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341 - Chapter 1350

1353 Chapters

제1341화

아무도 정은이 억울해하는 걸 당연하게 여길 수는 없었다.그 누구도.“나는 네가 지금처럼, 자신이 원하는 걸 분명히 알고 그걸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었으면 해.”현빈이 조용히 말했다.“만약 언젠가 지치고 힘들어진다면, 억지로 버티지 않아도 돼. 집으로 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나... 우린 항상 네 뒤에 있어.”정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하지만 금세, 그 눈물이 미소로 바뀌었다.“응!”현빈이 무언가를 주머니에서 꺼내 건넸다.은은한 광택의 목걸이였다.“작년에 출장으로 해외에 갔을 때, 그 나라의 한 액세서리 가게에서 우연히 샀어.”그는 사실 그때 국내에 돌아와 정은이네 집에 들렀을 때 건네려고 했었다.하지만 계속 미루다가 타이밍을 놓쳤고, 결국 그냥 주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역시 그냥 주지 않기엔 아쉬웠다.정은은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손바닥 위에 얹힌 펜던트는 원형 테두리 안에 육각 별이 새겨져 있었고, 별의 중심엔 알파벳이 한 줄 새겨져 있었다.Hakuna Matata.무의식중에 소리 내 읽은 순간,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이거... 유명한 애니메이션 대사 맞죠? 그...”“응.” 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출장 갔던 나라에서 자주 쓰는 속담이기도 해. ‘걱정 없이 살아라’,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의미야.”그 내용은 그 애니메이션에서 어린 멧돼지와 어린 미어캣이 어린 사자에게 전한 축복이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현빈이 정은에게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현빈이 호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정은보다 더 당황하고 놀랐다.“갑자기 왜 호주로 가려고? 혹시 네 엄마가 무슨 말을 심하게 해서, 네 마음에 상처라도...?”“외할머니.”현빈이 부드럽게 손을 올려 진정시켰다.“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제 말부터 잠깐 들어보세요. 네?”봉수진은 불안한 듯 두 손을 꼭 잡았다.“너 이제 떠나잖아... 내가 안 급할 수가 있겠냐. 정말... 속이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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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2화

정은은 정말로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차는 곧 현빈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풀며 정은이 말했다.“오빠, 다 왔어요.”문을 열고 내리려던 그가 잠시 멈춰서 정은을 바라봤다.“정은아, 잘 있어.”“오빠, 언제 떠나요?”반쯤 열린 창문 너머로 정은의 눈빛이 현빈을 붙잡았다.어느새, 하늘에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현빈은 정은의 눈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왜? 배웅이라도 하게?”“네.”“모레.”“알았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차를 돌려 떠났다.하지만 그녀는 집이 아니라, 곧장 실험실로 향했다.불을 켜자, 안쪽 어둠 속에서 남진일이 유령처럼 스르륵 나타났다.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과 진일은 동시에 흠칫 놀랐다.“선배... 다음엔 제발, 걸을 때 소리 좀 냅시다.”정은이 한숨 섞인 말투로 말했다.진일은 묵묵히 두어 초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노력은 해볼게.”“방학인데, 선배는 왜 실험실에 박혀 있는 거예요?”정은은 자신도 부지런한 편이라 생각했지만, 진일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긴 했다.진일은 멍하니 되물었다.“방학이야? 오늘 며칠인데?”그 순간, 정은은 깨달았다. 자신은 단순히 ‘조금’ 모자란 게 아니라 아예 비교 불가였다.‘이래서 선배가 국가 프로젝트도 따내고, 그 복잡한 서류며 자료도 다 해냈구나.’정은이 대답하려는 순간, 진일은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하더니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그렇네... 벌써 방학이네...”진일은 정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 시간에, 설마 너도 야근하러 온 거야?”“왜 안 돼요?”정은은 캐비닛을 열어 익숙한 동작으로 실험가운을 걸쳤다.“선배도 하는데, 난 안 돼요?”진일은 살짝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나 오늘은 야근 아니야. 나 여기 휴게실에서 자는 거, 기억 안 나?”옷장 들일 때, 진일은 정은에게 정식으로 메일까지 보내 ‘사용 목적’을 공지했었다.정은은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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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3화

