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411 - Chapter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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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1화

“조 교수? 재석아!”전진욱의 목소리는 끝내 거의 고함이 됐다.“응? 왜?”“너, 지금 무슨 일 있지?”진욱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재석을 위아래로 훑었다.재석은 그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려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계속 작업했다.진욱은 마치 금지품 냄새를 맡은 탐지견처럼, 순식간에 재석의 코앞까지 파고들었다.“너 뭔가 이상하다. 아주 많이 수상해.”“내가 점이라도 봐줄까?”진욱이 손가락을 꼽으며 단정적으로 말했다.“정은이랑 관련 있지?”재석의 눈빛이 순간 멈췄다.“너희 싸웠냐?”“아니.”“말 돌리긴.”재석이 짧게 말했다.“헤어졌어.”진욱은 거의 10초 동안 그대로 굳어 있다가, 뒤늦게 의미를 깨닫자 폭발하듯 소리쳤다.“뭐?! 뭐라고?! 헤...”“쉿!”재석이 재빨리 손으로 진욱의 입을 막았다.“작게 좀 말해.”“으응.”진욱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재석은 손을 놓았다.“누가 먼저 얘기한 거야? 왜 헤어졌는데?!”진욱의 목소리는 여전히 컸다.재석은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멀찍이서 대조군 실험을 하던 변리아의 손이 순간 멈췄다.‘헤어졌다고?’곧 리아는 스스로 흥분했던 것이 무색했다. 강서원의 행동을 보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결국은 그렇게 될 거라는 건 시간문제였다.연회 당일, 리아도 현장에 있었다. 게다가 재석보다 훨씬 일찍 정원에 도착해, 정은과 강서원이 말싸움하는 장면을 목격했다.‘재석이를 위한 거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버릴 수 있다’, ‘재석이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으니까 먼저 놓아줘야 한다’...강서원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말들을 들으며, 리아는 그 자리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정은 씨 잘 참는다... 나였으면 벌써 한 대 날렸을 거야.’‘미래 시어머니? 괜히 비위 맞출 필요 없지.’‘아직 아들하고 이어질지 아닐지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시어머니’ 행세라니...’‘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오는 건지...’리아는 속에서 주먹이 단단히 쥐어지는 걸 느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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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2화

“하지만 경계선을 분명히 긋지 않으면, 너랑 정은 사이는 계속 부딪힐 거야.”“이거 참... 어렵네.”진욱이 재석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돌아섰다.“아니, 나한테 조언해 준다면서? 그 조언은 어디 갔어?”진욱이 뒤돌아보며 말했다.“미안, 내가 섣불렀다.”“다들 모인 김에 한 가지 발표할 게 있습니다.”진욱이 손뼉을 두 번 쳐 주의를 끌었다.태민이 고개를 돌렸다.“전 교수님, 뭔데요?”“오늘 저녁 내가 낼게. 뭐 먹을지 정하자.”“어라, 오늘 무슨 날이에요? 철옹성 같은 전 교수님이 지갑을 다 여네?”미진이 웃으며 놀렸다.“에헴...”무슨 철옹성이니 짠돌이니, 말은 맞아도 좀 은근하게 못 하나? 은근하게!결국 다수결로 한식이 아닌, 서양식으로 결정됐다.진욱이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참, 고르기도 잘 고른다...”퇴근 후, 일행은 예약된 식당으로 향했다.아까워 죽겠지만, 진욱은 시내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1인당 비용이 상당했다.자리에서 진욱은 빈티지 와인까지 한 병 땄다.“전 교수님, 밥도 반이나 먹었는데 왜 쏘시는 건지 아직 말씀 안 하셨어요.”태민이 물었다.미진이 끼어들었다.“그걸 꼭 물어야 아나? 우리 전 교수님이 요즘 ‘여왕님의 남자’로 등극하셨잖아. 그것도 법적으로 인정받은, 명실상부한 그거. 이 정도면 축하해야지.”“헉, 전 교수님, 재결합하셨어요?”태민이 놀라서 물었다.“역시 너, 실시간 검색어는 안 보는구나.”“죄송합니다...”미진은 진욱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한 번 훑었다. 리가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하늘로 치솟아 한 바퀴 돌았을 기세였다.그리고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재석을 바라봤다.‘하... 뭐라고 해야 하나? 누군 웃고, 누군 울고...’‘많은 경우, 사람의 기쁨과 슬픔은 절대 같지 않아.’일행이 식당을 나왔을 때는 이미 하늘이 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태민은 호출한 택시를 타고 가장 먼저 떠났다.리아는 직접 운전기사가 마중을 나와 태워 갔다.비싼 로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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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3화

