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421 - Chapter 1430

1437 Chapters

제1421화

간호사가 보기엔, 강서원보다 예쁘고 능력 있는 여자가 세상에 널렸지만, 그만한 팔자를 타고난 사람은 많지 않았다.“간호사님, 잠깐만요.”“조 교수님?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저희 어머니, 도대체 왜 이러실까요? 전에 의사 말로는 더 이상 입원 치료는 필요 없고, 정기 검진만 받으면 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또 입원하신 거죠?”간호사가 고개를 저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모르겠다고요?”“네, 사모님이 직접 입원을 원하셔서, 저희가 급히 검사를 다 진행했는데...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습니다.”재석은 미간을 찌푸린 채 간호사가 들고 있는 쟁반을 바라봤다. 그 위에는 약병 두 개가 놓여 있었다.“그럼 이건요?”“비타민이랑, 한방 수면 보조제입니다.”“그거 주세요.”간호사는 안도의 숨을 쉬며 약병을 건넸다.“용법이랑 용량은 라벨에 다 적혀 있습니다.”“네.”재석은 쟁반을 받아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말귀 못 알아들어? 나가라니까! 나 혼자 좀 있게 해. 그게 그렇게 힘들어?!”등만 보인 채 쏟아낸 날카로운 목소리.하지만 대답은 없었다.강서원의 눈에 잠깐 기대가 스쳤다.재빨리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본다.다음 순간, 그 기대는 허탈로 변했다.문간에 서 있는 건 재석이었다.“너는 뭐 하러 왔어?”재석은 그 잠깐 스친 눈빛 속의 어두움과 실망을 놓치지 않았다.“저 말고, 누굴 기다린 거예요?”강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큰형? 둘째 형? 아니면 아버지?”“하!”마치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강서원은 즉각 방어 태세를 취하며 날카롭게 웃었다.“누가 오든 말든 상관없어. 너희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정말 아무것도요?”재석은 쟁반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어머니가 직접 전화 안 하셔도, 병원에서 연락이 옵니다. 말로 요구하지 않아도, 저희는 어머니 뜻을 헤아려서 최대한 맞춰드리려고 했죠. 항상 그랬잖아요. 그걸 모르세요?”강서원이 이상하다는 듯 재석을 보았다.“오늘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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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2화

강서원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그래, 네 아버지가 각자 살자고 했어.”“그럴 리 없습니다.”재석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실 리가 없어요.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어머니가 먼저 꺼냈을 때죠.”재석은 단어 하나하나를 힘주어 뱉었다.강서원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그 미묘한 동요를 놓치지 않은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오늘 이 소동, 아버지 들으라고 이러시는 거군요.”강서원은 고개를 돌려 손을 내저었다.“가던 길 가지 그래? 빨리 나가.”재석은 잠시 말을 멈추고, 어머니의 굳은 등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어머니, 제가 늘 느끼는 거지만, 어머니는 현명하다고 하긴 어렵지만, 절대 머리가 나쁜 분은 아니에요.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꽤 영리하시죠.”“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 아버지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인지 아실 겁니다.”“어머니가 뭘 못 참는지, 어떤 부분에서 자존심이 상했는지도 알아요. 하지만 사람의 인내심과 포용력은 한계가 있습니다.”“이렇게 계속하시다간, 아버지의 인내도, 두 분이 쌓아온 부부의 정까지 다 깎아먹게 됩니다. 얻을 건 아무것도 없어요.”“어머니 스스로 잘 판단하세요.”그렇게 말하고 재석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문앞에 다다른 순간, 발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덧붙였다.“참, 어머니 바람대로... 저, 정은이랑 헤어졌습니다.”강서원의 어깨가 움찔했다. 급히 돌아섰는데, 이미 아들은 사라진 뒤였다.“너, 그게 무슨...”텅 빈 병실에 홀로 남은 강서원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낮게 중얼거렸다.“정말 끝낸 거야?”그토록 갈라놓고 싶어 하던 두 사람이었는데, 막상 현실이 되니 기쁨보다 묘한 공허감이 밀려왔다.강서원의 가슴 한켠이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얽혔다.‘왜... 이렇게 허전하지?’...4월 말, 기온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몇 차례 보슬비가 내린 뒤, 나뭇가지 사이로 은근한 봄기운이 피어오른다.또 한 번,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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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3화