“이 시간에... 배달이 가능하나요?”정은이 물었다.“배달 안 시켜.”진일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야식은 어디서 나와요?”20분 뒤.정은 앞에 놓인 건 빨갛게 빛나는, 윤기 좔좔 흐르는 불닭볶음면.얼큰하고 매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정은은 무의식적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진일은 남은 면의 절반을 양념에 비벼 그릇에 담고는 정은 맞은편에 앉았다.진일의 그릇에 담긴 음식은 정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정은이 슬쩍 자기 그릇을 내려다보자, 진일은 고민하다 물었다.“양 괜찮아? 모자라면 좀 줄까? 나 아직 안 먹었어. 깨끗해.”“아니요, 아니에요. 충분해요.”“오케이.”진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진지하게 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정은도 젓가락을 들었다.맵고, 또 맵고... 하지만 맛있었다.진일이 순식간에 반 그릇 이상을 비우는 걸 보며, 정은은 입에서 불이 나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하... 진짜 매워... 죽을 맛...’결국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을 꺼냈다.“면 끓인 그 냄비, 쓸만하죠?”진일이 면을 삼키고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렸다.“완전 좋던데? 네가 산 냄비랑 그릇들 전부 잘 쓰고 있어. 내가 검색해 봤거든. 그 냄비만 해도 몇십만 원 하던데? 그 정도면 당연히 좋지.”“가격까지 검색했어요?”“그냥 좀 궁금해서.”‘좋으면 집에도 하나 들일까 싶었는데, 가격 보고 바로 포기했잖아...’정은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남진일 선배님, 이건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러는데요. 선배 지금 돈 안 부족해요?”“안 부족하긴 해.”진일이 웃으며 대답했다.“먹고 자고 다 실험실에서 하니까 쓸 데도 딱히 없고.”“내가 말하는 건 생활비 얘기가 아니에요. 선배 지금 손에 두 개나 되는 국책 과제 들고 있잖아요. 그 예산 대부분 정부에서 나오는 거고, 그 안에 연구자 인건비도 포함돼요.”“그 돈은 연구 장비 사고, 실험하는 데 써야지. 집에 냄비 사는 데 쓰면 안 되지.”“그 인건비로 월급 주는 거예요, 선배 자신한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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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4화

고백의 장소가 달라졌다. 지난번은 재석의 집이었고, 이번엔 정은의 집이었다.“재석 씨...”정은이 낮게 중얼였다.남자는 촛불 아래 서 있었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손에는 싱그러운 꽃 한 다발.너무도 성실하고, 너무도 진지한 모습이었다.재석은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은 앞에 섰다.정은의 복잡하지만 어딘가 이해한 듯한 시선을 받으며, 그는 붉은 장미를 건넸다. 그리고 정장 안주머니에서 작은 사각형 상자를 꺼냈다.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재석은 한쪽 무릎을 꿇고, 정성스럽게 반지를 내밀었다.“정은아, 우리 결혼하자.”정은은 반지 상자 안을 바라보았다.크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정교하게 세공된 반지였다. 촛불의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도 눈부실 정도였다. 반지 크기 또한 딱 맞을 것 같았다.집 안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촛불들, 그리고 ‘Marry Me’라고 적힌 조명의 글자, 벽을 따라 떠 있는 풍선들까지.‘이걸, 혼자서 이 짧은 시간 안에 다 준비한 거야...?’재석의 정성과 진심이 전해졌다.‘정말... 진심이구나.’하지만 정은은 문득 재석의 눈을 마주치고, 그 기대 가득한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망설이고 말았다.그 찰나의 진심이, 고스란히 재석에게 전해졌다.서로는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눈빛 하나로도 상대의 생각을 알아차릴 정도로.재석은 정은의 머뭇거림을 알아챘고, 정은은 재석이 그걸 눈치챘다는 걸 알아버렸다.그 순간,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공기가 멈춘 듯한 침묵이 흘렀다.정적이 길게 이어졌다.시간이 조용히 흘렀고, 창밖에서는 밤바람이 커튼 자락을 살짝 건드리며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왔다.재석은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였다. 마치 조각상처럼 정지된 자세였다.그가 들고 있는 붉은 벨벳 상자를 쥔 손가락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몇 번이고 입을 떼려다, 다시 다물었다.‘뭐라도 말해야 할 텐데... 뭐라고 해야 하지...?’결국, 먼저 입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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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5화

