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201 - Chapter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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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1화

물을 다 마신 정은은 컵을 재석에게 건넸다.재석은 조용히 컵을 받아 협탁에 내려놓았다.정은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말아 눕고, 곧이어 재석도 조용히 이불을 들추고 옆에 누웠다.“참... 외할머니가 내일 잠깐 들르라고 하셨거든요. 당신 시간 괜찮으면 같이 갈래요?”“내일?”재석이 잠시 멈칫했다.“약속 있어요?”“진욱이 이틀 전에 M시에 먼저 내려갔어. 거기 실험실 쪽 권한 몇 개 열어줘야 해서 직접 가야 해. 현장 인증도 해야 하고...”그 권한은 변리아가 데이터 분석할 때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재석은 애초에 ‘연휴 끝나고 하자’고 말했었지만, 리아는 그 특유의 태연하고 시니컬한 말투로 대꾸했었다.“제가 무급으로 야근까지 하는데, 조 교수님은 뭐가 그렇게 느려요?”“조 교수님, 책임자 맞아요?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구세요...?”“...”‘하... 인정. 변리아 선생님... 진짜 남을 할 말 없게 만드시네.’정은은 그 상황을 떠올리며, 늘 어딘가 덤덤하면서도 당당한 리아의 표정을 떠올렸다.‘진짜, 이상하게 미워할 수 없는 스타일이란 말이지.’그녀는 저절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괜찮아요. 나 혼자 다녀올게요. 저녁에 맛있는 거 사 올게요.”“응, 고마워.”그날 밤, 두 사람은 따뜻하게 서로를 품에 안고 잠이 들었다.평온하고 포근한 밤이었다.다음 날 아침 9시.정은과 재석은 함께 집을 나섰다.하나는 학교로, 하나는 외갓집으로 향했다.정은이 도착했을 때, 봉수진 여사는 마당에서 꽃을 손질하고 있었다.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봉수진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우리 정은이 왔구나!”정은은 바로 집 안으로 가지 않고, 밝게 웃으며 마당 쪽으로 걸어갔다.“외할머니, 혼자서 정원 일을 다 하시면 어떡해요! 밖이 이렇게 추운데, 들어가 계시지 그랬어요!”“아이고, 알았다, 알았어!”봉수진은 손에 쥐고 있던 가위를 내려놓고, 아이처럼 말 잘 듣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거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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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2화

봉수진은 그 모습을 보고는 슬쩍 웃으며 한마디 했다.“우리 현빈이, 요즘 사람 잘 챙기네. 손자며느리는 언제 데려올 거냐?”물을 들이켜던 현빈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사레가 들렸다. 그러고는 기침으로 민망함을 가리며 대답했다.“할머니, 또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왜긴 왜야, 진심인데.”봉수진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눈빛을 반짝였다.“너도 이제 곧 서른이잖아? 옛말에 ‘삼십이립’이라는 말이 있어. 일은 잘하고 있으니까 이제 가정도 꾸릴 생각을 해야지.” “그건 좀 더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자, 할머니 여기 생선 좀 드세요.”“이거, 내 입 막으려고 그러는 거지?”그 한마디에 식탁 위엔 웃음이 퍼졌다.현빈도 억지로 웃음을 지었지만, 그 표정 어딘가엔 묘한 당혹감이 섞여 있었고, 시선은 자꾸 정은 쪽으로 흘러갔다.식사가 끝나고, 현빈은 2층 서재로 올라가 일 처리를 시작했다.요즘 들어 부쩍 바빠진 눈치였다.봉수진이 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현빈이 아버지는 아예 손 놨어. 얼마 전엔 무슨 북유럽 간다더니, 스웨덴인가 노르웨이에서 오로라 본다고 나가버렸잖아.”“지금 회사는 현빈이 혼자 다 떠맡고 있어. 형제자매도 없는 외아들이니까, 진짜 얼마나 버겁겠어.”“책임은 윗세대가 회피하고, 짐은 고스란히 아래로 넘겨지고... 이런 구조, 너무 익숙해서 더 안쓰럽다.”그게 누구 탓일까?손 놔버린 아버지 심정훈 때문일까...아니면 아예 체념해 버린 어머니 이미윤 때문일까?정은도 조용히 봉수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요즘 현빈은 살이 더 빠진 듯했다.그는 원래도 갸름한 얼굴이었지만, 요즘은 턱선이 너무 뚜렷해서 ‘지나치게 날카롭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그때 이춘재가 묵직하게 말을 보탰다.“난 오히려 그게 좋은 거라고 봐. 젊을 때 고생을 좀 해야 나중에 제대로 자리를 잡지.”‘그건 맞는데... 그 고생이 꼭 이런 식이어야 할까?’‘...’정은은 배가 너무 불러 산책이라도 하려고 조심스레 일어났다.“외할아버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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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3화

