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971 - Chapter 980

1731 Chapters

제971화

이런 민지를 봐 온 서준은 아주 익숙했다. 그리고 곧바로 펼쳐진 건 민지의 실시간 홈쇼핑 쇼. “헐!! 뭐예요 이거?! 대박 맛있어요!!!” “양념이 좀 맵긴 한데, 그 알싸한 매운 게 아니라 기름지면서도 고소한 매콤함! 거기에 향신료 향이랑 쪽파 올라간 게 완전 핵심이에요.” “지글지글한 겉은 바삭하고, 안은 쫄깃쫄깃한데 속에 또 한 겹의 바삭한 반죽 있는 거 실화예요? 입에 넣자마자 바삭! 쫀득쫀득! 폭발했어요.” “정은 언니, 이거 어디서 샀어요?” 정은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만들었어.” ‘정은 언니, 대체 아직 공개 안 한 능력 몇 개 더 있는 거지?!’ 민지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 나 진심으로 말하는데요, 실험실에 있는 새 냄비랑 팬들... 그냥 언니를 위해 샀다고 보면 돼요. 그러니까... 자주해 먹자고요.” 말투는 거의 논문 발표 급으로 진중했다. 서준은 냉소적으로 한마디 던졌다. “지금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 귀에 다 들림.” “쉿! 조용히 해!” “...” “언니! 내일 바로 밀가루 한 포대 사 올게요. 실험실 간식 테이블 옆에 놔둘 거예요. 그리고 전기 팬도 사야겠네요.” ‘야망이 이렇게 노골적일 수 있나... 귀엽다 진짜.’ 정은은 그런 민지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 좋아.” “예쓰!!” ‘행복 또 적립 완료!’ 민지는 자기 몫의 전병을 금세 해치우고, 우유도 벌컥벌컥 마신 뒤, 서준 옆으로 빼꼼히 다가갔다. “서준아, 왜 말이 없어? 맛있긴 했어?” 서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천천히 먹어? 배 안 고파? 그럼 내가 조금 도와줄게.” 말하면서 슬그머니 손이 나가려는 찰나, 서준은 정확히 예상한 듯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왜, 내 거 뺏으려고?” 민지는 민망하게 헛기침했다. “뺏는다니! 말이 너무 심하다. 난 그냥! 아침을 남기면 안 되니까, 환경을 위해 돕겠다는 순수한 마음
Read more

제972화

그 이야기는 정은과 그녀의 친구들과는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저 그런 일이 또 있었구나, 하고 넘기면 그만. 하지만 ‘졌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학문적 명예라는 건 단순히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국가의 자존심과도 이어지는 문제니까.‘뭐, 어차피 우리 일이 아니긴 하지.’ 정은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잠깐 스쳐 지나간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러다 식판을 들고 배식 창 앞에 다다르자, 갓 볶아진 제육볶음의 윤기와 고소한 향이 그녀의 시선을 강탈했다. ‘됐다, 오늘 점심은 이걸로 힐링.’ ...한편, 같은 시간. 본관 최상층, 총장실.송영한 총장은 무력하게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또 졌군.” 그 앞엔 부총장 한중기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표정은 침울했지만, 충격의 강도는 총장보다 덜해 보였다. 게다가 애초에 기대가 크지 않았던 만큼, 받아들이는 것도 담담했다. “총장님...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승패는 늘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송영한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그래도 왔다 갔다 해야 말이라도 되지. 우린 지금 몇 년째 내리 패배야. 이걸 윗선에 어떻게 보고해야 하나?” 한중기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제가 소정은 팀으로 교체하자고 제안드렸을 때, 총장님께선 ‘지금 와서 팀을 바꾸면 혼란만 부를 거다’ 하셨죠. 하지만, ‘안정’이라는 게 때로는 ‘무난한 패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안정적인 실패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송영한은 말없이 눈만 감았다. 그 사이 한중기는 뜨거운 차를 따라 책상 위에 조용히 올려두었다. “총장님, 진짜 두려운 건 ‘실패’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졌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번엔 졌지만, 내년에 다시 준비하면 됩니다.” “내년에... 소정은 팀으로 나가겠다는 거야?” 이번엔 한중기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느낌이 옵니다. 이번만큼은, 그들이 뭔가
Read more