그날 밤, 실패로 끝난 청혼.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정은과 재석의 관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두 사람은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지냈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둘 중 아무도 그날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굳이 꺼낼 필요도 없어 보였다.심현빈은 호주에 도착한 뒤, 정은에게 전화를 걸어오거나, 가끔 메시지를 보내왔다.짧은 안부 인사 한 줄이 대부분이었다.가끔은 그곳 풍경 사진이나 스쿠버다이빙을 하는 사진도 함께 보내왔다.정은은 흥미가 생기면 몇 마디 더 묻기도 했고, 바쁠 때는 답을 미뤘다가 나중에 보면 ‘굳이 뭐 답장할 것도 없네’ 싶어, 그냥 넘기기도 했다.그런데도 현빈은 여전히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정은은 그에 맞춰, 여전히 가끔은 답하고, 가끔은 읽기만 했다.‘웃기네. 예전보다 오히려 연락이 잦아졌잖아.’물론, 현빈은 봉수진과 이춘재에게도 소홀하지 않았다.정은에게 보낸 사진은 대부분 두 사람에게도 전송되었고, 오히려 그쪽이 더 먼저 받는 경우가 많았다.봉수진은 문자 보내는 걸 귀찮아해서, 늘 영상 통화로 때웠다.현빈도 바쁘지 않으면 할머니의 전화를 놓치지 않았다.가끔은 호주에서 현빈으로부터 선물이 오기도 했다.그곳 특산물이라며, 소소하지만 정성스러운 것들.봉수진은 캥거루 가죽으로 만든 가방을 받았고, 이춘재는 헌터 밸리산 포도주 한 병을 받았다.정은에게는 두 사람이 대신 전해주었다.호주 원주민의 전통 공예품.점묘화나 나무 조각 같은 것들.Hakuna Matata, 인생은 걱정 없이 흘러간다는 뜻처럼, 따뜻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심지어...현빈은 재석에게도 선물을 보냈다.음... 뭐랄까...오메가3, 루테인, 간 건강 영양제 같은 대형 브랜드의 건강 보조제 세트.그걸 받은 재석은 딱 한 마디.“심 대표님께... 고맙다고 전해줘.”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말투는 딱딱했다.‘어떻게 들어도... 이를 꽉 문 소리네.’...현빈이 떠나고 나서, 심정훈은 집에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원래도 적막했던 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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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6화

질병은 말을 타고 오다가, 걸어서 떠난다는 말이 있다.이미윤은 거의 한 달 가까이 병원 신세를 지고 나서야 퇴원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의사의 당부는 단 하나.무리하지 말고, 화내지 말 것.현빈은 이미윤이 입원한 다음 날, 집사에게 안부 전화를 받고 나서야 어머니가 병원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직접 담당 주치의와 통화한 결과,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그저 심적 스트레스와 급격한 혈압 상승에 따른 실신이었다.현빈은 즉시 귀국행 항공권을 예매했다.출국 전, 어머니에게 전화 한 통 하려 했지만, 말도 꺼내기 전에 그쪽에서 날아온 건 거친 말뿐이었다.[전화해서 뭐 하자는 거야? 내가 병원에 누운 거, 너 불러들이려고 쇼하는 거로 생각하니? 잘 들어. 한번 갔으면 그냥 거기 있어. 갔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마! 난 이제 너 같은 아들은 없는 셈 칠 거야!]현빈은 짧게 대답했다.“알겠어요.”전화를 끊은 뒤, 그는 바로 항공권을 취소했다.이후 어머니의 상태를 묻는 일은 전부 집사를 통해서만 이어졌다.그날 이후, 모자는 단 한 번의 통화도 하지 않았다....심정훈은 현빈이 호주로 간 사실을 그가 떠난 지 2주가 지난 후에야 알게 됐다.심정훈의 정보력이 늦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지금은 그룹의 실권이 완전히 넘어간 상태.현빈이 그룹 전체의 의사결정권자이고, 심정훈은 사실상 사업에서 손을 뗀 지 오래였다.게다가 그는 세계 곳곳을 떠돌며 거의 연락 두절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고,그는 찾고 싶어도 찾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현빈과 심정훈, 남반구와 북반구, 약 15시간의 시차를 두고, 간신히 한 통의 전화로 연결됐다.[생각은 정리됐냐?]“네.”그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심정훈은 말이 없었다.그리고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적당한 시점에 끊는 것도 괜찮지.]현빈은 별다른 반응 없이 화제를 돌렸다.이번엔 이미윤의 병에 대해 말했다.“아버지는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지 않다는 거, 예전에 하셨던 말씀이니 이해합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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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7화

