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331 - Chapter 1340

1353 Chapters

제1331화

현우는 조기봉이 선물해준 로봇 강아지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설명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지언이 일어나려 하자, 현우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조금만 더 놀자, 엄마랑 대디 금방 안 와.”지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현우는 자기가 뭔가 이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설명서를 들고 조기봉에게 다가갔다.“할아버지, 여기 음성 인식 스위치가 어디에 있어요? 같이 봐주세요!”조기봉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지언이 먼저 재빨리 설명서를 가로챘다.“음성 인식 스위치 찾는 거지? 아빠가 봐줄게.”“아빠, 여기 앉아봐요.”“그래.”조기봉은 옆으로 밀려나고, 대신 지언이 현우 앞에 앉았다.“여기, 이 부분. 이거 눌러봐.”“됐어요!”지언은 웃는 얼굴로 슬쩍 물었다.“아까 엄마가 대디랑 있다고 하지 않았어? 엄마는 지금 실험실에서 야근 중 아니야?”“아니에요! 엄마 이틀 휴가 냈어요. 아빠, 이거 프로그램은 강아지한테 뭐 시키는 거예요? 약간 AI 같은데요?”지언은 프로그램 코드를 힐끔 본 뒤 말했다.“음, 강아지 후각 제어하는 부분 같네. 엄마 휴가 냈어? 뭐 하려고?”“엄마가 그러는데요. 대디랑 여기 구경 다닌대. 엄마가 가이드해준다고요.”그 말을 들은 순간, 지언은 피식 웃음 비슷한 숨소리를 흘렸다.“아빠, 방금 왜 웃었어요?”현우가 고개를 들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너희 그 대디가 핸드폰 없어? 내비게이션 없어? 간판 못 읽어?”“있죠! 대디는 나라 말도 여러 개 할 줄 아는데요?”“하...”지언의 입꼬리가 얄궂게 말려 올라갔다.‘그래서 뭐, 일부러 휴가까지 내서 같이 다닌다고? 볼 게 그렇게 많아?’시간이 꽤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현우는 로봇 강아지를 끌어안고 씨익 웃었다.“할아버지 할머니, 저희 이제 갈게요. 스케이트장이랑 로봇 강아지, 다 너무 좋아요! 할머니 밥도 진짜 맛있었고요!”그 한마디에 조기봉과 강서원은 입을 귀에 걸고 웃으며, 눈까지 실룩였다.“그래, 다음에 또 오너라!”“가자.”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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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2화

집 안으로 들어서자, 지언은 두 아이를 조심히 내려놓았다.“잘 있어, 아빠 갈게.”예의 있게 인사만 남기고, 더 머물 생각 없이 돌아섰다.‘뭐야...?’수환은 소파에 앉은 채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방아쇠 당길 준비까지 다 했는데, 총도 안 쏘고 그냥 간다고?’현우랑 현민은 슬쩍 서로를 바라보며 미묘한 표정을 주고받았다.“지언 씨, 잠깐만요!”리아가 재빨리 따라나왔다.지언은 현관 앞에서 돌아서며 물었다.“무슨 일이시죠?”“차 한 잔 하고 가실래요? 잠깐 앉아 있다 가요.”“괜찮습니다.”담백한 말투.욕망이 보이지 않는 평안한 얼굴.그리고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쉽게 다가올 생각 마라’는 분위기.리아는 잠시 말을 고르다,“오늘 두 애들, 혹시 너무 힘들게 한 건 아니죠?”“아닙니다. 아주 잘 지냈어요. 필요하시면 내일도 제가 유치원 하원 후에 데리러 가서 본가에서 저녁 먹이고 데려다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약속 끝나고 연락 주셔도 되고요. 그럼 그때 데려다줄게요.”‘필요하시면? 약속 끝나고?’리아는 잠깐 눈을 좁혔다.‘이거, 은근히 할 말 다 하네?’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내일 끝나고 연락할게요.”지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만 갈게요.”리아는 등을 돌려 걸어가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작게 혀를 찼다.‘성깔 있네.’...“갔어?”리아가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퍼져 있던 수환이 웃으며 물었다.“응, 갔어.”리아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얼음을 가득 담고 벌컥벌컥 들이켰고, 바로 속이 시원해졌다.“나도 한 잔 따라줘.”수환이 장난스레 말했다.“손 없냐?”“에이, 온 김에 내 물도 좀...”수환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매를 훌훌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바로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투덜거렸다.“내 팔자야, 밭에서 자라는 배추보다 못해, 시들어도 물 한 컵 안 주고...”리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중얼거렸다.“물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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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3화

