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181 - Chapter 1190

1190 Chapters

제1181화

‘양유미...?’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강서원은 잠시 멍해졌다.몇 분간 기억을 더듬은 끝에야, 머릿속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그 인물을 끄집어냈다.“그, 그게 무슨 약혼이야?”지언은 태연하게 답했다.“일단 약혼식만 먼저 할 거예요. 내년쯤 혼인신고하고, 시간 될 때 정식으로 예식도 하고요. 전체적인 틀은 그렇게 잡았어요.”“잠깐만, 너 진짜 그렇게까지 진행된 거야? 우리 아직 여자 얼굴도 못 봤는데...”강서원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막내도 머리 아픈데, 큰애는 아예 끝장을 봐버렸네...’“어머니.”지언이 조용히 말했다.“어머니가 소개해 주신 분이잖아요. 그럼 이미 어머니의 필터를 거친 셈이죠. 그 사람 외모, 성격, 집안... 전부 어머니가 제일 잘 아시잖아요? 아니에요?”“아니, 물론! 내가 소개해 준 여자애들은 다 하나하나 걸러서 고른 거지. 하지만 그땐 워낙 후보가 많았잖니. 시간도 꽤 흘렀고... 솔직히 전부 기억 못 해!”지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알겠어요. 그럼 나중에 유미 씨랑 티타임 한번 잡으세요. 서로 편하게 얘기 나눌 기회 생기면 좋죠.”“뭐라고?”‘그게 지금 그런 가벼운 일처럼 말할 일이야...?’“너... 정말 결정한 거야?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봐. 서두르지 마, 지언아. 이건 평생 갈 일이야. 한 번 결정하면 되돌리기 어려워.”강서원은 목이 바짝 말라오는 걸 느끼며 힘겹게 침을 삼켰다. 호흡을 여러 번 고르며 겨우 말을 이었다.“결혼하라고 닦달한 건 어머니잖아요.”지언은 반쯤 웃고, 반쯤 짐작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이제 약혼하겠다니까, 갑자기 천천히 하라니... 뭐 어쩌라는 거예요? 서로 조건 맞고, 성격도 무난하고, 저도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아요.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요.”“그럼, 너 양유미라는 애 좋아하긴 해?”지언은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유미 씨는... 함께하기에 적합한 사람이에요.”‘사랑이란 말은 끝내 안 꺼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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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2화

밤공기는 서늘했고, 달빛은 유난히도 밝았다.정은과 재석은 손을 꼭 잡고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재석은 몇 번이나 입을 뗐다가 다시 다물었다.그 모습이 반복되자 정은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하고 싶은 말 있어요?”재석은 잠깐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코를 만지며 헛기침했다.“아니야, 별거 아니야.”“그래도 말해줘요. 그렇게 궁금하게 해놓고 안 알려주면 사람 미칠 것 같잖아요.”“진짜 말해도 돼?”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였다.“네, 궁금해서 못 참겠어요.”“우리 어머니... 너한테 뭐 불편하게 하진 않았지?”정은은 한참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정확히 말하면 불편하게 한 건 아니야.’‘그저,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게 느껴졌을 뿐.’하지만 강서원은 언제나 예의를 지켰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도 품위가 넘쳤다.처음 서영숙이 정은에게 퍼부었던 그 비난과 비교하면, 정말 천지 차이였다.재석은 정은의 대답에 눈에 띄게 안도했다.“다행이다... 진짜 걱정 많이 했거든.”“둘이 무슨 얘기 했어? 산책을 꽤 오래 하던데?”정은은 피식 웃으며 재석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재석은 어쩐지 몸을 뒤틀렸다.“왜 그렇게 봐?”“재석 씨, 생각보다... 엄청 궁금한 게 많은 타입이군요.”“어?”“여자들끼리 무슨 얘기 했는지 그렇게 궁금해요?”“아니, 난... 그냥...”“사실 말해도 되는데... 우리 둘이 말한 건 말...”“그, 그만! 안 궁금해. 진짜 안 궁금하다고!”재석은 얼굴까지 붉히며 정은의 손을 끌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정은은 뒤따르며 속으로 웃었다.‘이 사람, 진짜 귀엽네.’정은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정은은 한 번 고민했다.‘오늘 있었던 일, 재석 씨한테 말해야 하나?’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강 여사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확실해.’‘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방해하거나 싸우려는 건 아닌 것 같아.’‘아마 재석 씨 눈치 봐서, 당분간은 이 정도 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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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3화