현빈은 노트북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테이블 앞, 두툼한 양털 러그 위에 조용히 앉아 다리를 말았다.바닥은 따뜻했고, 공기까지 훈훈했다.‘춥지도 않고, 조용하고... 괜찮네.’현빈은 곧장 업무에 집중했다.영업팀, 브랜드팀, 인사팀, 재무팀... 각 부서에서 올라온 승인 서류가 차례로 그의 메일함에 도착했고, 현빈은 하나하나 꼼꼼히 읽고 결재했다.중간에 두 개의 화상 회의 초대창이 떴다.현빈은 잠깐 고개를 돌려 소파를 바라보았다.정은은 여전히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깨지 않게 조심해야겠다.’현빈은 이어폰을 꺼내 조용히 꽂았다.회의에서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참석자들이 오가며 말하는 소리, 숫자, 보고 내용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현빈의 머릿속 한쪽은 계속 같은 장면을 붙잡고 있었다.소파 위, 담요 아래로 드러난 여자의 잔잔한 숨결.두 시간이 흐르고, 현빈은 마지막 파일에 사인을 하고 몸을 쭉 폈다.장시간 앉아 있던 탓에 허리와 어깨가 뻐근했다.그때, 문득 시선이 소파 쪽으로 향했다.정은의 몸 위에 덮혔던 담요가 슬며시 흘러내려 허리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현빈은 조용히 다가가 담요를 다시 정은의 어깨까지 덮어주었다.그리고 손을 거두려는 순간, 시선이 멈췄다.그 시선이 멈췄던 곳은... 정은의 얼굴이었다.‘평소엔 잘 못 보던 얼굴인데...’길고 진한 속눈썹이 부드럽게 눈두덩이를 덮고 있었고, 창백할 정도의 하얀 피부에 자연스러운 붉은 빛을 머금은 입술은 조금 벌어져 있었다.‘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되게 조용하고, 따뜻한 사람 같네.’어느새 남자의 몸이 살짝 앞으로 기울어 있었다.무의식중, 그는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현빈아? 거기 있니?”2층에서 들려온 봉수진의 목소리에 현빈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뭐 하는 거야, 나 지금...’마치 감전된 것처럼 허리를 펴고 두 걸음 물러났다.이내 2층에서 봉수진이 내려왔다.“할머니.”현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했고, 봉수진은 노트북이 닫힌 것을 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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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4화

재석이 도착하자, 봉수진은 자연스럽게 모두를 식당으로 이끌었다.현빈도 발걸음을 맞추며 조용히 물었다.“조 교수님, 오늘은 좀 한가하신가 봐요?”“연말이라 학교도 연구실도 다 휴무에 들어가요. 아마 지금 바쁜 분은 심 대표님 같은 성공한 사업가일뿐일 겁니다.”재석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게다가 어르신의 정중한 초대를 받았는데, 어찌 안 올 수 있겠어요. 마침 심 대표님도 오랜만이고, 겸사겸사 인사도 드리고 싶었죠.”현빈이 속으로 말했다.‘누가 널 보고 싶었다고 그래...? 말은 참 그럴듯하게 하네.’그는 대놓고 재석에게 뭐라고 할 수 없었기에, 자리도 미묘하게 재석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현빈은 재석이 당연하단 듯 정은 옆 의자를 당기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자리까지 저렇게 자연스럽게... 뭐야,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친했지?’현빈이 반대편으로 돌아가 앉으려던 찰나, 봉수진이 먼저 말했다.“정은아, 나 네 앞에 앉을게.”“네, 외할머니!”결국 현빈은 조용히 이춘재 옆에 앉게 됐다.그걸 지켜보던 이춘재가 슬쩍 물었다.“현빈아, 요즘 일 때문에 너무 힘든 거 아니냐?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니?”“살짝 피곤하긴 해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조절하면서 할게요.”현빈은 이춘재에게 큼지막한 새우 완자를 집어드리며 웃었다.“그래, 잘 생각했어. 몸은 하나니까 무리하지 말고.”“네.”그렇게 대화가 오가던 중, 현빈은 조용히 갈비 하나를 집어 정은의 그릇에 올려줬다.그와 동시에 재석 역시 같은 갈비를 집어 정은의 그릇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양쪽에서 동시에 다가온 두 젓가락.그리고 동시에 도착한 두 조각의 갈비.“어머머, 너희 둘이 아주 마음이 통했구나?”봉수진이 웃으며 말했다.“정은이가 갈비찜 좋아하는 거, 다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정은은 현빈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오빠, 고마워요.”현빈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천만에.”‘그냥... 늘 네가 좋아하는 걸 기억하고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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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5화

