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의 모든 챕터: 챕터 1361 - 챕터 1370

1409 챕터

제1361화

방선근은 아무 말도 못 했다.방금 제대로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말은 안 했지만,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한편에서, 정은은 여태껏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건 말할 타이밍이 없어서가 아니었다.‘엄마 혼자서 전장을 평정하는데, 내가 끼어들 이유가 없지.’이미숙의 날카로운 발언, 단단한 시선.그리고 단어 하나하나에 실리는 힘.정은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이토록 강한 사람이 됐을까?’한때, 아이패드도 ‘싫다’며 거부하던 이미숙이었다.문자보단 메모지를 선호하고, 스마트폰도 한참 지나서야 억지로 쓰게 됐는데, 지금의 이미숙은 출판사 대표 앞에서도 단 한 치도 물러섬이 없었다.‘나만 성장한 게 아니었구나.’정은은 불현듯 소진헌도 떠올랐다.이미숙의 책 사인회에 따라다니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던 그 시절, 소진헌은 늘 뒷짐 지고 조용히 기다려주었고, 그 와중에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고, 자연스럽게 견문이 넓어졌다.그 영향일까? 요즘 소진헌의 수업은 훨씬 재미있어졌고, 작년엔 전국 교사 수업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까지 받았다.그 학교에서 전국 단위의 교사상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소진헌은 연말에 7년 넘게 묶여 있던 교원 승진 심사를 드디어 통과했다.‘그땐 기대도 안 했는데... 진짜 그냥, 그렇게 되더라.’그는 겉으로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속으로 아주 기뻤다.다시 현실.방선근은 이미숙이 그냥 지나갈 사람 아니라는 걸, 이제야 제대로 깨달은 듯 말투를 바꿨다.“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나 편집장님 관련해서는 저희 출판사도 법적 대응을 준비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 정도 되시는 분이면 아실 겁니다. 개인과 조직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이미숙은 짧게, 하지만 꽤 날카롭게 웃었다.“후훗... 그게 바로 자리가 사람을 망친다는 거죠.”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방 사장님, 사장님이 착각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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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2화

방선근의 돌변에도, 이미숙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물론이죠. 제가 한 말, 한 글자까지도 책임질 수 있습니다.”그 순간, 방선근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미쳤구나, 진짜! 당신 지금 계약 상태라는 거 알고는 있어? 텐스출판사랑 정식 계약이 돼 있는 사람이 감히 우리를 협박해?!”벌떡 일어나더니, 방선근은 손가락으로 이미숙을 가리켰다.“‘선생님’이란 호칭, 체면 차려서 불러준 건데... 당신 진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나석천은 나석천이고, 당신은 당신이야. 우리 출판사를 이런 방식으로 협박하려고? 우릴 만만하게 봤구나?”정은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이미숙의 시선 역시 차갑게 가라앉았다.‘손가락질까지...?’그다음 순간,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나왔다.“저, 손가락질당하는 거 싫어해요.”“손 치우시죠.”잠시 정적.그걸 깨듯 방선근은 코웃음을 쳤다.“뭐? 손가락질 좀 했다고 뭐? 내가 너희 따위한테...”툭-그리고 바로 그 순간.두 개의 커피잔이 동시에 들려 방선근의 얼굴을 향해 그대로.쏴악!쏟아졌다.순간, 정적.회의실 전체가 얼어붙었다.방선근은 한쪽 뺨에 커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도 잊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어 있었다.이미숙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손가락질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사람 말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정신 좀 차리시라고 커피 드린 겁니다.”“당신... 당신...!”방선근은 벌벌 떨며 입술을 씹었다.이마에 핏대가 올랐다.“네가... 나한테 커피를 부어? 감히?!”정은은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왜요,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요? 이왕 붓는 거, 날짜 가려야 되나요?”“이미숙! 정신 차려! 당신 계약 내 손에 있어! 진짜 날 건드리면, 이 출판계에서 못 버티게 만들어줄 수 있어! 당장 퇴출시킨다!”그 말에 정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엄마, 이 사람이 지금 엄마를 못 버티게 만들겠다는데요?”이미숙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마치 예상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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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3화

