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391 - Chapter 1400

1409 Chapters

제1391화

정은, 민지, 서준 세 사람은 과제에 매달려 지내느라 방학이든 아니든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게다가 이번 방학에는 남진일까지 합류했다.그 뒤로는 탁재민까지 더해졌다.오미선 교수 말대로 재민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다.재민과 진일은 거의 실험실 붙박이였다.진일이 재민을 데리고 낮에는 실험하고, 밤에는 휴게실에서 자고, 다음 날 눈 뜨자마자 아침을 먹고 다시 일하는 일과가 매일 반복됐다.진일이 맡던 장보기는 이제 재민이 전담하게 되었다.둘은 한 명이 사고, 한 명이 요리하는 식으로 척척 호흡이 맞았다.민지가 어느 날 재민을 몰래 불러 조용히 말했다.“진일 선배처럼 일만 하는 사람 되면 안 돼!”“네.”재민은 처음엔 머쓱하게 머리를 긁더니 짧게 대답했다.하지만 돌아서자마자, 그는 여전히 진일만 졸졸 따라다녔다.재민은 진일을 ‘롤 모델’로 삼은 듯했고, 그 기준에 맞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민지가 답답해서 소리쳤다.“둘 다 답이 없네, 진짜!”재민은 또 머리를 긁으며 웃기만 했다.“헤헤...”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달이 바뀌고서야 실험실 멤버들은 잠시 한숨 돌릴 수 있었다.연말이 다가오자, 민지는 고향에 내려가기로 했다.서준도 올해는 민지의 고향에 같이 가고 싶어 했다.하지만 서준의 가족은 서준과 함께 설을 쇠고 싶어해서 두 사람은 결국 상의 끝에, 서준은 J시에 남아 설을 보내고 나서 민지네 집에 가는 걸로 정리됐다.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난 괜찮아.”서준이 미간을 좁혔다.“좀 서운하지 않아?”민지는 그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당연히 집에서 부모님이랑 새해 보내야지. 너는 네 부모님이랑, 나는 내 부모님이랑. 이게 뭐가 서운해?”“아버님, 어머님이 너 하나뿐인 아들을 설에 당연히 곁에 두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난 그 정도로 속 좁지 않아.”아직 결혼한 것도 아닌데, 민지가 서준을 붙잡을 명분은 없었다.결혼했다고 해도, 그녀는 그렇게 하진 않을 것이다.‘각자의 부모는 각자가 챙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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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2화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은은 소파에 몸을 던져 기대며 아무 일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짐 나르고, 슬리퍼 내주고, 과일 씻어 내오는 건 전부 아버지의 몫이었다.테이블 위에는 각종 간식이 잔뜩 올려져 있었다.“엄마는요?”“서재. 아마 화상회의 중일 거다. 안 그랬으면 네가 들어오는 소리 듣고 벌써 나왔지.”“엄마가 화상회의를 해요?” 정은이 눈을 크게 떴다.“그럼. 나무엔터 쪽에서 나석천 대표랑 헷갈리는 일 있으면 네 엄마한테 물어본다. 예전엔 전화로도 됐는데, 영상 자료가 많아지니까 전화로는 한계가 있더라고. 그래서 아예 화상회의로 하면서 자료를 바로 주고받는 거지.”정은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예전엔 스마트폰도 안 쓰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화상회의까지 능숙하게 하는 모습이라니.흐르는 세월 속에서, 모두가 달라지고 있었다.“정은아...”말하자마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엄마!!”정은은 웃으며 달려가 이미숙의 품에 안겼다.이미숙은 두 팔을 활짝 벌려 딸을 꼭 끌어안았다.모녀가 다정하게 포옹하는 모습을 보던 소진헌은 옆에서 툴툴거렸다.“딸이 집에 온 게 별일도 아닌데, 무슨 드라마 찍는 것도 아니고...”모녀는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아빠, 질투나죠?”“여보,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소진헌은 아무 말도 못했다.예상대로, 점심은 소진헌이 직접 부엌을 맡았다.상 위에는 전부 정은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즐비했다.밥공기에는 흰 쌀밥이 수북하게 담기고, 반찬 접시는 꼭대기까지 듬뿍 쌓였다.“아, 됐어요, 아빠. 더 주면 진짜 배 터져요.”“이게 뭐가 많아? 더 먹어야지.”‘배고프지 않은데도, 아빠 눈엔 늘 배고픈 딸로 보이나 봐...’정은은 속으로 말했다....집에 온 지 이틀째.첫날은 한가했지만, 그 다음날부터 정은은 손 놓고 쉰 날이 없었다.아버지와 함께 집 안 구석구석 대청소를 하고, 텃밭에 나가 무 뽑고 상추 자르고 시금치 거두고, 설 준비도 거들었다.돼지고기를 바삭하게 튀기고, 찹쌀 경단을 빚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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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3화