장기판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정은은 전혀 몰랐다.그 시각, 정은은 소파에 편히앉아 봉수진과 함께 ‘연애 리얼리티’를 시청 중이었다.즉, 연애 예능이었다.그것도 젊은 커플들이 나오는 진짜 찐 연애 예능.봉수진은 리모컨을 꽉 쥐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나는 말이야. 요즘 이런 거 보는 게 제일 재밌어. 마음에 드는 커플 생기면 응원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그게 뭐, 내가 직접 연애하는 거랑 다를 게 뭐 있니?”정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우리 외할머니, 생각보다 훨씬 트렌디하시네?’‘외할아버지는... 이거 아시려나?’“어머, 재하가 초대장을 가인이한테 줬어!”정은은 이 프로그램을 처음 보는 터라, 화면 속 상황이 다소 낯설었다.“네? 안 되는 거예요? 규칙상으로는 아무한테나 줘도 되는 거 아닌가요?”“그렇지만 가인이랑 호준이, 거의 커플이었단 말이야! 재하는 지금까지 쿨한 척하면서 전 회차 때까지 아무도 안 골랐었거든. 근데 갑자기 왜 가인이냐고!”“음... 어쩌면, 지내다 보니 마음이 생겼을 수도 있죠?”“아아... 어떡해... 나는 가인이랑 호준이가 더 잘 어울린단 말이지...”‘연애 예능이 이렇게 몰입감 있는 거였나...?’정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가인이가 누구를 고를지는 지켜봐야겠네요. 결국 마지막엔 한 사람만 선택하니까요. 진짜 호준이를 좋아한다면, 재하가 접근해도 쉽게 흔들리진 않을 거예요.”“맞아! 흔들리면 애초에 그렇게 좋아했던 것도 아닌 거지!”봉수진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정이입을 이어갔다.그리고 마침내 가인이 선택의 순간에 정중히 재하를 거절하고, 단호하게 호준에게 걸어가는 장면이 나왔다.봉수진은 두 손을 불끈 쥐며 환하게 웃었다.“그렇지! 가인이랑 호준이는 운명이야! 내가 픽한 커플은 절대 안 망해! 헤헤!”정은은 속으로 그런 봉수진을 너무 귀엽다고 생각했다.‘‘픽’이라는 단어도 아시네... 우리 외할머니, 진짜 요즘 사람이네.’두 사람이 연애 예능에 푹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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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6화

이춘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것도 좋지. 현빈이는 그냥 들어가서 푹 쉬어라.”현빈은 할 말을 잃었다.‘괜히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나...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껄끄럽지.’잠시 후, 가사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두 박스 다 조 교수님 차량에 옮겨드렸습니다.”재석은 곧장 두 어른께 인사를 드렸다. 특히 봉수진에게 공손하게 말했다.“저희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늘 너무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아서... 하루 종일 고생 많으셨어요.”봉수진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니야, 난 너희들 먹는 거 보는 게 제일 좋아. 고생은 무슨... 앞으로 자주 와. 그래야 내가 뭘 해도 보람이 있지.”“네.”재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정은도 곁에서 인사했다.“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오늘은 진짜 감사했어요. 이제 곧 주무세요.”“그래, 조심히 가.”그 모든 대화를 들으며 현빈은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뭐가 이렇게 어색하지? 괜히 분위기만 붕 뜬 느낌이야.’분명 다 자연스러운 인사였는데, 왜인지 모르게 혼자만 빼놓고 돌아가는 느낌....재석과 정은이 현관문을 나서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훅 스쳐 갔다.재석은 반사적으로 정은의 목도리를 여며주며 꼼꼼하게 목 주변을 감쌌다.정은은 그런 재석의 진지한 얼굴과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바라보며 웃었다.“괜찮아요. 너무 과하게 감싸는 거 아니에요?”정은은 조용히 말했지만, 입꼬리는 피식 올라가 있었다.그제야 재석은 안심한 듯 손을 거두고, 자연스럽게 정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차 쪽으로 향하려 했다.그 순간, 정은이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어?”“눈 와요!”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정은.재석도 함께 올려다보니, 하늘에서 작은 눈송이들이 톡톡 떨어지기 시작했다.그 조그만 입자가 이내 손톱만 한 크기로 커졌고, 곧이어 손바닥만 한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흩날리듯 내려오기 시작했다.‘첫눈... 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굵다.’재석이 시선을 돌리자, 정은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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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7화