청수벤처스를 찾아내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텐스출판사의 지분 구조를 따라가며 주주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결국은 정답이 보이기 마련이었다.“청수벤처스?”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블릿을 손에 든 채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겼다.“청수벤처스는 생긴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벤처캐피탈 업계에서 요즘 엄청나게 주목받고 있어요. 처음엔 연예계 인기 스타들과 파트너십을 맺으면서 빠르게 입지를 다졌고, 지금은 본격적으로 영상 산업 쪽으로 뛰어들었어요.”정은의 눈이 빠르게 스크롤을 따라갔다.“이번에 나무엔터를 노리는 건, 아마 영화 산업 진입 티켓이랑 IP 판권 기반의 수익 모델을 손에 넣으려는 거예요. 그리고...”페이지를 넘기며 정은은 몇 개의 투자 흐름을 훑었다.“청수벤처스, 작년부터 이미 관련된 포석을 깔기 시작했어요.”이미숙의 눈매가 좁혀졌다.“그럼 청수벤처스랑 텐스출판사는 무슨 관계야?”“청수벤처스가 텐스출판사의 최대 주주예요.”‘그래서였구나...’이미숙은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방선근이 겁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겁은 났지만, 손을 뗄 수가 없었다.정은은 말없이 계속 화면을 넘겼다. 스크롤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청수벤처스의 실질 지배 구조를 보면...”그 순간, 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눈빛이 단단히 굳었다.“왜 그래, 정은아?”이미숙이 조심스레 불렀다.“왜 그래? 청수벤처스 뒤에 누가 있는 거야?”정은의 입에서 천천히 두 글자가 흘러나왔다.“청류재단.”그리고 그 재단의 최대 출자자는 강서원이었다.정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왜... 그분이 여기에...?’...같은 시각, 텐스출판사.쾅!사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선근이 들어섰다.책상을 박차고, 의자를 걷어차고, 서류 뭉치를 벽에 집어 던졌다.“아오, 진짜 미친 거 아냐?!”그는 하영규를 불러들였다.하영규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자, 방선근은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도대체 누가 계약 기간을 10년에서 2년으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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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4화

정은은 잠시 말을 멈췄다.“나도 내부의 자세한 일까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누군가 최대한 악의로 했다고 짐작하고 싶지도 않고요.”비록 강서원이 자신에게 그리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이 추측하고 싶지는 않았다.‘설령 나에겐 냉담했을지라도, 이 문제와 연결 지을 근거는 없어.’“정은아...”재석이 정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남자의 손바닥은 익숙하고도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네가 원하는 건 뭐야? 내가 뭘 하면 돼?”서로의 눈빛이 맞닿는 순간, 정은은 무언가가 풀린 듯 가슴이 놓였다.그전까지 정은은 내심 걱정했다.혹시라도 재석이 ‘지금 이 타이밍에 이 얘기를 꺼낸 이유가 뭘까’라며 오해하진 않을지, 혹은 이걸 계기로 두 집안 사이를 의도적으로 뒤흔들려는 건 아니냐는 의심을 하진 않을지.하지만 지금 보니, 그 모든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했다.‘내가... 내 남자친구를 너무 얕봤나 봐.’그 생각이 스치자 정은은 재석에게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그러나 지금은 자책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하루라도 빨리 나석천의 문제를 풀어야 했다.“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요. 엄마랑... 당신 어머님이 직접 얼굴 보고 얘기 나누셨으면 해요.”“좋아.”재석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준비할게.”약속은 바로 다음 날 점심으로 잡혔다.재석이 강서원에게 전화를 걸자, 전화가 연결되기도 전에 강서원은 먼저 통화 목적을 미리 짐작했다.물론 재석도 돌려 말할 생각은 없었다.짧고 간결하게 나석천 관련 상황을 설명하고, 식사 자리를 제안했다.예상외로, 강서원은 의외로 담담하게 응했다.[좋아. 식사 한번 하자.]...다음 날, 날씨는 화창했다.가을 하늘은 높고, 구름은 옅었으며, 공기에는 선선한 기운이 감돌았다.정은과 이미숙은 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해 룸에서 기다렸다.정은은 살짝 긴장한 듯 손끝을 만지작거렸고, 이미숙은 물잔을 들고 창밖을 응시한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5분쯤 지났을 무렵, 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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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5화