정은이 잠시 멈칫하더니 담담히 대답했다.“요즘은 계속 여기서 해.”“왜 집에서 안 해요? 예전엔 언니랑 조 교수님이 집에서 해와서 가져오곤 했잖아요?”“나... 집 옮겼어. 전에 살던 집은 전 세입자가 요리를 안 해서 가스가 안 들어와 있었거든. 그저께 신청했는데, 아마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할 거야.”“네?”민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안에 있는 만두도 씹는 걸 잊었다.‘집을 옮겼다고? 왜 갑자기?’서준도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정은을 바라봤다.정은은 대수롭지 않게,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맞지 않아서 옮겼어. 졸업하면 거의 다 실험실에서 보낼 텐데, 그래서 더 가까운 데로 구한 거지.”“그럼... 조 교수님은요?”민지가 무심코 내뱉었다.“조 교수님 실험실은 서비 대학교에 있잖아요. 여기랑 거리도 꽤 있는데, 조 교수님도 같이 이사했어요?”정은이 고개를 저었다.“아니.”“그럼...”“우리 헤어졌어.”툭-민지는 그 말을 듣자 입안에 있던 만두를 그대로 그릇에 떨어뜨렸다.서준도 손에 쥔 젓가락이 미끄러질 뻔했다.둘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뭐야, 나 잘못 들은 거 아니지?!’‘응, 네가 들은 그거 맞아.’정은은 두 사람을 향해 짧게 미소를 지었다.“난 다 먹었으니까, 너희 천천히 먹어.”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실험실 밖으로 걸어갔다.그날 오후 내내, 민지는 유난히 말이 없었다.머릿속에는 ‘정은 언니와 조 교수님이 헤어졌다’는 폭탄 같은 소식이 계속 맴돌았다.해가 지고, 하루가 마무리됐다.민지와 서준은 함께 실험실을 나섰다.“언니, 너무 늦게까지 무리하지 말아요.”가는 길, 민지는 끝까지 정은에게 한마디 덧붙였다.정은은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민지는 정말, 작은 태양 같았다.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은 민지가 불쑥 고개를 돌렸다.“서준아. 우리도 나중에 헤어지게 될까?”서준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무슨 헛소리야?”“그냥... 물어본 건데.”“헤어진다고?”“응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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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4화

강도겸이 시선을 들며 정은 쪽으로 걸어왔다.“정은아.”정은은 반걸음 뒤로 물러서며, 두 사람 사이 거리를 벌렸다.그 반응에 도겸은 씁쓸하게 웃었다.“연인이 아니라도, 친구 정도는 될 수 있잖아. 꼭 독사나 맹수 피하듯 할 필요는 없지 않아?”도겸은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너도 알잖아. 난 널 절대 해치지 않는다는 거.”“전 남친이랑은 친구 안 해.”“그럼... 조재석은?”정은이 살짝 눈썹을 올렸다.도겸은 헛기침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알고 있어. 너희... 헤어졌다는 거.”“허.”정은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소식 한번 빠르네.”도겸은 그녀 말 속의 비아냥을 못 들은 듯, 진지한 눈빛을 보냈다.“너와 관련된 건, 난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까.”“그래서 오늘 온 이유가 이 얘기 하려고?”도겸은 정은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치 아무리 봐도 부족하다는 듯, 표정에는 그리움과 미련이 가득했다.“우리가 헤어진 지 벌써 4년이야. 그 4년 동안 단 하루도 널 안 떠올린 날이 없어. 꿈에서도 예전 잘못을 고치고 싶었어. 그러니까 우리 다시...”그 마지막 두 글자는, 정은이 내뱉은 단호한 말에 잘렸다.“안 돼.”도겸은 순간 굳어버렸다.정은은 곧장 그를 지나쳐 자기 차로 향했다.차 문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의 힘으로 다시 문이 닫혔다.정은은 고개를 들며 이미 지친 표정을 지었다.“강도겸, 대체 뭐가 하고 싶은데?”도겸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네가 이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면, 오늘은 그냥 접어두자. 사실 오늘은 그냥... 밥이나 한 끼 같이 하자고 온 거야.”“내가 왜 너랑 밥을 먹어야 하지?”“잊었어? 오늘 선우 생일이잖아. 나한텐 불만이 있어도, 선우한텐 없잖아?”정은은 잠시 멈춰 서서 날짜를 계산했는데, 정말 선우 생일이었다.그동안 선우는 정은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항상 ‘정은 누나’하며 부르던 동생.나무 엔터가 막 설립됐을 때, 경험도 규칙도 몰라 손해만 보고 업계 사람들과 관계도 틀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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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5화

