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141 - Chapter 1150

1190 Chapters

제1141화

“어이, 구 교수? 사람 다 갔는데, 아직도 보고 있네?”장민이 옆에서 세영을 쿸 찔렀다.세영은 시선을 거두며 무심하게 대답했다.“그게 장 교수랑 무슨 상관이야?”하지만 장민은 전혀 개의치 않고, 여전히 싱긋 웃으며 말했다.“남 연애하는 거 보고 있어봤자 뭐해? 직접 해야 재밌지, 안 그래?”세영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묵묵히 옆을 지나치려 했다.하지만 장민은 또다시 스멀스멀 다가왔다.“장 교수!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세영은 결국 폭발했다.“하고 싶은 말은 속에 담아두면 병 돼. 감정은 터뜨려야 제맛이라니까?” “뭐라는 거야, 정말! 내가 무슨 감정이 있다고?”‘진짜, 이 사람 왜 이렇게 갑자기 진지한 척을 해?’장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난 다 알아. 조재석, 짝사랑했던 거잖아!”세영이 말문이 막혔다.‘미쳤나, 진짜?!’세영은 장민을 거칠게 밀치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장민은 또 따라왔다.“짝사랑 정도야, 인생 살다 보면 누구나 하는 거잖아. 나도 해봤고...”‘너를...’장민은 입안까지 올라온 말을 꾹 삼켰다.어제 재석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급하게 굴면 일을 그르치게 될 거야.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천천히 해야 해.”‘그래, 지금은 아니야. 지금 고백하면, 바로 차인다.’장민은 몇 번 속으로 심호흡하며 정신력을 다잡았다.“구 교수, 내가 복수해 줬잖아!”세영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무슨 복수?”“내가 소정은한테 관심 있는 척하고, 그걸 재석이한테 슬쩍 흘렸어. 재석이, 완전 멘붕 왔더라니까?” “집중 훈련 중이라 안에 들어오진 못했지만, 분명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었을걸? 거의 이 잡듯 신경이 곤두서 있었을 거야.” “하나도 안 웃겨.”세영이 단호하게 잘랐다.“그래... 사실 나도 느꼈어.”‘문제는 소정은이 아무 반응 없었다는 거지. 계획이 살짝 틀어졌네.’“아, 혹시 ‘이 잡듯이’는 좀 오버였나? 너무 드라마 같았지?” “응.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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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2화

서로의 숨결이 맞닿고, 코끝이 살짝 스쳤다.그리고 자연스럽게, 입술과 입술도 맞닿았다.처음엔 봄 햇살처럼 따뜻하고 부드럽던 재석의 입맞춤이, 점점 더 깊어지고 뜨거워졌다.반쯤 잊고 있던 갈증을 다시 떠올린 듯한, 애틋하면서도 조급한 키스였다.‘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어.’머릿속이 하얘진 정은은 숨을 몰아쉬며 재석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어느새 티셔츠 한쪽 어깨끈이 흘러내려, 차가운 밤공기 속 정은의 쇄골을 드러냈다.재석의 입술이 입가에서 목선으로, 또 그 아래로 천천히 옮겨가려는 순간, 정은이 남자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재석 씨, 그만해요.”목소리는 살짝 떨렸지만 단호했다.재석은 정은의 가슴 앞에서 얼굴을 들었다. 눈동자엔 아직도 식지 않은 열기가 남아 있었다.하지만 이내 숨을 고르며 억눌렀다.“자기야. 보름 만이야. 나, 하나도 안 그리웠어?”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그의 표정엔 짓궂은 장난기와 진심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정은은 할 말을 잃었다.‘그런 걸 어떻게 말해... 말할 수가 없잖아...’“일단 집에 가요, 네?”정은이 눈을 피하며 말했다.재석은 웃으며 정은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차 문을 열고 내렸다.“좋아.”정은은 약간 어색하게 말헸다.“그런데...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안 돼요?” “응? 왜?”정은은 손가락으로 재석의 바지를 가리켰다.“좀, 티 나요.”5분 후,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지하 주차장을 나섰다.조용한 골목길, 은은한 가로등 불빛.그 아래, 둘의 그림자가 나란히 늘어져 있었다.그날 밤... 긴장과 설렘, 그리고 안도 속에 둘은 나란히 잠들었다.하지만 새벽 4시, 목이 말라 깬 정은은 핸드폰 화면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아... 벌써 4시야?’몸을 일으켜 물을 마시러 가려고 할 때, 재석이 눈을 떴다.“자기야...?”“그냥 물 좀 마시려고요... 난 괜찮으니까 더 자요.”목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정은 자신도 놀랄 만큼 허스키했다.“목소리, 너무 쉰 거 아니야?”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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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3화

