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겸과 헤어지고 나서, 그때 내가 했던 노력과 버틴 시간을 돌아보니... 그게 참, 우스웠어요.”정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안에는 씁쓸한 회한이 배어 있었다.“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 하나 때문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자신을 갉아먹고, 결국엔 나 자신을 의심하게 됐던 그 시기... 그게 정말, 가치 있었을까요?”재석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 가치 없지.”정은이 희미하게 웃었다.“맞아요. 가치 없죠. 나...”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마치 자신을 더 단단히 다잡듯 다시 입을 열었다.“해야 할 일이 아직 너무 많아요. 학업도, 연구도, 과제도, 논문도... 그 모든 것들이 ‘며느리 노릇'이나 '결혼해서 아이 낳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해요.”“내가 얼마나 애써서 그 진창 같은 과거에서 빠져나왔는데... 이제야 겨우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됐는데... 또다시 다른 진창에 빠지고 싶진 않아요.”재석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근데, 그게 진창이 아니면? 넌 아직 가까이 가보지도 않았잖아. 어떻게 단정할 수 있어?”정은은 곧장 남자의 눈을 마주 보았다.그 눈빛엔 두려움도, 미련도 없이 오직 확신만이 담겨 있었다.“아직도 모르겠어요? 난, 앞이 어떤 길인지 시험해 볼 여유도, 체력도 없어요.”“당신 말대로, 그게 진창이 아니라, 짙은 안갯속에 가려진 아름다운 풍경일 수도 있겠죠. 안개만 걷히면 드러날지도 몰라요.”“하지만 그 안에 낭떠러지나 벼랑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나는 그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요.”“확실한 방법은 하나예요. 애초에, 그 테이블에 앉지 않는 것...”재석은 대답하지 않았다.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짓지 못했다.말은 끊겼지만, 분명 손은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서로를 바라보는 눈도 마주하고 있었다.하지만 둘 사이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버티고 있었다.그 무엇보다 가까운 듯.또 그 무엇보다 멀리 느껴지는 거리.그 정적을 깨뜨린 건, 다름 아닌 정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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