민지는 턱이 빠질 정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국가에서... 돈도 줘요?”‘게다가 그렇게나 많이?!’‘미안한데... 나 지금 질투에 눈이 멀어버렸어.’“그럼 우리 과제도 내년에 신청하면 되는 거 아냐?”희망에 찬 민지의 목소리.서준은 입꼬리를 살짝 씰룩이며 고개를 저었다.“넌 너무 긍정적이야.”“왜? 뭐가 문젠데?”민지는 고개를 쭉 내밀며, 파고들 태세였다.‘이걸 안 캐면 내가 민지가 아니지.’서준은 한숨을 내쉬며 조곤조곤 설명했다.“일단, 전국에 교수, 연구자, 박사후 과정, 수천 개 연구실이 그 지원 하나만 바라보고 있어. 다들 혈안이 돼서 경쟁률이 장난 아니야.”“게다가 보이지 않는 내부 작용이나 커넥션 같은 것도 솔직히 없다고 말 못 해. 그런 거 다 제외하더라도, 기본 서류만 수십에서 백 개는 넘게 준비해야 해.”“그 많은 걸 준비하고도, 결국 떨어지면? 받아들일 수 있겠어?”민지는 몇 초 고민하다가 고개를 단칼에 저었다.“그럼 안 할래.”‘내 멘탈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그렇게 말하고 두 발짝 가다가, 뭔가 떠오른 듯 다시 돌아섰다.“근데... 진일 선배는 어떻게 붙은 거야?”‘진일 선배는 설마 자료도 안 쓰고 그냥 된 거야? 말도 안 돼.’서준은 쓴웃음을 지었다.“진일 선배가 밤낮없이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던 거, 그냥 그런 건 줄 알아? 네가 프로그램 설정하다가 전기 내리고, 와이파이 다 끄고 퇴근하자고 할 때도 진일 선배는 퇴근 안 한 거 몰라?” 민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헐... 진짜 몰랐어.”‘그럼... 나만 퇴근한 거야?’서준은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내가 시간 한 번 재봤는데, 진일 선배 하루에 최소 20시간은 실험실에 있었어.”“20시간? 진일 선배, 사람이 아닌 거 아니야?”“잠은 자. 근데 거의 다 휴게실에서 자더라. 엊그제는 거기 세탁기랑 협탁도 들여놨어. 누가 봐도 진짜 정착하신 듯.”“세상에... 실험실을 집처럼... 으악! 나는 다들 퇴근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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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4화