집중 훈련이 끝난 후, 정은과 몇몇은 사흘간의 짧은 휴식 시간을 가졌다.그리고 사흘 뒤, 정은, 서준, 민지는 H국으로 출국할 예정이었다.올해 국제학술대회는 H국 W시에서 개최되며, 전 세계의 각 분야 전문가와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될 터였다출국 당일, 재석은 정은을 공항까지 데려다줬다.“이번에도...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겠네.”재석이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정은을 바라봤다.정은은 까치발을 들고 먼저 재석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자기야, 나... 많이 그리워할 거예요.”재석의 눈빛이 순간 따뜻하게 풀렸다.그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시간이 좀 애매하네, 나 먼저 보... 윽...”재석의 입맞춤은 뜨겁고, 애절하고, 마치 폭풍우처럼 갑작스럽게 그녀를 휘감았다.숨이 멎을 것 같았지만, 그 순간 정은도 망설이지 않았다.정은은 잠시 멈칫하다가 곧 재석의 목을 감싸 안으며 키스에 응했다.공항 로비 한복판, 사람들로 붐비는 공간, 굵은 기둥 하나에 가려진 채, 떨어지기 아쉬운 두 사람은 그렇게 애틋하게 입을 맞췄다.입맞춤이 끝난 후, 둘은 천천히 떨어졌지만 눈빛은 여전히 서로를 붙들고 있었다.정은은 숨을 조금 몰아쉬며 웃었다.“진짜... 늦겠어요...”재석은 정은의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며 말했다.“응, 얼른 가.”그 자리에 남아 있던 재석은 멀어져 가는 정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봤다.좋아하는 건 붙잡는 거라면, 사랑하는 건 보내주는 거니까.재석은 손을 놓았고, 정은을 떠나보냈다.그녀가 높이 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정은아, 꼭 무사히 돌아와.”...정은은 탑승 대기 구역에서 서준, 민지와 합류했다.근처 카페에서 음료를 사 온 세영이 종이봉투를 들고 다가왔다.“무슨 맛을 좋아할지 몰라서 그냥 세 가지로 시켰어. 하나씩 골라.”이번 국제학술대회에는 세영이 인솔 교류로서 정은, 서준, 민지와 함께 가기로 했다. 민지는 제일 달콤한 버터 라테를 골라 몇 모금 마시더니 문득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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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4화