“어? 아프다고? 많이 심각해?”강서원 이야기를 들은 소진헌이 벌떡 일어섰다.“흉선암이에요. 이미 절제 수술은 받으셨고, 앞으로 항암 치료를 계속하셔야 해요. 그래서 올해는 조 교수가 어머니 곁에서 설을 보내야 해서, L시에 올 수가 없어요.”“그래, 그래...”소진헌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 조 교수 어머니가 그렇게 큰 병을 앓고 계시는데, 당연히 곁에 있어야지. 미안하다, 정은아. 아빠가 몰라서 그랬어...”그날 밤, 이미숙과 소진헌은 나란히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었다.창밖의 달빛은 차가웠지만, 방 안은 온기가 가득했다.소진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 기색을 눈치챈 이미숙이 얼굴에 크림을 바르던 손을 잠시 멈췄다.“오늘 밤 왜 이렇게 심각해요?”“재석이 어머니 병 얘기 들었어?”“네.”이미숙이 고개를 끄덕였다.“오후에 마트 갔다가, 정은한테 들었어요.”“아휴... 작년만 해도 멀쩡하게 L시에 와서 우리랑 밥도 먹었는데, 사람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조 교수네 집이야 재벌 못지않게 부자잖아. 근데 병이라는 건, 돈 많고 적고, 집안이 어떻든 가리지도 않네. 인생 참 공평해, 그치?”이미숙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 남아 있었다.‘암이라니... 그건 정말 장난이 아닌데.’그 마음 한구석엔 안타까움과 연민이 동시에 스며들었다.“우리 설 지나고 J시에 가서, 인사라도 드리고 올까?” 소진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미숙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명절 끝나고 정은이랑 먼저 상의해 봐요. 괜히 우리가 갑자기 찾아가면, 정은이도 모르고, 조 교수 어머님도 전혀 준비가 안 돼 있을 텐데... 그건 더 실례잖아요.”“그래, 그래. 당신 말이 맞다. 다 당신 하자는 대로 할게.”...올해는 설 전날, 정은네 집에서 다 같이 식사하기로 했다.아침 일찍, 소진우가 아내와 아들, 그리고 부모님을 모시고 도착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소인훈이 현관에 들어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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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4화

박나영과 이미숙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또 시작이네.’주덕순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시샘이 묻어 있었다.예전엔 자기 집에서 설 전날을 보내면, 다른 시댁 식구들은 늘 밥때에 딱 맞춰 와서 앉자마자 식사만 하곤 했었다.그런데 지금은? 이미숙이 잘 나가고, 정은이까지 든든하게 자리 잡으니, 태도가 달라졌다.‘아주버님네는 참 사람 봐가면서 대하네.’“그게... 저희 엄마 말은, 오늘은 좀 늦게 출발해서요. 그래서 더 일찍 오려고 한 거예요.”소시율이 나서서 부드럽게 분위기를 풀었다.시율은 작년보다 훨씬 말랐다. 원래도 소진호를 빼닮은 예쁜 얼굴에, 키도 훤칠했는데, 살이 빠지니 인상이 더 또렷해졌다.게다가 예전의 화려한 스타일 대신, 단정하고 미니멀한 옷차림으로 바꾸니, 누가 봐도 세련된 분위기의 미인이 되었다.시율은 정은 옆으로 와 앉으며 얌전하게 인사했다.“언니.”그때 인훈이 소진헌과 얘기하다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홱 돌렸다.“나한텐 왜 인사 안 해? 오빠라고 안 불러?”“오빠, 갑자기 그러시면 깜짝 놀라잖아요.”“오... 점점 예뻐지고, 예의도 바르고. 아주 좋아.”시율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만 지었다.점심으로 준비된 음식은 소진헌이 전부 손수 차린 푸짐한 상차림이었다.오후에는 다 같이 모여 카드 게임도 하고, 마작도 즐겼다.저녁도 그대로 정은네 집에서 먹기로 했다.밤이 깊어지고, 창밖엔 매서운 바람이 불었지만, 거실 안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설 특집 공연 소리와 웃음소리로 한껏 따뜻하고 활기찼다.그러다 주덕순이 과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신 뒤, 불쑥 물었다.“근데 정은아, 조 교수는? 오늘 안 왔어?”“작년에 자연산 특대 전복에, 고급 과일까지 챙겨줘서 내가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 올해는 직접 만나서 인사하려고 했는데, 왜 안 온 거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올해는 자기 집에서 설 보낸대요. L시는 안 와요.”“어머, 왜? 작년엔 왔잖아. 올해는 무슨 일 있어?”주덕순은 재석이 오지 못하는 이유가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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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5화