“야... 요즘 대표님 출퇴근 패턴, 완전 미스터리 아니냐?”“그러게, 모르는 사람은 진짜 애 데리러 다니는 줄 알겠어...”“야야야, 헛소리 하지 마. 대표님 아직 미혼이야, 애는 무슨...”“잠깐만! 너 지금 포인트 제대로 짚었다!”“작년에 그 결혼식 사건 기억 안 나냐? 현장 갔다 온 임원한테 들었는데, 애 하나가 장난감 오토바이 타고 예식장 쳐들어와서 ‘아빠’ 소리 질렀다며? 그다음? 결혼식 엎어졌잖아.”“그 뒤로 신부 쪽에서 공식 입장 하나 안 내고, 언론에선 화해무드 연출하고, 조씨 집안 이미지까지 감싸주는 인터뷰까지 하고... 그거, 완전 입막음 당한 거지.”“야야, 그 얘기 하지도 마라! 나 그때 뒷조사 살짝 해봤는데, 임원진들 입 싹 다 다물고, 마치 누가 목에 칼이라도 겨누고 있는 사람들처럼 굴더라.”“야, 그럼 우리 대표님, 진짜 애 있는 거냐?”“씁...”셋 다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오후 6시.지언은 정확히 두 아이를 픽업했다.“아빠, 오늘도 아빠가 데리러 왔네요?”현민이 말하자, 현우가 고개를 갸웃했다.지언은 웃으며 물었다.“왜? 싫어?”“아니요! 매일 아빠가 왔으면 좋겠어요! 근데 엄마가 말했어요. 아빠는 바빠서 자주 못 온다고요.”지언은 눈썹을 한 번 치켜올렸다.“그래? 엄마가 또 뭐래?”“음...”현우가 잠깐 고민하더니, 입을 뗐다.“엄마가, 아빠가 우리랑 놀아주느라 돈 못 벌면, 나중에 우리 받을 유산이 줄어든대요.”‘하... 변리아, 진짜...’“또 뭐래?”“엄마가 요즘 법 진짜 잘 돼 있다면서, ‘조’ 씨 성 안 따라도 상속권 생긴대요.”지언은 어이없다는 듯 낮게 중얼거렸다.“너희 엄만 돈에 눈이 멀었구나.”현우는 해맑게 끄덕였다.“맞아요! 엄마는 완전 재벌 꿈나무예요!”‘나 진짜, 이런 말 어디서 배운 거야.’지언은 현우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본가에 도착하자, 두 아이는 신속히 아이스링크로 향했다.장비를 착용하자마자 휙휙 뛰어다니며 한 시간 넘게 놀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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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4화

리아는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다가왔다. 겉으로 듣기엔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귀 기울여 들으면 그 안에 담긴 미묘한 뜻이 느껴졌다.“엄마!”두 아이가 뛰어가자 리아는 자연스럽게 한 팔에 아이 하나씩 안아 올렸다.그러다 문득 뭔가 떠오른 듯,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지언 씨, 거기서 얼마나 더 서 있을 건데요?”지언은 잠깐 멈칫했다.“금방 갈 거예요.”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말을 모호하게 했나 봐요? 들어와서 애들이랑 좀 더 놀다 가라는 뜻이었는데요.”그 말에 시선을 옆으로 돌려 수환을 바라봤다.“그리고 너, 호텔 예약해뒀다면서? 안 가?”수환은 한 손으로 가슴을 짚으며 과장되게 말했다.“리아, 그렇게까지 말하면 나 상처받는다!”“구급차라도 불러줄까?”“이런, 너무하다 정말! 간다!”수환은 일부러 드라마처럼 느린 걸음으로 돌아서며 팔을 살짝 휘저으며 걸어갔다. 그리고 등 뒤로 괜히 ‘이젠 잘 가거라’ 같은 배경음악이 들리는 듯했다.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저건 뭐야.’지언이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 사람... 참... 피곤하다.’그때 현우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대디! 엄마가 이번에 숏폼 드라마 투자한다는데, 대디가 남주 하면 딱이야! 완전 잘 어울려요!”수환은 발끝을 헛디뎌 몸을 휘청거렸다.‘세상 별수 없다!’“아빠, 어서 들어와요! 나 간식 많아요, 다 줄게요!”멀어지던 수환의 마음이 약간 상했다.‘야, 꼬맹이들. 예의 어디 갔니?’...지언은 결국 거실 소파에 앉았다.현우는 약속이나 한 듯, 방으로 달려가 수입 과자를 한 아름 품에 안고 돌아왔다.“이거... 그리고 이거... 이것도...! 다 제가 좋아하는 거예요! 아빠, 뭐부터 먹어볼래요?”지언은 건성으로 넘기지 않았다. 하나하나 포장지를 유심히 살피며, 진짜로 입맛이 당기는 걸 골랐다.아이에게 기분 맞추는 방법...어젯밤 읽은 육아서에서 본 내용이었고, 지언은 그걸 놀라울 정도로 잘 기억하고, 직접 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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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5화