통화 버튼만 누르면 정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녹색 버튼, 마지막 한 번의 클릭만으로...하지만 재석은 끝내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핸드폰을 천천히 접어 주머니에 넣고, 혼자 지하철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집 문 앞에 서서, 재석은 무심코 고개를 돌려 맞은편 문을 바라봤다.30초...1분...3분...그 사이,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그 문이 ‘딱’ 하고 안에서 열리고, 정은이 예전처럼 걸어 나와 환하게 웃으며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어, 우연이다.’하지만 10분이 지나도록, 그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집 안에 들어온 재석은 소파에 앉았다.눈앞에 정은은 없었지만,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소파 위에 놓인 부드러운 담요를 집어 안았다.아직도 희미하게 스민 그녀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재석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파묻었다.잠시라도, 거짓인 줄 알면서도, 그 꿈속에 숨고 싶었다.마치 현실을 외면하고 머리를 땅속에 파묻는 타조처럼.창밖엔 달빛이 차갑게 번져, 막 돋아난 나뭇가지의 새순을 비췄다.분명 봄은 왔지만, 3월의 따스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바람은 여전히 차고 매서웠다.달은 끝없이 고요하고 싸늘했다....같은 밤, J시의 한 고급 주택가.정원 한켠에서.“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불쑥 나타난 남자를 보며, 변리아는 놀란 눈길을 보냈다.조지언은 그 말에 미묘하게 눈썹을 올렸다.“왜? 반갑지 않아?”리아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비켜섰다.“일단 들어와요. 밖에 바람 차니까요.”말을 마치며 돌아서는 리아가 한마디 덧붙였다.“문은 꼭 닫아요.”“응...”지언이 코끝을 한번 긁적이며 대답했다.그는 직접 철제 현관문을 닫고, 리아의 뒤를 따랐다.“애들은요?”“벌써 자요.”“이렇게 일찍이에요?”리아의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지금 몇 시인지나 확인하고 하는 소리예요? 애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잘 크는 거 몰라요?”“흠... 이제 알았네요. 미안해요. 애들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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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4화

“그래도 현우 자는 모습이 더 귀여운 것 같아요.”지언의 말에 리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그 말 현민이 앞에서도 할 수 있겠어요?”“그럼요. 현민이가 안 귀엽다고 한 건 아니잖아요.”“...”이층에서 내려와 거실에 도착했을 때, 리아는 지언이 물 마시고 화장실 다녀오고... 분주하게 움직이면서도 정작 집에 갈 생각은 없는 걸 바로 눈치챘다.“배 안 고파요? 야식 먹을래요?”리아는 팔짱을 낀 채, 미묘하게 웃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지언은 알아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말 안 하면 찬성으로 알아들을게요. 뭐 먹을래요? 국수? 샐러드? 아니면 다른 거?”“당신이 해 줄 거예요?”“당연하죠.”지언은 말하며 슬쩍 소매를 걷었다.“고마운데, 배 안 고파요. 오늘 전 교수님이 밥 사줘서 꽤 많이 먹었거든요.”“그래서, 지언 씨는 언제 집에 갈 생각이에요?”리아는 더 이상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크흠...”지언은 전형적인 ‘전략 기침’을 했다.“저 오늘은 그냥... 안 가면 안 될까요? 여기서 자고 갈게요.”리아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왜요? 뭘 하려고요?”잠시 머뭇거리던 지언의 눈빛이 어느새 묘하게 번들거렸다.점점 농도가 짙어지는 그 시선에는 은근한 농담이 들어 있었다.“리아 씨가 하고 싶은 거면... 다 가능하죠.”“농담은 그만하시고, 진짜 왜 집에 안 가는데요?”지언이 한숨을 내쉬었다.“가고 싶지가 않아요.”조기봉이 호주에서 돌아온 뒤, 집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사흘에 한 번은 대판 싸우고, 이틀에 한 번은 사소하게 부딪히고... 말 그대로 아수라장.낮에는 회사로 도망칠 수 있었지만, 밤이 되면 피할 곳이 없었다.“호텔이 더 편하지 않아요?”지언은 리아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집이 있는데 왜 호텔에 가요? 말이 돼요?”리아는 그 당당한 말투에 헛웃음이 나왔다.“참나... 여긴 내 집이에요. 지언 씨 집 아니거든요.”“하지만 우리 아들이랑 딸이 있는 집이잖아요.”“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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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5화