[문 열어봐.]정은이 멈칫했다.“네?”[문 열어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은은 이미 현관 밖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소진헌이 그 모습을 힐끔 보더니, 바로 허리를 펴고 앉았다.“조 교수 온 거 아니야?!”작년 이맘때도, 그는 그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날 밤, 재석이 불쑥 나타나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었지.이미숙까지 고개를 들어 바깥을 내다봤다.정은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앞으로 갔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분홍 장미 한 다발이었다.“재석 씨...”입 밖으로 나오려던 이름이, 꽃을 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목구멍에 걸렸다.“혹시 소정은 씨 맞으세요?”노란색 유니폼을 입은 라이더가 미소를 지으며 꽃을 내밀었다.친절한 말투였다.정은은 몇 초간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조재석 씨가 소정은 씨께 보내는 꽃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감사합니다.”“전화번호 한 번만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아, 네. 잠시만요.”정은은 꽃을 품에 안은 채, 번호를 불러주고 서명했다.“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이더는 가볍게 인사하고 돌아섰다.정은은 품속 장미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정은아, 받았어?]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재석의 목소리.“네, 받았어요. 고마워요. 예쁘네요. 근데 궁금한데요, 설 연휴에도 꽃 배달이 가능해요?”정은은 전화를 붙잡은 채 꽃을 안고 걸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소진헌이 냉큼 다가왔다.“조 교수는? 뒤에 있는 거지?”그 말이 전화로 고스란히 재석에게도 전달됐다.잠시 침묵이 흘렀다.“아빠, 꽃이에요. 배달로 왔어요.”“뭐?”순간 표정에 실망이 스쳤지만,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장미가 참 예쁘네. 그것도 분홍색? 조 교수가 보낸 거지?”“네.”“마음 썼네, 마음 썼어.”재석이 말했다.[스피커폰으로 해봐.][아버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조 교수도 새해 복 많이 받아! 많이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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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6화

“어머니가 그냥 물어보신다는 건, 정은 씨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깔린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 제가 긴장할 수밖에 없죠.”강서원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올해 네가 집에서 설 보내서 나는 참 좋다. 리아도 현우랑 현민이 데리고 왔고, 다들 모이니까 완벽하잖아.”“명절 지나면, 나랑 네 아버지 결혼 30주년이야. 네 아버지가 파티하자고 하더라. 정은이도 꼭 같이 데리고 와.”“어머니?”“그 표정은 뭐야? 내가 무슨 꿍꿍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재석의 표정엔 장난기 하나 없었다.“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죠. 어머니, 전에 하셨던 일들이 있으니까요.”사프란 사건, 나석천 건... 여러 기억이 스쳤다.강서원이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건 다 옛날얘기야. 이번에 아프고 나니까 알겠더라. 사람이 살아서 진짜 자기 것인 건 몸 하나뿐이더라. 괜히 남 일에 마음 써봤자 뭐해.”재석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가능하다면, 정은이 부모님도 같이 모셔와. 지난번 L시에서 밥 한 번 같이 먹긴 했지만, 너희 둘 얘기를 제대로 나눈 적은 없잖아. 이번 기회에 공식적으로 인사하는 거지.”재석은 놀랐지만, 얼굴엔 기쁨도 설렘도 드러내지 않았다.“어머니, 전 이번만큼은 정말 정은 씨를 받아들이고 싶어서 그러시는 거였으면 좋겠어요. 뒤에서 다른 계산하시는 거면 안 됩니다.”강서원이 피식 웃었다.“지금 내가 적으로 보이니? 내가 그렇게 교활한 사람이야?”“아니길 바랍니다.”“어쨌든 기회는 줬어. 믿을지 말지는 네 마음이야. 네가 정말 정은이랑 잘 되고 싶으면, 부모와 가족을 배제하진 마. 너에게 직접적인 경험은 없더라도 들은 적은 있을 거야. 가족의 축복 없는 결혼은 오래 못 간다는 거.”그 말을 남기고, 강서원은 자리를 떴다....“야, 뭐 생각해?”지훈이 재석의 어깨를 툭 쳤다.“아무것도...”“난 이제 간다. 넌 오늘 본가에 있을 거지?”“응.”집에 가도 정은이가 없을 걸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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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7화