제973화

진일은 미리 식당에 가서 번호표를 뽑아두고, 다시 정문 앞으로 와서 모두를 데리러 왔다. 타이밍 딱 맞게, 도착하자마자 입장 순서가 돌아왔다. 진일이 웃으며 말했다. “이거 민지가 알려준 방법인데, 진짜 유용하더라.” 민지는 두 손을 뒤로 깍지 끼고,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요! 먹방러의 기본 소양이죠, 몰라요?” ‘어디 가서 굶을 일은 절대 없겠네, 저 열정이면.’ 서준의 원래도 안 밝던 표정이, 살짝 더 어두워졌다. ‘계속 민지 타임이네.’ 진일은 자리 잡고 메뉴판을 민지에게 건넸다. “추천한 식당이니까, 네가 주문해.” 민지는 망설임도 없이 받으며 말했다. “오케이! 시그니처 마라샹궈 하나 가고, 탕수육이랑 깐풍기, 마파두부도 넣자! 아, 너무 기름진 것만 시키면 안 되니까 양배추 볶음도! 국물은 혹시 야채와 두부 들어간 맑은탕 있어요?”직원이 바로 대답했다.“있습니다!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진짜 잘 먹는다. 메뉴에 없는 국까지 시키는 거 보면 내공이 느껴지네.’ 음식이 곧 하나둘씩 테이블에 차려졌다. 민지는 다시 직원을 불러 탄산 칵테일 몇 병을 추가 주문했다. “자, 다들 한 잔씩 들고, 우리 진일 선배의 박사 진학을 축하합시다!” 병과 병이 부딪치는 순간, 생각보다 근엄한 분위기가 시작되었다. 진일은 머쓱한 듯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다들. 예전엔 그냥 대학원만 빨리 끝내고 나가고 싶었어. 근데 여러분을 만나고, 오미선 교수님을 만나고 나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리고, ‘이제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고.” ‘부모님과 여동생도 점점 나아지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기고, 좋은 실험실에 좋은 교수님까지... 이게 바로 버팀목이지 뭐야.’ 서준도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 축하해요.” ‘그 누구보다 쉽지 않은 길이었으니까.’ 건배 후, 민지가 텐션을 높이며 모두를 둘러봤다. “이 집 평 진짜 좋은
Read more

제974화

키가 크고 단정한 실루엣의 남자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길을 건넜다. 천천히, 조용히. 그리고 마지막엔 정은의 옆에 멈춰 섰다. 민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머, 조 교수님이셨구나! 언니 혼자 귀가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젠 안심이네요.” 민지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말 그대로 걱정 덜었다는 어투였다. 서준과 진일 역시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둘이 같이 가는 건 워낙 익숙한 풍경이라...’ 둘 다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다. 정은이 가볍게 인사했다. “그럼, 우리 먼저 갈게.” 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가요! 언니!” 정은과 재석이 나란히 길을 걸어 멀어져 가고, 남은 셋은 조용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때, 진일이 문득 물었다. “정은이랑 조 교수님... 알고 지낸 지 오래됐나 봐?” 민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보다야 훨씬 오래됐죠.” 기억을 더듬어보면, 민지가 막 대학원 입학했을 무렵, 정은과 함께 식당에 갔을 때 재석과 마주쳤고, 그때부터 이미 두 사람은 꽤 친한 듯한 분위기였다. 진일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왜 항상 조 교수님이 정은 씨 데려다주는 것 같지? 집이 가까운가?” 민지는 놀란 눈으로 진일을 쳐다봤다. “헐... 선배, 몰랐어요? 두 사람, 같은 아파트 단지 살아요.” 진일은 당황한 듯 말했다. “아무도 나한테 그런 얘기 안 해줬는데...” 민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제 알았으니까 됐잖아요. 같은 방향이면 같이 다니는 거 당연하죠. 나랑 서준이처럼이요. 우리도 집 방향이 같으니까 자주 붙어 다니잖아요. 그렇지, 서준아?” 그러면서 서준 팔을 툭 치며 웃었다. 서준의 굳어있던 얼굴에 순식간에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 구름이 걷히듯, 조금 맑아졌다. “응.” 재석과 정은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걸 바라보며, 진일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Read more