지언의 단단한 팔이 리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더욱 세게 감았다.마치 리아가 도망칠까 두렵기라도 한 듯.“내가 속으로 다섯까지 셌는데, 그 안에 당신이 문을 닫으면, 난 조용히 내려가서 물이나 가져올 거고... 아니면...”“아니면 뭐...?”“당신이 생각하는 그거...”지언은 단번에 리아를 안아 올렸다.그리고 성큼성큼 안으로...“당연히 안방에 같이 들어가야죠.”문이 발끝에 밀려 닫히는 순간, 놀란 리아의 은근한 신음은 밤 공기 속으로 스며 사라졌다....같은 밤, 조씨 가문 본가.황 집사는 지언이 새벽이 되도록 들어오지 않자, 오늘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그는 당직 경비들에게 대문을 잠그라고 지시하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밤바람이 스며들어, 살짝 서늘했다.황 집사가 창문을 닫으려고 일어섰다가 동작이 불현듯 멈췄다.‘내 눈이 잘못된 건가...?’그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며, 확실히 보고 나서야 조심스레 불렀다.“회장님?”조기봉이 돌아서더니, 곧장 창문 앞으로 다가왔다.“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황 집사?”1층 창은 멀지 않은 정자를 향해 나 있었고, 조기봉은 방금 그 정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황 집사는 두 손을 내저었다.“아닙니다, 아직 안 자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닫으려다... 제가 눈이 침침해진 줄 알았는데, 진짜 회장님이시군요.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안 주무시고...”조기봉이 손짓으로 정자를 가리켰다.“막 좋은 차를 한 주전자 우렸어. 와서 한잔할 텐가?”황 집사는 원래부터 차를 좋아했다.차에 진심인 주인을 따라다니며, 긴 세월 속에 숱한 귀한 차를 맛보기도 했다.그 말을 들은 순간, 그의 눈이 반짝였다.“좋지요!”말이 툭 튀어나오자, 혹시 무례했나 싶어 덧붙였다.“제가 방해되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조기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촉하듯 손짓했다.황 집사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예, 바로 가겠습니다!”창문은 그대로 열어둔 채, 그는 총총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새벽 두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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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6화

요 며칠 동안, 조기봉이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강서원은 꼭 한 번씩은 화살을 돌려 오미선을 겨냥했다.“이번이 몇 번째야? 왜 자꾸 상관없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건데?!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뭔지는 알기나 해?!”마지막엔 조기봉의 목소리가 거의 갈라졌다.오미선은 살아 있을 때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다.‘죽어서까지 편히 못 쉬게 해야겠냐...’“하?”강서원이 비웃음을 흘렸다.“상관없는 사람? 당신도 양심이 있으면 가슴에 손 얹고 말해봐요. 오미선이 정말 상관없는 사람이에요?”“결혼기념일 날, 상관없는 사람 때문에 아내를 두고 나가요? 그 사람이 죽었다고 통곡해요? 장례식 날, 상관없는 사람의 관을 직접 메고 가요? 당신... 정말 눈 뜨고 거짓말도 참 잘한다?”“좋아. 여기까지 말이 나왔으니, 오늘은 끝까지 얘기하자.”조기봉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목소리를 눌렀다.“그날, 맞아. 당신한테 말도 안 하고 나간 건 내 잘못이야. 근데 상황이 급박했어. 1분, 1초라도 늦으면... 마지막을 못 볼 수도 있었어. 머릿속이 새하얬는데, 내가 그때 무슨 말을 어떻게...”“그만...!”강서원의 날 선 목소리가 그를 잘랐다.“당신이 그 여자 때문에 감정이 흔들리고, 정신을 못 차렸다는 얘기... 그딴 건 듣기 싫어요! 그럴수록 난 더 당신이나 그 여자가 더 미워질 뿐이에요!”하지만, 조기봉은 그만 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강서원!! 우리 결혼할 때 내가 뭐라 했는지 기억 안 나? 예전에 잊지 못할 사랑이 있었고,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때 당신의 대답이 뭐였는지 알아?”“상관없다고! 그 여자를 사랑해도, 당신에게 날 사랑할 기회를 달라고.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도 날 사랑해 주겠다고!”“그리고 당신이 내가 그 여자와의 사랑에서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에게 그 똑같은 상처를 줄 생각이냐고 물어봤어!!”“그래서 본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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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7화