“지언 씨.”리아가 와인셀러에 살짝 몸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혹시...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요?”지언은 잠깐 침묵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있어요.”리아의 눈빛이 살짝 진지해졌다.“말해봐요.”“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설수환 씨랑, 어떤 관계예요?”예상치 못한 질문에 리아는 잠깐 멈췄다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내가 수환이랑 어떤 사이인지, 그걸 꼭 알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요?”“있죠.”지언은 피하지 않고 리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앞으로 내가 당신이랑 어떤 방식으로 지낼지, 그걸 결정하는 기준이 될테니까요.”“만약... 나랑 수환이 연인 사이라면?”지언은 잠시 시선을 내려뜨리더니 말했다.“그럼, 앞으로는 선을 지킬 거예요.”“무슨 선?”“당신은 애들 엄마, 나는 애들 아빠. 그 이상, 직접 엮일 일은 없다는 선.”“그럼... 연인이 아니면? 그땐 나한테 어떻게 할 건데요?”순간, 지언이 조용히 일어섰다.그리고 묵묵히, 리아를 향해 걸어왔다.리아는 짧게 숨을 들이켰지만, 곧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그래, 어디까지 오나 볼까?’한 발, 두 발...둘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고, 숨결이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그러더니, 지언은 느리게 팔을 들어 리아의 허리를 아주 살짝 받쳤다. 힘을 주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너무나 가벼운 터치.그런데 리아는 피하지 않았다.“만약, 당신이 설수환 씨랑 연인이 아니라면...”지언의 목소리가 낮게, 또렷하게 들렸다.“난 당신과, 애들 아빠와 엄마로서만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 정확히 말하자면, 리아씨가 내 여자가 됐으면 좋겠어요.”그 마지막 ‘내 여자’라는 말에, 리아는 미처 준비 못 한 듯 눈을 깜빡였다.‘뭐야, 나 지금까지 이걸 구경하듯 보고 있었는데.’‘왜... 이 불길이 내 쪽까지 번지는 기분이지?’리아의 얼굴에 잠깐 스친 미묘한 표정, 그걸 본 지언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남자의 손끝이 리아의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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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6화

“어려운 거 알면서 왜 나를 ‘지언 씨 여자’로 만들고 싶어요?”리아는 웃으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지언의 턱선을 가볍게 스쳤다.지언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여성을 깎아내리려는 말은 아닌데요, 보통 남자들은 어려운 상대일수록 더 승부욕이 발동하죠.”“지언 씨도, 보통 남자예요?”“세끼 밥 먹고, 희로애락 느끼고, 부처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고... 보통 남자죠, 뭐.”“나는... 지언 씨가 다른 남자랑은 다를 줄 알았는데요.”지언의 입꼬리가 더 깊게 올라갔다.“물론, 다른 점도 있죠.”“예를 들어요?”“글쎄요... 얼굴이 좀 반듯하다든지? 키가 좀 크다든지? 통장에 찍힌 잔액 숫자가 남들보다 뒤에 0이 몇 자리 더 있다든지?”“푸하하...”리아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겸손한 듯, 자랑하는 거예요?”“지금 이 순간, 여기... 내가 당신 앞에서 이렇게 당신을 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다르다는 거... 적어도 당신 눈엔 다른 거, 맞죠?”리아는 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 잘생긴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난 똑똑한 남자가 좋거든요.”지언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그럼, 리아 씨, 제 지능은 마음에 드세요?”“음... 그럭저럭?”“그럭저럭?”지언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뭔가 더 바라는 거 있어요?”지언의 시선이 슬쩍 그녀의 입술로 내려앉았다.“혹시... 뭐든 괜찮아요?”순간, 리아의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둘 사이의 공기가 달아오르려던 그때.“아빠, 엄마, 뭐해요?”현우의 목소리가 2층 난간 위에서 툭 떨어졌다.지언은 마치 전기가 찌릿한 듯 손을 확 거두었고, 리아도 놀란 듯 두어 발짝 물러났다.“크흠... 씻었어?”지언이 헛기침하며 물었다.현우는 해맑게 말했다.“네! 다 씻었어요!”순간, 둘 사이에 번지던 뜨거운 기류는 현우의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스르륵 식어내렸다....진욱이 연차를 쓰는 바람에, 재석은 자연스레 랩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정은도 마냥 놀진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는 새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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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7화

