. 이모, 과자 먹어도 돼요?”하예정은 고개를 들어 옆에 있던 정겨울을 바라봤다.“감기 걸린 아이가 과자 조금 먹는 건 괜찮을까요?”“조금은 괜찮아요. 대신 너무 많이 먹이면 죽은 못 먹으니까 적게 먹여요.”하예정은 작은 조각의 과자를 하나 집어 아이에게 건넸다.그러자 우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이 말했다.“이모가 먹여줘요.”“그래, 이모가 먹여줄게.”아이는 아플 때마다 이렇게 한없이 애교가 많아졌다.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스스로 하려 하지 않고 꼭 품에 안겨 있으려 했다.우빈이가 태어나서부터 돌봐온 하예정은 그런 꼬마의 버릇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부드럽게 과자를 한입 크기로 떼어내 아이의 입에 넣어주었다.우빈은 순하게 입을 벌리고 는 동안에도 여전히 이모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몇 분 뒤, 정겨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예정 씨, 이제 체온계 꺼내도 될 것 같아요.”하예정은 체온계를 꺼내 확인했다.“37.8도네요. 아직 완전히는 안 내려갔어요.”하예정이 건넨 체온계를 본 정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약은 아직 한 번밖에 먹이지 않았잖아요. 목이 조금 부어서 미열이 남은 거예요. 한 번 더 먹이면 금세 내려갈 거예요.”정겨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따뜻한 물 한 컵을 따라왔다.“우빈아, 물 좀 많이 마셔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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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6화

“이모, 왜 여기 날씨는 그런 음식이 안 좋은 거예요?”“여긴 일 년 내내 여름이 길고 덥잖아. 겨울에도 춥지 않으니까 이런 기후에서는 고칼로리 음식을 많이 먹으면 몸이 쉽게 상해.”외지 친구들은 늘 관성 사람들은 매운 걸 못 먹는다고들 한다.하지만 사실 매운맛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좋아해도 몸이 그걸 잘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우빈은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예정은 조카가 아직 어려서 말로 해도 잘 모를거로 생각하며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열은 좀 내렸어?”노동명이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현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문턱에 들어서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하예정은 품에 안고 있던 우빈을 내려놓았다.“아저씨.”우빈이 반가운 듯 달려가자 노동명이 곧장 그를 안아 올렸다. 경호원이 밀어 온 휠체어에 앉은 는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어 잠시 살폈다.“아직 조금 열이 남은 것 같네.”하예정이 다가와 말했다.“열은 거의 다 내렸어요. 방금 봤는데 37.8도더라고요. 약 한 번만 더 먹이면 완전히 내려갈 거예요. 형부, 바쁜데 뭐 하러 직접 오셨어요. 저 혼자 충분히 돌볼 수 있어요.”하예정은 일부러 전태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괜히 그녀의 남편까지 달려오면 일이 커질 게 분명했다.노동명은 고개를 저었다.“걱정되어서 그래. 직접 봐야 안심이 되거든. 회사야 나 없어도 돌아가. 나에게는 우빈이 먼저야.”그의 말투에는 깊은 애정이 묻어 있었다.우빈은 그의 품속에서 고개를 들어 말했다.“아저씨, 저 엄마 보고 싶어요.”노동명은 아이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하자. 우빈이가 다 나으면 이번 주 금요일에 엄마 보러 가자. 학교 끝나고 바로 출발하자. 어때? 우빈이가 약을 잘 먹고 푹 쉬면 금방 나을 거야.”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감기가 단순히 이불을 걷어차고 잔 탓만 아니라 치킨을 너무 많이 먹은 결과라는 것을 이제 알아차렸다.그 사이 심효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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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7화