“그럼에도 지금까지 나 편집장님과 제가 나무엔터를 두고 움직이지 않았던 건, 이 회사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함께 세우고, 함께 키워온 곳이니까요. 하지만 정말 끝까지 가야 한다면—그 정도 감정쯤은 내려놓을 수 있어요.”“이런 나무엔터, 청류재단은 여전히 탐나시나요?”이미숙의 말투는 또렷했고, 흐름은 매끄러웠다.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준비된 듯 망설임 없었고, 뒤로 갈수록 더 단단했다.이 자리에 앉은 건 파국을 원해서가 아니었다.가능하다면, 나석천도 살리고 나무엔터도 지켜내고 싶었다.그게 이미숙이 지금 강서원 앞에 앉은 이유였다.정작 나석천의 문제는 그녀에게 큰 걱정이 아니었다.이미 대응할 방법은 충분히 세워뒀다.그녀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든 건, 바로 강서원의 태도였다.‘아무리 사업은 사업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여기까지 오는 동안 강서원이 단 한 번도 정은과 재석의 관계를 고려했다는 흔적은 없었다.사적으로 친분이 없으니, 모든 건 철저히 비즈니스로 판단한다.그 논리는 이해가 되지만, 적어도 아들의 연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고려조차 되지 않는 태도는...‘강 여사는 정은이를 애초에 사람으로 안 보는 거야.’이미숙의 간담이 서늘해졌다.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또 설 연휴 때 일이 떠올랐다.한밤중,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다음 날엔 조기봉을 데리고 일방적인 식사를 준비했던 그날.‘이유가 있었구나...’강서원은 처음부터 이 관계를 반기지 않았다.더 정확히 말하면, 정은의 존재 자체를 탐탁지 않아 했다.바로 그때, 직원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음식을 상에 올려도 될까요?”정은이 대답하려던 찰나, 이미숙이 먼저 움직였다.조용히 일어나더니, 가방을 들고 딸의 손을 잡았다.재석은 잠시 얼어붙었다.강서원 역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하지만 이미숙은 곧게 선 허리를 더 반듯하게 세우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죄송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제가 경솔했습니다. 나 편집장님의 일은 앞으로 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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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6화

재석이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저는... 어머니와 정은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한 게... 잘못이었어요. 왜냐하면... 애초에 균형이란 게 불가능하니까.”“너... 지금 무슨 말을...”“제일 나은 선택은, 거리 두기입니다.”이번엔 화도 내지 않았다.재석은 담담하게 말을 끝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룸을 나갔다.강서원은 자리에 앉은 채, 하나둘 테이블에 올라오는 음식들을 바라봤다.하나도 손이 가지 않았다.그저, 기분 나쁜 포만감이 가슴속에 차올랐다.‘내가 틀린 말 했어?’‘난 그저 비즈니스로 접근했을 뿐인데.’‘이미숙은 도움을 청하러 오는 처지에서 저렇게 당당한 이유가 뭐지?’‘딸이 우리 아들이랑 사귀니까?’ ‘그걸로 내 앞에서 큰소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L시로 돌아가기 전, 이미숙은 나석천과 조용히 한 번 더 만났다.두 사람은 책방 겸 서재 공간에서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돌아가는 길, 나석천과 아내가 현관까지 배웅을 나왔다.“여기까지만 하죠. 앞으로 고생 좀 하실 텐데, 미리 감사드려요.”이미숙의 말에 나석천은 고개를 저었다. 표정엔 피곤함보단 오히려 홀가분함이 묻어 있었다.“괜찮아요. 비바람 몰아치던 시절도 잘 버텼는데, 이깟 소나기쯤이야 이미 각오했어요.”그날 오후, 정은은 어머니를 KTX역까지 배웅했다.“엄마. 하고 싶은 말 있으시죠?”이미숙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은은 엄마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엄마가 느끼셨듯이, 나도 알아요. 걱정 마요. 제가 한 번 다쳤는데 두 번 다치기야 하겠어요.”이미숙은 살짝 웃으며, 정은의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눈빛엔 오래된 애틋함과 묵직한 온기가 서려 있었다.“많이 컸네, 우리 딸.”정은이 살짝 다가와 팔을 벌리고, 이미숙을 조심스레 안았다.“엄마랑 아빠한테, 늘 걱정만 끼쳐서 미안해요. 예전에도, 지금도.”이미숙은 순간 얼어붙은 듯 멈췄다가, 곧 한 손으로 정은의 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부드럽고 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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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7화