장민도 세영을 따라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말했다.“세영아, 방금... 너 내 손 만졌지...?”세영은 정말 장민이랑 대화하기 싫었다. 출국 이틀 전, 세영은 조용히 학교 측에 인솔 교수 변경을 요청한 바 있었다.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장민은 바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비행기표 한 장 들고 혼자 H국으로 직행해 버린 것.“아이고, 구 교수님. 그 요청은 좀 곤란하네요...”교무처 직원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대체 인솔 교수로 다른 사람은 없어요?”“있긴 한데요, 장 교수님이 벌써 W시에 도착하셨다네요. 지금 다시 오라고 하긴 좀 그렇잖아요, 안 그래요?”“장 교수님이 좀 튀긴 해도, 능력은 있잖아요. 이번에도 알아서 먼저 가서 숙소며 일정이랑 다 챙기고 있대요. 솔직히, 그렇게 세심하게 챙길 수 있는 사람은 드물잖아요?”“구 교수님, 그냥... 일주일만 참아요. 금방 지나갑니다.”세영은 어쩔 수 없이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실은 장민도 헛되게 먼저 온 게 아니었다.국제학술대회는 내일부터 시작이라 주최 측 숙소 제공도 그때부터였다.그래서 오늘 밤은 각자 숙소를 따로 해결해야 했는데, 장민은 이미 이틀 전에 숙소를 예약했고, 그동안 민박 주인과는 거의 친구 맺은 수준이 됐다.네 사람을 이끌고 민박집에 들어서며, 카운터에 앉아 있는 현지인 사장 한진주에게 자연스럽게 인사했다.“진주 누나! 우리 학교 교수와 학생들 왔어요! 고기 좀 부탁해요!”“네.”한진주는 능숙하게 대답하며 환하게 웃었다.네 사람이 짐을 풀고 1층으로 내려오자, 식당 겸 공용 공간의 긴 테이블 위엔 이미 불판이 세팅되어 있었다.장민은 익숙하게 고기를 굽고 있었다.삼겹살이 지글지글 구워지며 기름이 튀는 소리에 민지의 눈이 반짝였다.“얼른 앉아, 얼른! 세영이 넌 여기 앉고, 너희 셋은 맞은편!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지? 배고플 테니까 빨리 먹어! 이건 다 익은 거고, 또... 내가 소혀랑 스테이크, 닭 날개도 시켜놨어!”민지가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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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5화

민박을 나서자, 바로 눈앞에 펼쳐진 건 현지의 로컬 먹거리 거리였다.한 줄로 늘어선 다섯 사람은 길 초입부터 끝까지 천천히 걸으며 구경했다.튀김 냄새, 고소한 어묵 국물 향, 달콤한 간식 냄새들이 코끝을 간질였고, 소리 없는 석양이 서서히 하늘을 물들였다.주황빛 노을이 하늘에 잔잔히 번져가고, 흰 구름은 부드러운 솜처럼 그 주위를 떠돌았다.“슬슬 어두워진다. 이제 돌아갈까?”“응, 가자.”민박으로 돌아온 다섯 사람은 각자 방으로 흩어져 휴식을 취했다.밤 8시쯤, 어김없이 장민이 복도를 쿵쾅쿵쾅 걸으며 방문을 두드렸다.“얘들아! 저녁 먹자!”이번 식사는 아까보다 단출하게, 부대찌개 하나.다섯 명이 테이블을 빙 둘러앉았다.민지는 추가로 돌솥비빔밥 두 개를 더 시켰고, 직접 비벼서 다섯 그릇에 나눠 담았다.정은은 반쯤 먹고 나서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정은 언니, 왜 이렇게 조금 먹어요?”민지가 물었다.“충분해.”‘이 시간에 너무 먹으면, 소화가 안 될 것 같아서...’‘잠 설치면 내일 일정에 지장 가니까.’밤은 깊어져 가고, 창밖엔 바람 소리도 조용했다.정은은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다 말린 뒤,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들었다.손끝이 자연스럽게 누른 건, 영상 통화 버튼.그녀는 재석에게 전화했다.신호음이 몇 번이고 울렸지만, 화면은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어디 간 거지...”‘오늘 하루도 이렇게 끝나는 건가?’...그 시각, 조씨 가문의 본가.본가의 거실엔 고급스럽고 정갈한 상차림이 펼쳐져 있었다.형형색색의 음식들이 잔잔한 조명을 받아 더욱 먹음직스럽게 빛났지만, 분위기는 정적 그 자체였다.‘이걸 모르는 사람은 진짜 무슨 장례식인 줄 알겠네...’조지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왼편에 앉은 어머니 강서원을 힐끗 바라봤다.기품 있는 자세로 식사를 이어가는 강 여사는 고개조차 움직이지 않고, 오직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저 우아함은 타고났지... 근데 왜 이렇게 무섭냐.’지훈은 다시 오른쪽, 재석 쪽으로 고개를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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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6화