분위기가 잠시 얼어붙었다.다들 입을 닫은 채 서로 눈치를 보는데, 주덕순만 눈치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왜 이렇게 조용한 건지 감을 못 잡고 있었다.그때 시율이 불쑥 말을 던졌다.“엄마, 냄비 타는 거 아니야? 한번 확인해 봐.”“설마?! 내 족발...”주덕순은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갔다.시율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정은은 막 자리에 앉았다.그때 바로 전화벨이 울렸다.심현빈이었다.두 사람은 평소 전화를 자주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대부분 톡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편이었다.“오빠, 새해 복 많이 받아요.”전화를 받자마자 정은이 먼저 인사했다.현빈 쪽이 잠시 멈칫하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 정은아.]“거기 많이 바빠요? 외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올해도 설에 안 들어온다고?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가 시간 내서 호주로 가서 오빠 보자고 하시던데.”[조금 바빠. 중요한 프로젝트가 막바지라서, 지금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그래도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미리 전화드리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는 절대 오빠를 탓하지 않아요. 오히려 더 걱정하고 안쓰러워하시지.”현빈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이 딱 맞네.]정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거... 자랑이에요?”[응, 네가 그렇게 받아들이면 자랑인 거지 뭐.]현빈의 웃음소리가 더 환해졌다.정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빠, 요즘 제 지도교수님이랑 연락한 적 있어요?”순간, 전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모르겠어요.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교수님께 계속 전화를 드렸는데, 전화를 안 받으세요.”“연구팀 다른 교수님께도 연락했는데, 똑같이 연결이 안 된다고 나와서... 좀 걱정돼요. 오빠?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잠시 후, 현빈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정은아, 나 오미선 교수님이랑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어. 근데 네 성격을 내가 아니까... 한 번 의심이 들면 어떻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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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8화

정은은 설을 보내고 나서 비로소 J시로 돌아왔다.“정은아...”게이트를 막 나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멀지 않은 곳에서 재석이 웃는 눈으로 서 있었다.정은도 웃으며 다가갔고, 재석은 자연스럽게 그녀 손에서 여행용 가방을 받아들었다.오랜 시간 쌓인 호흡 덕분에, 둘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움직임은 매끄럽게 이어졌다. 한쪽 손으론 가방을 끌고, 다른 손으론 정은의 손을 꼭 잡았다.“먼저 밥 먹고, 집에 가자.”정은이 웃음 섞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벌써 다 계획했어요?”“당연하지.”...J시에 돌아온 이튿날, 정은은 집에만 있기에 지루해 실험실로 향했다.민지와 서준은 아직 민지의 고향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이번에 종친회 격인 사당 제사에, 민지는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여자였고, 서준은 유일하게 들어간 외부인이었다.‘역시, 권력이라는 건 대단한 거구나.’‘말하지 않아도, 변명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대신 나서주고 변호해 주는 힘.’민지가 속으로 생각하며 정은에게 전화했다.[언니, 나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요? 숙모들이랑 이모들, 사촌 동생들이 날 보는 눈빛이... 질투랑 부러움이랑, 분노랑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어요.][우리 엄마가 그렇게 신나서 웃는 거 처음 봤어요. 예전에 우리 집 재개발 보상금 들어왔을 때보다 더 좋아했죠. 숙모들이랑 얘기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걸음걸이도 당당해지고요.][그리고... 사실 하나 더 있는데... 서준이 나 몰래 우리 아빠한테 가서, 우리 쪽 결혼 풍습이랑 준비해야 할 거, 예물은 어느 정도 하는지 이런 걸 물어봤더라니까요? 언니, 서준이가 나한테도 물어본 적은 있는데... 이건 완전 월권 아니에요?][근데 내가 또 화를 못 내요. 왜냐하면... 내가 몰래 엿들은 거거든요. 아... 진짜 고민돼요. 만약 서준이가 진짜 청혼하면 어떡하죠?][아니, 청혼을 안 해도 문제예요. 아빠가 그렇게 시원하게 대답하는 거 보고, 자기 마음대로 ‘우리 결혼은 확정’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어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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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9화