“죄송합니다, 사모님. 장인미 간호사는 심 대표님이 직접 지정하신 인물이라... 교체가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주치의는 진땀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이미윤은 순간 말을 멈췄다.“심 대표? 누구?”“사모님의 아드님, 심현빈 대표님입니다.”그 말을 들은 이미윤의 눈에, 아주 잠깐 실망이 스쳤다.‘그 애가...’하지만 그 감정은 단 몇 초도 되지 않아 강한 눈빛으로 바뀌었다.마치 기대 따윈 없었다는 듯, 단단하게.“내가 누군 줄 알고, 그 아들이 간호사 하나 못 바꿔주겠어?”주치의는 당황하며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그게... 사모님, 정말 송구합니다. 심 대표님께서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사모님께서 혹시 간호사 변경 요청을 하셔도, 저희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너...!”이미윤이 입을 더 열기 전.철컥-병실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심정훈이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섰다.갑작스레 나타난 그의 모습에, 이미윤은 잠시 얼어붙은 표정을 지었다.심정훈은 무표정하게 손을 들어 보이며 의료진을 물러나게 했고, 간호사들과 의사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문이 닫히는 순간, 병실엔 둘만 남았다.“뭐야, 당신 왜 왔어? 지금쯤이면 전 세계 어디선가 한량처럼 잘도 떠돌고 있겠구먼”“아들이 그러더군. 당신이 입원했다고.”말인즉, 병문안 왔다는 거였다.하지만 이미윤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럼 내가 지금 두 손 모아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이 고귀한 발걸음, 직접 한국 땅까지 밟아주시다니?”심정훈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그따위 말투로 할 거면, 더 얘기 나눌 필요 없겠네.”이미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또 시작이네. 늘 그렇지.’‘자기 기분 조금만 불편하면, 대화 자체를 끊어버리는 사람.’“알아서 해.”말투는 여전히 싸늘했지만,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이었다.자존심은 굽히지 않았지만, 분위기를 더 악화시키고 싶지는 않다는 신호였다.심정훈은 옆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테이블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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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8화

어쩌면 심정훈의 병문안이 조금은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혹은, 아들이 왜 그렇게까지 해서 해외로 떠났는지에 대해 조금은 더 편안하게 받아들였을지도.그날 이후, 이미윤은 갑작스럽게 치료에 협조하기 시작했다.애초에 마음의 병이 크긴 했지만, 병원도 좋고, 의료진도 훌륭했기에 일주일 만에 퇴원이 결정됐다.그런데 정작 심정훈은 병문안 온 다음 날 아침, 조용히 한국을 떠났다.퇴원 준비 중, 이미윤은 문득 물었다.“회장님은?”곁에 있던 집사가 눈을 깜빡이며 잠시 말을 멈췄다.“회장님께서는...”그 머뭇거림.딱 봐도 눈치 보이는 말투.뻔하지 않은가.이미윤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심정훈이 다시 이 땅 밟는 건, 내 장례식 때겠네?”집사의 얼굴이 순간 하얘졌다.“사, 사모님... 그런 말씀 마세요...!”하지만 이미윤은 뜻밖에 침착했다.“가라면 가라지. 다 가버려. 그래야 끝이지, 뭐.”‘다 끝나야지. 그래야 나도... 놓을 수 있어.’집사는 더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고개만 푹 숙였다....9월 중순, 한 해의 두 번째 학기가 다시 시작되었다.신입생들이 등록하러 오고, 복학생들도 하나둘 캠퍼스로 돌아오는 시기.정은은 이미 박사 과정 선발을 확정 지은 3년 차 석사과정을 밟는 대학원생이었다.더 이상 개강식 같은 행사에 끌려갈 필요는 없었다.행정실에 얼굴만 비추면 되는 정도.민지와 서준은 여름 내내 전국을 돌아다니며 신나게 놀다가 실험실에 복귀한 그날, 누가 봐도 제법 보기 좋게 햇볕에 그을려 있었다.민지는 다이어트에 완전히 성공했다. ‘마른’ 수준은 아니었지만, 딱 보기 좋게, 건강하고 균형 잡힌 몸매로 거듭났다.흔한 백옥 피부에 연약한 이미지가 아니라, 활력 있고 자신감 넘치는, 보기 드문 건강미.“정은 언니이이이...! 보고 싶었어요!!”문을 열자마자 튀어 들어온 작은 폭탄.다음 순간, 정은을 와락 끌어안겼다.정은은 순간 놀랐지만, 이내 웃으며 민지를 토닥였다.“나도 보고 싶었어. 둘 다.”새 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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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9화