강서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조기봉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오늘 재석이 불러서 밥 먹자고 한 거, 당신도 동의했던 거잖아. 모자 사이에 오해 좀 풀고, 얼굴 붉히는 일 없이 대화 좀 해보자고 했던 거고.”“근데 당신은 어때? 재석 들어오자마자 얼굴 굳고, 밥상에 앉아서도 한마디 안 하더라.”“재석이가 일부러 시간 내서 왔고, 밥도 먹었는데, 당신이 먼저 말 좀 걸면 어때? 아들한테 손 내미는 거,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내 아들인데 내가 먼저 말까지 해야 해요? 아들한테 내가 손을 내밀어요? 미쳤어요?” 강서원의 목소리에 짜증이 실렸다.“나도... 나도 아들이 먼저 입 열고, 먼저 당신한테 손 내밀었으면 좋겠지. 근데 재석이 성격 알잖아. 고집 세고 욱하는 거, 누굴 닮았겠어?”조기봉은 아내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강서원은 말없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그래, 그 녀석 성격은 날 닮았지.’조기봉이 다시 말을 이었다.“재석이란 애가 원래 좀 냉정하잖아. 형만큼 눈치 빠르지도 않고, 둘째처럼 말도 잘 못하고. 대신 한 번 마음 먹은 건 절대 안 바꿔. 그 고집은, 솔직히 당신 판박이야.”강서원은 미간에 잡혔던 주름을 서서히 풀며 작게 중얼거렸다. “막내가 나를 닮긴 했죠... 그럼 당신 말은...?”조기봉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일단 당신이 먼저 말 꺼내. 얼음 좀 깨자고.”“알겠어요.”강서원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조기봉은 기세를 몰아 계속 말했다.“그리고 아들 여자 친구 문제 말인데, 당신이 소정은이 마음에 안 든다곤 했지만, 난 재석이가 그렇게 쉽게 사랑에 눈이 멀 정도로 어리석은 애는 아니라고 생각해.”“우린 아들 믿어야 해. 판단력도, 보는 눈도. 혹시 당신이 소정은이란 애를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몇 번 마주친 걸로 성격을 판단하고, 판단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아들 여자 친구인데, 다시 한번 제대로 봐 줄 순 없겠어?”강서원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고, 미간이 다시 좁아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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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7화

강서원 입에서 그런 부드러운 말이 나올 줄은 조기봉조차 상상하지 못했으니, 지언과 지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지훈은 괜히 속이 쓰렸다.‘강 여사님, 나한테는 한 번도 저렇게 먼저 사과해 본 적 없는데...’재석은 살짝 표정을 풀었다.“그날 저도 좀 예민했어요.”강서원은 드디어 미소를 보였다.“이번 주 토요일, 그 친구 시간 되니? 같이 와서 밥 먹자.”“이번 주는 안 돼요.”“왜?”“정은이 H국에 국제학술대회 참가하러 갔어요. 다음 주는 돼야 돌아와요.”지훈은 눈을 깜빡이며 놀랐다.“네 여자 친구 아직 대학원 다니는 거 아니었어?”“응.”“헐... 꽤 대단한데.”“응.”“...”지훈은 동생의 이런 대답을 듣고 속으로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봐라, 봐. 얘 지금 완전 자기 여자 친구 자랑 중이잖아?’ ‘꼬리 흔드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네.’강서원이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이번 주 토요일은 넘기고... 다음에 다시 날 잡자.”“그래요.”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얘기해 보고 연락드릴게요.”...시간이 꽤 흘러, 삼 형제가 하나둘씩 본가를 나서 집으로 향했다.집 앞 정원을 지나가던 중, 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 강 여사, 오늘 드디어 기분 풀렸네. 나 그저께 왔을 때, 진짜 장난 아니었거든.”“얼굴이 거의 바닥까지 쳐져 있어서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어. 원래는 쉬러 온 거였는데, 결국 방 안에서 계속 일만 했지, 뭐.”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아... 어쩌겠냐?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일벌레 인생인데.”‘어제 또 새 사건 하나 맡았고...’지언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됐고, 그만 좀 떠들어. 네가 집에 틀어박힌 거, 피곤해서가 아니라 민 씨네 집안사람들이 네 사무실 찾아가서 계란 던질까 봐 도망친 거잖아?”지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들켰네...’반년 전, 지훈은 갑자기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었다.잘 나가던 형사 전문 변호사가 느닷없이 상속 소송을 맡았다는 소식 때문이었다.사건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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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8화