그 후로 강서원은 시어머니를 따라 각종 사교 모임에 드나들며 시야를 넓혀갔다.이쪽 방면에 타고난 재능이 있다면, 아마 그녀가 그랬을 것이다.배우는 속도도, 익히는 능력도 남달랐다.재석이 두 살 되던 해, 시어머니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그렇게 강서원은 자연스럽게 조씨 가문의 진짜 안주인이 됐다.결혼 후, 강서원은 한 번도 조기봉의 과거 연애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그 여자가 누구였는지도 묻지 않았다.그리고 조기봉 역시 더는 ‘내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다’, ‘아직 첫사랑을 사랑한다’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그렇게 20년이 훌쩍 지났다.둘은 부부금실이 좋기로 소문났고,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조기봉은 돈과 권력을 쥔 자리에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밖에서 사고를 치지 않았다.비슷한 연배의 남자들이 밖에 첩을 두고 사생아까지 만드는 것과 달리, 그는 그야말로 ‘청렴의 표본’이었다.강서원을 사랑하고, 존중했으며 그녀가 원하는 건 웬만하면 다 들어줬다.다투더라도 먼저 사과했고, 의견이 엇갈리면 대부분 그녀 쪽으로 물러섰다.그래서일까? 강서원은 자신이 조기봉의 첫사랑을 완전히 대체해 남편의 마음속 유일한 여자가 됐다고 믿게 됐다.그 착각은 재석이 대학에 들어가서 생명과학을 전공하며 오미선 교수 밑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어졌다.그날, 조기봉은 직접 그 유명한 ‘오미선 교수’를 찾아갔다.그리고 그날 밤, 강서원은 어둠 속에서 남편의 낮게 흘러나온 잠꼬대를 들었다.“미선 씨...”그제야 그녀는 알았다.남편이 잊지 못한 첫사랑의 이름이 ‘오미선’이라는 걸.그 순간, 질투의 씨앗이 마음 깊숙이 심겼다.그래서였다. 강서원은 책 냄새 나는 여자, 원피스를 즐겨 입는 여자, 학문에 매달리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그리고 정은은... 그 세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여자였다....지금, 강서원은 눈앞의 초췌한 남편을 바라봤다.호주에서 돌아온 뒤, 조기봉은 마치 온 기운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오미선의 영정 앞에서, 조기봉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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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8화

‘그래’... 그 한 마디에 드넓은 저택 안이 순간 숨 막히게 고요해졌다.“허... 허허... 드디어 인정하네요.”강서원의 입가에 서늘한 웃음이 번졌다.조기봉은 아무 말도 못 했다.강서원은 등을 곧게 세운 채 돌아섰다. 마치 조금만 힘이 가해져도 꺾여 버릴 듯한... 팽팽하게 긴장된 등줄기였다.“잊지 못하면... 앞으로는 각자 살죠.”조기봉은 한참 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낮게 물었다.“진심이야?”강서원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곧 단단하고 확고한 빛으로 바뀌었다.“그래, 진심이야.”길게 이어진 정적 끝에 강서원이 막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고개를 숙일까 말까 하기 전, 조기봉이 먼저 입을 열었다.“좋아. 당신의 결정을 존중할게.”그리고는 똑바로 걸음을 돌려 객실로 사라졌다.강서원은 멍하니 돌아서 머뭇거림조차 없이 멀어지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뭐... 뭐야, 이게?’실은 오늘 밤 그녀가 이렇게 소동을 벌인 건... 조기봉이 미안해하고, 후회하고, 덩달아 자신에게 한 걸음 물러서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결코 진짜로 두 사람은 선을 긋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려는 게 아니었다.강서원은 잘 알고 있었다. 오미선은 이미 죽었다. 죽은 사람이, 설령 남편 마음속에 조금 자리하고 있더라도 자신과 끝까지 다툴 수는 없는 법이다.시간이 지나면 첫사랑은 빛이 바래고 희미해지는 법이라 그 이치는 모르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그날의 모욕만은 삼킬 수 없었다.수많은 하객과 수많은 시선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기봉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강서원을 버리고 떠났다.그 굴욕은 강서원이 아직도 사교계의 안줏거리로 오르내린다.게다가, 장례식장에서 남편의 모습...남편의 눈에 담긴 깊은 애도와 상실감은 강서원의 질투심을 활활 태웠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남편을 ‘조금은’ 혼내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 다음에는 남편도 겁이 나서라도 다시는 이런 짓을 못 할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계산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조기봉이 정말로 받아들인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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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9화