“오빠도 거기 있었네요?”정은이 묻자, 오미선 교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번에 심 대표가 나를 얼마나 챙겨줬는지 몰라. 모든 걸 깔끔하게 준비해 주고, 자주 들러서 이 늙은이 안부도 살피고.][이민혜 교수가 ‘이분 누구예요? 조카예요?’ 라고 묻더라니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친조카도 이렇게 정성껏 못 해.’]이민혜 교수는, 바로 그 체중 감량도 실패하고 맹장염까지 걸렸던 당사자였다.현빈이 장난스럽게 거들었다.“제가 정은이한테 교수님 잘 챙기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안 지키면 정은이가 직접 날 잡으러 올 거라서요. 그건 제가 감당 안 되죠.”오미선 교수가 크게 웃었다.“아, 그건 진짜 정은이가 할 만한 일이네!”“아니, 두 분이 모여서 대놓고 제 흉을 보시네? 이거 반칙 아닌가요?”정은이 입을 삐죽였다.이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정은이 먼저 작별 인사를 하고 통화를 끊었지만, 입가의 웃음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잠들기 전, 정은은 늘 하던 대로 논문을 꺼냈다.침대 옆 협탁 위에는 재석이 프린트해 묶어둔 논문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며칠 전, 정은은 계절성 결막염이 도져서 전자 기기를 오래 볼 수 없었다.평소엔 태블릿으로 논문을 읽었지만, 재석이 ‘그럼 내가 출력해 줄게.’라며 관련 자료를 전부 인쇄하고 제본해 둔 것이다.‘오랜만에 종이로 보니까... 의외로 새롭네.’약을 쓰고 나서 염증은 가라앉았지만, 종이로 된 자료를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아직 다 읽지 못한 자료들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논문 한 편을 꺼내 들던 중, 사이에 끼워져 있던 색지 한 장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정은은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종이에 닿기 직전 멈췄다.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집어 올려, 원래 자리에 다시 꽂아 넣었다.그건... 조기봉과 강서원의 결혼 30주년 기념 파티 초대장이었다.전날 밤, 재석이 건네며 말했다.“가고 싶으면 가고, 아니면 거절해도 돼. 뭘 선택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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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0화

소진헌이 처음으로 조씨 가문 본가에 들어섰다.걸음을 옮기면서도 주변을 은근슬쩍 살폈다.그러고는 고개를 약간 숙여 이미숙에게 작게 속삭였다.“여기 이 집, 우리 장인 장모님 댁보다 더 크네.”이미숙이 고개를 끄덕였다.“여기, 조씨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집이래요.”“옆에 저 땅 좀 봐. 온실 지어놨네. 저거 밭으로 바꾸면 사계절 내내 채소 걱정 없겠다.”그 앞을 지나칠 때, 소진헌은 주위를 살핀 뒤 슬쩍 쪼그려 앉아 흙을 손으로 만져 봤다.‘오... 기름진데?’이미숙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이렇게 큰 땅, 누가 농사지어요? 심어놓으면 물 주고 김매는 사람도 따로 둬야 할 텐데... 채소 좀 먹자고 사람 고용하는 게 이득일까요?”“아... 그러네.”소진헌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땅만 크다고 되는 게 아니지. 농사꾼이 있어야 채소가 나오지.’“정은이랑 조 교수는? 아직 안 왔나?”이미숙도 주위를 둘러봤다.“계획대로라면 우리가 오기 전에 도착해야 했는데...”“전화해 볼까...”소진헌이 핸드폰을 꺼내려는 순간, 강서원이 조기봉의 팔을 가볍게 끼고 다가왔다.“정은 어머님, 정은 아버님.”강서원은 은은한 노란빛의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히 올린 채 화장을 곱게 했다.아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 시선엔 부드러운 미소가 머물렀고, 분위기마저 온화했다.이미숙이 미소로 화답했다.“안녕하세요. 또 뵙네요.”소진헌도 앞으로 나서며 조기봉에게 손을 내밀었다.“반갑습니다. 결혼기념일 축하합니다.”조기봉이 웃으며 악수를 받았다.“멀리 L시에서 일부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회장님, 인사가 너무 과하십니다.”“자, 안으로 들어가시죠.”“괜찮아요, 바쁘실 텐데. 저희는 저희끼리 들어가도 됩니다.”부부가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조기봉이 중얼거리듯 말했다.“정은이 부모님, 참 좋은 분들이네. 그래서 그런가, 정은이도 그렇게 예의 바르고 싹싹하게 컸지.”“재석이 눈이 진짜 높아. 좋은 것만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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