눈은 쉼 없이 내리고, 밤은 깊어만 갔다.한편, 집 안.“어머, 밖에 눈 오는 것 같네.”봉수진이 거실 창밖을 흘긋 바라보았다.현빈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말했다.“네.”짧게 대답했다.‘첫눈? 매년 오는 거잖아.’눈은 그저 겨울의 일부일 뿐, 현빈에게 낭만이란 없었다.아니, 이 동네에서 자라난 대부분의 사람에게 눈은 그저 교통을 막고 일정을 꼬이게 하는 불편함의 시작일 뿐이었다.하지만 현빈의 머릿속은 여느 사람보다 복잡했다.‘지속해서 눈이 쌓이면 결국 폭설로 이어지고, 폭설이면 곧 재해...’‘재해가 오면 물류 차질, 생산성 저하, 에너지 공급 압박...’‘결국 소비 위축, 기업 수익 하락, 투자 심리 위축...’‘교통, 관광, 유통 관련 종목 주가 하락...’‘정부는 국채 발행 늘리고, 채권 금리 출렁이고...’‘유동성 수급 불균형, 기준 금리에도 여파가 올 수 있어...’짧은 찰나, 눈발 사이로 온갖 경제 흐름과 리스크 시나리오가 현빈의 머릿속을 질주했다.하지만 눈을 보고, 즐기고, 손에 받아보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할머니, 리모컨은 고장 난 게 아니라 건전지가 다 됐던 거였어요. 새 걸로 갈아놨고요. 이제 슬슬 가볼게요. 푹 쉬세요.”“그래, 운전 조심하고.”“네.”현빈은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신고, 묵묵히 문을 열었다.순간, 찬바람이 가슴팍을 파고들며 확 밀려왔다.하지만 그보다 더 매섭고, 더 차가운 게 있었다.바로 현빈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었다.꽃이 가득한 온실 앞, 가로등 아래,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는 두 사람.그 순간, 현빈의 몸이 굳었다.‘뭐지...?’그는 숨이 걸리는 듯했다.손끝부터 발끝이 싸늘하게 굳어갔고, 너무도 조용했던 탓인지 심장 소리가 고막에 울리기까지 했다. ‘정은...과 조재석...?’그는 분명히 봤다.정은이가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재석의 목에 감는 걸.재석이 웃으며 정은이를 더 깊이 끌어안는 걸.그 몇 초는... 현빈에겐 몇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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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8화