‘답이 없어.’현민은 그런 오빠를 보면서 속으로 말했다.지언은 슬쩍 딸을 보았다. 예쁜 얼굴은 잔뜩 굳어 있고, 무표정 속에 ‘어이없음’이 넘쳐흘렀다.그러고는 대놓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아들을 바라봤다.‘다행이다. 아들은 그냥 순수 그 자체네.’현우는 지언과 눈을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아빠가 왜 이렇게 이상하게 쳐다보지?’ ...세 식구가 함께 세면을 마치고 내려가니, 아침 식사가 이미 차려져 있었다.한발 늦게 내려온 리아가 식탁에서 밥 먹고 있는 지언과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좋은 아침이네.”“엄마, 좋은 아침!”두 꼬맹이가 동시에 외쳤다.지언이 고개를 들어 부드럽게 웃으며,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좋은 아침...”그 한마디에 담긴 미묘한 섹시함이 리아의 신경을 스치듯 파고들었다.리아가 눈썹을 살짝 올리며 시선을 보냈고, 남자의 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뭐지, 이건? 어쩐지 유혹하는 것 같은데?’‘예전엔 이런 사람 아니었는데?’그리고 어젯밤이 문득 떠올랐다.‘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말이 되네. 타고난 건가?’“엄마, 더워요?”현우가 우유를 한 모금 마시다 묻는다.“얼굴 빨개졌어요.”리아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물을 따르며 슬쩍 시선을 피한다.“그래?... 그래 보여?”“네!”아들의 확답에 지언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현우가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아빠, 왜 웃어요?”“에헴... 아무것도 아니야.”‘오늘 아빠, 엄마 둘 다 좀 이상한데?’헌우가 속으로 좀 이상했다.그때, 삼각관계를 다 보는 듯 담담하게 샌드위치를 먹던 현민이 느릿하게 한 마디 툭 던진다.“바보.”...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선생님에게 인사를 마친 뒤, 멀어지는 두 꼬맹이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 있던 지언은 그제야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재석은 벌써 일주일째 정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아침에 나설 때, 저녁에 조깅할 때, 집 앞, 건물 1층, 골목길...일부러 마주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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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0화

그러나 다음 순간, 재석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등을 보이며 서 있던 중년 여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섰다.잠시 멈칫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잠깐의 정적 후, 여자는 재석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누구세요?”“옆집에 삽니다.”“아, 잘됐네요. 정은 씨가 이거 전해 달라고 맡기고 갔어요.”여자는 구석에 놓인 종이상자를 가리켰다.재석은 한 박자 늦게, 힘겹게 입을 열었다.“정은 씨는요?”“이사갔어요.”그 말을 하는 여자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이 집을 정은 씨한테 세준 지가 거의 3년이네요. 정말 단 한 번도 속 썩인 적 없어요. 보세요, 얼마나 깔끔하고 예쁘게 쓰셨는지.”“세입자 참 많이 받아 봤지만, 이렇게 집을 자기 집처럼 아껴 준 사람은 정은 씨가 처음이에요. 가능하다면 쭉 정은 씨한테 세 주고 싶었죠. 재개발 들어갈 때까지라도.”그 말끝에 여자는 웃었지만, 그게 불가능하단 걸 알기에 곧 씁쓸하게 표정이 바뀌었다.“하아... 다음 세입자도 이렇게 아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 맞다.”무언가 떠오른 듯, 여자가 재석을 보며 물었다.“정은 씨, 왜 갑자기 나간 건지 아세요? 석사 졸업하고 이사 간 거라면 몰라도, 아직 4월이잖아요. 졸업까지 두 달은 남았는데.”“혹시 새로운 계획이 있나요? 미리 취업이 정해져서 다른 도시로 가는 건지, 아니면... 결혼이든 뭐든, 남자친구랑 살려고 옮긴 건지?”재석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가 혼잣말처럼 말을 이어 갔다.“제 생각엔 후자 쪽일 것 같아요. 정은 씨처럼 매력적인 사람이면, 졸업도 전에 누가 찜했겠죠, 헤헤...”“저는 이제 마무리만 하면 돼요. 새 세입자가 내일 바로 들어오거든요. 사실 정리할 것도 없어요, 워낙 깔끔하게 써서... 이 박스만 가져가세요. 저 곧 문 잠글 거예요.”“네...”재석은 종이 박스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겉은 작아 보이는데, 꽤 묵직했다.테이프를 뜯어 열어 보니, 안엔 온통 자신의 물건뿐이었다.면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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