무한 실험실이 연말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을 때, 재석의 실험실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올 한 해에만 SCI급 논문 세 편, 국가 연구개발 과제 두 건, 주요 프로젝트 여섯 건, 수상 실적만 열두 번에 달했다.정은 팀이야 워낙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재석은 그야말로 ‘조용히 미친 듯이 일하는 스타일’이었다.티 안 내고 할 거 다 하는 사람... 그게 바로 조재석이었으니 말이다.재석 팀의 팀원들 성과도 어마어마했다.전진욱은 연말 성과급만 수십억, 손태민이랑 조미진도 각각 몇억씩 챙겼고, 무려 지난달에 들어온 신입조차 과제 두 개를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정은은 그 신입에 대해 딱히 관심 없었다.재석이 말하길, 말수 적고, 성실하고, 능력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그 말을 듣자 하니, 평범한 중년 남자 과학자 느낌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아침.재석이 욕실에 들어간 타이밍에 전화가 울렸다.“정은, 나 지금 씻는 중인데 전화 좀 받아줘. 아마 실험실 쪽일 거야.”정은은 아무 생각 없이 수신 버튼을 눌렀고, 그 순간, 귀에 닿은 목소리는 맑고 고운, 여성의 목소리였다.[교수님, CMD 데이터 쪽에 문제가 있어서요. 백엔드 접근해 보고 싶은데 권한이 안 열려요. 혹시 시간 되시면...]약간의 당혹감을 억누르며 정은은 차분하게 말했다.“여보세요? 조재석 교수님은 잠시 통화가 어려우시고요, 요청하신 내용은 전달해 드릴게요.”상대는 잠깐 침묵하더니 짧게 답했다.[네, 감사합니다.]뚝-전화를 딱 끊었다.‘어? 깔끔하네.’정은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욕실 쪽으로 걸어가 문틀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살짝 미소를 머금고.재석이 머리를 닦으며 고개를 돌려 물었다.“누구였어?”정은은 천천히 말했다.“이름이 저장 안 돼 있던데요? CMD 권한을 요청했고요.”재석은 금방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 변리아 선생님일 거야.”“변리아 선생님이요?”정은은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응, 우리 실험실 신입. 지난달에 왔는데...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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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5화

정은은 3단계 모델 실험을 마친 후, 딱 2주 만에 실험실 출근을 멈췄다.하지만 남진일은 그 뒤로도 전혀 집에 갈 기미가 없었다.“선배, 설 준비는 안 도와도 돼요?”정은이 조심스레 물었다.지금쯤 진일의 고향 집에선 육포를 말리고, 순대를 말리는 등 온 가족이 연중행사처럼 분주해질 시기다. 평소와 같았으면 진일이 제일 먼저 짐 싸서 내려갔을 때다.“우리 어머니가 지난달에 벌써 다 끝냈어. 친척이 옆집에 사니까 부모님 도와줄 사람은 넘치고, 나는 설 전날쯤 내려가면 돼.”정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래서... 진일 선배가 국가 과제 따내고, A등급도 받는 거구나.’천재성에 성실함까지 겸비했다.기회만 생기면 누구보다 멀리, 높이 날아갈 사람.문득 정은의 머릿속에 한 생각이 스쳐 갔다.‘가만히 보면... 진일 선배는 마치 매 같아.’‘땅에서 묵묵히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누구보다 높이 날아오르는...’‘사람들 눈에는 그저 조용하고 말 없는 선배일지 몰라도, 날개는 이미 단단하게 자라 있었던 거지.’정은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그래, 진일 선배는... 가만히 있다가도 하늘을 지배하는 사람이야.’...정은은 조금 한가해졌지만, 재석은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들리는 말로는 데이터가 자꾸 안 맞아서 벌써 2주째 원인 추적 중이라 했다.덕분에 전진욱은 M시로 떠나려던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아내랑 딸도 못 보게 되었다.정은은 우연히 재석이랑 진욱의 메시지 창을 스치듯 봤는데, 진욱의 분노 게이지가 화면 밖으로 넘쳐흐를 지경이었다.[진욱: 정은이가 해주는 밥 아니면 야근 안 해!!!][재석: 꿈은 클수록 좋지.]그다음 순간, 진욱이 분노의 음성메시지 도착했다.그날 밤,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정은은 무심코 그 음성 메시지를 재생했다.[아아아아... 조재석 넌 진짜 개X끼야! 일은 시키고 밥은 안 줘?! 정은이한테 물어보긴 했어?! 정은이 같은 천사한테 어떻게 이런 악마가 붙었냐고!! 사랑도 없고, 양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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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6화