제975화

“아빠가 그러는데... 석사 졸업하면 집으로 돌아오래.” 민지의 말에 서준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민지가 J시 사람이란 걸, 집에선 외동딸이라 졸업하면 반드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 여기에 남을 수 없는 거잖아.’ 민지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거 좀 봐줘. 어떤 게 나아 보여? 서준? 서준아?” “응...?” “골라달라고! 어느 게 나은지.” 서준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진짜 졸업하면 돌아갈 생각이야?” 민지는 턱을 괴며 웃었다. “모르겠어. 사실 돌아가고 싶진 않은데... 굳이 여기에 남아야 할 이유도 뚜렷하진 않아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근데... 넌, 나... 아, 아니... 정은 누나랑 우리 팀... 같이 고생한 사람들이랑 떨어질 수 있어?” 민지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당연히 못 떨어지지. 그래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냥... 그때 가서 생각하려고.”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웃을 수 있지...’서준은 차창 밖을 향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정은과 함께 길을 떠난 재석은 집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진일 선배, 박사 붙었대요. 그래서 다 같이 밥 먹었어요.” 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미선 교수님 랩으로 가는 거야?” “네.” 아파트 1층 현관에 다다랐을 때, 정은이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근데... 아까는 왜 손 안 잡았어요?” “응?” “아까 나 데리러 왔을 때 말이에요.” 지금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재석은 말이 없었다가, 조금 머뭇거리며 말했다. “민지랑 진일이 앞이라... 네가 아직 공개하기 싫어할까 봐.” ‘불편하게 만들까 봐, 괜히 조심했어.’ 정은은 말없이 남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너도 그때 안 잡았잖아.” 재석
Read more

제976화

그 말이 떨어지자, 재석의 두 볼에 순식간에 붉은 기가 퍼졌다. 하늘 끝에 퍼진 노을처럼, 은근하고 예뻤다. 정은은 현관 앞에 기대선 채, 웃는 얼굴로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재석을 바라보았다. ‘이건... 진짜로 농담이 아닌가?’ 재석은 갑자기 목이 바짝 말랐다. 숨이 잘 안 쉬어질 정도로, 입 안이 바싹바싹했다. 그는 겨우 목을 축이며 말을 꺼냈다. “아, 아냐... 나 그런 뜻은 아니고...”“그냥, 너 들어가는 거 보고 싶어서... 오해하지 마, 나...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정은은 문틀에 몸을 기대며, 그가 허둥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표정, 장난스러운 듯 말없이 웃고 있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귀여워.’ 재석은 점점 더 진땀을 흘렸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보여서, 정은은 더는 놀리지 않기로 했다. “잘 자요.” 정은은 부드럽게 인사하고,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재석은 순식간에 공허감에 휩싸였다. ‘뭔가... 놓친 느낌이야.’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던 그는, 몇 초 후에야 한숨을 쉬며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정은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떠오른 재석의 새빨간 얼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쉽게 부끄러워하다니... 진짜, 안 되겠어... 너무 귀여워서.’ 같은 시간, 재석 역시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오늘... 그 한마디 때문에 미치겠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요?’...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끝없이, 마치 주문처럼. ‘...내가 그때 진짜 ‘그래’라고 했으면... 그다음은 어떻게 됐을까?’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재석은 벌떡 일어나 찬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아니, 벌컥벌컥 마셨다. 손을 가슴 위에 얹자, 가슴이 미친 듯이 뛰는 게 느껴졌다. ‘쿵... 쿵... 쿵... 이게 뭐야, 왜 이렇게 빨라.’ 물
Read more