모두 별다른 이견은 없었다.어디서, 뭘 먹을지는 당연히 민지의 픽이었다.“학교 근처에 진짜 맛있는 고깃집이 있어요! 방학 전에 모모랑 갔다 왔는데, 완전 대박! 고기도 신선하고, 거기만의 특제 소스가 진짜 미쳤어요. 딱 그 불향에...”“됐어 됐어, 묘사 안 해도 돼. 우린 네 미각 믿는다니까.”민지는 잠시 멈칫하더니, 눈이 동그래졌다.“내 혀가 그렇게 신뢰받는 레벨이야?”그리고 곧, 그 혀는 사실로 판명되었다.고깃집은 대학가에서도 잘 눈에 띄지 않는 골목 안에 숨어 있었다.입구도 좁고 허름했지만, 문 열기 전부터 고기 굽는 냄새가 후각을 찔렀다.안에 들어서자 ‘치이익’ 소리와 함께 고기가 구워지며 기름이 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결국 넷이 배불리 먹고 나올 땐 이미 밤이 늦은 시간이었다.어두운 하늘 아래, 더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식당 안의 열기를 털어내는 듯했다.진일은 실험실로 돌아가야 한다며 먼저 일어섰다.“지하철 타고 간다고요? 지금요?”민지가 놀란 표정으로 정은을 바라봤다.말보다 눈빛에 더 많은 질문이 담겨 있었다.정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 말 맞아.”“진일 선배 그렇게 알뜰해요? 솔직히... 돈 없는 사람은 아니잖아요?”“‘좋은 자원은 중요한 데 써야지.’ 진일 선배가 늘 하는 말이야.”‘완패다. 진짜 나는 그냥 철없고 무계획한 소비자일 뿐... 반성하자, 민지야...’“소정은!”그때 길 건너편, 차창이 스르륵 내려가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재석이었다.창밖으로 손을 흔들던 그는, 곧 차에서 내려 정은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정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민지와 서준을 향해 말했다.“나 먼저 갈게. 너희도 조심히 들어가.”“넵! 정은 언니 잘 가요!”민지는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그렇게 재석이 정은의 어깨를 감싸며 차에 오르고, 차가 골목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민지는 눈을 떼지 못했다.그리고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정은 언니랑 조 교수님... 진짜 너무 잘 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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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0화

정은은 얼마든지 이유를 댈 수 있었다.연구실에 일이 많아서, 세미나가 있어서, 학교 일정이 꼬여서...그 어떤 핑계도 그럴듯했고, 재석 역시 그런 말엔 굳이 의심하거나 따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정은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정은은 재석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더 정확히는, 거짓말을 해야만 관계가 유지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거짓으로 거절하는 사이가 되긴... 싫었다.그보단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돌려 말하지도, 숨기지도 않고.있는 그대로, 감정 그대로.가고 싶지 않다는 그 이유 하나면 충분했다.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면.“교수님. 우리, 그냥 연애 자체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요?”정은의 말에, 재석은 잠시 말을 잃었다.정은이 고개를 살짝 숙였을 때, 재석은 조용히 물었다.“그 ‘그냥’이라는 건... 어떤 의미야?”정은이 시선을 다시 들었다.“그냥... 지금 우리가 함께 있는 이 순간을 감사하며 즐기자는 뜻이에요. 가족이니, 주변 사람이니... 그런 것들까지 굳이 엮지 말고요.”재석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하지만 우리, 이미 서로 부모님도 다 만났잖아. 가족들께 인사도 드렸고.”정은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다 만났죠.”그래서 정은이 확실히 알게 됐다. 사람과 사람이 맞는다는 것과, 가족 간의 거리감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정은은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재석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우리 집 쪽이... 불편했어?”“엄마야? 아버지?”정은은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조율할 수 있지만...’‘가족과의 관계는... 그만큼 간단하지 않잖아.’정은은 다시 눈을 들었다.“우리가 함께하는 데에, 다른 사람은 개입하지 않았으면 해요.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럴 수 있어요?”재석은 그 눈빛을 바라보았다.기대와, 동시에 단호함이 함께 담긴 시선.“응.”잠시 후, 재석이 고개를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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