정은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빈손으로 찾아뵙는 건 예의가 아니에요.”재석은 못 이기는 척 한숨을 쉬고는 차를 갓길에 세우고, 함께 마트로 들어갔다....오전 10시, 두 사람은 조씨 본가에 도착했다.현관에 들어서자, 가사도우미가 재빨리 다가와 슬리퍼를 내밀었다.정은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제가 할게요.”가사도우미는 살짝 놀란 듯, 그러면서도 어딘가 감탄한 얼굴로 정은을 바라봤다.‘저런 점이 닮았구나.’재석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본인이 직접 신발을 챙기고,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괜히 재석 도련님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네.’‘딱, 비슷한 사람이니까.’거실로 들어서자, 정은이 먼저 입을 열어 인사했다.“회장님, 사모님. 안녕하세요.”“응.”강서원은 가볍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 표정은 늘 그렇듯 냉랭했다.반면, 조기봉은 활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아니, 정은아! 너 왜 아직도 ‘회장님, 사모님’이라고 불러? 이제 좀 편하게 부르랬잖아.”정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부르는 게 더 마음 편합니다. 회장님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하하... 그래, 그래...”조기봉은 잠깐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결국 멋쩍게 웃으며 손을 긁적였다.“그래, 잘 왔다! 마침, 내가 방금 우려낸 차가 있는데, 맛 좀 볼래?”“네, 감사합니다.”조기봉의 푸근하고 소탈한 말투에 정은은 마음 한켠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조기봉은 직접 찻잔을 들고 와 정은 앞에 건넸다.“어때?”정은은 두어 모금 더 음미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처음엔 약간 쌉싸름한데, 곧 입안에서 단맛이 돌기 시작하네요. 차 맛이 부드럽고, 신선한데 풋내도 없고, 삼킬 땐 목 넘김도 깔끔해요.”“그리고 마지막에 약간... 청량감 같은 게 느껴지는데요? 혹시 상급 녹차인가요?”조기봉은 무릎을 탁 쳤다.“이야, 대단하다! 또 맞혔네!”그는 요즘 정은과 함께 차 마시는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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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8화

“뭐가 그렇게 웃겨?”강서원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정은은 손에 쥔 매실차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냥 웃겨서 웃었어요. 그게 문제 될까요?”“안 마실 거야? 아니면 맛이 별로야?”“사실... 이런 거 안 하셔도 돼요.”정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정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사모님, 결국 저 임신했는지 보고 싶으셨던 거잖아요? 이렇게 돌려서 하지 마시고, 그냥 물어보시면 돼요. 저 다 솔직히 말씀드릴 건데요.”강서원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잠깐 들킨 듯 멈칫했지만, 곧 스스로 합리화하며 말을 이었다.“뭔 소리야? 그냥 사프란이야. 요즘 애들 진짜 드라마 같은 거 너무 봐서 망상하는 거 아니니? 무슨 임신이니 유산이니... 어이없네.”“저 유산 얘기는 안 꺼냈는데요? 그런 생각하신 분이 누구신지는 모르겠네요.”강서원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정은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확실히 말씀드리자면, 저 임신 안 했고요. 그리고 당분간 결혼하거나 애 가질 계획도 없어요. 이제 좀 안심되세요? 그리고 이 매실차는... 사모님이 드세요.”그 말을 남기고, 정은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강서원은 본능적으로 찌푸린 미간으로 바라봤다....“정은아...”마침, 재석이 그녀를 찾으러 오던 길이었다.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하려고 할 때.“먼저 갈래요.”정은이 말했다.재석은 잠깐 멍해졌다.“그래.”그는 묻지도, 붙잡지도 않았다.“차 가져올게.”그 말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방금 외할머니한테 연락이 왔는데, 어제 돌아오셨대요. 오늘 저녁 외가에서 먹기로 했어요. 밤엔 거기서 잘 거고요.”“그럼... 나도 같이...”재석이 무심코 내뱉었지만, 정은은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나 하룻밤 잘 거예요.”둘이 동거 중이라는 건, 대충 눈감아주는 어른들도 있었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대놓고 굴면 먼저 욕먹을 사람은 재석이었다.“알겠어. 그럼 데려다 주기라도 할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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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9화