자신의 스승 김청산을 떠올린 정겨울이 웃으며 말했다.“사실 어르신들은 다 비슷해요. 우리 스승님도 그래요. 3일만 예훈이를 못 보면 애가 살 빠졌네, 우리가 제대로 안 챙긴다고 잔소리하세요. 심지어 제가 아들 굶긴다고 의심까지 해요. 훈이는 제가 열 달 품고 낳은 아인데 안 이쁠 리가 있겠어요? 아무리 울보에다 손 많이 가도 내 친아들인데 설마 굶기기야 하겠어요? 그분들도 다 오버하는 거예요. 겉으로는 엄하시지만 손주 사랑은 또 다른가 봐요. 제가 어릴 때는 숙제를 못 하면 밥도 못 먹게 하셨거든요. 그땐 굶어도 눈 하나 깜빡 안 하셨는데 지금은 예훈의 얼굴만 봐도 살 빠졌다고 호들갑이에요.”하예정이 웃으며 맞장구쳤다.“그게 바로 손자 사랑이죠. 연정 씨도 그런 얘기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집에 가면 온 가족이 자기만 챙기고 난리였는데 애 낳고 나서 혼자 가면 엄마가 애도 없이 뭐 하러 왔냐고 한대요. 애들이랑 같이 가면 또 세상 행복한 얼굴로 반기시는데 정작 시선은 전부 애들한테 가 있대요. 예전에는 가족의 중심이 자기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밀려났대요.”그 말을 하던 하예정의 눈빛이 문득 부드러워졌다.이야기하다 보니 하예정은 문득 자신의 부모님이 떠올랐다.만약 그녀의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셔서 지금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될 나이라면 다른 사람들처럼 손주만 봐도 환하게 웃으셨을 것이다.혹시 자식이 손주를 데려오지 않고 혼자만 찾아간다면 돌아서며 이렇게 말씀하셨을지도 모른다.“애도 안 데려오고 너 혼자 와서 뭐 하려고?”아내가 멍때리고 있자 전태윤이 이내 말을 건넸다.“왜 그래?”정겨울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이 부부는 언제 봐도 다정했다. 하예정이 잠깐 멍하니 있어도 전태윤은 바로 눈치챘다.정겨울의 남편 예준일 역시 아내를 누구보다 아껴주는 사람이었다.그녀들은 하나같이 사랑을 듬뿍 받는 여자들이었다.하예정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할머니가 우빈이를 예뻐하시고 또 겨울 씨랑 얘기하다 보니까 갑자기 생각나서... 우리 부모님이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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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8화

전태윤이 하예정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가자. 오늘은 나랑 같이 산부인과에 다녀오자.”그는 오전 일정을 전부 미뤄 두었다.회사보다, 일보다 지금은 아내가 먼저였다.두 사람은 복도를 걸어 나오다 우연히 여운별과 마주쳤다.여운별은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타이르듯 말하고 있었지만 아이는 삐친 얼굴로 시선을 돌린 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전 대표님, 사모님. 우빈이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시는 길이세요?”여운별이 걸음을 멈추며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그녀의 시선이 전태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 이내 하예정의 얼굴에 고정되었다.하예정은 임신 28주, 이제 막 29주를 향해가고 있었다.한편 심효진은 벌써 32주였다.남편 소정남은 아내가 다시 서점에 나가는 것을 말렸지만 그녀는 집에만 있는 게 너무 답답하다며 버텼다.심효진은 한 달만 더 출근하고 그 뒤에는 집에서 조용히 몸을 돌보며 뱃속의 작은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소정남은 하는 수 없이 내버려두기로 했다.심효진의 곁에는 언제나 소씨 집안의 경호원이 따라붙었다.그 과도한 걱정은 전태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밤마다 하예정이 불편한 자세 때문에 자주 뒤척일 때면 그는 매번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작은 생명을 뱃속에 품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전태윤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 여자를 평생 지켜야 한다고.그녀는 사랑 때문에, 단지 사랑 하나로 그의 아이를 품고 있었다.그녀에게만큼은 어떤 실수도, 어떤 상처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사모님.”여운별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하예정도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안녕하세요.”그녀는 더 이상 이 여자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었다.그 여자의 등 뒤에는 용태호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으니까.얼마 전 공은호가 관성을 방문했을 때 그의 수제자 염천매도 함께 왔다.그 무렵 전태윤이 그들에게 이 일을 언급했던 모양이다.며칠 지나지 않아 하예정은 깨달았다. 여운별이 용씨 사모님을 사칭하며 자신에게 접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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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9화