변리아 덕분에 음식이며 반찬들이 수월하게 연구실로 옮겨졌다.정은은 순간 깜짝 놀랐다. 보기엔 여리여리한 외모의 변 선생이, 커다란 종이 상자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더니 흔들림 하나 없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정은 무심코 침을 삼켰다.“변 선생님... 힘이 꽤 세시네요?”리아는 조용히 웃었고, 눈웃음이 참 선해 보였다.하얀 피부에 말갛고 단정한 인상.딱 봐도 착하고 순한 이미지였지만... “저 평소에 운동해요.”“운동이요? 요가나 러닝 같은...?”정은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스쿼트 자세를 취하더니 말했다.“웨이트요.”“네?”정은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그런데 그 순간, 리아가 겉옷 지퍼를 내리더니, 한쪽 팔을 쏙 꺼내선, 팔꿈치를 살짝 굽혀 이두박근을 보여줬다.‘진짜다.’예쁘게 잡힌 근육 라인.‘현실에서 이런 팔뚝을 가진 여자는 처음 본다...’정은은 어느새 팔꿈치를 보며 손이 스르륵 앞으로 나갔다.‘이건 좀 실례 아닐까?’그러다 급히 멈췄다.“죄송해요... 저, 무의식적으로...”리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괜찮아요. 만져보셔도 돼요.”그 말에 정은은 두 눈이 살짝 커졌다.리아가 다시 주먹을 꽉 쥐며 팔에 힘을 주자, 부드럽던 팔에 탄탄한 근육이 탁 하고 올라왔다.정은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손끝으로 ‘톡’.한 번, 또 한 번.‘헐... 진짜 단단하다...’‘근데 피부는 또 말도 안 되게 부드러워...’근육이 서서히 이완되자 팔은 다시 일반 여성처럼 가녀린 느낌이 되었다.“지금은 힘을 뺐지만요, 운동한 근육은 기본적으로 좀 단단해요.”“혹시... 한 번 더 만져봐도 돼요?”“그럼요.”정은은 다시 손끝으로 조심스레 눌렀다. 이번엔 아예 손바닥으로 감싸 쥐듯이 살짝 만져봤다.‘우와... 진짜 운동 많이 한 티 난다...’‘이거 중독될 것 같은데...?’재석은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톡을 열었다.역시, 정은에게서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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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7화

태민은 눈치 있게 조용히 돌아서서 자기 도시락 통을 가지러 갔다.정은은 아직 도시락 통들이 안 모였다고 생각해서 박스를 열 생각은 안 했다.그런데 리아가 마술처럼 어디선가 쓱 하고 식판 하나를 꺼냈다.‘식판? 진짜 식판?’리아는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그게... 며칠 전에 학식을 포장해 왔는데, 반납하는 걸 깜빡했거든요. 지금 딱 좋네요.”그러더니 식판을 쓱 내밀었다.정은은 멍하니 몇 초 서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 네! 담아드릴게요.”옆에서 아직도 도시락 통을 기다리던 진욱은 말문이 막혔다.“이런 것도 된다고?”잠시 후, 미진과 태민이 각자 도시락 통을 들고 돌아왔을 때, 리아는 이미 의자에 앉아 우걱우걱 식사하고 있었다.한입 먹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와, 진짜 맛있어요.”미진, 태민, 진욱... 다 할 말을 잃었다.“줄 서자! 내가 1번이다!”진욱은 순식간에 도시락 통을 정은 앞으로 내밀었다.딱 봐도 유치원에서 밥 기다리는 꼬마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거의 ‘많이 주세요’ 같은 분위기였다.5분 후, 모두가 각자 도시락을 들고 앉았다.짧은 정적이 흐른 후, 진욱은 입 안 가득 밥을 넣은 채로 감탄사를 뱉었다.“으음으음... 흐으... 으음므므...”미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전 교수, 삼키고 얘기해. 또 목 막히면 어떡하려고 그래?”진욱은 두세 번 급히 삼키고 나서 다시 외쳤다.“아니 이거... 이 소불고기, 대박이야!!”미진이 씩 웃으며 맞장구쳤다.“그러니까! 정은이가 한 요리 중에 맛없는 게 어딨냐고!”그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소불고기 볶음은 맵지 않고 딱 정통 그대로의 맛, 한입 먹자마자 입맛이 확 살아났다.찜갈비는 살짝 매콤했는데, 뼈는 가늘고 고기는 부드러워 감자와의 조합이 완벽했다.간장 닭조림은 말할 것도 없이, 겉은 윤기 좔좔, 속은 한입 베어 물면 살이 뚝 떨어질 정도로 부드러웠다.짭짤한 거, 매운 거, 달콤한 거... 각각 하나씩 조화롭게 준비되어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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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8화