조기봉은 웃으며 재석을 안으로 불렀다.부자지간이 거실에 들어서자, 조기봉은 손수 차를 우리며 말했다.“원래는 이 차, 정은이 오면 내주려고 했던 건데... 네가 운 좋게 덤으로 얻어 마시는 거다.”재석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아버지, 저 아들이잖아요? 차 한 잔 마시는 게 뭐 대수라고요.”“이게 무슨 차인지는 알아야지. 이건 내가 아끼는 최상급 녹차야! 마셔봐, 얼른.”재석은 조용히 잔을 들어 두어 모금 마셨다.“어때?”조기봉이 기대 섞인 눈으로 물었다.“괜찮네요.”“그게 다야?”“네, 다예요.”조기봉은 어이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봐라, 이래서 내가 이 귀한 차를 너 같은 애한테 주면 안 된다니까! 아깝다, 아까워! 정은이한테 줄걸...”재석은 웃으면서 빈 잔을 내밀었다.“한 잔 더 주세요.”“꺼져! 꿈도 꾸지 마! 역시 정은이가 최고야...”말 안 해도 정은이는 늘 공감과 리액션을 착착 맞춰줘서, 조기봉 마음에 썩 들었다.그러다 문득 조기봉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근데, 너 정은이랑 사귄 지도 꽤 됐지? 앞으로는 무슨 계획이 있냐?”재석은 잠깐 멈칫했다.“아니, 내가 뭐 결혼 재촉하려는 건 아니다. 그냥, 사람이 살다 보면 가정 꾸리고, 아이 낳고, 그게 자연스러운 인생의 흐름 아니냐.”“너도 이제 서른 넘었고, 정은이도 내년이면 대학원 졸업이고... 둘이 미래 얘기는 안 해봤냐?”재석은 두 초쯤 생각하다 작게 말했다.“없어요.”조기봉은 눈이 동그래졌다.“뭐야? 설마 그냥 연애만 하고 결혼 생각은 없는 거야? 너 그럼 나쁜 놈 되는 거다?”재석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제가 그런 놈처럼 보여요?”“그럼, 정은이 쪽에서도 그런 얘기 꺼낸 적 없고?”재석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그 침묵은... 곧 대답이었다.조기봉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요즘 젊은 애들은 우리 세대랑 많이 다르긴 하지. 결혼이 구속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그래도, 인생의 본질은 비슷하더라.”그는 찻잔을 살짝 돌리며 느릿느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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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0화

봉수진은 그 모습을 보고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하지만 한숨 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이춘재는 봉수진의 손등을 살며시 토닥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정은이 웃으며 말했다.“오빠, 살 좀 빠진 거 같은데요?”현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그, 그래?”“응, 외할머니, 안 그래요?”봉수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자를 유심히 바라보다가,“그러게, 진짜 살 빠졌다. 현빈아, 요즘 뭐 제대로 못 챙겨 먹었니?”한숨은 한숨이고, 걱정은 또 걱정이었다.지금 봉수진의 눈빛엔 분명한 안쓰러움이 스며 있었다.‘어휴...’손녀도, 손자도, 둘 다 어느 쪽이든 다 귀한 내 새끼.현빈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요즘 좀 바빴어요. 덥기도 하고, 입맛도 별로고.”봉수진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잘 됐다! 오늘 네가 좋아하는 오리구이 해놨어. 좀 많이 먹어.”“네.”그리고 정말로 저녁 식탁에서 현빈은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식사 후, 이춘재는 현빈을 붙잡고 바둑판 앞에 앉았고, 봉수진은 소파에 앉아 드라마 삼매경에 빠졌다.정은은 혼자 슬쩍 정원으로 걸어나왔다....여름이면 비울 줄 알았던 이 정원은 여전히 정갈하게 손질돼 있었다.정은은 새삼 놀랐다.꽃 가꾸는 사람, 채소 관리하는 사람, 토양 손질하는 사람, 온도 관리하는 사람.한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따로 관리한다더니, 확실히 달랐다.꽃들은 만개했고, 채소는 싱싱하게 잘 자랐으며 멀리 보이는 과수원은 올해 새로 단지까지 내어 서쪽 기후에 맞춘 땅에서 특별히 키운 수박밭이 눈에 띄었다.초록 덩굴 아래 속살을 감춘 큼직한 수박들이 이따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며칠만 더 두면 훨씬 달아질 거야. 다음 장마 오기 전엔 따야 하고.”언제 다가왔는지... 현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정은이 고개를 돌리자 바로 눈앞에 깊은 눈빛이 닿았다.잠시, 숨이 멎는 것 같았다.“그럼, 그때 외할머니께 부탁해서 나도 두어 개 챙겨야겠어요.”현빈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말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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