만약 원수들이 계속해서 집착한다면 원림성 H시에서 용씨 가문의 사업을 억제하고 압박할 수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용정을 돕는 셈이었다.하지만 전태윤은 하예정에게 말했다. 용정을 해친 원수는 비록 용씨 가문의 사업을 이어받았지만 진정으로 그 사업을 지배하거나 움직일 수는 없다고.그 원수는 용씨 가문의 도템도, 권한 증표, 그리고 가주 전용 도장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 모든 중요한 물건은 이미 김청산에게 맡겨져 있었다.모연정이 그것들을 직접 김청산에게 건네며 용정을 위해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그 몇몇 세외고수는 오제당의 옛 세대 인물들이었고 이제는 세상과 인연을 끊은 지 오래였다. 하여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얼마 남지 않았으며 그들의 은신처를 아는 이는 더더욱 드물었다.따라서 용씨 가문의 그 중요한 물건들을 김청산에게 맡기는 것은 예진 리조트에 두는 것보다 훨씬 안전했다.용씨 가문의 도템 문양은 용정의 등 뒤에 새겨져 있었다.하예정은 처음 그 문양을 보았을 때 그것이 단순히 신분을 상징하는 표시가 아니라 가문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것으로 추측했다.하지만 그것은 용씨 가문의 일이었고 용정도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네댓 살짜리 아이였기에 하예정은 더는 묻지 않았다.용씨 가문의 선조들은 강성의 이씨 가문보다 더 멀리 내다보는 똑똑한 사람들이었다.그들이 세운 규칙은 훨씬 철저하고 치밀하여 설령 누군가가 자리를 빼앗는다 해도 모든 것을 온전히 차지하기는 쉽지 않았다.만약 가문 내부의 야심가들이 현임 가주의 일가를 모조리 죽여버린다고 해도 가주의 상징물인 도템과 권한 증표가 없으면 진정한 계승자가 될 수 없었다.현재 용태호가 용씨 가문의 사업을 임시로 관리하고 있지 언젠가 용정이가 가주의 증표들을 손에 쥐고 돌아오는 순간 용태호가 지금껏 쌓아 올린 모든 것은 결국 용정을 위해 마련한 무대가 된다.그가 과연 순순히 받아들일 리 있겠는가.그래서 용태호는 끊임없이 용정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아이가 아직 어릴 때 제거하려 하는 것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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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90화

여운별은 경호원 두 사람을 통해 겨우 용태호의 근황을 알아냈다.그 남자는 요즘 새로운 여자를 만나 즐기며 다닌다고 했다.여운별은 차지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싫증이 난 모양이었다.처음에는 열에 들뜬 듯 그녀를 감싸안더니 이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만약 그녀가 쓸모가 없었더라면 용태호는 진작 그녀를 내팽개쳤을 것이고 용돈도 보내주지 않았을 터였다.지금이라도 겨우 명목상의 용 사모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그가 시킨 일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었다.그 일을 마치는 순간 여운별은 버려질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여운별은 요즘 들어 쓰는 돈도 아껴 썼다.아낀 돈을 모아 그 일을 끝내는 대로 관성을 떠날 생각이었다.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새 인생을 시작하리라고 마음먹었다.‘집을 사고 차도 사고 가게 두어 개만 운영하면 돼. 그 돈으로 생활비 벌고 나중에는 젊고 잘생긴 남자 만나 결혼해서 애 낳고 살면 되지. 그리고 여씨 가문의 재산도 언젠가 꼭 되찾을 거야. 전부는 못 가져도 최소 삼 분의 일은 내가 가져야지. 그걸 여운초한테 죄다 넘길 순 없어.’여운별은 무심코 자신의 배를 쓸어내렸다.그 안에는 한때 생명이 있었다.그녀가 처음으로 품었던 생명이었다.아기를 지워낸 뒤로 여운별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볼 때마다 시선이 잠시 머물곤 했다.그 아이가 만약 세상에 남아 있었다면 올해쯤이면 세상에 태어났을 터였다.여운별은 하예정이 몹시 원망스러웠다.그녀는 여전히 하예정을 향한 분노를 꾹꾹 눌러 담고 있었다.만약 그 여자가 나서서 여운초를 돕지 않았다면 자신이 굳이 하예정 부부를 건드릴 이유도 없었다.그러면 전태윤의 눈에 띄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이후의 모든 파국도 없었을 것이다.그 뒤로 수많은 일들이 생겼다. 여운별의 부모는 감옥에 들어갔고 그녀가 점찍었던 남자 전이혁은 오히려 그녀의 형부가 되어 버렸다.게다가 여운초는 전씨 가문의 둘째 며느리가 되어 신의 제자 정겨울에게 치료받으며 10만에 시력을 되찾았다.그뿐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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