‘빈 껍데기라...’강서원은 이미숙이 그날 했던 말과 똑같았다.‘왜 빈 껍데기라는 거야?!’‘나무엔터 정도 되는 규모의 회사가...’‘나석천하고 이미숙 둘만 빠지는데 회사가 한순간에 무가치해진다고?!’그쪽에서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이 회사는 구조가 좀 특수합니다. 핵심 경쟁력 대부분이 두 창립자에게 집중되어 있어서요. 그 둘 중 하나라도 등을 돌리면 회사 자체가 무너질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강서원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좀 더 생각해 볼게요.]“네, 알겠습니다.”...그날 저녁, 조기봉은 아내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요즘 왜 그래? 이틀째 멍하니 정신이 딴 데로 가 있는 것 같아.”강서원은 대꾸하지 않았다.조기봉이 계속 말했다.“내일은 쌍둥이 생일이잖아. 오후에 재석이한테 전화해서, 정은이랑 같이 와서 생일파티 하자고 했거든. 근데, 재석이가 뭐라고 한 줄 알아?”강서원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딱 잘라서 안 온대. 이유도 안 대고. 그리고 앞으로 별일 없으면 부르지 말라고 하더라. 불러도 자기 혼자 갈 테니까, 여자친구는 끼워 넣지 말라고.”조기봉이 고개를 갸웃했다.“재석이 왜 저래? 갑자기 폭탄이라도 삼킨 것처럼 버럭이야? 정은이랑 싸운 건가? 근데 걔네 거의 안 싸우잖아...”“느낌이 좀 그래. 말투가 딱히 정은이랑 사이 문제는 아닌 것 같더라고. 오히려... 집에 대한 분노 같았어. 나야 요즘 아무 일도 없고, 너는? 무슨 일 있었어?”“뭐라고요?”조기봉이 다시 물었다.“당신 혹시 재석이 화나게 한 거 있어?”강서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멍하니, 조금은 무너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재석이가 정말... 앞으로 별일 없으면 집에 오지 말라고 했대요?”“내가 그걸 지어냈겠어?”강서원의 가슴 한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이게 다 무슨 일이람.’그때, 조기봉은 어느새 강서원의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재석에게 전화를 걸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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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8화

탁재민 얘기가 나오자, 실험실 안에 잠시 조용한 공기가 흘렀다.사실, 탁재민은 좀 억울하게 휘말린 케이스였다.예전에 남진일의 가족 일로 나섰다가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그날, 한 방 제대로 맞고 병원에 실려 갔고, 의식도 못 차리고 10일 넘게 ICU에 누워 지냈다.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머리를 다친 터라, 후유증은 피할 수 없었다.지능에 문제는 없었지만, 뇌에서 근육을 조절하는 신경이 손상돼 재민은 한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결국 학교에 휴학을 신청하고, 온전히 치료와 재활에만 집중하게 됐다.이에 대해 남진일의 가족은 무한한 죄책감을 느꼈다.‘우릴 도와주려다 다친 건데... 우리가 아니었으면 저런 일, 절대 없었을 텐데.’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죄책감만으론 아무 의미 없었다.그래서 모두가 직접 행동으로 나섰다.재석은 나서서 J시에서 가장 평판 좋은 재활병원과 연결해 줬고, 입원비며 치료비는 전부 면제 처리되었다.진일의 아버지는 시내에 집을 마련해 두었지만, 여전히 시골을 자주 오갔다.갈 때마다 재민의 부모에게 돈을 드리고, 틈틈이 농사일이나 목공 일도 도왔다.재민 아버지는 1년 전 공사장에서 허리를 다쳐, 이제는 힘들여 몸을 쓰는 일은 할 수 없게 되었고, 그걸 안 진일의 아버지는 함께 주 도심 쪽으로 나가 노점 장사를 시작했다.재민의 어머니는 진일의 어머니와 함께 일찍이 커뮤니티 공동구매 일에 들어갔다.손이 빠르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사람이라, 어느새 일을 척척 배우고, 나중에는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서 ‘라이브 커머스’도 시작했다.고향 농민들 도와주는 콘셉트로, 귤이나 유자, 밑반찬 같은 지역 특산물을 판매했다.초반엔 사람도 안 들어오고, 주문도 드물었지만, ‘그래도 계속 하다 보면 되겠지’ 하고 꾸준히 이어간 덕에, 방송 시간도 길어지고 말솜씨가 좋아서 입소문이 조금씩 퍼졌다.지금은 도심의 과일 체인점과도 계약을 맺어, 라이브 방송과 오프라인 납품을 병행하는 구조로 운영 중이다.덕분에 매출은 의외로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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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9화