“야, 진짜 대단하다. 한 방에 전 재산을 다 넘긴 거 보면. 이거, 뭔가 수상하지 않냐?”지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기업의 책임자인 만큼, 그도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었다.“그러게. 들은 바로는, 민 회장이랑 첫째 부인은 벌써 수십 년 전에 이혼했다더라? 지금 부인이랑은 젊을 때 죽고 못 살았고, 아들도 여섯이나 뒀는데... 근데 왜 갑자기 첫째 부인 쪽으로 마음이 돌아선 거냐?”“그걸 누가 알겠어?”지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손바닥을 뒤집었다.“뭐, 첫째 부인한테 지은 죄가 있어서 죽기 전에 속죄하려고 했거나... 아니면 진짜 누가 저주라도 건 거겠지.”“근데 너, 그렇게 대형 사건 맡아서 승소까지 했으면, 뭔가 내부 정보 들은 거 있지 않아?”지언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완전 수다 모드였다.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없어. 진짜 몰라.”“그럼 이유도 모르는데 재판에서 이긴 거야?”“상속 소송이면 꼭 유언 이유까지 알아야 하냐? 사실만 딱 정리해서 논리로 밀어붙이면 끝이야. 감정은 감정이고, 법은 법이지.”‘젠장... 또 지훈한테 말발로 당했다.’지언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그러다 슬쩍 방향을 돌리며 물었다.“근데 너는 왜 갑자기 상속 소송을 맡은 거야? 그것도 피고 측으로... 민정한 회장 첫째 부인 쪽 손녀 이름이 뭐였더라? 민슬기? 민슬이?”“아, 진짜! 민슬아! 민슬아!”지훈이 단호하게 정정했다.“오... 지훈아, 꽤 또렷이 기억하네?”지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훈은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쳤다.“형, 지금 그 눈빛은 뭐야? 민슬아는 내 의뢰인이야! 의뢰인이라고.”“근데 이름 부르는 게 꽤 익숙해 보인다?” “그게 얼마나 큰 사건인지 알아? 민슬아 건 하나로 로펌은 3년 치 매출을 벌었어. 형이 그런 대형 사건 하나만 소개해줘 봐. 그럼 내가 형 이름으로 노래도 만들어줄 테니까.” 지언은 픽 웃으며 말했다.“지금은 딱히 없고... 아버지 유산 분배할 때쯤이면, 뭐 하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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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9화