남은 뼈해장국은 결국 진욱이 자기 도시락 통에 담아갔다.“저녁에 데워서 먹을게.”정은은 어이없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그 정도예요? 그렇게 맛있어요?”진욱은 한숨을 길게 쉬며 본격 하소연을 시작했다.“정은아, 넌 몰라. 우리 요즘 진짜 지옥이야. 데이터 오류 원인 못 찾아서 계속 야근에 야근... 맨날 시켜 먹는 배달 음식 때문에 입에서 기름 나올 지경이야.”“학교 식당은요?”“방학이라서 운영도 부실하고, 학생도 없으니까 질도 떨어졌지.”‘그렇구나. 생각보다 진짜 힘들었네.’정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데이터 문제는 앞선 두 번과는 성격이 달랐고, 정은이 아무리 똑똑해도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다행히... 삼 일 후, 그 고생은 끝났다.그날, 재석은 실험실 전원에게 휴가를 선언했고, 이제는 오랜만에 집에서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둘은 거실에서 나란히 앉아, 미니 화로에 불을 피우고 차를 끓였다.‘이렇게 조용한 오후, 너무 오랜만이야...’정은은 티포트에 손을 얹으며, 무심한 듯 물었다.“그 오류 데이터, 결국 누가 찾아냈어요?”재석은 귤껍질이 들어간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약간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곧 자연스럽게 풀렸다.‘역시... 이 조합은 적응이 안 돼.’“변 선생님이었어.”정은은 놀라지 않았다.며칠 전 도시락 배달하고 돌아온 후, 정은은 재석의 메일함에서 변리아의 이력서를 확인한 적이 있었다.‘학력도 경력도, 진짜 흠잡을 데가 없더라.’그날 밤, 리아의 전공 분야까지 직접 찾아봤다.‘이 정도면 진짜 인정할 수밖에 없어.’그때, 재석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내일, 우리 큰형 약혼식인데... 같이 갈래?”“어?”정은은 눈을 깜빡였다.“미뤘다면서요? 갑자기 다시 잡힌 거예요? 완전 급하시네요.”재석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사실, 약혼을 미룬 이유는 윌 큰형이 해외로 출장을 갔다가 독감에 걸려서, 한 달 넘게 거기서 치료받느라 그랬던 거야.” “신랑이 없는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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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9화