도겸은 속으로 불같이 화를 냈다.‘뭐, 씨...?’현빈은 도겸을 힐끗 보기만 하고, 곧바로 정은에게 웃으며 물었다.“언제 도착했어? 내가 차 몰고 실험실로 데리러 갔는데, 이미 떠난 뒤더라고.”도겸이 끼어들었다.“아, 내가 데리고 왔어. 미안, 헛걸음하게 했네.”현빈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그래?”도겸은 슬쩍 웃으며 정은 반대편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번엔 아무도 그 자리를 빼앗지 않았다.그러고는 입꼬리를 올린 채, 약간 도발하듯 말했다.“그럼, 안 믿기면 정은이한테 물어봐.”‘정은’이라는 말에 현빈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오빠, 내가 직접 내 차 몰고 왔어요.”결국 정은의 한마디가 두 남자의 기싸움을 끝냈다.선우는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보며,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도겸이 물었다.“선우, 오늘 우리만이야? 다른 사람은 없어?”선우는 고개를 저었다.“없어요.”“너답지 않은데?”선우는 원래 사람이 북적이는 걸 좋아했다. 생일이면 업계 안팎의 친구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친하든 아니든 다 한자리에 앉히는 게 보통이었다.“나이 먹었나 봐요.”선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예전엔 사람 많은 거, 시끌벅적한 거 좋았는데... 이제는 친구는 많을 필요 없고, 진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만 모이는 게 더 좋아요.”현빈이 선우를 한 번 훑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괜찮네. 좀 컸다.”도겸도 맞장구쳤다.“우리 선우, 이제 어른 다 됐네.”“푸하... 형님들은 나를 놀리면 속이 안 시원해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 우리 아버지들인 줄 알겠어요.”현빈이 어깨를 으쓱했다.“난 괜찮아, 아버지 해줄게.”도겸도 손바닥을 뒤집으며 장단을 맞췄다.“그래, 아들. ‘아빠’ 한 번 불러봐.”선우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필요없어요. 형님들 다 그만해요.”정은이 잔에 음료를 따라 선우 앞에 밀어줬다.“자, 마셔. 진정 좀 하고.”“흑... 역시 우리 정은 누나가 최고예요.”선우는 한 모금 마시더니, 도겸과 현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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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6화

정은은 재석의 반응을 보지도 않고, 그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교수님, 일이 있어서 저는 먼저 가볼게요.”정 교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재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같이 안 가고요? 우리 쪽은 다 끝났는데...”재석은 묘하게 깊은 눈빛으로 웃음을 흘렸다.“아마 우리끼리 얘기할 게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정은이 그 아인 참 눈치도 빠르고 사려 깊네요. 얼른 가서 잡아요. 진짜 가버리겠어요.”“네.”재석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교수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걸음을 옮겼다.정 교수는 재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학계 최고의 커플이랄까... 참 잘 어울려요.”다른 교수들도 맞장구를 쳤다.“소정은 학생, 이제 석사 졸업이 얼마 안 남았지?”“그러게. 두 달도 안 남았네.”“혹시 졸업증이랑 혼인신고서, 같이 들고 나오려나? 요즘 젊은 사람들 그런 거 많이 하잖아.”“소정은 학생, 박사 과정 이미 진학 확정이라던데? 박사 졸업할 때쯤이면 애가 뛰어다니고 있을 수도 있겠네. 하하.”“그럼 난 꼭 결혼식 청첩장 받아야겠네.”“그럼! 다 같이 가야지.”“하하하...”“...”교수들 무리는 마치 자기 일인 양 흐뭇하게 웃으며 두 사람의 ‘미래’를 그려나갔다....식당을 나서니 곧바로 주차장이었다.정은이 차 키를 꺼내려던 순간, 뜨겁고 단단한 손이 손목을 잡았다.뒤를 돌아보자, 깊고 검은 시선이 그대로 그녀를 꿰뚫었다.“정은아...”재석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따뜻한 숨결이 귀 옆을 간질이자, 정은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거리를 벌렸다.“왜 이사했어?”“실험실이랑 좀 더 가까운 데로 가고 싶었어요. 마침 계약도 끝나서요.”정은은 남자의 눈을 보지 않았다.“나 때문은 아니고?”“왜 나를 안 봐?”재석의 손끝이 정은의 뺨을 스쳤다.그의 시선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여자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절박하고 집요했다.정은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의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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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7화