정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굳어 있던 등줄기가 서서히 풀어지며 한결 편안해졌다.“정은 언니, 우리 먼저 갈게요. 서준이랑 약속이 있어요. 언니도 너무 늦지 말고, 너무 무리하지 마요.”민지가 실험 가운을 벗어 사물함에 넣으며 말했다.“응, 나도 곧 갈 거야. 며칠째 집에 못 갔더니 좀 그립네.”정은이 웃으며 대답하자, 민지가 슬쩍 눈을 찡긋했다.“집이 그리운 거예요? 아니면 집에 있는 사람이 그리운 거예요? 헤헤...”정은은 잠시 멈칫했다.요 며칠 사이, 재석에게서 전화는 몇 번 왔다.하지만 둘 다 워낙 바빠 통화 시간도 짧았고, 무엇보다 강서원 얘기는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말 안 해도 서로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피한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고, 언젠간 마주해야 할 문제였다. “언니, 갈게요.”“응, 잘 가.”정은이 짐을 정리하고 실험실을 나설 즈음, 붉게 타던 해는 이미 저 산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하늘은 어둑했고,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갔다.“정은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은이 고개를 돌리자, 길가에 세워진 낯익은 폭스바겐 옆에, 익숙한 남자가 기대 서 있었다.남자의 시선이 온전히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다.따뜻하고, 부드럽고, 집중된 눈빛.“여긴 어쩐 일이에요?”정은이 웃으며 다가갔다.재석은 대답했다.“데리러 왔지. 퇴근길.”“우리 오늘 실험 끝낸 거 어떻게 알았어요? 잠깐, 민지가 말했죠?”재석이 정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내가 먼저 물어봤어.”“그럼 나한테 물어보지 왜 굳이 민지한테...”“갑자기 나타나는 게... 더 설레잖아?”그 말과 함께, 재석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정은이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려던 순간, 재석이 먼저 손을 뻗어 ‘딸칵’ 소리를 내며 벨트를 채워주었다.하지만 차는 곧장 집 방향으로 향하지 않았다.재석은 정은을 태우고 조용한 외곽의 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레스토랑 안은 은은한 조명에 감미로운 바이올린 선율이 흘렀다.크리스털 샹들리에에서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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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0화

맛있는 음식, 그리고 잔잔한 음악.이 조합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느긋하게 만든다.배가 부르자, 정은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조용히 손을 닦았다.“재석 씨, 우리... 이야기 좀 해요.”그 순간이 왔다.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재석은 오히려 차분해졌다.“그래.”정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사실... 알고 있어요. 당신 어머니가 절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거. 처음부터 인상이 안 좋았을 수도 있고, 제가 뭔가 어머니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했을 수도 있고...”재석은 그 말을 듣는 내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아니야.”정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급하게 말을 끊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절대 네 탓으로 돌리지 마.”“정은아, 잘 들어.”재석은 정은의 눈을 또렷이 바라보며, 천천히, 그러나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넌 충분히 잘했어. 누구에게도 맞추거나, 억지로 이해받으려고 애쓸 필요 없어. 그게 나든, 내 가족이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요.”재석도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사실 나도 알아. 네가 무슨 얘기 하려는지.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우리 어머니도, 최소한 나 생각해서 너와 너희 가족을 존중해 줄 거라 믿었는데...”하지만 현실은 달랐다.강서원은 그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았다.잠시 말을 멈춘 재석의 눈빛에 스치는 건, 난처함이었고, 그 아래엔 분명... 정은을 향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있었다.“정말 미안해, 정은아.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둘 사이가 좋아질 거라 믿고, 계속 너를 집에 데려가고, 자꾸 엄마랑 마주치게 만들고... 근데 정작 네 마음이 어떨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재석은 그저 생각했다.몇 번 더 보면 어색함도 사라지겠지.조금만 더 함께 시간을 보내면, 강서원도 마음을 열겠지.하지만 그건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었다.‘내가 모든 걸 다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나는 다르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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