신랑도, 신부도 보이지 않았다.강서원은 방금 입장한 하객의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하곤, 입꼬리를 살짝 내렸다.“지언이는 또 어디 간 거예요? 신부는 드레스 입고 메이크업하느라 못 나온다 쳐도, 신랑까지 아침 일찍부터 안 보이면 어쩌자는 거예요?”“결국 나랑 당신만 입구에서 인형처럼 서 있는 거잖아요. 나 지금 입 근육 다 굳었어요.”조기봉이 헛기침했다.“조용히 좀 해. 좋은 날인데 싫은 티 내지 말고.”“됐고요. 지언이는 어디 갔냐니까요?”“회사 쪽에 급한 회의가 생겨서 안쪽 대기실에서 노트북 들고 화상 회의 중이래.”“지금 뭐라고 했어요? 약혼식 시작까지 두 시간도 안 남았는데 회의요? 지금 이게 말이 돼요?!”강서원의 눈썹이 씰룩거렸다.‘아니,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오늘은 약혼식이잖아, 약혼식!’조기봉은 어깨를 으쓱였다.“당신도 알잖아. 지언이는 원래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니까.”강서원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돌렸다.‘진짜, 이 집안 남자들은 하나같이 일에 미쳐서야...’그때 조기봉이 손을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어, 재석이랑 정은이 왔네!”강서원도 고개를 돌렸지만, 정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자 입꼬리가 다시 내려갔다.“그래요?”조기봉이 부드럽게 말했다.“당신 피곤하면 좀 들어가 있어. 재석이한테 맡기지, 뭐.”강서원은 멀리서 다가오는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곤 시큰둥하게 말했다.“알겠어요. 내가 들어가서 둘째 불러올게요.”잠시 후, 지훈이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등장했다.지훈은 잘나가는 변호사답게 사교성 하나는 끝내줬다. 어떤 하객이 와도 바로 대화를 이어가며 분위기를 띄우는 재능은 타고난 수준이었다.“어이, 재석이랑 정은이. 너희 그냥 들어가지 말고 여기서 하객 좀 맞이해줘라!”재석의 이마에 핏줄이 살짝 떠올랐다.“됐어. 난 이런 거 안 맞아. 그런 건 형이 딱이지.”“야! 웬일로 내 칭찬이야? 쑥스럽게. 구체적으로 말해봐. 형이 뭐가 그렇게 잘 맞는데?”재석은 단박에 쏘아붙였다.“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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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0화

현장은 순식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지금 저 꼬마가 조씨 가문의 식구라는데... 무슨 뜻이야?”“무슨 뜻이긴? 이건 그냥 대놓고 약혼 반대잖아.”“조 대표님 약혼 막겠다고 자기가 조씨 가문의 식구라고 밝히는 거면... 백 퍼 조지언 대표님의 숨겨진 아들이지, 뭐.”“말도 안 돼! 조 대표님 지금껏 스캔들 하나 없던 사람인데, 완전 바른생활 아이콘이라면서!”“조지훈 변호사님이 그랬다고 하면 좀 믿겠는데, 조지언 대표님은 진짜 아닌 듯.”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있는 지훈은 속으로 아주 어이가 없었다.‘지금 나 디스한 거지? 무례하네?’...강서원과 조기봉도 충격에서 벗어나 서로를 바라봤다.“저 애... 누가 데려온 거예요?”“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나도 몰라.”강서원의 눈썹이 바짝 올라갔다.“우리 집안 사람이라는데요? 오늘 온 친척들은 당신이 전부 인사받았잖아요. 낯익은 애 아니에요?”“아니야! 친척 중에 애 데리고 온 집 딱 한 군데 있었는데, 그건 여자애였다고. 근데 혹시... 그게 말이지... 지언이가...”조기봉이 급히 대답했다.“잠깐만, 당신 지금... 우리 아들을 의심하는 거예요?”강서원의 얼굴이 단박에 굳어졌다.“우리 지언이가 어떤 성격인지 성격 몰라서 그래요? 절대 그럴 리 없다고요!”조기봉이 약간 억울한 듯 반박했다.“아니, 지언이도 나이가 서른 넘었잖아. 밖에서 몰래 연애 좀 하거나 여자 친구가 있었을 수도 있잖아. 그게 뭐 이상해?”강서원도 속으로 너무나 답답했다.“내가 그 얘길 하는 게 아니잖아요?”조기봉은 더욱더 이해가 안 됐다.“그럼 뭔데?”강서원은 결국 다시 한번 자세히 설명해 줬다.“내 말은, 지언이가 여자가 있건 연애하건 상관없어요. 근데 그 애가... 그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애까지 만들고도 숨긴다?”“심지어 오늘 같은 날,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둔다고요? 그건 절대, 지언이 성격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조기봉이 머쓱하게 입술을 씹었다.“근데 혹시 모르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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