도겸이 비릿하게 웃었다.“조 교수님은 정은이랑 이미 끝났잖아요.”재석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끝났다’라는 말이 마치 날 선 강철 바늘처럼 가슴팍 깊숙이 박혀 들어왔다.피가 배어 나오는 듯 숨이 막혔다.“그만해!”정은이 앞으로 나섰다.“이건 나랑 조 교수님 사이의 문제야. 아무리 그래도 너 같은 전 전 남친이 끼어들 일은 아니지.”도겸의 입가에 걸린 여유로운 웃음이 그대로 굳어졌다.정은은 곧 재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비록 이제 남남이 되었지만, 누군가 그를 깎아내리는 건 절대 보고 넘길 수 없었다.특히 그 ‘누군가’가 강도겸일 때는 더더욱.“나 먼저 간다.”짧게 말한 뒤, 정은은 차 문을 열어 타고 시동을 걸었다. 머뭇거림 없이 핸들을 꺾어 도로로 빠져나갔다.재석은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도겸이 이를 악물었다.“조 교수님, 전에 나한테 그랬잖아요. 남의 걸 탐내봤자 내 것이 되지 않는다고. 그 말, 오늘 그대로 돌려줄게요.”재석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비켜요. 내 차 앞 막고 있잖아요.”도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저게 지금 무슨 태도야? 헤어졌다고 잘난 척이냐?’도겸은 차가 출발하자 뒤통수에 배기가스가 직격으로 와 닿는 기분에 펄쩍 뛰었다.“조 교수가 일부러 그랬어! 나 골탕 먹이려고!”현빈이 옆에서 피식 웃었다.“그 태산 같은 조 교수도 결국 흔들리는구먼.”도겸이 고개를 홱 돌렸다.“그게 무슨 소리야?”“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진짜 화가 나지 않으면 저런 유치한 짓 안 해. 분명 이번 일은 꽤 선 넘은 거야.”현빈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봐라, 아무리 침착한 사람도... 원하지 않는 이별 앞에선 이성적이기 힘들어.”“허... 그걸 내가 몰라서? 예전에 나도...”도겸은 말끝을 흐리다 입술을 닫았다.‘아 맞다, 이놈이랑은 이런 얘기 나누는 거 아니지.’ 그리고 곧 속으로 눌러 삼켰다.촤악-현빈이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차 보닛에 등을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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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8화

정은이 새로 얻은 집은 교외, 도시와 시골이 맞닿은 경계에 있었다.실험실까지는 차로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학교까지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집 앞에 바로 지하철역이 있어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이사 온 지 꼭 일주일째 되는 날, 드디어 도시가스가 개통됐다.토요일 오전, 정은은 새집에서 첫 끼니를 준비했다.다진 고기를 넣은 가지볶음이 거의 완성될 즈음, 불이 조금 세졌다.정은은 프라이팬 속을 보느라 정신이 팔린 채, 무심코 옆으로 손을 뻗었다.“자기야, 접시...”말이 끝나자마자, 스스로 멈칫했다.‘이제 옆에, 같이 요리하면서 접시를 건네줄 사람 없구나.’그녀의 입꼬리에 저절로 쓸쓸한 웃음이 번졌다.찬장 문을 열어 접시를 꺼내고 재빨리 갈비를 담았다.손이 빨랐음에도 불구하고 팬 바닥엔 어김없이 살짝 눌어붙은 자국이 남았다.불을 끄자 은근한 탄내가 퍼졌다.다행히 접시에 담긴 갈비는 멀쩡했다.겉은 노릇노릇, 고소한 향이 입안을 자극했다.다시 팬을 씻고, 정은은 토마토 계란볶음과 공심채 볶음을 만들었다.밥을 푸면서 습관처럼 그릇을 두 개 꺼냈다.그러다 중간에 손이 허공에서 멈추고, 한 개를 다시 찬장으로 넣었다.그녀는 식사를 마친 뒤, 부엌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챙겼다.이 아파트 단지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예전처럼 층계를 오르내릴 필요가 없었다.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엘리베이터를 고작 두 번 타면 끝났다.단지는 출입이 통제되고, 관리사무소도 있어 예전보다 생활 여건이 훨씬 나았다.하지만 정은은 그 좋은 점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중앙정원을 지나는데, 관리사무소에서 이벤트를 하는지 주민들이 길게 줄을 서서 경품을 받고 있었다.웃음소리와 말소리로 가득 찬 현장.정은은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한 번도 시선을 머물지 않은 채 곧장 걸음을 옮겼다....낮잠에서 깬 정은은 먼저 차를 몰아 실험실로 향했다.데이터를 업로드하고 나서, 이번엔 오미선 교수가 예전에 살던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매주 토요일이면, 정은은 이곳에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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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9화