“어라? 현빈이가 차 시동 거는 소리가 안 들리네? 벌써 갔나? 내가 좀 보고...”이춘재는 중얼거리며 집 안쪽의 큰 창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내가 뭐랬어? 차가 그대로 있잖아. 심지어 출발도 안 했어. 설마 바퀴가 눈에 박힌 건가? 그럴 리 없는데... 눈이 그렇게 많이 온 것도 아니고...”“됐어, 그냥 나가서 한번 보고 와야겠다.”그가 문 쪽으로 향하려던 찰나, 봉수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조용히 울렸다.“나가지 마요.”“왜?”이춘재는 의아한 눈으로 아내를 돌아봤다.“갈 사람은, 알아서 가게 돼 있어요.”그녀는 짧게만 말하고는 묵묵히 2층으로 올라갔다.‘뭐야, 왜 저래...’이춘재는 못내 찜찜한 얼굴로 계단을 올려다봤다.하지만 곧 현빈의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서서히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어휴... 전화 온 거 받느라 좀 늦었나 보지, 괜히 걱정했네.”이춘재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고개를 끄덕였다.‘현빈이도 참, 하루 종일 바쁘긴 바쁘다니까...’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밤중 목이 말라 깬 잠에서 이춘재는 손을 더듬어 머리맡의 텀블러를 찾았다.텅 비어 있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잘 때 물 좀 더 받아놓는 건데...’한숨 섞인 후회를 내뱉고는 조용히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슬리퍼를 꿰어 신고 복도로 나서려는 순간, 침대 건너편이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이 사람... 어디 갔지?’“여보? 여보...?”조심스레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그제야 잠이 확 달아났다.이춘재는 서둘러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내려갔다.거기... 거실 소파 구석, 형광등 불빛도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봉수진이 조용히, 혼자 앉아 있었다.이춘재는 곧장 걸어가 조명을 전부 켰다. 거실이 훤히 밝혀졌고, 소파 끝에 조용히 앉아 있는 봉수진의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그는 허둥지둥 아내 곁에 앉아 손을 덥석 잡았다.“이 손... 왜 이렇게 차가워...”“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밤중에 잠도 안 자고 거실에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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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9화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한데?”이춘재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현빈이 혼자 산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그동안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왜 이 난리야?”심지어 선까지 보게 하자니.“혹시 당신, 몽유병이라도 생긴 거 아냐?”이춘재는 슬쩍 농담처럼 떠봤다.봉수진이 바로 고개를 홱 돌려 그를 째려봤다.“몽유병은 당신이죠!”“휴... 아니면 다행이고. 그래도 이해가 안 돼. 아무리 현빈이가 걱정된다고 해도, 이 늦은 밤에 거실에서 이러고 앉아 있는 건 너무하잖아. 이러고 있으면 며느릿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해?”“나 지금 농담 들을 기분 아니에요.”이춘재는 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당신이 그랬잖아, 자식은 자식 복이 따로 있는 거라고. 나도 현빈이 일이 걱정되는 건 이해하지만, 당신 몸부터 생각해야지. 깼는데 당신이 없어서 심장이 진짜 철렁했어.” 봉수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 후에야 작게 말했다.“미안해요... 그냥 마음이 뒤숭숭해서... 도저히 잠이 안 오더라고요... 바람 좀 쐬려고 했는데...”“응.”이춘재는 아내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괜찮아, 나는 다 이해해. 근데 뭐 때문에 그렇게 신경 쓰는지는 말해줘야지.”“그게...”봉수진은 말끝을 흐렸다.이춘재는 점점 불안해졌다.“설마... 나한테도 말 못 할 일이야?”잠시 침묵이 흘렀고, 봉수진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당신은... 현빈이가 정은이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좋아하지. 그건 눈에 훤하지...’그렇게 대답하려던 순간, 이춘재는 아내의 표정에서 묘한 기류를 느꼈다.그리고 순간 등골이 싸해졌다.“왜 그런 걸 물어?”말은 대수롭지 않게 했지만, 속으론 점점 불안이 커졌다.‘설마... 아니겠지? 무슨 일 있었던 건가?’“오늘 낮에... 낮잠에서 깬 후에 방에서 나왔거든요...”봉수진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그러나 그 속엔 흔들리는 감정이 분명 담겨 있었다.시간을 되돌려, 그날 오후.봉수진은 낮잠에서 깨어났다.이춘재는 아직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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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0화

재석은 금방 도착했다.저녁 식사 시간, 현빈은 정은의 옆에 앉으려 했다.하지만 이미 재석이 자리를 선점했고, 현빈이 다시 반대쪽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봉수진이 재빨리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니까, 결국 당신이 리모컨 얘기를 한 것도, 현빈이 발을 붙잡으려고 일부러 그런 거야?”이춘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맞아요.”봉수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어떤 사실은, 직접 눈으로 봐야 포기할 수 있을 테니까요.”“그런데 너무 가혹한 거 아니야?”이춘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내를 바라봤다.“가혹이요?”봉수진의 목소리가 단단하게 굳었다.“진짜 가혹한 게 뭔지 알아요? 바랄 수 없는 걸 계속 쥐고 늘어지는 게 가혹이고, 혼자만의 집착으로 다른 사람을 망가뜨리는 건 더 가혹한 거예요.”“그보다 더 가혹한 건, 결국 그 모든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버려서 평생 후회 속에서 사는 거예요.”“지금 우리가 마음 약해져서 현빈이를 그냥 내버려두면... 그 뒷감당은 누가 할 건데요?”이춘재는 할 말을 잃었다.한참 후, 겨우 입을 열었다.“정말 그렇게까지 심각할까?”봉수진의 눈빛이 깊어졌다.“현빈이가 정은이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조 교수에게 보이는 노골적인 견제와 불편함을 보면, 그 감정... 이미 깊이 빠진 것 같아요.”“지금은 아직 스스로 조절이 가능하니까 괜찮아 보여도, 언젠가 조절이 안 되면요? 혹은, 아예 조절할 생각이 없어지면요?”“현빈이 성격을 생각해 봐요. 그때 가서 일이 터지면, 누가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이춘재의 등줄기에 차가운 땀이 흘렀다.그 순간, 봉수진의 말이 이어졌다.“심 서방과 미윤이... 그리고 그 집안사람들을 생각해 봐요. 심씨 집안... 사랑에 미쳐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 감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터질 경우,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재앙이 될 거예요.”“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현빈이가 정은이를 사랑한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이 너무 잔인한 건 아닐까?”봉수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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