“장난 아니고, 진지하게 생각 중이야. 잘 풀리면... 연말쯤 약혼하려고.”지언이 갑자기 눈빛을 바꾸며 말을 꺼냈다.“뭐? 진짜야? 연말이면 몇 달 안 남았잖아. 형, 진심이야?”지훈은 평소의 장난스러운 태도를 거두고 진지하게 물었다.“응.”지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본가를 돌아봤다.“어머니 말이 맞더라. 우리 셋 다 결혼 안 하고 계속 버티는 것도... 좀 그렇긴 해.”‘나는 장남이니까.’부모는 이미 지언에게 가업의 절반 이상을 넘긴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에 따르는 책임도 당연히 따라야 했다.부를 누리면, 대가도 치러야 하는 걸... 지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혼이란 결국 필요에 의한 제도였다.장씨 집안이든, 이씨 집안이든... 그는 누구든 상관없었다.지언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 아니라, 함께 공식 석상에 서서 미소를 연기할 수 있는 파트너.신뢰할 수 있는 협력자. 딱, 그 정도.목표만 일치하면, 감정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더 깔끔하게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으니까.“형,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재석은 지언의 눈빛 속 무감정을 읽고, 이내 얼굴을 굳혔다. 그는 명백히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지훈도 고개를 끄덕였다.“형이 원하지 않으면, 어머니도 절대 강요 안 하잖아.”지언은 어깨를 으쓱였다.“어차피 해야 할 거면, 빨리하는 게 낫지.”지훈은 살짝 입을 삐죽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야, 그냥 임무 수행하는 것 같잖아.”“인생이 원래 그런 거야. 하나 끝나면 또 하나, 계속 임무야. 복잡한 걸 단순화해서 보면, 오히려 편해.”‘두 동생은 아직 자유롭고, 자기감정에 솔직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나는... 장남이니까.’그 말에 더 할 말이 없었다.셋 다 말없이 걸음을 멈췄지만, 그 누구도 서로를 설득할 수 없었다. 이유는 다르지만, 다 각자의 길이 있었다.재석은 차에 올라타며 핸드폰을 켰다. 잠금 해제하자, 부재중 전화 두 통이 떠 있었다.정은에서 온 전화였다.‘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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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0화

아침 식사를 마친 다섯 사람은 행사장으로 출발했다.도착 후엔 먼저 출석 확인과 여권 확인을 마치고, 주최 측에서 마련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점심은 호텔 뷔페에서 간단히 먹고, 잠깐 휴식을 취한 뒤 오후엔 본격적인 개막식.정은 일행은 무대와 가까운 좌석에 배정받았다.왼쪽은 M국 대표팀, 오른쪽은 F국 대표팀.개막식은 꽤 성대하게 진행됐다.H국 고유문화와 세계 각국의 다양성을 결합한 퍼포먼스가 이어졌지만, 결국 주최 측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단 하나였다.즉, 과학엔 국경이 없다. 연구엔 끝이 없다.그중 눈에 띄는 순서 하나.H국 학생 대표가 무대에 올라 연설하는 시간이 있었다.무대에 오른 건 긴 웨이브 머리의 여학생.어디서든 단번에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분위기며 태도며, 그 자체로 시선을 끌었다.거기에 인형 같은 이목구비까지 더해지니, ‘아이돌 무대인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이런 게 바로... 살아 있는 바비 인형이란 건가?’‘과학엔 국경이 없다더니, 미모에도 국경이 없는 듯.’정은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우와...”여학생이 단정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세계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정은 언니, 저 여학생 진짜 예뻐요!”민지가 감탄을 터뜨렸다.예쁜 건 무조건 인정하는 타입이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진짜 예쁘네.”“그래도 내 기준에선 정은 언니가 제일 예뻐요!”민지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그 순간, 서준도 덩달아 민지 귀에 대고 속삭였다.“내 눈엔 네가 제일 예뻐.”민지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왜, 표정이 그래?”“눈에 문제 있는 거 아냐?”서준은 억울한 듯 입을 다물었다.그 여학생이 연설을 마치자, 현장에는 교육부 장관이 연설할 때보다 더 큰 박수가 쏟아졌다.역시 외모의 힘은 국경도 언어도 뛰어넘는다.개막식 후엔, 각국 대표팀이 학문 분야별로 조를 나눠 3일 차에 있을 경시대회 대진 추첨을 진행했다.왜 3일째일까?그 이유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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