“네.”[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자. 너한테 할 말이 있어.]“무슨 일인데요?”정은이 웃으며 물었다.[중요한 일이야.]현빈의 목소리에는 농담기 하나 없었고, 어딘가 묵직한 기운이 스며 있었다.정은의 표정이 금세 진지해졌다.“알겠어요.”[위치는 문자로 보낼게. ...천천히 와. 안전 운전 하고.]현빈이 보낸 주소는 한 중식당이었다.정은은 중간에 방향을 틀어, 20분도 안 돼 도착했다.방으로 들어서자, 현빈은 이미 자리에 앉아 주문을 마친 상태였다.“오빠.”“왔어? 앉아.”현빈이 일어나 직접 의자를 빼 주었다.“고마워요.”“대충 몇 가지 시켜놨는데, 혹시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지금 시켜. 먹으면서 기다리면 돼.”정은의 시선이 테이블을 훑었다.‘이게 대충 시킨 거야...?’한 상 가득... 죄다 정은이 좋아하는 메뉴였다.“저는 충분해요. 오빠가 먹고 싶은 거 더 시켜요.”현빈은 다시 한 가지 요리와 국, 그리고 후식까지 추가했다.정은이 다시 물었다.“전화로 그랬잖아요. 중요한 일이라고... 뭔데요?”현빈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젓가락을 정은 쪽으로 밀었다.“일단 먹자. 먹으면서 얘기하자.”“네.”오후 내내 일하느라 허기졌던 정은은 일단 젓가락을 들었다.현빈도 정은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며 덩달아 젓가락질이 빨라졌다.배가 절반쯤 차자, 정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서... 무슨 일이에요?”마지막으로 정은이 이런 표정을 지은 건, 예전에 현빈이 유하린의 신상 정보를 건넸을 때였다.현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의자 뒤에 걸어둔 서류 가방에서 한 파일을 꺼냈다.“이거 한번 봐.”정은이 받아 펼쳤다.“검사 보고서?”시선이 왼쪽 위 ‘성명’난에 닿는 순간, 정은의 손끝이 멈췄다.거기에는 분명 이렇게 적혀 있었다.오미선이었다.정은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이거... 교수님 검사 보고서예요?”“응.”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미선 교수님이 처음 병원에서 치료받을 때, PO-X 바이러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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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0화

현빈은 성급히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정은 손에 있던 서류 맨 아래 장을 슬쩍 뽑아 올렸다.“이것도 봐.”정은이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내렸다.다음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이거... 두 번째 입원 때 변이 바이러스 검사 보고서예요?!”“그래.”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첫 번째 입원에서 남은 후유증이 어떤 계기로 갑자기 악화됐다면, 감염된 변이 바이러스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N2였어야 해. 그런데 이번 결과는 J3였다.”그 목소리가 낮고 단호했다.“J3는 N2보다 훨씬 드물어. 지난 5년 동안 전 세계 200여 개국과 지역에서 단 한 번도 대유행을 일으킨 적이 없었지. 그만큼 희귀하고 전염력도 약하다는 뜻이야.”그런데 하필 오미선 교수가 감염됐다.“게다가...” 현빈은 말을 이었다.“오미선 교수님 외에 그때 병원에 입원해 있던 인원 전부에 대해 내가 PCR 검사를 지시했어.”정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결과는요?”“교수님 말고는 아무도 J3에 걸린 사람이 없었어.”즉, 병원 내 감염 가능성은 사실상 0이라는 얘기였다.정은의 표정이 굳었다.“나중에 알아본 바로는, 교수님이 병원에 실려 갔을 때 이미 폐 감염이 심했다고 하던데... 그럼 혹시 요양 빌라에서 J3에 감염된 건 아닐까요?”현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 생각 나도 했어. 그래서 요양 빌라에 있던 모든 사람, 직원까지 포함해서 전부 샘플을 채취했지.”정은은 숨을 죽였다.“그런데 결과를 보면 아무도 J3가 아니었어.”“왜 이런 거죠?”정은은 두 장의 보고서를 나란히 놓았다.‘J3의 전염력이 약하다고 해도, PO-X 계열 변이인데...’‘교수님만 걸리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걸린다? 가능성이 너무 낮잖아.’“반대로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에겐 전혀 없는 J3가... 교수님 몸에는 대체 어디서 들어온 거냐는 거죠.”정은의 머릿속이 고속으로 회전했다. 수많은 가설과 추측이 스쳐 지나갔다.현빈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녀의 생각을 지켜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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