제977화

문득, 정은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베란다 구석. 세탁기 옆 바닥에 조용히... 놓여 있는 건... ‘어라? 저거 혹시... 트렁크 팬티?’ 추측이 확실해지는 순간, 정은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홱 돌렸다. 거실에 있던 재석은 그제야 뭔가 떠오른 듯 몸을 굳혔다. ‘아, 젠장...’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 쪽으로 뛰어갔다. “정, 정은아...!” “네?” 정은이 돌아봤다고, 재석은 괜히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거기... 볼 거 없어. 우리 그냥 나가자.” ‘못 봤겠지? 아니겠지...? 제발.’ 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재석을 따라 다시 거실로 나왔다. 하지만 걷던 도중, 정은이 무심한 듯 물었다. “근데 아침부터 왜 이렇게 부지런하게 빨래하고 있어요? 침대보에, 베란다도 정리한 것 같고...” 재석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청소는 안 했고, 샤워도 안 했어. 그냥... 침구 빨래 좀 한 거야.” 정은의 눈빛이 순간 묘하게 흔들렸다. ‘샤워는 안 했는데, 속옷은 갈아입었어...? 어젯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얼핏 떠오른 베란다 구석의 팬티. 생각하면 할수록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퍼즐. 정은의 표정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그 순간, 재석도 늦게야 상황을 파악했다. ‘설마... 설마 그걸 본 거야?’ 정은의 눈빛과 마주친 순간, 재석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귀까지 시뻘겋게 물든 재석의 모습은 정은이 본 이래 가장 ‘과즙미 터지는’ 모습이었다.‘이런 말, 남자한테 쓰면 좀 이상하지만... 내 남자 친구... 지금 진짜, 과하게 귀엽네.’ 정은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음... 오래 안 빨았다거나, 딱히 이유 없는 건 아니겠죠?” 재석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그냥... 오늘 날씨 좋길래... 햇빛 좋잖아, 빨래가 잘 마르니까... 그런 이유로...” 말
Read more

제978화

해 질 무렵, 정은은 실험대에서 내려와 가운을 벗으며 걸음을 옮겼다. 민지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언니, 벌써 가요?” “응.”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가요?” 민지가 유난스러운 건 아니었다. 워커홀릭 정은이 칼퇴근이라니, 이건 거의 자연재해 급 사건이었다. 정은은 웃으며 말했다. “왜? 그 눈빛은 뭐야? 정시에 퇴근하면 안 되는 사람이야, 나는?” ‘네, 언니. 평소엔 늘 야근하더니... 너무 이상하잖아요.’ 민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웃으며 물었다. “언니, 오늘 약속 있어요?” 정은은 겉옷을 걸치며 담담히 말했다. “응, 약속 있어. 데이트... 라고 해야 하나?” 민지는 충격이 너무 컸다. 정은이 실험실 문을 나서고,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서준이 민지 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왜 그렇게 멍때려? 퇴근 시간이야.” 민지가 갑자기 서준의 손을 붙잡았고, 서준은 깜짝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건... 세게 꼬집기. “악! 뭐야! 왜 이래?!” 예상 못 한 통증에 놀란 서준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파?” “당연하지! 너 진짜...” 화가 나서 웃음까지 나왔다. 민지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꿈은 아니구나...” “방금 정은 언니가 일찍 퇴근하길래, 어디 가냐고 물었더니 뭐라는지 알아? 데이트하러 간대!” 서준은 미묘하게 입꼬리를 씰룩이며 말했다. “그래서?” “데이트라잖아! 전 남자 친구인가? 도대체 언제 다시 만난 거야?” 서준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둘은 다시 만난 적 없어. 데이트라면... 지금 남자 친구랑이겠지.” 민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현 남자 친구...?” ‘뭐야, 저 침착한 태도...’‘혹시 서준이가... 뭔가를 알고 있나?’ “서준아, 방금 말한 거 진짜야? 정은 언니한테 새 남자 친구 생긴 거?
Read more

제979화

민지는 얼마나 ‘나’만 반복했는지도 모른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그녀는 조금씩 정신을 가다듬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첫 번째로 튀어나온 말은... “임서준, 너 미쳤어?” 두 번째는... “아니면 뭔가에 홀렸어?” 세 번째는... “너, 너, 너... 나를 어떻게 좋아할 수가 있어?” 그 말을 내뱉을 때, 민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혀까지 꼬였다. 서준은 조용히 말했다.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민지를 바라보는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 미친 거 아니고, 홀린 것도 아냐. 너 좋아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민지는 안절부절못하며 손끝을 만지작거리다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뚱뚱하고, 안 예쁘고, 게으르고, 먹는 것만 너무 좋아하고... 맨날 다이어트한다고 해놓고, 맨날 실패하고... 매일 너한테 잔소리 듣고 겨우겨우 운동 나가고...” ‘이런 나를... 대체 왜?’ 그러다 뭔가 떠오른 듯, 민지의 눈빛이 갑자기 미묘하게 흔들렸다. “너 혹시 우리 집에 부동산이 많은 거 알아서... 그거 물려받을 생각으로... 전세 살기 싫어서 나랑 결혼하면 건물주 되는 건가 싶어서...?” 서준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대체 어디까지 상상할 건데.’ “근데 또 아니야...” 민지는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너희 집이면 뭐... 아파트는커녕, 우리 동네 땅을 다 살 수 있는 집안이잖아. 그럼 돈 때문도 아니고...” 서준은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만해. 너 요즘 빅데이터 얼마나 잘 잡는지 몰라? 계속 그렇게 떠들면, 우리 집 진짜 조만간 조사 들어올 듯.” 민지는 민망하게 웃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미안, 나 좀 당황해서.” 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정색했다. “민지야, 네가... 통통하고 안 예쁘다고 생각해? 아니, 넌 귀엽고, 볼 때마다 기분 좋아져.” “먹는 걸 좋아하는 건, 그냥 미식가일 뿐이야. 게으르다고? 아
Read more

제980화

민지가 차를 몰아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해산' 저녁 도시락을 뜯고 있었을 시간. ‘해산’은 요즘 민지가 푹 빠져 있는 플래티넘 등급 맛집으로, 단골 멤버십까지 가입해 놓은 상태였다.매일매일 다른 신메뉴가 도착했고, 한 번도 질린 적이 없었다. 하루 종일 실험실에 있다가 돌아와 그 뜨끈한 한 끼를 여유롭게 즐기는 건, 민지에게 있어 ‘오늘 하루 수고했어’라는 작은 위로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 고소한 향기가 가득한 도시락을 앞에 두고도 뚜껑조차 열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아직도 멍하네.’ 머리는 아직도 ‘그 순간’에 붙들려 있었다. ‘임서준... 서준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오늘은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문제는 내일이었다. ‘내일... 또 실험실 가야 하잖아... 그럼 또 마주쳐야 하잖아... 으악, 머리 아파.’ ...다음 날 아침. 서준은 평소처럼 7시 정각, 민지네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했다. 익숙하게 출입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려던 찰나, 경비가 서준을 불러 세웠다. “어이, 청년.” “민지 찾지?” 이 경비는, 한때 민지가 가져다준 '마라 맛 닭발' 한 팩으로 급격히 친해졌고, 이후 서준과도 종종 마주치며 얼굴을 익힌 사람이었다. “네, 맞아요.”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는 민지의 말을 전하듯 조심스레 말했다. “오늘은 운동 안 간다고 하더라. 청년한테 말 좀 전해달래.” 서준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경비가 덧붙였다. “그리고... 네가 고집부리고 찾아오면... 앞으로는 말 안 섞을 거라고도 했어.” 서준은 발걸음을 멈췄다. “혹시 또 뭐라고 했나요?” 경비는 곰곰이 떠올리며 말했다. “그냥... 조용히 있고 싶대. 그리고, ‘조용히가 뭔지’는 묻지 말아달래...”
Read more
PREV
1
...
96979899100
...
174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